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품을 알자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시 108:4).
우리의 것이면서 우리 마음대로 정말 안 되는 것이 있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에요. 우리 스스로 원하기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굳건해지고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요동쳐요. 우리 밖에서 보는 많은 사물들, 또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내가 들어갈 때, 우리 영혼 안에서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우리의 죄, 이런 것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는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지 말라고 마음에게 수차례 명령을 해도 마음이 말을 잘 듣지 않아요. 손과 발에게 명령을 하면 금방 되는데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하면 이 마음이 마음의 지시를 듣지를 않아요. 이런 고민을 우리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을 올곧게 믿고 따르려고 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한거죠. 오늘 이 시는 명백히 다윗의 시죠. 그런데 그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확정할 수 있었던 비결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숙고하는 것이었어요.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리고 찬송했어요. 그가 첫째 숙고한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숙고했어요. 그 인자하심을 숙고할 때에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여기서 하늘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샤마임’. ‘샤마임’은 이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하늘을 포함해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 우주의 공간까지, 심지어는 이 물질적인 우주의 세계에 너머에 있는 하늘에 그 하늘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하나님의 창조된 영적 세계까지를 천상의 세계까지를 포함해서 ‘샤마임’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거기까지 쭉 미치는 거예요. 그거를 온 영혼 안에서 지성 속에서 자기와 같이 티끌 같은 한 인간 거기부터 시작을 해서 모든 이 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 그리고 눈에 볼 수 없는 저 하늘 너머에 있는 하늘 위에 하늘, 천상의 세계에 우주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거기까지 꽉 찬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숙고하였던 것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이 시인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그 인자함이 강물처럼 확 밀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두 손을 활짝 펴고 온 땅과 하늘 그리고 그 하늘 너머에 까지 꽉 찬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면서 감격해본 적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지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성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아시지만 이 지상에 있는 피조물 중에는 인간 이외에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성품이 알려지지 못해요. 그냥 덕을 입을 뿐이지 그렇게 덕 입히시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가장 나쁜 짓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반역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에요. 바다를 항해할 때에 바다에 무슨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호등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섬 하나 없이 망망한 대해에 밤중에 그것도 항해를 하게 된다면 그 어디가 어디인줄을 알고 배가 가겠어요. 그런데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그러면 뱃사공이 눈이 뚫어져라고 밤새도록 북두칠성만 쳐다보겠어요? 그렇지 않죠. 돛을 달고 밤바람을 맞으면서 어두운 바다를 항해할 때에 가끔은 배에 밀린 일도 하고 가끔은 잠을 자기도 할 거예요.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뱃머리가 북두칠성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을 할 거예요. 그죠?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숙고가 바로 그런 것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에요. 더군다나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고 성품을 묵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커다란 불충한 삶을 사는 거예요.
(예화) 오늘도 그 인덕원 쪽을 들어오면서 그 거리에 있는 수많은 간판을 봤어요.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에 겉에다가 좋은 타일을 붙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간판으로 다 가려버리니까 어차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근데 수 천 개의 간판이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 육체를 위한 간판이지 영혼을 위한 간판은 없어요. 뭐 발마사지 집, 아이스크림 집, 통닭 집, 족발 집, 무슨 양념 치킨, 도너츠 집, 양말 파는 집, 내복 파는 집 다 있는데 모두 육체를 위한 것이에요.
