곤고한 자를 건지신 하나님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0-14).
우리가 인생을 살 때 항상 따뜻한 봄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폭풍가운데를 지나야 되기도 하고 한 줄기의 빛도 없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흑암 속을 헤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다가 환경에 어려움이 오고, 마음에 곤고함이 찾아오게 되면 그 원인을 항상 자기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환경의 어려움에 처하고 마음이 무너지게 되면 신기하게 사람들과의 관계도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미운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곧바로 미운 사람도 많이 생기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수많은 현실들이 큰 무게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어서 결국은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감옥의 문맥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그 문맥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감금되어 있어도 자유가 없는데 쇠사슬로 온 몸을 묶고 다리까지 채워서 옥문이 열린다고 할지라도 도망갈 수 없는 절망적으로 갇혀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휩싸여 있고 영혼은 죄수와 같은 속박에 얽매여 있는 상태가 바로 본문 10절이 그리고 있는 인간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몸부림쳐도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속박 속에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행복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그런 모든 노력과 몸부림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영혼의 곤고함과 육체의 절망 속에 두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들이 있고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것들은 우리들이 지혜를 모으고 사람들의 힘을 규합하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만 특별한 어려움은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게 하기 위해 계획해 놓으신 어려움이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자원을 동원하고 사람들에게서 힘을 빌어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게 하시려고 주신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동물도 인간도 모두 그 고통에서 속히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동물은 그것만 생각할 뿐이지 그 고통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주는 의미 같은 것들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야생동물들을 포획하는 기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깊은 숲에 동물들이 다니는 길목에다 먹이를 놓고 덫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 위에 지푸라기 같은 것을 덮어 놓으면 음식 냄새를 맡고 동물들이 거기에 찾아와서 음식에 다가가는 동안에 덫에 발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동물들을 보호해서 굉장히 많은 야생동물들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강원도인데 어렸을 때 일입니다. 방학 때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 길거리에서 꿩이 새까맣게 날아다녔습니다. 하도 잡아서 거의 없었는데 요새 다시 꿩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여러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최근에도 강원도에서 몇 번을 본 적이 있습니다. 멧돼지들도 아주 많아졌다고 합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덫에 걸린 것입니다. 기자가 가보니 며칠 전에 죽었는지 꽝꽝 얼어붙은 새끼 멧돼지 하나가 쓰러져 있습니다. 발목을 보는 순간은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발목을 채이니까 줄을 나무에 걸어놓았습니다. 밤새도록 멧돼지가 거기를 헤어 나오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나무껍질이 동그랗게 다 하얗게 까졌습니다. 몸부림 쳐도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조여들어서 결국은 마지막에 뼈가 드러나고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인간이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좌절 속에 빠져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렇게 곤고하게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고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을 때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을 때는 그 고통의 원인이 자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당하는 인간을 보시면서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절망과 곤고함의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거역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성경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합니다. 사람들은 이 의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의무는 무슨 의무야? 자유롭게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의무를 주시는 그 자체가 우리를 매우 높이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 같은 인간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더욱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당신에게 무슨 손해가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사랑하지 않으면 벌을 내릴 것처럼 명령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에게는 손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날 사랑해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벌주리라”까지 말씀하면서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의무를 주시는 것은 우리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고 하나님 앞에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점에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그 가치가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주시고 의무를 부여하시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규정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무입니다. 이 의무는 바로 성경에 나오는 계명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두 가지입니다. “이렇게 믿어라와 이렇게 살아라.” 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아무리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은 점점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하는 규칙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아주 맑은 상태를 유지해야 되는데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영혼이 있는 동안에는 특별한 은혜의 작용이 계속되지 않으면 영혼은 저절로 혼탁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소문난 큰 죄를 짓지 않아도 열렬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영혼은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그 분을 믿는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사랑을 베푸셨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계명을 주시는구나.’하면서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을 때에는 이것이 머릿속에 명료하게 살아있어서 믿음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커다란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이 자체로부터 받는 은혜가 넘쳐야지만 이 세계를 볼 때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충만히 받는 사람일 때에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눈 뜨면서 자연, 숲, 인생의 이치, 바다와 하늘, 물질의 이치, 사물들 이것을 보면서 만천하에 충만해 계신 하나님을 보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름다움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설교할 때 졸고 은혜를 못 받는 사람은 그 아름다운 숲속을 보여주면 삼겹살 생각이나 나지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로로 흩어져 있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이 뭉쳐진 보석의 덩어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하나하나를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성경 말씀 속에 너희는 무엇을 믿으라고 하는 믿음의 규칙들이 나옵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대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아로새기고 지나갈 때 우리들이 금보다 더 충만한 믿음을 유지하게 됩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이 충만했던 사람이 미끄러지는 이유는 바로 계속해서 은혜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삶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분명하게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고 진리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충만하게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가하는 아주 분명한 계시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대로 살았을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많은 영혼의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껏 기도하고 그 기도의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한 사람이 됩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헤아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진정한 자식 사랑은 엄마인 내가 내 자녀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 안 해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교통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생활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예전에는 기도도 안하고 어쩌다가 기도하면 엉뚱한 기도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자신 안에 오시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늘 원하시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자신에게도 행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가는 기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복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삶의 교훈, 한때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영혼이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하고 주시는 그 명령이 예전에는 기쁨이 되었는데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영혼이 부패한 현상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죄악 된 세상에서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육체를 입고 동안에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목사님, 우리 아이는 분명하게 회심을 했는데 정말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의 지배에서 멀어져서 죄 가운데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모습니다.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은 모두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지독하게 불순종하는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생애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지존자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존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과 인간, 모든 창조세계 위에 가장 뛰어나게 높은 최고의 가치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육체도 그분이 직접 손으로 빚으시고 숨을 불어넣어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죄를 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므로 그 모든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려고 은혜도 주시고 말씀도 주셔서 회심도 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말을 들어야 되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을 들어야 되겠어요? 너무 분명하잖아요.
