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및 질의응답
녹취자 : 오희열
어떻게 질문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질문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질문지가 올라왔습니까? 질문이 없으면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질문 ) 신동진 목사님의 질문입니다. 인간의 구성은 히브리어로 아파르, 루아흐, 네페쉬라고 했는데 성도 중에서는 삼분설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내에서는 인간을 통일체로 보는 견해 - 총신 최용석 교수님과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 책에서 암시 –도 있는데 이런 다양한 견해에 대한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 통일체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야기해보십시오. 신동진 목사님 어디 갔습니까? 통일체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십시오. (신동진 목사님 : 저도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오우진 목사님 : 최홍석 교수님이 신대원에서 가르칠 때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론들이 있는데 분리되기는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혼만 가진 것도 아니고 육체만 가진 것도 아니고 두 개의 결합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삼분설이라는 것은 인간의 구성요소, 인간존재라는 것은 두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입니다. 육체의 재료가 ‘아파르’, ‘티끌’에서 온 것이고, 생명, 영혼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는 과정을 통해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혼’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하나는 ‘루아흐’이고 다른 하나는 ‘네페쉬’입니다. 히브리어, 특히 성경에서는 본질을 가지고 탐구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철학에서 나누는 방식을 가지고 성경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어려운 것은, ‘루아흐’와 ‘네페쉬’입니다. 다른 단어로 ‘네쉬마’가 쓰입니다. 육체는 ‘아파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파르’는 재료이고 육체는 ‘바사르’, ‘살코기’라고 합니다. 희랍어로 ‘사르크스’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되었다”고 할 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때의 “살”이 ‘바사르’입니다. 문맥을 잘 분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바사르’와 ‘영혼’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수학처럼 딱 잘라서 ‘루아흐’, ‘네페쉬’, ‘네쉬마’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푸뉴마’도 마찬가지입니다. ‘푸시케’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단어도 신약성경에서 딱 떨어지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루아흐’는 ‘영’, ‘성령’을 이야기할 때 나옵니다. 원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넘어가면, 아람어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나타냅니다. 다니엘서 2장 8절부터 아람어로 되어있고, 에스라서 4장부터 아람어로 되어있는 포션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민첩하여”라는 부분이 있는데 아람어로 ‘루아흐 야틸’이라고 나오는데 ‘민첩의 영’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spirit이지만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영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논의로 볼 때, 우리가 논리학이나 철학서에서 보는 것처럼 명확하고 딱 떨어지는 의미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네페쉬’는 ‘soul’로 번역되는데, 요나서의 “풀들이 네 목구멍까지 들어왔으며”에서는 ‘목구멍’이라는 뜻이라고 많은 주석가들이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예 ‘목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확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질문과 관련되어서 한 가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육, 영, 혼, 이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는 ‘푸뉴마’와 ‘푸시케’가 신약성경에서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됩니다.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두 가지가 구별이 있으면서도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셋으로 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은 그리스철학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같은 것, 하나를 포괄하면서 이쪽 부분을 이야기하거나 이쪽 부분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겠는가 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논거는, 삼분설을 이야기하려면 맨 처음에 인간이 창조될 때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육체와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첫 번째 요소 흙으로 만드시고 두 번째 요소는 직접 숨을 불어넣는 동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멈춰야 하는데,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는 그 순간에 혼과 영이 따로따로 실체로 창조되어 인간 속으로 들어갔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설로 봅니다. 강점도 있고 약점도 있습니다. 강점은 성경의 근거가 너무 명확하다는 것이고 약점은, 동물들에게 있는 정신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들이 난점이 됩니다. 저는 그것 자체가 동물이나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서 육체의 생명에 딸린 일부의 정신작용이라고 봅니다. 개혁신학을 따르면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고 표준적으로 그렇게 봅니다.