그거예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땅에 있는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살면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길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위한 땅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하나님을 위한 땅의 것을 간직하고 살던 사람 중에 하나가 가룟유다 아니에요. 그러다 결국은 주님은 잃어버리고 돈만 남았죠. 그게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의 비극이에요. 근데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묵상하는 거예요. 그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미치는 거예요. 그러면 시인이 이토록 기쁘게 경험한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이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왜 그러면 시인만 감격하고 대부분의 많은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자비,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에요. 그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 모든 세계를 운행해나가세요. 그리고 거기에는 변함이 없어요. 언제나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당신의 목적을 따라서 세계와 그 땅에 있는 모든 사물들과 그리고 인간들을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려 나가셔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거죠. 그런데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마치 거대하게 흐르는 물결과 같아요. 그래서 모든 것들을 전부다 삼키며 한 방향으로 계속 흐르는 거예요. 거대한 흐름이 되어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변하지 않는 성향과 그리고 목적과 의지를 가지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세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인간이 자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왜 그래요? 결국은 하나님이 이 온 세상에 가득히 계셔서 그 가득한 그 하나님을 인간은 자기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지 그 바깥에서 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를 떠나서 어디를 갈 수 있겠어요? 인간은 자기를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인간의 이 영혼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의 모상이에요. 그래서 안 계신 곳 없으신 그 하나님처럼 인간의 영혼은 있지 않은 곳이 없도록 그렇게 유사하게 존재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를 피해서 어디를 갈 수 있겠어요?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주의 낯을 떠나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옛날 구약 시대 사람들은 그리 생각 안 했거든요. 신들마다 자기 구역이 있어서 거기에서 도망치면 신들이 관할 구역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면서 살면 진노하시고 우리를 징계하시고 혹은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면 우리를 향해서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요. 우리가 만약에 우리가 가던 길을 돌이켜서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며 돌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두 팔을 벌리고 집을 나갔던 자식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들이 불순종해도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고 가던 길을 돌이켜 참회해도 또 다른 방식의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길을 걸어도 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요. 여기에서 이 인자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품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불변하신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 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 땅에 있는 삼라만상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인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지 아니하고 통치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거슬려 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거슬려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하고 더군다나 그 인자하심이 자기를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관계하여 하늘에 하늘을 까지 미치는 것을 영혼으로 파악하고 마음으로 그것을 인해 감격하며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그 인자하심을 보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라고 말이에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렇지 못했을 때에 도저히 보지 못하던 수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예화) 절제를 많이 하고 요새는 많이 나아졌는데 제가 한 참 식욕이 왕성할 때에는 고기가 그렇게 좋았어요., 그래서 몇 칠에 한 번씩 안 먹으면 헛헛해서 못 견뎌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우거지를 좋아해요. 대조적이죠. 어느 날 우리 딸하고 식탁에 앉아서 우거지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딸을 옛날의 나를 닮아서 육류를 좋아해요. 그러니까 얘는 우거지국 그러면 그냥 푸르둥둥한 이파리 그냥 된장 넣고 끓인 것, 그것 하나밖에 몰라요. 근데 이제 엄마가 설명을 해주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거지가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란다. 그것마다 맛이 다 틀리단다. 배추를 금방 솎아서 어린 잎을 잘 씻어서 끓인 것도 우거지 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는 가을 배추, 그 다음에 솎은 배추, 어린 배추, 무 시래기, 그것도 생무를 끓인 것, 말린 걸 다시 데쳐서 끓인 것, 종류가 수없이 많아. 나는 사실 그렇게 종류가 많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고 그냥 살았거든요. 그래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 다양성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죠. 그 대신 고기가 얼마나 여러 종류이고 그리고 그것이 등급에 따라 맛이 다양한지는 또 한참 설명할 수 있죠.
사랑하지 않으면 다 복잡해보이고 그러면서도 또 단순해보여서 그게 그것 같아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하나님이라는 그 성함, 그 빛 아래서 비추는 그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의 빛깔들이 다가오지 않는 거예요. 오 하나님은 잘 살면 그저 복을 듬뿍 주시고 못 살면 혼내시는 분,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그분, 주일마다 가서 문안인사를 드려야 되는 그분, 이렇게 밖에 두루 뭉실하게 생각을 못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그 성품의 아름다우심에 그 찬란한 빛깔들 그 하나하나를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안 계시는 거예요. 교회에 와서 설교나 듣다가 눈물이라도 흘러야지 거기 겨우 계시고 눈물 마르면 하나님은 다시 그 눈물과 함께 증발해 버리시는 거예요. 이거는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또 박수를 치며 불을 떼어야 하는 이런 서글픈 종교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너무 착한 질문 아니에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눈에는 보편적으로는 당신 자신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모두 귀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이나 다양한 거예요. 그들을 하나님이 모두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영혼들의 가치가 다 틀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 그렇게 묻잖아요? 그러면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전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십시오. 전 삶에 있어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자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께 집중이 되도록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그분을 향하여 의미를 가진 것이 되도록 그렇게 되지 않게 하는 요소는 두 개도 아니고 딱 하나에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 불가능한 거예요.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계속 가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은 닮은꼴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무리 추구해도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를 사랑하면서 온갖 손과 발을 다 동원해서 심지어는 주위의 사람들까지 모두 동원해서 자기를 사랑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드디어 나는 나의 사랑을 성취했다 그런 지점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그게 하나님 닮은 거예요.