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및 질의응답
녹취자 : 김지혜
여러분들께서 ‘담임목사가 왜 이렇게 우리를 괴롭힐까, 어떻게 보면 목사님이 우리를 가르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다 틀렸습니다. 가르치고 싶지 않다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한 가르쳐 줄 것이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코코를 길러보니까 – 여러분을 코코에 비유해서 미안하지만 – 데리고 왔을 때에는 ‘저걸 어떻게 키우려고 그러나’ 했습니다. 첫날 와서 - 태어난 지 1주 2주가 지났을 때인데 - 어떻게 그렇게 눈치를 보는지 한 달 정도 눈치를 보는지 가만히 인형처럼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8일 만에 배변 패드를 활용했습니다. 사람하고 인연을 맺으며 사는 것도 이렇게 짐이 무거운데, (개랑) 또 인연을 맺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 같이 살아보니까 재밌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꾸 강아지하고도 놀고 싶어지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학생들은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을 이끌어내니까, 강의가 훌륭하면 제가 강의를 잘했기 때문이고 강의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면 여러분이 나에게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니 (웃음)
자 어쨌든, 우선 그냥 시작하면 재미없으니까 5명만 추려서 이번 설교 정독 소감을 듣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래되신 분 말씀하시고 제일 늦게 들어온 나이 어린 분 말씀하시고 중간은 제가 지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소감1) 사실 사경회 설교를 들을 때 전반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럴 사이가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설교 청취 녹취본을 줄 치면서 읽고 나서 설교 청취도 하니까 그때 굉장히 내용이 상세하게 들어왔습니다. ‘아, 스터디를 이렇게 하는 거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인간과 자아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한번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자체를, 자신의 존재를, 내가 섬기는 지체들의 인간됨을 한번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소감2) 저도 사경회 때 어린이 사경회를 준비하느라 사경회 당시는 못 듣고 따로 들었습니다. 지금 더 정확하게 듣고, 공부하면서 들으니까 더 좋았습니다. 공부도 되고 은혜도 됐습니다. 평소에도 인간과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했지만, 인간의 근원이나 영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서 면밀하게 생각해봤던 적이 없었습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어떨 때 불행한지 어떨 때 진정한 행복에 대해 느끼는지에 대해서 세세하게 고민해봤던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까 더 자세하게 스터디를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겨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소감3) 신대원을 들어와서 제일 많이 했던 것이 책 요약입니다. 하지만 설교 요약은 처음 해봤습니다. 설교는 사실 적으면서 듣기는 해도 듣고 나서 은혜받고 마음에 감화가 있고 난 다음에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2장 이내로 요약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무엇인지도 꼼꼼히 들어야 하고, 자세히 봐야 하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야 머리로 들어온 다음에 그것을 녹여내야 했습니다. 그래야 질문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들이 저 자신한테 유익이 되었습니다. 이 질문을 풀어야 하는 대상을 생각하며 설교를 들으니 그 대상에 대한 이해도 배울 수 있었습닏. 많은 유익이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동진 목사님 눈이 마주쳐서.
(소감4) 1강 인간이란 무엇인가 2강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들으면서 이제 인간으로서 제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봤을 때 - 신앙을 떠나서 생각했을 때에도 -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참 스스로 모르고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혼란스럽고 정말 명확한 답을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또 내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참 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가 젊은 날에 축구를 정말 좋아해서 여자친구를 사겨도, ‘나는 토요일에 축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연애 못 한다’라고 선포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평생 축구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30대가 넘어가니까 교역자 수련회 가서 축구 하는 것이 싫을 만큼 축구가 싫어졌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확인해야만 깨달아 알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보면서 젊은 날에 많이 읽으며 연애를 많이 시도했었습니다. 그때 사랑에 실패를 많이 경험하면서 ‘허무한 것을 좇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었구나’, ‘정말 행복이란 것은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할 때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요셉 강도사님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박재헌 목사님 소감 들어보겠습니다.
(소감5) 교역자로 처음 들어왔을 때 제일 기억나는 것이 토요일 아침 7시에 왔습니다. 한 시간 반 설교를 듣고 이어서 회의를 진행하면 토요일 오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때 설교 시리즈 끝날 때마다 요약한 것을 묶었습니다. 문제를 다 내서 제출하면 목사님께서 잘한 사람 3명에게 추려서 선물도 주시고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할 때여서 뭐가 뭔지 잘 몰랐을 때 목사님 설교 들으면서 신학에 대한 전체적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번에 스터디 하면서)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유익했던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들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은 ‘세상을 살아갈 때 왜 허무할 수밖에 없는가’였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없었을 때가 있었고 언젠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없었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영원한 관점에서 봤을 때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소감6) 저는 우선 설교 스터디를 처음 같이 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설교 주제가 작년부터 생각하던 주제였습니다. 이번 설교가 한편으로 많은 것을 이뤄놨고, 하나님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한테 잘하고 있다 격려하고 있는 그런 말씀이었던 것 같아서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목사님) 오우진 목사님 소감 들어보겠습니다.