아까 이야기한 ‘통일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는 오히려 인간존재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인간 형상에 관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논의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강조점은 인간의 육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끼쳤던 스토아주의적 철학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불교나 유교에 익숙해져 있듯이 그 당시 로마 전체가 스토아주의에 익숙해져 있었고 누구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심지어 툴리우스 키케로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걸출한 인물들 모두 스토아주의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스토아주의 철학이 하나의 국민철학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사도 바울이 스토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전문적인 분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영혼에 치우친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강조점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 원래의 강조점은 그것이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받든 아니든 그것은 그 세계에 맡기고, 성경으로 보면 그 강조점은 인간의 영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중세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부분에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진 때는 교부들 가운데 제가 일일이 다 조사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단언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교부들은 극단은 피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육체는 그 영혼을 담은 그릇이고 집이다. 그러므로 담겨진 영혼이 소중하면 육체도 소중하다.’ 이런 정도의 선에서 스토아주의와 선을 긋고 우리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정도 선에서 아주 moderate하게 멈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어거스틴만 해도 굉장히 금욕주의적 성향이 강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때 막 생겨나기 시작했던 수도원주의 운동들, 거기에 나오는 성 안토니우스 같은 사람들(녹음불량 14:45), 4-5세기 정도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전통들이 나오면서,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육신을 미워하는 성향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영혼중심적인 하나님 형상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재조명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종교개혁자들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만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까지 포괄한다고 보고, 인간의 존엄성을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포괄한다는 근대적인 인권개념으로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새롭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고대 교부들로 돌아가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에 관한 것이지만, 인간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이고 그의 육체도 당연히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존중을 받아야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율법의 완성이라고까지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그 두 가지 주장이 날카롭게 대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이 나중에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확대하는 것과 해방신학 등등의 발전들과 많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거기까지 치밀하게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16세기 이후 17세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고 인권운동들이 생겨나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작용들, 칼 마르크스 이후에 인간관에 대한 새로운 반성, 이런 것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들을 다시 조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현대 신학자들이 바빙크 때 정도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다 취합했을 때인데, 현대의 인권개념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개념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대발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고 저도 고민을 많이 했던 이야기입니다. 이제 질문을 읽어보십시오.
질문 1) 인간 영혼이 은혜 안에 있을 때, 영혼은 전일성(全一性)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참된 주체를 발견하고 안정감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이 악에 몰입할 때도 영혼은 그 안에서 전일성을 경험하며 순간적인 안정감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참된 것’과 ‘모방적인 것’의 차이로 보아야 할까요?
답변 1) 그렇지는 않고 여기서 영혼의 전일성이라는 것은 플라톤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아주 많이 썼던 용어입니다. 사라져버린 용어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요즘 말로 하자면 신박하고, 옛날 말로 하면 질박한 의미들, 묵직한 의미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전일성이라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oneness’입니다. ‘하나임’입니다. ‘oneness’보다는 ‘인떼그리따스’라고 합니다. integral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중에 ‘정직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에 있는 내용이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적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통합’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 거기서 온 것입니다.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물의 전일성이라는 것은 ‘그것의 그것됨으로 가득 찬 상태’, 이것이 전일성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전도사인데 낮에는 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밤에는 클럽에도 가고 술도 마시고 노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럴 때 그 전도사는 ‘전도사임’으로 가득 차지 않은 것입니다. 전도사가 아닌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날라리임’도 들어간 것입니다. (녹음불량 22:08) 그럴 때는 전일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악에 몰입할 때도 영혼이 전일성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저 질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전일성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심각한 질병을 앓아서 각혈을 하고 있는데도 운동경기를 하는 일에 몰입을 해서 티끌만큼도 아프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주 건강한 사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 전일성의 문제는 주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은 그 안에서 전일성을 경험하며’라고 했는데 전일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이 한 곳에 쏠려서 다른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질문에서) 순간적인 안정감을 누리는 것 같다고 했는데, 안정감이라기보다는 몰입에서 오는 정신의 쏠림입니다. 다른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어떤 사람이 강원도 초상집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 강원랜드에 가서 700만 원을 벌었습니다. 차를 타고 돌아오다가 ‘나는 이 방면에 아주 드문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에 가서 300억을 날리고 쫄딱 망해서 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학 간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도 너무 바쁜 회사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아내에게 대신 다녀오라고 했는데 (사실은) 도박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안정감을 누린 것이 아니라 쾌락에 쏠려서 몰입했기 때문입니다. (녹음불량 24:24) 모방적인 것과 참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질문 2) 목사님의 삶 속에서 비참을 최초로 경험한 때는 언제였을까요? 또, 비참을 경험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당시 믿음과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는지, 시간이 지난 후 믿음과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2) 비참을 경험한 것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경험했던 이유는 내 안의 죄를 경험하면서 비참해진 적도 있었을 것이고, 좀 더 경건한 의미에서 보면 내가 진리를 이것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비참했을 수도 있고, 마땅히 도달해야 할 내 영혼의 상태와 현재의 나의 영혼의 상태를 대조하면서 비참해질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것이 믿음과 지혜가 부족했음을 깨달아서였는지 함께 깨닫는 것입니다.
