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
녹취자: 김연희
Ⅰ. 본문해설
2주간 동안 2번 요추가 부러져서 병원에 꼼짝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 때 우리 딸이 침대 위에다가 걸어놓고 핸드폰을 볼 수 있는 걸이를 사다주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걸어놓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다가 우연히 YouTube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본 영상이 방금 전 여러분이 본 영상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그 영상을 여러 번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자를 맹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못하는 사람을 가르쳐서 ‘금수만도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금수의 대표는 맹수입니다. 사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6일이나 7일마다 사냥을 하고 충분히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1년 동안 길러진 크리스티앙이 산속에, 밀림 속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일 년 동안에 아마 최소한 60번 내지 70번을 사냥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자는 정말 놀라운 적응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이나 그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 ‘맹수의 본성이 한번 깨어났기 때문에 절대 1년 동안 본 주인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여러 해 전에 어느 선교사 부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조용히 낮잠 자고 있는 사자 옆에 다가갔는데 사자가 실눈을 뜨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사진을 찍어주었고 잘못해서 플래시가 터졌습니다. 한 순간에 그 아내 앞에서 사자는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그런 위험이 있다고 경고 했는데도 이 두 사람은 자기가 길렀던 사자를 보러갔고, 1년 만에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사냥 속에서 살았던 그 사자가 그 일 년 후에 사람을 알아보고 달려와서 안기는 그 장면은 정말 여러분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가 금수나 되는가?’ 생각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동물보다 나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시고 이성을 주셔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고 또 머리로도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아는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과연 알아보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문병 온 사람들마다 그것을 보여주었는데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어제 여러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제가 뒤에 멘트를 써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린 것입니다. 감동 받으셨죠? ‘정말 우리가 동물만 같았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군데 더 두드려보니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악어를 너무 사랑해서 길렀는데 그 악어가 주인을 알아보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정말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금수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을까? 가질 수 있다면 정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또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나는 이 설교를 시작하며 묻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익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런 환경이 날 예수를 못 믿게 만들었고, 이런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해서 주님을 바라볼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뭐 합니까?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요.’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세월이 흘러야, 언제쯤 되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 환경이 될까요? 얼마만큼 살면 여러분들을 미워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만 남을까요? 그리고 얼마만큼의 긴 세월을 살아야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예수 믿을 날이 올까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결단코 그런 날은 오지 않습니다. 혹시 온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변할 것입니다.
신앙은 다른 아무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향하여 걸어가는 진취적인 발걸음입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이 설교를 듣기 전에 여러분은 지금 마음의 결정부터 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또 적당히 자신의 상황으로 말씀을 덮어버리고 죄의 지배 아래에서 살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후자를 택한다면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벌떡 일어서서 여러분들은 저 문을 걸어 나가서 여러분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한 번 실컷 돌아다녀보고 하나님 없는 삶이 살만한지 여태껏 실험해 본 것 말고 한 번 본격적으로 온 몸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도록 실험을 해보십시오.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오면 구원받을 사람이고 안 돌아오면 여러분들은 영원히 선택된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주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나쁜 환경, 힘들게 하는 사람, 어려운 역관 그리고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못 믿는다면 그럼 하나님을 믿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었고 좋은 환경이 여러분들에게 신앙을 주는 것이었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Ⅱ. 마음의 찔림