(소감7) 개별적으로 설교 스터디를 하는 것도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특별히 그룹 스터디에서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나누고 서로가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고 목사님께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까지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저희가 공부하고 스스로 공부하고 찾을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고 자료 접근성이 생각보다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부분이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설교 내용에 관해서는 인간과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가 그렇게 확신하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고민을 해왔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강의도 해주시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해주셔 이 부분에 대해서 정립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신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견들도 궁금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그것과 비교해서 우리가 가진 신앙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 중요한 일인지를 비교하면서 점검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확신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질문 1번은 저에게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사경회 때 목사님 설교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성도들이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더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지막에 자아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면서 핵심으로 설명해주셨는데, 뒷부분 (자아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Q1) ‘고유한 자아’의 개념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학’과 ‘심리학’ 등에서 활발한 논의를 거쳐 다양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자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요?
A1)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일반적인 기독교적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 자아에 대해서 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까? (인간 뇌과학에 기초한다고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억 상실 뇌의 이상으로 기억이 왜곡...–녹음불량) 그러면 자아는 상실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상실된 것 또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기억이 자아라면,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자아를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경우에는 기억이 뇌가 사라져서 기억이 사라질 수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무의식의 아주 깊숙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 어떤 촉발요인이라고 하나요 기억들을 살려내는 살아내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자아의 고유한 개념이 기억인데, 기억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심층 기억 혹은 무의식 속의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여전히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느냐고 보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무의식이 남아있지만, 서로 작용하고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만약에 자아라고 말한다면 무수한 기억을 집어넣은 AI 로봇은 자아라고 부를 수 없을까요? (심리학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자아를 명확하게 설명)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 않습니까? (네. 모든 걸 뇌 활동의 산물로 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면 일반 학문의 지평에서 자아에 대한 논의가 봉착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기억을 담당하고 있는 대뇌를 다른 사람과 교환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뇌가 들어오게 되었고 들어온 다음부터는 정상적으로 작동을 해서 내가 본 것, 내가 기억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그 대뇌 속에 쌓입니다. 뇌의 정상적인 기능을 합니다. 그 속에 뇌를 교환하기 전 옛날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뇌를 전달해준 A라는 사람의 자아를 가지고 것입니까? 수술받은 B라는 사람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심리학에서는 어떤 대답을 합니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해야 맞습니다.
고유한 자아에 대한 개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성경에서는 자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요? 저런 질문이 황당한 질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자아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 학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영혼의 기원과 상태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영혼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성경은 믿음의 기능에 대해 말하거나 이런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믿음은 이것이라고 본질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자아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그런 이유는 성경이 기록된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 되어 온전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어떤 글을 쓸 때에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똑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기재하지 않겠습니까? 기록하지 않겠습니까? 자아라는 주제로 시를 쓰라고 주어졌습니다. 그럼 시를 썼을 것입니다. 뇌 생물학 전공하는 박사과정에서 자아에 대해 쓰라고 주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시를 쓰면 안 됩니다. 그럼 0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너무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 정의를 잘 내리지 않고 기능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아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자아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저 멀리 플라톤으로부터 올라가도 자아에 대한 고민한 흔적들이 나옵니다. 플라톤이 자아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고민을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아를 생각하는 것으로써는 자아를 알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일까. 자아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결국은 자신이라고 하는, 자기라고 하는 존재를 이미 있는 것들과 관계에서 규명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사물이 있는데 그 사물들은 죽고 시들고 흘러갑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에 근원은 어디일까 돌아보면서 ‘일자’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자라는 말은 토의, 에이나이의 현재 분사입니다. 있는 분,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하나만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아니면 그중의 아무것도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모든 것이 왔다라고 하는, 비롯되었다고 하는 관념을 가질 때 비로소 자아에 대한 논의는 타자에 대한 생각을 타고 들어오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규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은 항상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찰하는 능력이 깊어질수록 거울을 통해 들어오는 타자를 보면서 그것에 의해서 자기가 피동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거울로 들어오는 명백하기만 하였던 것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이어집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아에 대한 고민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에게서 나옵니다. 플라톤은 너무 종교적입니다. 그렇게 내려옵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후에 자아에 대한 교부들의 관심은 그전과 동기가 다릅니다. 교부들의 시대에 자아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걸 가장 통합적으로 정리해 놓은 사람이 고대 교부 중에서는 고대와 중세 문턱에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지학의 창시자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동의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의 긴 여정의 출발 자체가 자아에 대한 고민이고, 그 고민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신학은 자아라는 항구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아라는 항구로 돌아옵니다. 