가치의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인생의 모든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중심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기보다는 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는 하나님도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인간이 멀어지게 되면 절대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끊임없이 비추면 비출수록 ‘너는 중심이 아니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 비춰주는 진리의 빛과 자기가 실재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생겨납니다. 진리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자신을 껍데기 채 벗겨서 수치를 드러내기 때문에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어둠 속에 적당히 있기 때문에 그 빛을 싫어합니다. 원하는 것은 자기가 최고라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사상, 하나님보다는 자신이 더 지존자라고 하는 이 생각을 유지해주는 이성을 거슬리지 않는 많은 견해들은 자신에게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신앙의 사조를 보면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 모든 신앙이나 심지어 진리의 말씀도 공정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빼서 읽어서 자기의 행복에 이 신앙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때로는 굉장한 헌신을 교회와 이 세상에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당장 쪽박을 차고 망하고 불치의 병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도 잘 살 수 있고 사회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것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의 원하는 것을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행복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이렇게 죽음과 같이 육체의 절망, 죄수와 같은 영혼의 속박 속에서 고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필요합니다. 말은 쉽지만 인간이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탁월한 지혜로 그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3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는 마음을 낮추십니다. 여기서 낮추신다는 말은 아주 겸비해져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마음은 우리의 인생이 뱃길이고 우리 인간 존재를 배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배를 움직이는 방향타와 같습니다. 방향타를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슬었기 때문에 아무리 핸들을 움직여도 방향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가 통제를 받지 않고 자기 가고자 하는 대로 계속 달려갑니다. 그 배를 예쁘게 색칠한다고 해서 배가 가는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배에다가 아주 값진 물건을 실었다고 해서 배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배에 새로운 엔진을 달아서 출력을 높였다고 할지라도 배의 가는 방향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 배에 유명한 사람이 동승했다고 해서 배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돈 많이 벌고 잘 살 때도 있고 사업이 잘 돼서 승승장구할 때도 있고 망해서 쪽박을 찰 때도 있습니다. 지위가 높아질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습니다. 삶의 고통스러운 환경이 찾아와서 힘들 때도 있고 이상하게 형통해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배에다 짐을 싣고 배를 색칠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인생의 본질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향은 외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 인생의 가는 방향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이 배에 무슨 색칠을 할까? 누구하고 탈까? 얼마나 많은 값비싼 물건을 싣고 이 뱃길을 항해할까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방향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가는 방향이 하나님이 이 세상과 그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인생의 길이라면 값비싼 많은 짐을 싣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인생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예쁜 색칠을 하지 않았어도 그 배는 올바른 길을 감으로써 그 배는 올바른 길을 감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겉모습으로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려도 우리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향을 바꾸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변해야 되는데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변하여 평지가 되는 일은 건설사가 할 수 있어도 인간의 마음 하나를 깎아서 높은 마음을 낮게 웅덩이처럼 파진 마음을 돋우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고른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십시오. 우리 마음은 육체를 향해 명령을 내립니다. 집어라. 집습니다. 마셔라. 마십니다. 말해라. 떠듭니다. 그만해라. 멈춥니다. 얼마나 육체가 마음의 명령에 잘 순종하는지 모릅니다. 마음과 육체는 별개인데도 순종을 잘합니다. 마음보고 마음을 향해 명령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자. 주님을 위해 충성하자. 열심히 기도하고 진리를 따라 살자. 마음에게 명령을 해 보십시오. 말을 들어먹지 않습니다. 한마음은 한마음에게 명령하는데 그 마음은 같은 마음이면서도 또 한 마음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이 속에서 영혼이 찢어짐의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낮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낮아지면 하나가 되고 마음이 높아지면 찢어집니다. 마음을 하나님이 낮추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높아지게 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떼어놓으시므로 말미암아 마음이 낮아질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돈에 목 매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돈을 잃어버리게 만들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에게 매인 사람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해주시면 하나님 이외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또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철저히 고립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낮추시는 과정입니다.