오늘 제일 먼저 마음의 찔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했습니다. 무슨 말을 들었을까요? 아주 간단한 설교가 있었지만, 그 간단한 설교의 결론은 이겁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하는 이 결정적인 설교의 결론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찌른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 이렇게 건강하게 있는데 누군가가 뾰족한 송곳이나 혹은 예리한 칼로 여러분들의 배를 확 찔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칼이, 혹은 뾰족한 송곳이 깊이 들어가서 피부를 뚫고 피하지방을 지나서 살을 뚫고 여러분들의 장기를 찔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견딜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찔려서 육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고통을 받기 직전까지 있었던 생각들은 하얗게 지워질 것입니다. 미장원에 가는 중에 찔렸다면 미장원은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며, 술 마시러 가는 중에 그렇게 괴한의 습격을 받아 찔렸다면, 그리고 배를 찌른 그 칼을 그 괴한이 180도로 돌리고 있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술 생각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찔림입니다.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도록 양심을 찌르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었고, 현장에 없었어도 그들은 외침에 깊이 동의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긴 세월동안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알고 보니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역사가 바로 이 한 분을 바라보고 줄달음 쳤던 역사임을 알았고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깊은 찔림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왜 이런 마음의 찔림이 없을까?’ 여러분 중에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러한 마음의 깊은 찔림을 받아봤으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찔림을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 얻을 때만 필요한 찔림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이런 깊은 찔림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저 영상을 보면서 제 마음을 깊이 찔렀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고 돌보신 자비하심을 저 맹수만큼이라도 감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것이 여러분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맹수 같아 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겨우 일 년을 자기를 돌봐준 그 주인을 잊지 않고 그렇게 달려와서 그렇게 품에 안기고 그렇게 좋아하는 그 사자를 보면서 ‘정말 우리가 사람입니까?’ 라고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게 찔림입니다. 그게 찔림입니다. 왜 이런 찔림을 받지 못할까요.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그 말씀에 집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은 경외함의 상징이었고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최고의 불경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심판을 준비하신 적이 없습니다. 결국 멸망당하고 심판당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악물고 안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찔림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에 찔림이 없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대해서, 나의 삶의 대해서, 나의 믿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찔림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찔림은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또 그 말씀을 자신에게 깊이 적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냥 일반적인 양심의 찔림, 뜨끔함, ‘날보고 야단을 치시네, 내가 저런 사람이었는데, 진짜 창피해,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지?’ 라고 생각하지만 설교가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추론할 수 있는 찔림을 당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듣는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성적으로 맑은 가운데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입니다.
여러분들이 황제에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개를 내가 볼 일이 있으니 들라하라” 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왕이 뭐라고 분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계속 귀를 파고 졸고 휴지를 꺼내서 코를 푼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사형입니다. 왜냐하면 왕에게 있어서는 왕의 말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왕의 권위에 대하는 최고의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말씀하시는데 귀를 파고 딴 짓을 하는 것은 “왕 저 새끼” 라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끝까지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설교 한 50분 정도 되는 동안에 성경 한 30분 읽는 동안에 마음을 집중하기를, 여러분들이 너무 좋아하는 드라마를 집중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해보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똑바른 자세로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이성이 명증하게 살아있어서 활동을 하며 그것을 지성의 작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이해 못하는 것은 믿으려는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적용입니다.
두 번째 적용은 여러분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그 말씀을 자신과 치열하게 연결하는 정신의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흐트러진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마음을 드려서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성경도 건성으로 읽는 사람이 있고, 아예 안 읽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확률은 노래방에서 회개할 가능성만큼 희박합니다. 그냥 지금 사는 것처럼 계속 그렇게 신앙과 불신앙, 세상과 교회 그리고 은혜와 죄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사는 동안에 20대는 30대, 40대로 늙어갈 것이고 30대, 40대는 60대, 70대로 늙어갈 것이고 그렇게 살만큼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런 삶이 우리가 원하는 것일까요?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에게 관계되는 말씀이 울려 퍼진다고 생각하고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학이나 직장에 시험을 보고 아마 합격자 발표하던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땐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발표가 벽보에 붙이거나 신문에 났습니다. 