무엇에 의해서 가능해지냐면 하나님을 앎으로써 자아라는 항구에서 출발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하나님을 앎으로써 자아라는 항구로 되돌아오게 될 때에 거기에서 자아와 하나님의 일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는 자아에 대한 개념들을 깊이 탐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는 자아에 대해서 객관적인 기술들을 시도하면서 어거스틴보다는 훨씬 덜 교화적인 방법으로 자아에 대한 생각들을 합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중세시대 신학자들로 들어가면 어거스틴의 가지고 있던 사유와는 달리, 자아에 대한 사고 자체가 매우 부정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휴머니즘적인 요소가 많이 잠식당하고 자아를 마치 공산주의에서 바라보는 자아같이 바라보는 시각들이 들어옵니다. 공산주의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아와 뒤따르는 자아비판. 기독교와 차이는 분명합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자아는 세계를 내버려두면 결국은 공산주의 사회가 됩니다. 공산주의 사회도 과정이 있고 마지막에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주의를 거쳐서 마지막에 지상 낙원인 유토피아가 됩니다. 그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 자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자아는 끊임없이 비판을 받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역사의 순리를 거슬렀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자아를 비판하고 자기를 버리고 다시 공산주의 이론으로 이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세시대를 지나서 르네상스에 들어오게 되면서 자아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많이 달라집니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중기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르네상스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다양한 결들이 존재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처음부터 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는 절대적인 무신론자 그룹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르네상스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결들이 그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주 유명한 문헌인데, 피코 미란돌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길지 않고 짧습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고 하는 것을 남깁니다. 아주 유명한 역사적인 작품입니다. 미란돌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시간이 많이 가니까, 그 사람이 자아를 이런 식으로 규정했다기보다도 자아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아담을 지으셨지만 아담의 일생에 대해서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자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에 계심을 알고, 나머지는 모두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고 정결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참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정화된 영혼으로 이웃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 안에서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아의 순수성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나오지 않는 것은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생태학적인 문제가 제기가 안 되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자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가 나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코기토 에르고 논 숨(cogito ergo non sum)” 아마 역사를 바꿔놓은 100대 명언에 들어갈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있는 것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자아의 근거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찾던 이제까지의 교회에게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시각에서 자아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당연히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자아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이 그냥 생각하는 게 아니라 ‘코기토’, ‘코기타레’, 회의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생각할 때 그냥 사물이 주는 인상에 이끌려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생각하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이야기를 똑같은 형식으로 이미 어거스틴이 했습니다. 씨 에님 뽈리오르 에르고 숨(Si fallor ergo sum), “실로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바꾸면 ‘나는 오류에 빠진다. 그럼으로 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많은 학자들이 그걸 카피한 것이라 봅니다. 새로운 해석을 가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하던 고민을 똑같이 어거스틴도 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은 ‘자기가 오류에 빠진다면 자기는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자기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자신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뒤집어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어거스틴 사상 전체 맥락에서 보면 어거스틴은 이렇게 봅니다. 인간이 죄가 들어온 다음에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사실 내가 하나님인지 하나님이 나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내가 하나님을 의존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내가 악을 행하거나 오류에 빠지게 될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고, 나에게 그런 주체성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에 결국은 거기서 나 자신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있다’라고 하는 의미도 아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있다’라고 하는 의미는 ‘exist’ 그냥 여기 시간과 공간에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있다’라고 하는 의미는 주체성을 가지고 도덕적인 선택을 하며, 참과 거짓 사이에서 그것을 결정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주체로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거스틴은 그렇게 행하게 하는 주체가 바로 자아라고 본 것입니다.
지루하죠? 좀 더 역사가 지나가면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를 이야기하면서 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전 자기에서 흐르는 - 박사논문감으로 좋은 것이라고 봅니다- ego와 self라고 하는 개념을 추적해갑니다.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self는 self-love를 이야기할 때 한해서 자주 언급됩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self에 대한 논의는 퇴보했다고도 봅니다. 그리고 이제 그후에 에드먼드 후슬(edmund husserl)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아를 설명합니다. 그 자아를 결국은 사유하는 자신, 사유 작용, 그다음 사유되는 대상,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어거스틴에서 들었습니다. 놀아야 손바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다가 내가 잠깐 빠뜨린 것이 데카르트는 자아에 대한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냐면 존재 중심의 사유에서 인간 중심의 사유로 대전환한 것이다고 봅니다. 그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만 해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하다(녹음불량). 그런데 그러면 회의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회의한다, 뭔가를 스켑트(skept)하면서 thinking하고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직 명료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어떤 이해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실 회의를 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회의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어디서 옵니까? 데카르트는 애매한 설명을 내놓습니다. 그게 그 유명한 영원진리창조설입니다. 논문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메르센 보인이라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 긴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 속에서 나타납니다. 인간은 이렇게 인식을 하는데, 인식 저 바깥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된 진리에 대한 감각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볼 때 회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회의할 수 있지만 데카르트는 이렇게 봅니다.
