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I. 본문 해설
이 시는 다윗 시대에 쓰여 진 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경건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길이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들이 이런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급히 벗은 발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측근의 몇 사람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남의 나라 땅에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을 수종하였던 충성스런 신하 가운데 고라의 자손 한사람이 쓴 시였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원래 고라의 자손은 저주 받은 이름의 대명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교회이던 시절에 고라는 지도자 모세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고 하나님은 이 고라의 자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비방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전대미문의 심판을 내리셨는데 그들이 있던 진의 땅이 꺼지면서 입을 벌려 그들을 모두 삼키고 다시 땅이 닫혀져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후로부터 고라 자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종에 대해서 반역을 일으켰다가 하나님께 천벌을 받은 민족이라고 하는 부끄러운 이름이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고라의 자손을 심판하셨는데 그때 모든 고라의 자손을 멸망하지 않으시고 일부를 남겨두셨습니다. 부끄러운 수치 속에서도 자손은 번성해 갔고 이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이 나라를 세울 때였습니다.
다윗이 다시 나라를 세울 때에 그는 상처받은 자, 원한이 있는 사람, 빚진 자, 가난하고 병든 사람 이렇게 하층 민족들을 모두 끌어안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고라의 자손을 이 다윗의 수하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 다윗의 치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셨으니 다윗이 나라를 세운 후에 이 고라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특별한 사명을 주었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예배를 돕고 성전을 섬기는 일에 수종 하도록 다윗이 그들을 높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졸지에 반란은 일어났고 나라는 악한 자들 수중에 떨어졌으며 기름 부은 받은 왕, 다윗은 백성들에게 수치와 멸시를 받으며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II.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사라진 현실
시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었겠습니까? 악한 원수들을 진멸해 주시는 것도 시급한 기도제목이었고 기름 부은 왕을 다시 왕위에 앉게 해 주시는 것도 아주 급한 기도의 제목이었을 것입니다. 망명 살이 가운데서도 원수들에게 멸시를 당하지 않는 것도 시급한 기도제목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모든 것을 밀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억제할 수 없는 처절한 갈망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인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길에 와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이 더욱 간절해진 것을 주님 앞에 토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데서나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성전에서만 예배할 수 있었으니 이제 그 성전으로부터 축출당하고 왕권도 법궤도 원수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때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간절한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견딜 수 없는 갈망이었습니다.
한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욕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세속적인 사람이라면 세속에 대한 욕망이 가득 찼을 것이요, 거룩한 사람이라면 신령한 것에 대한 욕망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늘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었던 환경 가운데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이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을 때에 이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갈망이 가득차서 마음속에 견디기 힘든 갈망이 되었는데 이것을 오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문맥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이 사슴들의 교미 철입니다. 수컷들이 발정한 상태에서 짝짓기를 위해 암사슴을 찾아 나서고 혹은 암사슴 한 마리를 두고 여러 마리의 수컷들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교미기가 되면 사슴의 몸에 변화가 찾아오는데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짝짓기를 위해서 광야로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습하는 목마름을 이기지 못해서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데나 물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광야에서 가끔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납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않았는데 거기서 살다온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광야여행을 가는데 길도 없고 차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야지만 진짜 광야의 맛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배낭에다 페트병에 물을 넣어서 갑니다. 하루에 4개 정도 먹을 요량을 하고 3일이면 12개 정도를 들고 간답니다.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다든지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돌아오는 날짜에 제대로 돌아오지 못하면 광야에서 물이 없어 죽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광야에 무슨 물이 있겠습니까?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드디어 눈에 헛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친 듯이 달려가면 샘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물이 아니고, 물이 아니고 결국은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쓰러져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어갈 때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시인은 광야에서 이렇게 쓰러져 죽어가는 수많은 사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모금의 물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목마른 사슴들에게 광야에서 한 모금의 물이 생명이었던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한 번의 만남은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영혼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이 세상의 자원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근심하고 염려하는 많은 것들은 땅에 있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채워지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온 과거의 인생의 길을 돌이켜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돈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늘 고통을 받은 것 같지만 이 세상에는 물질의 부족함이 없어도 많이 괴로워하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 그득합니다. 특히 작년 한 해에는 유명한 연예인이 유독 많이 자살한 한해였습니다. 인기도 있고 돈도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더라도 육신의 것들이 있는데도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적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얼마든지 있었고 사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주님을 찾게 된 것도 물이 없거나 떡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곤고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현실입니다.