질문 3) 지식과 지혜의 관계를 지혜가 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가장 좋은 것은 지식과 지혜를 함께 갖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과 지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지성의 성향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조화, 자연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 그리고 영적인 지혜의 상호 작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3) 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저런 질문을 한 모양인데, 그 기대에 다 부응할 수는 없고 맛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 대한 책 세 권을 썼습니다. 그중에 한 권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아버지로서 주는 교훈들을 담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일설에 의하면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이고,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내용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평생 한 줄도 쓰지 않습니다. 플라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대가들은 원래 글을 쓰지 않습니다. 저 같은 잔챙이들이 글을 쓰지 대가들은 글을 쓰지 않습니다. 알듯 모를듯 하는 이야기를 휙 던지고 사라집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구역장 공부시간에 그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어마어마하게 심오한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어떤 음식점에 갔더니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라”라고 써있었습니다.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강의를 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필기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몰래 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모아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보면서 그것이 진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인지는 100% 우리가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적해가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도 글을 일체 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플라톤이 그것을 정리해서 냅니다. 제자들이 그 대화를 정리해서 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거의 남기지 않았고, 플라톤은 스승과의 대화를 정리해서 자기가 썼든지 제자가 썼든지 간에 내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재밌는 것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크라테스는 가만히 있는데 플라톤의 나이는 점점 어린 나이가 됩니다.
어쨌든 그런 상황 속에서 지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엑기스만 제가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 할 정도로만 알면 됩니다. 뭘 그렇게 평생 적어서 박사 논문까지 써도 다 못 쓰는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계속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시대 전 세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에도 엄청난 문명이 있었고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이런 곳의 역사가 거기보다 뒤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문명이 발달하고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그리스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른 문명에서 지혜에 대한 논의들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서양문명을 읽어낸 사람들과 같은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조상들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 그런 점에서 관점 자체가 글로 통용되고 서양문화가 펼쳐져 나가면서 계속해서 자기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사의 틀이 형성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해동 육룡의 나르샤…” 라고 하면서 이성계 집안의 용비어천가를 주장했는데 우리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을 다 지배하고 수백 년 동안 지배하고 지금까지 지배하면서 교육한다고 하면 그들도 다 똑같이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면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 구도들이 펼쳐진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학문의 틀들이 서구 중심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게 온 것입니다. 다른 문명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은 것인데, 공부하는 것에 있어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맛만 보여주면, 플라톤을 보십시오. 플라톤의 입장에서 지혜라는 것은 밑에서 추적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영혼이 상승해서 천상의 진리를 터득하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을 보면 손가락을 위로 들고 오는 사람이 플라톤이고, 아래로 가리키며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소크라테스이고, 저쪽에서 술 먹고 퍼져있는 사람들이 디오니시오스입니다. 그렇게 지혜를 본 것입니다. 그렇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천상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 같은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물들의 질서를 올바로 알게 되는 것을 지혜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플라톤의 『이상국가』 제7권에서 동굴의 비유와 햇볕의 비유에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을 읽었는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웃기지만 8년 전에 참 잘 썼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쓰라고 하면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그쪽에 한창 빠져있어서 정신없을 때였습니다. 그 책을 책상에 바짝 앉아서 미친 듯이 읽어보면 아마 많은 것들이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혜라고 본 것입니다. 책에서 이야기한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플라톤은 그런 것들이라고 보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접근이 달랐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승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사물들을 보게 됩니다. 플라톤의 사고가 보편자 중심의 사고, 이데아 중심의 사고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 중심의 유명론적인 사고입니다. 이 두 사고가 진짜 대립을 하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습니다. 오히려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고 봅니다. 제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할 때 특히 아리스토텔레의 『형의상학』 중에서의 「신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스승의 철학을 쏙 뺏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학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론과 유명론처럼 대립하는 사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뒤가 하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아카데미아를 떠나고 리케이온이라는 자기 나름대로 학교를 다시 만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분에게서 배운 가장 유명한 학생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런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대제국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첫 번째는 형이상학적인 지식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저 너머에서 보는 것, 그것을 ‘메타피직스’라고 하고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합니다.