칸트는 그것을 물려받으면서 더 훨씬 정교화합니다. 그래서 칸트까지만 해도 여전히 자아에 대한 생각과 자아 밖에 있는 객관에 대한 생각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개념이 명백합니다. 대표적인 말이 ‘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에 빛나는 별 양심’ 입니다. 이 두 가지 별빛이 자기를 인도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칸트는 정원명법이 유명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보편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고, 그것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칸트의 가장 중요한 생활의 지침입니다. 칸트는 선의의 거짓말은 있을 수 없고 무조건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웨스터 민스터에 있는 판포이드 드레스 견해가 그런 견해입니다. 칸트를 따르고 있습니다. 칸트주의자라는 말이 아니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칸트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그 사람들이 말하는 자아의 중심점이 생각하는 자신에게, 인간에게로 옮겨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고유성을 갖게하는 자아의 기원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피테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아에 대한 가장 폭넓고 완전한 체계들을 세웁니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긴 이야기이고, 지금은 어떻게 됬냐면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입고, 마시고, 결국은 즐거움을 느끼는 나 자신의 만족 이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며 들어가는 작업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안 하는데 안 하기 때문에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풀리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이런 고민들을 일깨워서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교부들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일들을 하면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설교를 하니까 아주 명백하게 그것만 파고 들어가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 철학 강의가 됩니다. 항상 남은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 담아두고 액기스들을 꺼내서 성경과 친숙하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아를 무엇으로 보았을까요? 세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sensus perceptio였습니다. 직역을 하면 감각지각입니다. perceptio는 중요한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지각, 설명하면 너무 길지만,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물들을 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비행기입니다. 사물을 봤습니다. 그럼 첫 번째 눈을 통해 들어오면 두 번째 비행기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옵니다. 그러기 전에 이 안에서 이것에 대한 지각의 덩어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나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물이 본 적이 없을 경우, 한참 혼선을 빚게 됩니다. 이렇게 있는 덩어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밀밭이고 밀밭에서 빻아와서 반죽 덩어리고, 생각이 여기로 내려갑니다. 이것을 빚어서 비행기라는 개념을 떨구는데 그 이전의 이것을 perceptio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감각은 오감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접촉하고, 냄새맡는 오각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지각을 (느낍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그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봤는데, A라는 사람은 ‘아후 저거 타고 빨리 날라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저게 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저걸 팔아서 (어떤 사람은)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될까?’, 별생각을 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비행기를 보면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자아를 형성하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두 번째는 sensus communis입니다. 직역하면 공통감각입니다. 자연적 공통감각, 도덕적 공통감각이 있습니다. 자연적 공통감각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예쁘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쳐다도 안봅니다. 별로 관심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쁘게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예쁜 사람을 보았습니다. 남성이 예쁠리는 없으니까 아름다운 여성을 여기에 세워뒀습니다. 물론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은 ‘아 밥맛없게 생겼다.’ ‘난 저런 상 질색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저거 성형한 것 아냐’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예쁠지는 모르지만 팔자는 사납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사람이 예쁘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험치 상으로 보면 많은 사람이 예쁘다고 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는 결국 우리는 모르지만 인간 안에 ‘어떤 사람이 예쁜 사람일까’라고 하는 것을 잴 수 있는 공통감각들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공통적 감각도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변합니다. 북한에서 미인과 남한에서 미인은 완전히 다릅니다. 북한에서 미인은 얼굴이 동그래야 합니다. 지현 자매처럼 토실토실하고, 그 다음에 웃었을 때 여기 뻐드렁니(덧니)가 하나 나와야 합니다. 보조개가 들어가야 합니다. 최상의 미녀입니다. 물론 김정은이 좋아하던 여자의 타입하고 김정일이 좋아하는 여자 타입하고 많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이건 북한에 가서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남한에서는 쌀 형의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훨씬 서구적입니다. 미국 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그렇습니다. 갸름한 얼굴 우리로 말하고자 하면 윤정희나 아이유는 북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이고, 그리고 손예진은 중간 정도 될 거라고 보고, 배우 이름을 잘 모르니까 어쨌든 쌀형처럼 생긴 그런 사람들이 (남한에서는 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계속 바뀌어 갑니다. 그리고 이제 자연의 세계를 보더라도 정말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야 정말 아름답구나’하며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게 아닌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비슷합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입니다. 도덕적인 공통감각입니다. 초대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양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양심을 극단적으로는 단순한 사회적 편견의 산물이다고 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신의 목소리라고 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개별적인 것들을 보면서 판단할 수 있고, 그 판단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자아 구성 요소로 봅니다.
