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엇이 관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1-4)
이 시는 탄원의 시가 아니라 찬송시입니다. 찬송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높이는 찬양의 시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참 살아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때는 대부분 개인의 일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더니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이렇게 느낍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복을 주십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경험입니다.
시편의 경험은 다릅니다. 시인이 찬송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늘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찾아와 주십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면서 감격합니다.”라고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살도록 만들었던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삼라만상과 모든 자연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신앙입니다.
항상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의 종교생활의 틀 속에만 갇혀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흔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입니다. ‘무엇을 입어야 하나, 내일은 뭘 먹어야하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식주의 문제가 늘 고민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이 근심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전 그런 생각을 안 하시다가 근심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가시면서 늘 삼라만상 보이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사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시편의 찬송시가 갖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굳센 믿음은 사색에 의해서 촉진됩니다. 믿어야할 것과 내가 아는 것 사이를 끊임없이 사색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가운데에 지적인 친밀함을 우리 마음이 누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아름다움, 은총의 세계를 깊이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따라 사는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2절은 여기에서 젖먹이와 어린 아이의 입으로 보수자들과 악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뭘 모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배운 자기도 잘 모르는 단순한 진리를 그냥 외울 뿐입니다. “너희들 싸우면 큰 일 난다. 너 나쁜 짓하면 하나님이 다 내려다 보셔.” 그러면 사람들은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들에 핀 백합을 입히시고, 공중 나는 새를 먹이셨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 하나님이 무엇인가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다스리신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 대해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언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관심 없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떤 사람은 거기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각에 대해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판단된 것을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살무스라는 교부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선악간의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냥 살지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생각은 하면서 나는 하나님은 가지고 계신 목적에 합당한가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사실상 무신론자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없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방법과 온 몸으로 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온 몸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면서 온 몸으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개역한글판) 여기에서 ‘권고’는 히브리말로 ‘파카드’라는 말인데 잘하라는 뜻이 아니고 방문하는 것, 찾아오는 것입니다. ‘권고하시는 날에’라고 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그 날을 말합니다. 그 날에 악인들은 두려워 떨 것이고 의인은 기뻐할 것입니다. ‘심방하다’라는 정도의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찾아오시나이까” “인자가 무엇이 관대” 이것은 똑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생각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병행법입니다. “인자가 무엇이 관대 저를 찾아와주시나이까. 너무 감격스럽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너무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에 있어서 뛰어나시고, 세상을 통치하심에 있어서도 너무나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실까?” 하며 무시했지만, 젖먹이와 어린 아이들의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그 보수자들, 원수들에게 그대로 임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언약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은총을 입고 보니까 “사람이 무엇이 관대 하나님이 저희를 생각하십니까? 인자가 무엇이 관대 저를 찾아와주십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이 귀한 것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자기도 귀해 보이지 않고 세상의 인간들도 귀해 보이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어떤 미친 사람이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승용차를 몰고 여의도 광장으로 갔습니다. 차는 못 들어가게 되어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휴일이라 광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는데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세상이 지겨워서, 행복한 사람들이 싫었다고 합니다. 자기 인생이 불행해지면 사람이 귀한 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사라집니다. 고통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굴립니다. 고통이 많은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으면 몸을 아무렇게나 막 굴립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개별자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보편적인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습니다. 개별자인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보편자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구제가 나오고, 인간을 사랑하는 선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경험을 이야기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그 사람은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자체가 교통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