그러면 그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명단 속에서 연필을 붙들고 내 이름을 찾아갈 때에 그 마음이 어떤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나 자신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적용하는 그런 부지런한 마음의 노력을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대머리 벗어진 교장 선생님이 하는 조회시간입니까? 예배시간이 맨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드는 담임 선생님의 종례시간입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본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옆에 사람은 주님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그 옆에 사람은 끄떡거리고 코를 골며 잡니다. 그리고 옆에 사람은 도대체 핸드폰 속에 뭐가 들었는지 설교시간에도 여전히 만지작거립니다. 몇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는데 말입니다. 설교시간 내내 자신에게 선포되는 말씀과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연결시키고 적용시키려는 것이 찔림을 얻게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대체로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수련회가 있습니다. 전도사 때 학생들을 다 긁어모아서 한 80명을 데리고 어느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근데 너무 멀었습니다. 그때는 관광버스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버스를 빌릴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깐 버스를 타고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는데 주위에 집이 없었습니다. 한참 더 들어가니깐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매 하나가 설교 시간 직전에 도착했습니다. 아니 설교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도착했습니다. 그 자매는 (신학적으로도, 영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아서) 오락가락 하던 자매였는데, 설교가 시작된 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저녁에 그 자매가 은혜는 혼자 다 받았습니다. 진짜 성령의 놀라운 목소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아침밥을 같이 먹으면서 물어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자매가 그 수련회를 위해서 기도했을 리 없을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수련회를 가야한다는 마음을 주셔서 당연히 약도를 보고 물어물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버스 운전수한테 물어보니깐 여기서 내리라고 해서 내렸는데 딱 차에서 내리고 보니 길엔 불빛 하나 없는 것입니다. 몇 미터를 더 들어 가야 교회가 나오는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자 혼자서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다렸다가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갈까 생각도 했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 주님’ 그러면서 기도원을 찾아가기로 했는데 길을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아주 암흑 같은 길이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뛰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가 교회 불빛이 보이고 찬양소리가 들릴 때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워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날 그 자매를 만나주셨습니다. 깊이 일생에 잊혀 지지 않는 만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뭐가 있었습니까? ‘하나님 만나게 해주십시오. 성령의 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간절히 하고 예배에 참석해야합니다.
Ⅲ. 복음이 요구하는 것
사도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찔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양심을 후벼 파기 시작했고 자기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대해 ‘천하의 역적이오.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고 생각하고 죽여 버렸던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였고, 그분이 지금 부활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가슴에 깊이 찔려 어찌해야할꼬 하고 물었습니다. ‘어찌해야할꼬’라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실존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정말 살아야할지 믿어야할지 생각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어찌해야할꼬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주 냉정한 음성으로 이렇게, 어찌해야할꼬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 가지었습니다.
A. 회개하라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에오(meta noevw)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노에오’(noevw)는 생각하는 것인데, 눈에 비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깊이 통찰하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오는 ‘메타’라는 단어는 ‘뒤에’ 혹은 ‘다시 한 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고전 그리스어의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한, 두 가지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생각 전체가 변하는 것, 달라지는 것이 ‘메타노에오’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대로 안 되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 여러분들의 나이가 되었으면 이미 충분히 그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직도 못 깨달았다면 유아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지 아십니까? 형제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런 자매들을 결혼의 상대로 선택해야할 때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자라면서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런데 애가 점점 자라면서 욕심이 많아집니다. 뭘 해달라고 하는데 엄마가 안 해주면 두 다리를 뻗고 물건을 내던지면서 막 큰소리로 웁니다. 그러면 엄마가 뭐든지 해줍니다. 아빠가 뭐든지 해주고 온 가족이 뭐든지 해줍니다. 그렇게 컸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아가서 직장생활을 해보니 두 다리 뻗고 땅을 두드리며 울어도 아무도 귀를 안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더니 더 강적을 만났습니다. 두 다리를 뻗고 우니깐 아예 상대도 안 해줍니다. 더구나 시부모님 앞에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인간 취급을 받겠습니까? 어렸을 적부터 빨리 배워야할 것이 뭐냐면 ‘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이구나. 나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구나.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구나.’ 그걸 빨리 배워야 합니다.