세 번째는 ratio입니다. 어거스틴이 사용하는 이성입니다.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 의해 자아가 규정된다고 봅니다. 이성은 이야기하면 아주 깁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상식 정도로만 이야기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봅니다. 크게 인간의 정신의 기능을 ratio와 인뗄리겐띠아로 나눕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성이라고 번역이 되고,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자면 총명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인뗄리겐띠아는 직관입니다. 이 두 역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추론의 기능과 관련된 것이고, 이것은 변증이 기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변증이라고 해서 변호라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할 때 그 변증법은 계속 변호하면서 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 반이 나옵니다. 그러고 합이 됩니다. 합은 다시 정이 되고 반이 됩니다. 그럼 다시 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제의 합이 내일은 정이 되고, 내일의 정이 모래에는 부정당하면서 합으로 발전하는데, 그 정을 따라서 그려진 곡선을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티아렉티케(dialektikē)라고 이야기 합니다. 변증입니다. 변증은 1+1=2 이런식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직관 속에서 탁 하고 들어옵니다. 변증의 기능에 속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봅니다. 믿음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이걸 꼽은 이유는 어거스틴은 이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신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말을 먼저 가지고 들어옵니다. 모든 인간에서 인뗄리게띠아가 없을 순 없지만 인뗄리겐띠아의 기능은 마지막에 ratio에 합쳐져서 그래서 결국은 ratio라 합니다. 영어 원서에 보면 인간을 가르켜서 rational creater라고 영어에 되어 있습니다. 이성적 피조물이라고 번역합니다. 넌센스입니다. 그게 아니라 지성적 피조물이라고 번역을 해야합니다. intellectual creater라고 쓰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도 사실 어거스틴 전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하면 결국은 지각을 가지고 있고, 그 지각을 판단하는 공통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에 그것을 추론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라고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어떤 사물을 보고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영원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ratio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있는 것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자아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에 질문 있습니까? 어렵습니까?
(Q. 자아 인식이 타자를 통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자가 불완전하면 자아 인식도 불완전하니까, 완전한 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성찰할 때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 저희가 갖고 있는 사상입니까?)
어거스틴이 오면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입니다. 내 얘기가 그 얘기다. 그러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비춰볼 수 있는 완전한 거울은 하나님이십니다. 어거스틴 어머니는 모니카 여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 어머니에 대해 온갖 찬사를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세속적인 면이 있습니다. 아들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사짜 달린 사람이라고 보고 부잣집으로 장가를 보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를 비춰보면서도 어거스틴은 자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춰보면서 자기를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니가 여전히 무지와 죄와 악에 영향을 받고 있는 한, 넌 참다운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다음부터 제 이야기를 보태면 결국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자기를 발견해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 그 책에 그노스꼬메 인아이떼라고 쓴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영원의 빛 아래에서는 순간을 살다 지나가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믿은 우리는 자아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질문 하나로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말고 공부를 많이 하십시오.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사색해야 합니다. 미끄럼 타면 안 됩니다. 그러고 어디 가서 꽂히면 이단이냐는(녹음불량)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Q. 지금까지 논의된 신학자들은 자아를 인신론적 관점에서 파악을 했습니다. 혹시 아우구스티누스나 또 다른 신학자 중에서 자아를 인식론적 말고 다른 관점에서 자아에 대해 말한 신학자가 있습니까?)