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있지만 이미 내가 얻었다 내가 이미 도달하였다 이미 내가 붙잡았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도 그렇게 끝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에 인간 안에는 그 치열한 전존재적인 삶에 그 온전한 집중을 통해서 그렇게 집중하면서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모든 삶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이 되게끔 살아가지 않았을 때에는 도저히 자신의 지성의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하나님의 성품의 찬란한 빛깔들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결국 그 빛과 광채는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빛들이에요. 저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기도를 할 때에 제일 힘든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쩜 인간의 언어가 이렇게 없을까? 어쩜 인간은 이렇게 불편하게 표현도 못하는 후진 도구를 가지고 살아갈까? 그거였어요. 그 주님의 십자가에서 비취는 찬란한 사랑의 빛, 그 아름다운 밝기는 그 십자가 밑에서 드러난 인간들의 어두운 죄 때문에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대낮에 불꽃놀이 하는 바보는 아무도 없어요. 모두다 밤에 해요. 그것도 캄캄한 충분히 어두운 밤에 하늘을 향해 퓽 하고 터져요. 찬란한 불꽃이 튀는 거예요. 거기에서 비취는 현란한 빛깔의 그 하나님의 성품의 스팩트럼,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 비취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일평생 그 빛깔에 압도당하면서 산 거예요. 그래서 심지어 뭐라고 그래요.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왜냐하면 거기에서 비취는 빛이 얼마나 찬란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신자의 일생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이미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고 주님에 의해 점령되어 있으면서도 주님에 의해 더 많이 지배되고자 하고 주님을 이미 얻었는데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처럼 그 주님을 찾아가는 삶, 이게 신자의 삶이에요. 그래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때문에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진짜로 자신이 깊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고백이 나오냐면 ‘하나님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존재이니 하나님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옵소서.’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같이 티끌 같은 인간을 향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자비와 인자하심이 이 세상을 뛰어넘어서 그리고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고 광대하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피조물의 세계 속에서 보게 되는 거예요.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로 상승한 영혼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창조의 모든 세계는 그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들을 뿜어내는 현란한 빛의 발광체들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보는 거예요. 그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발견해요. 그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찬연한 빛을 뿜어내는 피조물이 바로 성경이라는 책, 성경책이거든요. 이게 이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찬란한 빛의 직접이에요. 찬란한 빛을 비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성경이 꿀같이 단 거예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 성경을 볼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속으로 계속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오늘 이 시인이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인내는 광대하여 하늘에 미치나이다 라고 고백한 이유에요.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흔들릴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디를 가서 하나님같은 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분이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더 많이 사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좋으신 분이라면 덜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어요? 매우 큰 잘못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아름답고 그 인자가 너무나 커서 온 피조물들을 에우고 마지막에는 하늘 위에까지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탁월하신 인자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진다면 우리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 되어야 되지않겠어요? 왜냐하면 무하하신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어야 할테이니까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무한히 사랑하는 거예요.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한 없이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나의 사랑을 배신하면 어떻게 할까?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바로 뒤편에 나오는 거예요. 그에 진실하심은 궁창에 미치나니. 히브리말로 ‘엠에스’에요. 이거는 진리라는 말로도 번역이되고 신실함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돼요. 이 궁창은 파란 하늘이에요. 파란 하늘, 그러니까 영어로 말하자면 sky이에요. 그러니까 새들이 날아다니는 이 하늘. 우리의 이 시야에 들어오는 이 파란 하늘, 그 하늘 끝까지 주의 신실하심이 꽉 찬 거예요. 피조물의 모든 세계는 그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자신들 모두를 포섭하고 마지막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그 광대한 높이를 가지고 땅과 땅 아래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공간을 지나서 푸른 하늘을 지나,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까지 맞닿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분의 부름에는 후회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 가끔 후회 할 때가 있지만 말로는 안한다고 그러지만 그러나 삶으로서는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을 후회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어요. 한번 택한 당신의 자녀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을 버려도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잘 순종하며 살 때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힘이 없어서 그렇게 살 수 없을 때, 심지어는 죄에 미끄러질 때에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한번 우리를 그 부르신 그 부르심의 신실하심을 저버리지 않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당신의 목적들을 모두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셔요.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그 푸른 하늘 꼭대기에서 이 시인은 발견해낸 거예요. 그러니 이 시인의 눈에 비쳤던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겠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들여다보면서 끊임없는 육욕의 충동을 받는 그런 물질세계이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그림책 같았을 거예요. 그래서 하늘 위에까지 미친 하나님의 그 광대하신 인자와 거기를 가로질러 푸른 하늘에까지 다다른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찬란한 빛깔의 금수주단을 직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거를 보면서 그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 어디에 눈을 돌려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그 광경, 풀포기 하나에 구르는 돌멩이, 풀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그리고 작은 풀벌레 하나에도 그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과 신실하심이 꽉 차있었던 거예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창조하셔서 그래서 나로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을까 라고 하는 거예요.