세상 교육이 뭐라고 가르치든지 간에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계속 미래형입니다. 지금 현재에는 없습니다. 돈을 얻고 보니 명성이 저 멀리 있고, 명성을 얻고 보니 미모가 더 멀리 있습니다. 미모를 얻고 보니 건강은 더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행복하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은 매 순간 매 순간 불행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살까요? 의미를 찾아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기쁨이 되는 것은 내가 지금 겪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내가 완전히 도달하고 싶은 행복을 못 느꼈어도 상관없음은 내가 여기 살아있는 의미를 발견하고 내 인생을 해석할 수 있으니 참으로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해석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해석이기에 나도 그 안에서 즐거운 것입니다. 그렇게 의미를 찾으며 사는 사람은 행복이 매일매일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루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꼭 필요한 하루였어.’라고 고백하며 삶으로써 그 의미가 어제와 연결되고 또 내일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날로 후패해져 가나 그것 역시 상관없음은 우리는 어차피 의미를 찾아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발견하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힘이 나로 하여금 그 고난을 견디며 살아가게 한다면, 생을 포기하는 것보다도 행복하다고 믿게끔 만들어 준다면 그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시작됩니까?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은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큰 힘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도 한 5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은 아버지 때문에 불행해졌고, 정말 아버지와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생각했고,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사실은 회상의 힘입니다. 그런데 회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데 제 나이 스물일곱 살 1월의 일이었습니다.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는 나를 몰랐다. 너도 나를 몰랐으면 네 아버지보다도 태어날 너의 아이에게 더 힘들게 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이 한 말씀이 제 마음을 후벼 팠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 후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습니다. 그 후로 제 기도 이후로 35년을 살고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나 단순하게 제 마음이, 생각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아버지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힘겹게 인생을 살았지만 나에게는 회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만들었구나.’ 그리고 내 가슴을 후벼 파고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던 아버지와의 모든 나쁜 기억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귀엽게 느끼게 만들어주었어요. ‘정말 그러셨구나.’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결국 ‘회개한다.’ 하는 것은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가짜 회개는 눈물이 있는데 생각이 안 바뀌는 것이지만 진짜 회개는 눈물이 없어도 생각을 뚜렷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 가보셨습니까? 가보는 비결은 이런 것입니다. 진찰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위암 말기의 끝입니다. 의학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보호자는 환자를 모시고 집에 가서 편안히 계십시오.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진통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단순히 ‘머리핀이 갖고 싶다. 연극을 보고 싶다. 혹은 홍콩 여행을 가고 싶다. 혹은 하와이에 가서 와이키키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싶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 입니까? 지금 나는 그런 사소한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인생자체의 엄청난 위기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 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에드워즈가 “마지막 이 순간이 죽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계속 하고 있을 그 일을 매일매일 하기를 힘쓰자.” 했던 이유도 그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나 중심의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나를 깨뜨릴 수 없사오니 주님은 나를 깨뜨려 회개하게 하시고 내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나를 돌이키도록 은혜를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간절히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다른 아무 문제도 나에게 있어서 해결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만약에 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싶다가도 또 마음이 스러진다면 작정기도를 하십시오. 일주일 혹은 한 달을 저녁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십시오.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한 달씩, 사십일씩 교회 열쇠를 받아서 걸어놓고 교회에 와서 철야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유로운 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회개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세례를 받으라
두 번째는,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이렇게 번역이 되었는데, 사실 그리스어 원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례는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거나 물을 뿌려서 세례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물 위로 나오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던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일어날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가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기도를 드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기억하며 진심으로 죄를 뉘우칠 때 그 기도가 끝나면 언제나 예수와 함께 사는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얼마나 반복되고 얼마나 깊이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기쁨의 삶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가슴이 아파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던 때가 사실은 제일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세상의 심리학에서는 같은 순간에 한 인격 안에 슬픔과 기쁨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슬픔은 언제나 기쁨을 몰아내고 기쁨은 슬픔을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 안에서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슬픈데 형언할 수 없이 기쁜 것입니다. 그 슬픔이 하나님을 위한 슬픔이기 때문에 그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누구의 위로입니까?