어떤 관점을 말하는 겁니까? (명확하게 잘..) 그러니까 자기를 보는 방법이 둘이 있습니다. 인트로(intro) 엑스트로(extro) 입니다. 엑스트로 바깥에서 보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존재입니다. 나는 넓게 말하면 사물이고, 라틴어로 레스입니다. 제가 사물이라는 말을 가끔 쓰는데, 여러분이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레스는 하나님까지 들어갑니다. 있는 모든 것은 다 레스입니다. 그러니까 넓게 보면 나는 레스입니다. 그 수많은 레룸 중에 하나입니다. 동시에 나는 being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더 가까이 가서 나를 보면 나는 자기입니다. 바깥에서 보는 자기에 대한 관점입니다. 자아라는 용어 자체는 이미 안쪽에서 밖을 향해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서 자기를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아와 자기라는 두 단어가 어거스틴의 작품 속에 많이 나오는데 자아는 인트로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자기는 엑스트로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여기서 나를 보는 것과 30cm 바깥에서 나를 보는 것이 자기고, 30센치 몸속 정신속으로 들어가서 보는 것이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그 용어를 잘 생각하면서 해야합니다. 프로이트같은 경우는 인간의 문제를 설명할 때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 리비도(libido)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가만히 보면 다양한 이설들을 내놓지만 완전히 서로 끊어진 학설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고 안에 초자아가 있고 슈퍼에고가 있고 리비도가 있습니다. 리비도는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호르몬이 뚝 떨어지면 리비도는 낮아집니다. 성적인 리비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다음에 슈퍼에고에 있어서는 자신을 이제 지도, 감독하면서 마땅히 되어야 할 자기를 향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의 입장에서 양심이라든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라든지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자, 이제 대충 끝난 것 같습니다. 누가 읽을까요? 김동기 목사가 읽어보십시오.
Q2) 목사님께서 한 고유한 인격을 설명하실 때, ‘개별영혼’보다는 ‘고유한 자아’에 강조점을 두고 설명하셨습니다. 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원죄론>에서 고유한 자아보다는 개별 영혼에 강조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강조점의 차이가 생겨났는지 궁금합니다.
A2) 이 질문은 어려운 질문은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원죄론이라는 책을 쓸 때 그냥 한번 원죄에 대해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때 커다란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펠라기우스적인 관점을 가지고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는 그런 논리를 내놓습니다. 존 오웬도 똑같이 비판하게 됩니다. 라코비우스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라코비우스 교리문답이 오웬 전집에 실렸는데 보면 황당무계합니다. 인간이 죄와 상관없다고 봤습니다. 자연적인 인간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는데 고유한 자아 이야기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관심사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타락과 함께 오염됬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살아가는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기서 쥐고 있는 논쟁은 소위 이야기하는 죄의 유전에 대한 문제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다는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문맥에서 자아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개별 영혼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자아라는 말에 대해서 쓸 때는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결국 죄를 짓게 되는 자아입니다.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죄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죄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문맥에서 한 말입니다. 문맥 자체가 다릅니다. 3번 누가 읽어볼까요? 류요한 강도사님.
Q3) 세상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며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 간의 삶의 수준이 차이 날 때, 비교하며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극복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A3) 설교하고 큰 관련 없는 질문 같습니다.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요? 이런 찬송을 부르면서 극복하십시오. “사람을 보면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겠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때 나는 만족하겠네.” 왜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진짜 좋은 사람하고 연애를 해보면 연애하기가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진짜 너무 좋은 사람하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디 가서 그만한 남자/여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내 것으로 체득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성화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이 어떻게 보면 피 흘리며 가는 길이지만, 그 자신의 마음속에는 피보다 더 큰 행복이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이 질문은 김미영 전도사가 읽어주세요.
Q4) 고대 그리스 학파 중 에피쿠로스 학파는 행복의 조건으로 ‘인간의 욕망을 줄여 적게 소유하는 것’, ‘삶의 의미를 위해 철학을 토론하며 우정을 나누는 것’,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제시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원리들을 따라 행복감을 누리며 살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느낀 행복감과 우리의 행복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고, 그들의 삶보다 우리의 삶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A4) 에피크로스 학파의 누가 저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구인가요?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서양철학사 책을 보면서 에피크로스 창시자가 이런 말을 해서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에서는 정말 여자나 창녀나 노예에 이르기까지 마치 예수 공동체처럼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이 에피크로스 하면 쾌락주의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 쾌락을 아주 육체적인 쾌락으로 이해합니다.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쾌락은 정신적인 쾌락입나다. 그러니까 영혼적인 쾌락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신적인 쾌락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 인간의 욕망을 줄여서 적게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말이 타당한 이유는 - 지난번에 제가 설교할 때도 썼지만 - 남편이 제주도 여행 가자고 특급호텔 4박 5일을 끊어놔서 팔짝팔짝 뛰던 아내가 그다음날 마을 사람들과 차를 마시다가 (다른 사람이) 유럽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제주도 4박 5일이) 너무 시시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욕망을 줄임으로써 쾌락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위해서 철학을 토론하며 우정을 나누는 것 이것입니다. 