(예화) 제가 회심하기 전에 인생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여러 번 죽으려고 했어요. 그 중에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공부하고 뭐 살아가고 이런 게 힘든 게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길가에 구르는 돌, 풀숲에 피는 강아지풀 같은 것을 부러워했어요. 내가 저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회심하고 나서 그것도 한참 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세계를 많이 깨달은 진보가 있고 난 후에 가장 감격하고 요즘 감격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것.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 인간이라는 것. 아 하나님 내가 사람입니다. 하나님 내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그 세계를 바라 볼 줄 아는 나를 인식할 수 있는 피조물로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인간은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진리의 빛 아래서 살지 않는 한 정말 자신의 위치를 공정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는 인간이에요. 그리고 그런 찬란한 진리의 빛 없이 인간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간접적으로든지, 직접적으로든지 결국은 비록 그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는 결국은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부패한 자기 육체에 대한 편애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눈을 들어 보다 찬란한 진리의 빛, 그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 거기로부터 비춰오는 그 현란한 빛깔들, 진리의 아름다운 광채 그것을 사모해야 하는 거예요. 목사님 당장 사업이 안 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고 뭐 건강도 안 좋고 직장도 오락가락하는데 그런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인간이 반드시 붙들어야하는 세 가지가 있는 거예요. 첫째는 뭐냐 하면 지성의 여유에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는 너무 피곤한 삶을 사는 거예요. 이른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눈, 귀, 그 다음에 우리의 삶의 접촉으로부터 들어오는 쓰레기 같은 수많은 정보들, 그것이 어마어마한 양이 우리의 가슴 속에 수없이 덩어리째 던져지는 거예요. 그러니 잘 들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인터넷에 코 박고 사는 사람은 인생 버린 거예요. 그중에서 꼭 필요한 정보를 보는 것은 도움이 될 거예요. 쓸데없이 거기에 앉아서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코 박고 그러면서 이게 눈을 뜨고 살아가면서 접촉하는 것도 영혼이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집중적으로 호수를 가져다가 머리통에 꽂아 놓고 그걸 수없이 다운로드 받아가지고 가슴속에다 그 쓰레기들을 쏟아 붙는 거예요. 거기 경건없어요. 단연코 애기할 수 있어요. 인간 영혼과 마음의 구조는 그런 눈을 채우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그 속에 포크레인으로 실고 온 것 같이 막 쏟아 부어진 그 속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생명이 숨 쉴 수가 없는 거예요. 숨 쉴 수가 없는 거예요. 일어나자마자 라디오 뉴스부터 시작해서 밤에 잘 때에 동해물 나올 때까지 MBC보다가 자는 그 사람 속에 그 들어오는 수많은 그 사물에 대한 정보 속에서 이 지성이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만나는 곳, 보는 그곳이 이 지성이거든요. 그 지성의 여유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 감각적이 그런 세계를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또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이니까 배워야지 정복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하는데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쓸데없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을 가로막아야 해요. 절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두 번째 여유가 뭐냐 하면 지성의 여유, 그 다음에는 마음의 여유에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여유에요. 왜? 인간의 마음이 어떤 것들에 집착하고 매달리면 눈을 감고 있어도 마음은 하나님을 만날만한 장소가 못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창조적인 능력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이 눈을 감고 있어서 아무 사물을 보지 않아도 스스로 이 기억 속에서 이 사물들을 불러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불러올려서 자기가 좋은 게 떠오르면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없는데 가슴이 뛰면서 너무 좋은 거예요. 슬픈 게 떠오르면 아무도 자기 욕하는 사람이 없는데 눈물이 확 쏟아지는 거예요. 그런 속에서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사니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오셔서 뭔가 우리에게 마음에 감동을 주시려고 해도 안 되는 거죠. 주일날 예배에 나올 때에 여러분들이 몸만 덜렁덜렁 나오면 안 되고 이런 여유 속에서 살다가 여유를 가지고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게으르게 산다고 해서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을 끊임없이 눈을 들어서 위에 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따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의 최고의 기쁨이고 보람이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확정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그렇게 마음이 확정될 때에 기도와 헌신과 찬양과 하나님의 말씀에 전파와 이 모든 것들은 강한 생명의 능력을 갖게 되는 거예요. 아주 강한 생명의 능력을 갖게 되는 거예요. 놀라운 힘을 갖게 돼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