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맘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이 당시에 이 사람들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냥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례는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을 주실만한 이름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그 고백을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것은 엄청난 핍박을 불러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곧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씨족과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도 이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예수는 사기꾼이요, 신성모독자라고 여기고 있던 때였기에, “내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그 분만이 나의 참된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쫓겨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본보기였습니다. 그래서 골육과 친척으로부터 멀어졌고, 그는 외톨이가 되어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세례의 정신이 매일매일 여러분의 삶의 고백이 되는 것이, 죄를 보면서 저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고 나 때문에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위해 흘린 보혈의 피로만 내가 구원받을 수 있고 오늘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진실하게 예수를 믿고 또 자신의 입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날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주님은 나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는 평생 한 번 받는 것이지만, 이 세례의 고백은 무한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일상적인 일처럼 여겨질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 떠나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좋고 그리고 세상의 쾌락들이 여러분들을 기쁘게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저 마음 깊은 곳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은 소리칩니다. “나에게 우리 하나님을 보여 다오. 나는 네가 즐거워하는 세상의 이 모든 것들로는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 다오.” 라고 소리치는 영혼의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을 전해주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만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스도만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라고 그리스도의 피의 자신의 마음을 담글 때 하나님은 매 순간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용서하사 당신의 사랑 안에 살게 하십니다. 이 세례의 정신 속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성령을 받으라
마지막 세 번째는, 명령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선물은 성령이 주시는 어떤 선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격의 ‘of’가 사용되었으니 ‘성령, 곧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물은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선물하는 고무장갑과 주걱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주는 지우개와 연필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제일 짜증나는 것은 설날에 어른들이 나에게 주신 세뱃돈을 엄마가 뺐었다가 그 돈으로 운동화 사주는 것입니다. 피천득 씨에 의하면 ‘선물은 사치스러워도 좋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선물은 내 돈으로는 거의 살 가능성이 없는 것이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선물은 반드시 뜻밖의 물건이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한 것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물이 가리키는 의미는 ‘뜻밖의 것, 최고의 것,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 등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쁨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지만 가난할 때에 몇 달은 그럴 수 있어도 의미 없는 일을 위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허비할 바보 같은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충분히 바보스러운 사람에게는 그런 제안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은 자기의 기쁜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뜻밖에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올바른 것을 좋아하느냐, 바르지 않은 것을 좋아하느냐’ 아니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을 즐거워하느냐, 아주 열등한 가치밖에 없는 것을 최고로 좋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달려있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냥 마음에만 맡기지 말고 그 좋아하는 것에 찬란한 불빛을 쏘여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돈이 아쉬워서 끼고 있는 다이아반지를 팔러 갔습니다. 그러면 보석상에 갔을 때 “이 반지를 팔러 왔어요.” 주인이 이렇게 보고, 저울에 달아본 다음에 “얼마입니다.” 그렇게 얘기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아주 밝은 불빛, 그리고 까만 벨벳 위에 가져갑니다. 그리고 돋보기 안경을 씁니다. 그리고 각도를 돌리면서 클리어, 커팅, 캐럿, 소위 3C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가격을 매깁니다. 왜요? 그렇게 해야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라도 색깔이 들어있는 것은 헐값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흠집이 없어야 됩니다. 이물질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커팅이 예술적으로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걸 확인한 후에 가격이 매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까만 벨벳 위에 올려놓고 진리의 말씀의 밝은 빛을 비추어서 ‘이것이 내가 그렇게 좋아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것은 상관없어. 내가 좋은데 뭐. 인생의 행복은 나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것이지.’라는 생각은 예수 믿기 전의 생각이었고, 그것 때문에 불행해져서 예수님 살려 달라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옛날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정말 돌려보내주시기를 원합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돌려놓고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정도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정직하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아닌 것을 버리고 올바른 것을 붙들고 살려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것을 줄 것이라고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와 함께 죽었으니 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고 그렇게 삶으로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시는데 이 성령은 회개와 믿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마음을 주시고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그로 인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시면 주시고, 안 주시면 안 주시는 것이지 거기에도 무슨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연애하는 친구들을 보면 모두 그렇게 행복해 보입니까? 