III
쓰러져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사슴에게 한 모금의 물만 있으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한 번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죽을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고 우리 인간의 존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목마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당신의 은혜를 향해 갈급해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셔서 그 은혜로 충만하게 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인생에 큰 은혜를 입었을 때에도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을 때에도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목마르고 사모하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런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그런 큰 역사를 우리의 인생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향해 깨뜨려지지 않은 마음보다는 죄 가운데 살아왔다 할지라도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상하고 깨뜨려진 마음 안에서 주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인간들이 지어놓은 화려한 건축이나 사람들이 쌓아올린 명예나 부와 일의 업적을 향하여 시선을 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였던 그 사람의 마음에 눈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주님의 크신 사랑의 경험이 마르고 진리가 힘차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은혜의 감격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두 주간 동안 열린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 조용히 청중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어떻게 주일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예배하는 것일까?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가? 아마 우리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장소와 시간에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예배를 드리다가 마음에 얻은 것 없이 예배당을 떠났겠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절대로 그런 곳에 하나님 계시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여러분 속에 간절하게 떠올랐던 적이 언제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 말고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간절한 욕망,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도록, 이 비천한 인생의 마음에 찾아와주시도록 주님이 내게 주실 빵이나 떡, 돈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내 영혼에 찾아와 주셔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의 빈 심령을 주님 자신으로 충만케 채워주시도록 그런 목마름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내 마음에 오시도록 구해본 적이 언제냐고 묻고 싶습니다.
중세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경건한 수도사가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천재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청년이었습니다. 너무나 주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믿어서 오직 기도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위한 학문을 하는 일에만 온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세속적이던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이런 식으로 외골수로 신앙을 파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집이었습니다. 금욕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만 연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학문만 하는 천재적인 아들에게 가는 길을 막아볼 요량으로 아주 예쁜 처녀를 그 방에 들여보냈습니다. 사명을 주었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을 유혹해서 저 신앙의 길에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꽃같이 아름다운 요염한 처녀가 그가 공부하는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를 보는 즉시 아퀴나스는 난로에서 불타고 있는 장작 하나를 들어 휘두르면서 마귀야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이 처녀가 기겁을 해서 도망을 쳤고 그러자 그는 시커멓게 탄 장작으로 벽에 십자가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는 신학대전이라고 하는 유명한 전집을 남겼는데 60여 권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남겼습니다. 놀랍게도 그 책이 완성되지 못하고 뒷부분까지 써 내려가다가 중단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거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니까 아퀴나스가 금식하고 고행하며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종 아퀴나스야,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탄식하며 기도하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애절하게 부르짖느냐?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주랴?” “하나님 나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이 내게 무엇인가 주시려면 주님 자신을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저의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아주 커다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후에 친구에게 쓴 서간 속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때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성령의 탁월한 신비를 경험한 이후로 나는 이제껏 써온 나의 글이 지푸라기와 같아서 속편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당신과 사람 속에서 교통하기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기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낳았다면 그 자녀로부터 사랑을 받고 여러분들이 자녀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상호교통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것보다 자녀에게 부모에게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연인에게 함께 사랑하고 사랑을 나누며 그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사랑가운데서 누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도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멸시와 욕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왜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이 큰 사랑,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 그것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의 힘으로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이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죄가 많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하고 의롭게 살기를 원하시지 죄 가운데 임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눅18장을 보면 세리는 일평생 죄를 짓고 백성들을 늑탈하며 살아온 악한 인간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못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비록 죄인이었으나 주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죄 가운데 살아온 자신의 죄악 된 현실사이에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비록 죄인이었으나 주님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야할 하나님의 사랑과 죄 가운데 살아온 자신의 죄악 된 현실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옵나이다.’ 비록 죄를 지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맺고 싶고 그 사랑 안에 살고 싶다고 하는 아주 처절하고 간절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의롭게 살아온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못 만났는데 죄를 지면서 살았던 이 세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총각 때 주일학교 섬겼을 때 일입니다. 여름이면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여름성경학교 되기 전에 봄이면 항상 고난 주간이 옵니다. 결혼도 안 하던 총각시절이었으니까 매인 것도 없고 고난 주간이면 늘 교회에서 철야하면서 자면서 그렇게 직장을 다녔습니다. 은혜를 많이 주신 때여서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고난 주간이면 아이들을 모두 교회로 불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스스로 금식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우리도 고통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금요일 저녁이면 모두 모여서 고난 주간 금요 철야기도회를 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인데 참 신기한 것이 지하실에 내려가서 찬송 몇 장 부르고 기도회를 하면 그 아이들이 그렇게 진실하게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하고 금요기도회를 하는데 3시간 정도 기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밤중에 어느 학부형이 자기 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려고 와서 지하실에 내려와 기도실 문을 확 여는 순간에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교회에서도 굉장히 말이 많으셨던 집사님이셨는데 문을 확 여는 순간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였습니다. 펑펑 울면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만도 못해. 우리는 아이들만도 못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365일 교회를 드나들어도 한 번도 가슴이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사람, 매주 예배를 드려도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한 적이 없는 사람, 매번 기도해도 마음속에 자신의 죄와 강팍함을 위해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 마음속에 어찌 주님이 오시겠습니까?