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메타’는 ‘넘어서’, ‘다시 한번’, ‘초월해서’입니다. 자연, 즉 ‘피직스’, ‘피지카’이고, 자연적인 것,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들 너머에 있는 것을 다루는 학문을 형이상학이라고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중에 『자연학』 다음에 나옵니다. 자연학 본권, 자연학 후권, 이런 식으로 메타피직스가 된 것이 아닌가 보고 후대에 형이상학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지식입니다. 형이상학은 하나의 범주가 되어서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그 틀에 맞추어 생각하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런 형이상학입니다. 예를 들어 칸트 같은 사람이 어떤 사물을 판단할 때 기준으로 제시했던 크기, 넓이, 길이, 등등 소위 철학에서 말하는 ‘대상일반’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을 잘 하면 사물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굉장히 사변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천적인 지혜입니다. 세 번째는 자연에 대한 지식입니다. 자연에는 풀, 돌, 물, 꽃, 이런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이성의 논리가 정확히 적용되는 모든 것에 관한 지식을 가리켜 자연에 대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왜 눈물을 흘리는가?’, ‘어떤 때 눈물이 나는가?’, ‘아플 때 흘리는 눈물과 그리울 때 흘리는 눈물의 성분은 같은가 다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는 지식까지도 자연에 대한 지식이라고 봅니다. 크게 세 가지로 지식을 나눕니다. 그중에서 우리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지혜와 관계있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은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자연적인 지식은,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데아라고 말해도 좋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사물들이 있습니다. 특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물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물들을 사용합니다. 사용하여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생산 혹은 변형을 가합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결국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됩니다. 이것을 A라고 하고 이것을 B라고 하면, 이런 것들이 이렇게 변화되어서 이것 자체로는 직접 쓸 수가 없는데 이렇게 바뀌어 사용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이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육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봄나물을 뜯으러 산에 많이 갑니다. 연한 쑥을 뜯어서 빈대떡을 해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여름에 버섯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버섯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아무것이나 뜯어먹으면 독버섯을 먹고 죽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이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이것들을 어떤 기계들을 사용해서 가공할 것인지를 아는 것도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이것으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낼 것인지도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어떤 식으로 포장하면 먹음직스러울까 하는 것도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어떤 순서로 먹어야 맛있는지도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지식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때로는 정신에 원기를 돋우거나 혹은 힘을 낭비하지 않는 데에 매우 도움을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행기를 모르는 사람 앞에 헬리콥터가 착륙한다면 얼마나 공포스럽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연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여기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사람이 이것만 쓰고 산다면 개, 돼지입니다. 개, 돼지도 그렇게 합니다. 이것을 사용해서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닙니다. 여기에 제일 중요한 것으로 ‘의미’가 들어옵니다. 제가 쓰기 좋아하는 말입니다. 의미가 들어오면서 자기가 때로는 왕이 될 사람의 가정교사가 되었을 때는 얼마나 대접을 잘 받았겠습니까? 그러다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삽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다양한 삶이 있는데 어쨌든 거기에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각각의 의미들이 있고 그 의미들을 연결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려면 판단력이 반드시 들어와야 합니다. 판단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실천할 수 있는 힘까지 들어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멀쩡하게 걸어가는데 예쁜 여자가 와서 자꾸 말을 겁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는 정도가 훨씬 강력합니다. 그러면 빨리, ‘이 사람은 여자다, 젊다, 이 사람은 나에게 친절하다’ 이런 것은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왜 그렇게 다가오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사기 치려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 늙은 사람에게 왜 그렇게 다가가겠습니까? 사기 치려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기가 아니면 보험 들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빨리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거절하는 것, 내가 이 상태에 있는 것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빨리빨리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판단은 되었습니다. ‘이건 이러면 안 된다.’ 그런데 마음이 끌립니다. 실수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지혜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단순하게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것까지를 모두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푸르덴시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배운 라틴어로 ‘푸르네시스’입니다. ‘푸르덴시아’는 여성형인데, ‘모든 덕의 여신’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덕스러운 장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덕에 매달려있지 않으면 좋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신중하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푸르덴시아가 결핍되면 우유부단함 이외에 아무것도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용기가 있다는 것은 덕스러운 것입니까 아닙니까?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푸르덴시아가 없으면 불의한 자의 편에 서서 생명을 바치며 칼을 휘두르게 됩니다.