이 구절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세요. 자 무슨 뜻입니까? 논어의 첫 구절입니다. “유붕이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아라” 벗이 멀리서 스스로 나를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입니다. 아주 중학교 때부터 자주 본 글귀입니다. 책에 나올 때에는 심오한 검토를 거쳐서 나옵니다. 한 시간짜리 강연에서 다 못할 정도로 엄청난 내용이 이 문장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질문하고 관계된 것인데 붕(朋)이라는 단어입니다. 중국말로 친구를 '펑요우'(朋友, pengyou)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더 고대로 들어가면 붕(朋)과 우(友)는 완전히 다릅니다. 둘 다 벗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붕은 그냥 어린 시절에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만나면 반가운 그런 친구가 아닙니다. 사상을 같이 하는 정신적 형제입니다. 이해됩니까? 오래 못 봤던 친구가 왔다면 반갑겠죠? (그러나) 반가워봤자 고기나 구워먹고 소주나 한 잔하고 안부나 묻다가, 정치 욕하다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하고, 죽은 사람 산 사람 기억을 더듬으면서, 잠들고 일어나면 그다음날은 별로일 것입니다. ‘얼마나 거덜 낼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라면 저렇게 불역열호아까지는 안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붕(朋)이 원방래했습니다. 멀리서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오기 전까지 이 사람은 녹슨 이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이야기한다고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나이다. 자기가 깨달은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말귀가 통하는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붕이 찾아왔는데 붕이 온 이유는 닭 잡아먹고 개 잡아먹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붕에게 만나서 붕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悅)자는 한자에서 말하는 기쁨을 표현하는 말중에서도 훨씬 강도가 높은 말입니다. 단순한 희(喜)보다도 강도가 높습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모영보 강도사님 (그렇습니다) 훨씬 강도가 높습니다. 굉장한 기쁨입니다. 모영보 강도사가 생각할 때 저 열이 갖고있는 용도가 현대 중국어에서 옛날하고 다르겠지만 저 열을 어떨 때 많이 씁니까? (차원이 높은) 맞습니다. 영어에 enjoy, happy, pleasure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enjoy는 웨스터 민스터 첫번째 문장에서 나옵니다. “Enjoying God”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고차원적일 때 쓰는 것입니다. 쾌락에 떨다. 쾌락에 몸에 떨다. 그러지. 희열에 몸을 떤다고 하면 깊은 정신적인 울림이 있기 때문에 몸을 떠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감격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대로 넘어가면 저런 이야기를 에피쿠로스 학파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학파들이 저 이야기에 대해서 공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정애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진리를 찾는 형제이기때문에 나누는 사랑을 우정애라고 봅니다. 그다음에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을 제시되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해결도 안 되는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염려를 하면 현재의 쾌락이 반감됩니다. 스피노자의 표현에 의하면 콘나투스가 자꾸 떨어지니까 막 만나서 신나게 파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잠깐 내가 전해줄 소식이 없는데 친하던 아무개가 “방금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문자왔어.”라고 하면 파티가 되겠습니까? 파티 다 끝난 다음에 조용히 헤어질 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음 문제를 회피한다고 해서 죽기 싫다는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염려가 현재의 사유와 가치 있는 것을 찾아가는 행복을 방해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과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결국은 기독교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고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님의 행복이 잇대어서 그 행복에 참여하는 존재로 봅니다. 저걸 저기서 딱 잘라내서 그다음에 하위에 있는 바람직한 것들에게 자기를 연결시키면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일 수가 없습니다. 6번은 누가 질문했습니까.
Q5) 목사님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논증적으로 잘 설명해주셨고, 정도(正道)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그 길이 맞다고 하더라도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들을 보다 더 잘 설득할 수 있을까요?
A5) 가장 좋은 설득은 설득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그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감각의 만족이 행복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니까 논리적이지 않고 그냥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서 젊은 애들이 미친 듯이 놀기 좋아합니다. 젊은 애들한테는 노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워싱턴인가 뉴욕인가 코로나 때문에 난리인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홍대 클럽 같은 곳에 가면 사람이 미어터진다고 합니다. 말은 들어가기 전에 검사한다고 하는데, 들어가서 미친 듯이 마스크 안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침을 튀기면서 놉니다. 미국에서 (젊은 사람한테) 인터뷰를 합니다. “코로나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라고 물으니) “걸리면 걸리라지 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이 “젊음을 과신하지 마라, 나쁜 것을 니가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가 나이든 엄마 아빠한테 옮긴다고 생각을 해봐라. 집안이 어떻게 되겠냐. 교만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를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웃음) 젊은이들이 타락하여 육체의 감각을 좇아서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그러고 삽니다. 우리가 잘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모두 한쪽 사이드만 제시됩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에서 야한 장면이 나오면 공통적인 것이 몸도 얼굴도 예쁜 남녀가 나오지, 차마 볼 수 없는 사람이 그런 행동하는 것은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보고 있는 동안에 파노라마처럼 그 사람이 거쳐온 과거와 미래에 어떻게 세월이 흘러가며, 늙고, 변화되고, 병들고 죽을 것이냐는 고통의 문제가 같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반짝하는 쾌락만 전달이 됩니다. 그걸 자기가 받아들입니다. 결국 판타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 맞다고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대부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난 몰라 난 그딴거 모르고 난 어쨌든 내가 오늘 필요한 것은 클럽에 가서 멋있는 남자, 예쁜 애 하나 만나서 오늘 하루를 즐기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가게 둬야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묶을 것입니까. 묶어서 못 가게 할 것입니까. 그러니까 설득의 문제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를 다 준비해야 합니다.