한 시대를 풍비했던 가수 중에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인기와 명예를 누렸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적은 없지만 하도 특이한 일이라서 가슴 속에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1970년대에 호주에서 그 사람을 초청하면서 2일만 와서 노래해주면 7억 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가수의 답변이 너무 바빠서 거기까지 갈 시간이 없다는 것일 정도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이 사람은 택시 운전사였습니다. 늘 노래를 좋아해서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마침 뒤에 유명한 대중가요 작곡가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발탁이 된 이후로 연속 히트를 치면서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지금도 많은 올드 팬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인기와 부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우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저택을 정돈해 보니까 딸에게 준 장난감만 두 트럭이 나왔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말년에 그를 취재하기 위해 그의 저택에 갔을 때 계란껍질 타는 누릿한 냄새가 났습니다. 알고 보니까 엘비스 프레슬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는 냄새였습니다. 손가락을 태우고 있는 냄새였습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어 손가락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육체는 병들지 않는 한 음식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병들지 않는 한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님을 모르는 사람은 영혼 속에서 끊임없는 갈증은 일어나는데 영혼이 그것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인 줄은 모르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춤추고 향락하고 죄짓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향락에 빠지고 이 세상의 많은 죄에 빠진 사람들을 우리는 저주하기 보다는 영혼의 심각한 질병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긍휼이 여길 수 있어야 됩니다. 절대로 영혼이 그런 것들로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고백록 첫 장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 아래서 살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기도시간마다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말씀을 열어주시면 열어주실 수록 그 말씀에 헐떡였고 주님의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시면 부어주실수록 더 갈증을 내며 주님의 더 큰 은혜, 더 많은 사랑, 더 밝은 진리의 빛을 사모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구도의 열정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은 항상 기다려졌고 주님과의 만남은 내 영혼에 만족을 주었지만 또 더 큰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나를 이끌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기도를 드리던지 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에 사무친 기도였고 우리 마음으로 섬기는 그 섬김은 자신이 처한 삶속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섬김이었습니다.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은 더 귀하고 깨뜨려지면 깨뜨려질수록 우리는 우리 안에 뿌리 밝은 무한한 죄와 악당들을 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게 되면 이런 감각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차가운 의무로 바꾸고 주님을 향한 목마름은 이 세상에 대한 탐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입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사랑은 샘솟듯 솟아나는 그리움이고 사랑하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 될 때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그런 갈증을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갈증이었습니까? 그가 그리워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그가 정말 사모하고 만나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사슴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말합니다. “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인생의 난관과 어려움들이 어려움이 아닙니다. 진짜 어려움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뵈옵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싼 원수, 에워싸는 많은 환경과 두려운 이 벽들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위기 가운데 건져주시고 고난 가운데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던 이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목마름이 우리 안에 간절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생생하고 간절한 그리움들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허락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에 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 결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 목마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없이 살아갔던 인생의 곤고했던 날들, 그 인생의 위기 가운데 나타나셔서 나를 그 곤고함 가운데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 주님께 돌아갔을 때 주님이 내게 베푸시던 그 탁월한 달콤함과 자비의 그 놀라운 은혜 이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특별히 그 일을 많이 생각하고 묵상함으로써 가슴 속에 내려오게 하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우리 인생의 문제이고 명예가 없어서 문제이고 이런 저런 인생의 많은 자원들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문제는 많아도 해결책은 오직 하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차갑고 냉랭해지면 냉랭해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곤고해지고 우리는 진정한 행복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으로 깊은 찔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고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고 사람들은 나를 정죄할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마음, 인생의 소망을 세상 자체에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좌와 그 영광에 둔 성도의 그리움,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 살면서도 어찌하든지 영혼으로 이것을 넘어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고자 하는 사람, 그분이 있음으로 행복하고 자신이 이 땅에 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갈망으로 꽉 차있는 마음,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부족한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목마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던 이 고라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방에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물로 주야로 음식을 삼았다고 고백을 한 이 사람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그 큰 능력으로 주께서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던 원수들을 멸하시고 지극한 영광 가운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고라의 자손이 다시 예전에 섬기던 그 성소로 돌아가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주님을 찬송하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충만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주님 안에서 변화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