아마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모두는 아닐지라도 여러분 중에 상당수는 설명을 못해서 그렇지 이렇게 마음이 낮아져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깊이 깨뜨려져서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도울 수 있는 아무것도 없고 예전에 내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다 끊어지고 나만 달랑 혼자 고립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죽음과 같은 육체의 절망에서 죄수와 같은 영혼의 속박된 상태에서 나를 건져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절망 속에 고립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아직까지도 낮아진 마음이 아닙니다. 낮아진 그 마음은 고립감을 느끼는 가운데 예전에 하나님 이외에 것들을 신뢰하고 믿었던 자신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불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신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판단을 내리고 그릇된 판단으로 나에게 이렇게 살라 이렇게 행동하라 끊임없이 명령하는 것만 듣고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육체와 영혼이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지켜 줄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불신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낮아진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때 나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그 마음을 요약하자면 원통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입니다. 원통한 것은 내가 너 같은 인간을 믿었더니 내가 이 꼴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불신을 표명합니다. 네가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냐고 자기의 옛 자아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보다는 내 자아를 믿으면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곤궁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진정한 기도가 솟아나오게 됩니다. 영혼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나오게 됩니다. 떠들면 그것이 다 진리가 아닌 것처럼 부르짖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이렇게 상하고 깨뜨려진, 낮아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탄식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입으로 많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깨어진 마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응시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그 언어가 기도의 언어이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낮아지는 것은 전혀 없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뢴다고 해서 기도는 아닙니다. 우리들이 마음이 겸비하게 낮아져 깨뜨려지지 않으면 우리의 많은 기도는 허공중에 흩어집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 되기보다는 허공에 흩어져서 기도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과 우리의 삶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삶속에서 마음을 잘 간수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고 기도 속에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은 삶속에서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삶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그치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기도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저 높은 산과 푸른 하늘,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지난주에 말씀을 준비하러 갔습니다. 기도원마다 전화를 해보니 한 달 전에 예약이 마감되었습니다. 청평에 있는 어느 숲속에 가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눈이 펑펑 왔는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온 산야가 하얗게 되어 있습니다. 달력 같습니다. 그 그림도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다 모아도 한 가지 아름다움만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은 신자가 깨어진 마음으로 통절히 기도할 때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누군가가 통렬하게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면서 기도하면 유별도 떤다는 생각이 듭니다. 은혜가 떨어져서 맛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 속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 어느 성도가 통절하게 회개할 때 자신의 마음도 함께 녹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자기의 원수라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 안에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돈 잘 벌고 잘 나갈 때가 아닙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어떤 사람이 같은 날 열린 교회 예배에 둘이 같이 참석했습니다.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나 봅니다. 뒤에 있는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눈물로 회개를 하면서 예배를 마쳤습니다. 두 사람의 반응이 각각 틀립니다. 한 사람은 건전하지 않은 예배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으면 기뻐해야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냐?’ 또 한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기도하는데 많이 눈물이 났대요.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이 사람들은 이렇게 순수하게 회개하는데 자기에게는 이런 눈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각 자기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도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비록 고함을 치는 외침이 없을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육이 죽고 주님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지고 깨뜨려진 그 마음은 정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 마음입니다. 마치 그 마음 자체가 하나의 고운 진흙덩이처럼 어떻게 빚으시든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기꺼이 빚어지려고 하는 그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곤고함에서 인간을 건지시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관심사는 곤고할 때에 다시 행복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인생의 관심사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가 돈 때문이고 인생의 어려움이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며 칼을 품고 있습니까? 전부가 바보짓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그렇게 해서 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에 대한 원망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의 고통, 영혼의 속박 받은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그 진리의 빛으로 볼 수 있고 주님에게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혼의 자유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꿈을 꿉니다. 시커먼 옷을 입은 군인들이 창을 들고 칼을 들고 자기를 쫓아오더랍니다. 막 미친 듯이 도망을 가는데 창을 휙 던집니다. 바로 앞에서 쿵쿵 떨어집니다. 한방만 맞으면 죽는데 창을 던지면서 쫓아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울면서 도망을 가는데 마지막 벼랑 끝이더랍니다. 밑은 천해만해 한 벼랑 끝입니다. 저쪽에서는 시커먼 군인들이 달려옵니다. 여기를 뛰어내려서 자살을 해버리는 것이 낫지라고 생각하는데 하늘에서 날개가 내려옵니다. 하나님이 날개를 달아주더랍니다. 이제 날아라.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벼랑에서 확 뛰어내렸더니 날개를 활짝 펴고 그 계곡을 비행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벼랑 끝은 자살을 하기 위해서 뛰어내리는 절망의 벼랑이 될 수도 있고 하늘을 향해 높이 나는 비상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묘미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이치로는 더 이상 갈 길이 없고 인생의 벼랑입니다. 거기에서 떨어져서 죽을 것 같습니다. 놀랍게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보내셔서 거기에서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그 벼랑 끝에 이르지 아니하였더라면 날아볼 수 없었던 그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숙명처럼 자기를 따라 다녔던 죽음과 같은 육체의 절망과 죄수와 같은 영혼의 속박을 비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이 사경회에서 주님 만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오히려 날아오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