제일 훌륭한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행복한 모습, 지성의 준비입니다. 베드로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소망에 관한 묻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답변할지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행복한 모습을 보였을 때 그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의 비결이 뭐냐고 묻지 않습니다. 비결을 물을 때는 잘한 사람한테 묻습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널리 알려진 사람에게 라면이 맛있게 끓이는 법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몸매가 좋은 사람에게는 훌륭한 몸매가 갖는 비결이 뭐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이 사교성이 뛰어나서 한번 만나면 전부 이 사람 편이 됩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을 끄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비결이 묻는 것은 (그 사람이) 뭔가 이미 그걸 누리고 있기 때문에 묻는 것입니다. 그걸 지성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또렷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러나 이 두 가지로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행복의 길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영혼을 바꿔놓으시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그에게 임하도록, 하나님이 그를 부어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해주시고 변화시켜주셔야 합니다. 그런 것이 결국(녹음불량) 마지막 6번, 오숙녀 전도사님 읽어보십시오.
Q6) 소유의 개념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 행복이 꼭 영원한 것을 소유해야만 가능하다는 근거가 성경과 어거스틴이 말하는 육체의 자원과 영혼의 자원이 다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 외에 더 있을까요? 목사님께서 더 비교하신 내용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A6) 질문이 명쾌하지 않은데, 첫 번째 질문에 그런대로 답을 하겠습니다. 소유의 개념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을 때,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전능하지도 않고 전지하지도 않고 자립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aseity, 자존성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쓰고 사용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합니다. 인생은 일생이 소비의 연속입니다. 소비 없이 내가 보기에는 500시간도 버티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습니다. 500시간은 너무 짧습니까? 넉넉잡고 1,000시간이라고 칩시다. 24시간 50일 넘는데, 안 먹어도 더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죽는 것입니다. 공기라도 소비를 해야 하고, 물이라고 소비를 해야 삽니다. 소비하며 살아가는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소비하려면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처분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소유의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육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지상에 있는 자원을 소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 존재 자체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둘중에 하나만 만족을 누린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영혼을 위해서도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이 필요합니다. 소비됨으로써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사용하면서 우리의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런 소유하지 않는다면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유의 개념이 행복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전개되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첫 번째는 소유는 했는데 그 소유한 것을 내가 언제든지 원할 때 활용할 수 없다면 , 두 번째는 소유하지만 그것이 얼마큼 사용하면 동이나 버려서 더이상 쓸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그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으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 자신.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들이 참된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줄에 참 행복이 곧 영원한 것을 소유해야만 가능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질문의 모순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때 그 근거는 넘칩니다. 오늘 질문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근거입니다. 영원한 것을 소유하지 않고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기 와서 저 질문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 번째 줄에 성경과 어거스틴이 말하는 육체의 자원과 영혼의 자원이 다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 외에 더 있을까요? 저 질문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육체의 자원과 영혼의 자원이 다르다는 것까지는 맞습니다. 영혼의 자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고, 그다음에 육체의 자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곡식을 주셨고, 땅은 곡식을 낼 수 있고, 추수할 인력도 있고, 기술도 있고, 그것을 지어넣어 빵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밥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힘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느 한순간 하늘에서 햇반 도시락과 각 나라의 문화에 따라 인도에는 난을 내리고 터키에는 아무것도 없는 뭐라하는지 잊었는데 그 빵을 내리시고 중국에는 국수를 쏟아내시고 그러시지 않습니다. 일반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당연히 육체의 자원과 영혼의 자원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질문하고 뒤 질문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거하고 영이신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외에 더 있을까요? 아무 상관 없는 질문입니다. 목사님께서 더 비교하신 내용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없습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한 말씀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깊이 사색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계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마음을 모으고 진리를 소중함을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그래서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분인지를 더 잘 알도록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