희랍어의 ‘푸르네시스’는 ‘푸로네마’로도 나타나는데 mindedness, mind는 ‘생각하다’이고 minded는 ‘생각되는 것’이고 mindedness는 명사형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쏠리면서 계속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존 오웬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푸르네시스가 가는 방향은 두 개밖에 없다. world이거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결부되어 있으니 하나는 세상 사랑이 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 됩니다. 세상 사랑으로 마음이 쏠리게 되면 그것은 푸르덴시아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혜는 머릿속을 뱅글뱅글 도는 아이디어나 판단력만이 아니라 이미 사람 전체를 통활하면서 그가 그것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실천력까지도 그 지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것이 나중에 아퀴나스 정도에 오면 스콜라 철학들이 발전하면서 이것을 ‘지혜’, ‘지식’ 이런 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으로 모자란다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상세화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제가 대충 뽑은 것만 여덟 가지 정도로 나옵니다.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 마음을 열고 수용적인 태도로 사물을 보는 것(돌키타스), 총명(인텔리켄띠아), 이성, 예지력, 서킨스펙션 - 복잡한 상황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이런 많은 것들이 이 푸르덴시아 속에 있다고 스콜라 철학자들이 분리해냅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지식에 대한 논의들이 굉장히 많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불교 철학을 많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지혜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첫째를 생득혜,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지혜, 두 번째는 문소성혜, 주워들어서 알게 되는 지혜, 세 번째는 사소성혜, 스스로 사색을 하면서 터득하게 되는 지혜, 마지막으로 수소성혜, 삶을 끊임없이 수양하면서 도달하게 되는 지혜까지를 이야기합니다.
재밌는 것은 스콜라철학에서 그렇게 번쇄하게 인간의 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놓치지 않는 것, 10세기의 베르나르도나 띠에리의 기윰이나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지혜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사랑이다’라는 공감을 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불교에서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소성혜라는 말이 어려운데, 수양한다는 뜻, 수양한 바 이루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수양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를 빼놓고는 수양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있고 여기에 인간 자신으로서 전일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훼손하는 것들이 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모든 부자유와 속박을 느낍니다. 이것을 덜어내는 과정을 ‘수’라고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랑을 덜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 물론 불교의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처럼 적극적으로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 그것을 덜어냄으로써 중생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는 놀라운 일치점을 보여줍니다. 사랑과 지식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명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푸르덴시아와 대조를 이루는 여신이 있습니다. ‘유스디띠아’입니다. ‘정의’입니다. ‘정의’라는 확고하고 날카로운 법칙 속에서, 지혜는 어떻게 하든지 유스디띠아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지혜보다는 ‘사려깊음’이라고 번역합니다. 유스디띠아가 넘쳐남으로써 기계적으로 유스디띠아를 추구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 푸르덴시아가 사려깊음을 통해서 가장 조화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스디띠아를 버리는 푸르덴시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이 대립이 되고 대조를 이루면서 신들의 세계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런 개념입니다. 거의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질문 4) 행복한 삶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알고 연합에 이르게 될 때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지식을 얻게 되는 것도 많은 논의와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확신할 수 있으며, 성육신 당시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답변 4) 질문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데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연합에 이루게 됨으로써 명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세상에 있는 지식을 얻게 되는 것도 많은 논의와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은 지식이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지식이 무엇이든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확신할 수 있으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고, 지식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믿는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질문자 :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설명해서 질문을 드리자면, 생명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와 연합이 생명이라고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 편에서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차원이 인간 안에는 존재하게 된다는 것으로 논리상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부터 시작은 아니지만 그것을 전제로 해서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알아가는 축적, 그러면서 그분과 연합된 그 상태 자체가 이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상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보면, 똑같은 사건들을 놓고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아는 그 지식으로 세계를 이해합니다. 그 상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실존적인 차원에서 보여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 상이성이 존재하는 사람들 안에서 있는 그리스도를 향한 이 지식을 우리는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저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이나 내 안에 있는 지식이나 그리스도를 향한 지식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개개인이 그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을 동원합니다. ‘생명을 누린다, 생명을 주신다, 생명을 얻는다, 생명을 받는다’ 다양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은 문학적인 표현들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기에 인간이 이렇게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많은 지체에게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어주시고, 교회에 부어주시는 생명들에 지체들이 참여하는 그림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림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이 생명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바깥에서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삶을 사는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배워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나 개인과 교회와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예수와 연관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배운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터득하고 삶을 통해 터득한 것을 다시 성경을 통해 확인하면서 배워갑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태어난 지혜도 있고, 들어서 배운 지혜도 있고, 생각해서 발견하게 되는 지혜도 있고, 절제의 삶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게 되는 지혜도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홀로 도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을 그려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이런 그림이 주어집니다. 