그렇지 않은 커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 석 달은 행복했는데 그 다음은 그렇게 우울해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행복해보였는데 헤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마다 연애를 하는데 그 사랑의 깊이와 진실함은 다 다릅니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죄와 은혜가 섞인 가운데 오히려 죄가 우월한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은혜가 우월한 상태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거의 죽은 것처럼 혹은 그 죄의 성향의 자신의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 충만히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부으심, 세례, 충만 등으로 다양하게 문학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마음의 깊은 찔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향한 복음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저의 설교는 끝났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살아가는 삶이 충분히 만족하면 그냥 사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주님과의 사랑의 때를 그리워하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흐느낌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을 언제까지 이 세상에 쾌락으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고집대로 사는 삶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눈부시게 누렸던 많은 쾌락과 즐거움들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기억들, 주님이 나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셔서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에 비하면 나의 헌신은 티끌 같지만 그래도 영혼을 섬기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의 한 구석을 섬기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았던 그런 기억들이 오늘 여러분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소환해 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니, 우리의 육체는 시간 속에 흘러가고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도 시간 속에서 흘러가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 아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이 여러분들을 위한 특별한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전에 무슨 죄를 지었든지,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삶을 살았든지 하나님은 상관없이 여러분들의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보시면서 용서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의 용서받을 가치가 하나도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그의 대신적인 죽음 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의 피를 보고 여러분들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될 것이고 눈처럼 하얗게 주님이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죄도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다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무의미한 삶인지를 생각하며 주의 성령의 충만함을 달라고,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뜨겁게 회복하는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미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이런 복음의 찔림을 경험한 적이 언제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내 마음이 찔리고, 내 양심이 찔려서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되겠다는 강한 마음의 결심을 언제 가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 듯 해 보이는 예수 믿는 청년의 삶, 예수 믿는 성도의 삶,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가 소문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주여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옵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며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처럼 그렇게 가슴을 두드리며 기도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결코 하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온 세계의 모든 물질보다도 한 영혼이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합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삽시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고,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이길 수 현실을 이기며 살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포악한 맹수도 1년 자기를 길러준 주인을 알아보고 그렇게 기뻐하며 어린 아이처럼 주인을 끌어안고 뒹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맹수보다도 더 뛰어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굳어졌던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조용히 접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이미 옛날에 죽었으니 이제 나는 예수와 함께 아니면 살아날 길이 없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없이 이렇게 억지로 살아가는 기쁨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 아름답지 않은 것에 취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삶을 버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죄는 운명이 아니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언제나 숙명과 같았던 우리들을 바꾸어 놓습니다. 죄의 노예를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던 노예와 같은 사람들을 바꾸어 하나님의 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되었던 사람들이 변하여 주님의 마음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힘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힘닿는 대로 이 사랑을 전하려고 하였고, 매일의 기도는 주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진 여러분들이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자를 보면서 나는 병원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다면 잠시 전까지 입에 피를 묻히고 짐승을 물어뜯는 잔인함이 있었을지라도 그 입으로 주인의 얼굴의 볼을 부비며 그렇게 주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이 맹수와 같았던 자들도 이렇게 받아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 이 시간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우리들이 주님을 멀리 떠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찔림을 받은 적이 없고 내 고집대로 내 원하는 대로 살았나이다. 주여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아버지 앞에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죄의 용서함을 다시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님 앞에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기도합시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 없어요. 문제는 여러분들의 진심이에요. 언어로 주님께 기도하는 기도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언어로 하나님께 간절히 오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