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자의 하나님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 7:9~10)
I. 본문 해설
우리는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 방패가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이제는 방패가 아니라 쇳덩어리를 쓰고 있어도 폭탄이 날라 와서 쇳덩어리를 다 녹여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방패가 전쟁에서 얼마나 요긴 할지는 알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방패시라는 말씀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가리켜서 방패라고 하신 말씀 찬송하는 성도들이 여호와가 나의 방패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는 이야기들 참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이 당신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하나님의 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쓰던 방패가 시편이 쓰여 지던 시대에 그것도 생활에 따라 수시로 변천하지 않았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방패인지 자료를 찾아 조사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고대에서 전쟁하는 기록들을 보면 방패가 굉장히 큽니다. 왜냐하면 이제 먼 곳에서 화살을 날리기 때문에 방패가 굉장히 커서 어느 정도 하나면 지금 전경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 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방패를 세우고 방패 뒤에 쭈그리고 앉으면 온몸이 충분히 가려질 수 있을 만 한 그런 방패입니다. 그러한 방패를 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자기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찬송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길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고통 받는 자녀들을 당신의 품에 불러들이고 그 날개 그늘 아래서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상처입고 고통 받은 자들을 치료하실 뿐 만 아니라 더 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지 않도록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해 주시는 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해 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에게 쉽게 노출 당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지는 것도 필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주님의 그 보호막을 뚫고 누가 우리를 헤칠 수 있겠으며 누가 우리를 상처 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험했던 모든 성도들은 바로 이 점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 하시면 주님의 그 의지를 꺾고 그리고 반드시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 깊이나 높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명예를 걸고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 죄가 있으면 주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해 주십니까? 그러나 깊은 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의심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상태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회복되지 않은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망원렌즈에다가 비누질을 잔뜩 하고 하늘을 쳐다보면 별과 달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붉은 별빛과 푸른 별빛을 아름다운 은하수를 관측해 낼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온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하십니다.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았을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 고통과 상처의 이유를 분명히 해 주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그 상처만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범죄에 빠져서 죄 가운데서 상처받은 인간의 그 더러운 상처도 주님은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상처받거나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안전한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우리의 피난처를 제공해 준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진정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피난처는 하나님의 품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이 거기에는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지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는 그런 감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만 바로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 자기에 피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뿐 만 아니라 당신에게 피하는 자를 주님이 또한 보호하십니다.
여러분! 비 오듯 쏟아지는 그런 많은 화살을 방패로 막고 그 방패 뒤에서 위기를 모면하는 병사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단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호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적당히 겁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어떤 어려운 일만 만나면 하나님에 품으로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무서운 동물을 만나거나 혹은 두려운 사람을 만나거나 뜻밖의 일을 당하면 어머니의 치마폭에 자기의 모습을 감추는 것 같이 우리는 세상에서 적당히 겁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힘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고 보호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품으로 도망칠 수 있는 그렇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 물들지 않도록 보호 하시고 사단의 화살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 하고자 하는 그 의지를 뛰어 넘어서서 하나님의 의지에 반해서 우리를 해하거나 고통 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하나님의 이러한 완전한 보호하심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얼마나 간단합니까? 아이들이 엄마의 치마폭에 피하는 것 보십시오. 복잡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무섭다고 말하며 뛰어와서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복잡한 절차와 순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여 주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요새니 이다 주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요 나의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쉬리이다 고백하며 주님의 품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향해 다가오는 커다란 변화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고통스러운 공격과 그리고 위협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향하여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쉬운 일 보다는 염려와 근심을 자신이 짊어지고 뼈를 상하게 하고 마음에 고통을 더하고 심장을 찌르는 그런 고통과 아픔을 스스로에게 가하면서 비로소 이 세상에 자기가 살아있다 라고 하는 존재를 확인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이 커다란 괴리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소망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나의 소망이 마음이 정직한 자를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직한 자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고 또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요?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내편이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도다. 내가 방백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함 보다 여호와께 피함이 낫도다. 내가 피하면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리라 라고 하는 담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담대함이 사라지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담대함이 사라지는 가장 중요한 어느 하나를 말하라면 양심에 거리끼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양심에 거리끼는 삶! 우리는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완전할 수 없어요, 우리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작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죄 밖에는 없는 것 같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많은 부분이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없지요.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이렇게 위기와 고난과 어려움이 닥칠 때에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께 피하고 주께서 나의 방패시요 라고 고백하는 담대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양심에 가책이 없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무엇을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다는 것이 내 마음속에 드는데 그 일을 행하면서 살면 그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지은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우리와 하나님과 사이에 관계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정말 자기가 위기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주여 나를 도우 소서 내가 주를 믿나이다 하고 감히 고백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것을 방해하고 송사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양심 이예요. 양심에게 너무나 많은 채무를 잡혔기 때문에 여호와여 주님이 나를 도와주실 줄 믿나이다 할 때 우리의 양심이 반발하는 거예요 그와 같은 믿음에 대해서 아니야 하나님 나를 안도와 주실 거야 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죠.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 하죠. 그러나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잘못하는 것과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양심에 가책 받을 일들을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너무나 부족해서 그래서 또 너무나 예민하고 세미한 문제이기 때문에 미처 우리의 신앙과 생각이 그렇게 머리카락을 찢는 것 같은 그런 세미한 구분에 까지 이를 정도로 말씀에 지식이 없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짓는 것은 그런 죄 한 두 번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져다주지 못해요. 그러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기력을 모두 말려 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스스로에게 책망할 것이 없으면 두 가지를 얻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고 또 하나는 무엇을 기도하든지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라는 말은 안 나와요. 그러나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 위기를 만나거나 핍박을 받을 때 담대함, 비난 받을 때 담대하고 단호함 이런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책망 받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하는 이유 하나가, 우리 자신이 얼마든지 양심적으로 책망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죠. 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데 항상 의로우신 하나님 그분께 소망을 두고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하여 혹시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한번 하나님 찾아보소서 내 안에 무슨 악이 있는가 무슨 더러운 것이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악한 생각이 있는가 하나님 한번 찾아내 보여 주시옵소서 하는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의 무딘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길과 정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무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나의 양심은 나 자신의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내편이 되어 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혹시 그 무슨 감추어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드러내 보여 주시면 내가 그것을 해결하고 다시 주 앞에 정결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담대함은 담대함을 잃어버리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허약함이나 의지의 나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불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순결한 사람들에게는 단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내어 쫓는 힘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먼저 살아있는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의식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차마 우리 말씀의 지식이 아직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분별해 내지 못하는 그것을 먼저 찾지 말고, 우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우리 신앙의 양심이 침체 되었으면 침체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양심이 옳지 않다고 라고 하는 것,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주님이 너는 옳지 않다 할 때에 그런 담대한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 앞에 주님이 옳다고 인정을 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은 내편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너는 옳지 않다 말씀하실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회개합니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감히 말할 수 없고 주저주저 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겸손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너 이거 잘못했다 저거 잘못했다 할 때에 말이 많고 변명이 많고 구실이 많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이 정직한 자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고차원적인 삶을 추구하기 전에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담대함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무기력해 지는 이런 모든 실패들을 하나님 앞에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세상을 이기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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