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보면서 1번, 2번, 3번, 4번을 줄로 연결합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코코를 안고 있는 엄마의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른데 어떻게 나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 그림 1번의 사람과 2번의 사람이 상이하게, 예를 들어 지금 코로나가 일어나니까 예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분명하게 차이가 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배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분들이 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분들이 아닌데 이런 상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어떻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모와 같이 있고 언니는 진심으로 효심이 가득합니다. 둘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만 아빠나 엄마가 한마디만 해도 바짝 움츠러들면서 “잘하겠습니다!” 합니다. 셋째는 부모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 맘대로 해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첫째는 부모가 자신의 부모이고 자신이 그 자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셋째는 자신을 고아원에서 주워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확신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상이성과 그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시는 다양성도 있고 허락이 안 되는 다양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가지고 우리가 절대적인 회의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질문 5) 목사님께서 지혜란 지식을 인생의 의미와 연결 짓는 능력이라 하셨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를 정신의 법도(modus)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보다 실제적인 적용으로 부드럽게 표현해주신 것이라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았습니다. 혹 이 두 표현의 연관성과 차이점이 있다면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답변 5) 문학과 법률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사랑을 한 번 심어보고 거기서 눈물이라는 열매가 맺히는지 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과적 사고방식에 치우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를 자신의 글 속에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순결한 여인으로도 묘사하고, 법도라고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첫 줄에 나오는 내용과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혜란 정신의 법도다.” 어느 한구석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거스틴이 지혜에 대한 반복되지 않는 불멸의 definition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위에 있는 나의 이야기가 훨씬 더 계속 변하지 않는 definition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혜를 정신의 법도라고 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 길로 가고, 이 사람은 이 길로 가고, 이 사람은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당연히 이 사람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갔을 것입니다. 이 인간도 그렇기 생각했기 때문에 갔을 것입니다. 사람이 행한 것 중에서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렇게 게임에 몰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게임에 몰두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도 이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담배를 너무 피워서 내일 죽을지라도 그 지독한 니코틴을 빨아들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담배를 피우는 것이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하루 더 사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옳은 것입니까? Who? 누가 옳은 것입니까? 이렇게 전개되는 것을 볼 때 마지막에 나타나는 결과를 보면 옳지 않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마지막에 행복하지 않고 살아가는 과정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되었다는 것은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만들 때부터 이렇게 사용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입니다. 설계할 때부터 이렇게 끼워서 쓰려고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처음부터 이렇게 충전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다 짝이 있고 목적이 있어서 만든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질서입니다. 이것 하나만을 가지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려면 저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다 연관되듯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이미 창조와 함께 질서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폐기물 하차장에 트럭으로 쏟아놓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당연히 관계에 대해서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관에 의해서 자연의 세계가 행복을 누립니다. 복을 누리면서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창궐해지는 것도 지구 온난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수많은 질병이 그렇습니다. 지금 이탈리아에서 8천 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마에 폭탄이 떨어지면 8천 명 정도 죽겠습니까? 제러드 다이어몬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류의 미래는 핵전쟁보다도 이런 바이러스나 질병, 경험해보지 못했던, 약품이나 의학적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질병들 때문에 죽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실제로 인류의 마야 문명이나 아즈테카를 비롯해서 수많은 문명이 사실 그런 자연재해나 질병으로 인해서 사라졌습니다.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와트의 유적 같은 것도 19세기에 발견되었는데 전쟁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데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자연악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연악이 제거된 상태가 질서 있는 상태이고 자연악이 침투해왔는데 자연악의 침투로 인해서 깨진 질서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고통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되었다면 당연히 여기에는 또 다른 질서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인간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할 때, 이것 전체를 규율할 수 있는 어떤 법이 있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modus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어느 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 위에 결국 법이 어디서 왔느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는 법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다스리실 때 법만으로 다스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법으로는 파멸되어야 하는데 또 다른 사랑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참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인간의 삶의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법도를 아는 것을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또 다른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 없으시면 기도하겠습니다.
(시간관계상 답변하지 못한 질문을 아래에 기재함)
질문 6)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삶」에 보면,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 사이에는 중간이 없다는 점을 대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수긍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지식에도 풍성함과 빈약함의 정도가 있고, 지혜에도 넉넉함과 빈곤함의 정도가 있는데, 이 부분에 중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