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시 27:10-11)
녹취자 : 김세나
사귀면 사귈수록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그 관계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있고 이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아주 깊이 삭힌 간장이나 된장처럼 점점 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사이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런 것 같아요. 다윗하고 우리아와의 관계가 그런 것 같아요. 신앙이 어렸을 때는 제일 재미없는 성경이 두 개가 있었는데 레위기와 시편이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신앙이 오래,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이 시편, 특히 그 중에서도 다윗의 이 노래가 가슴에 깊이 다가 오는 것은 아마 틀림없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는 다윗이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소유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다윗의 사람, 다윗이라는 사람을 슬픔과 영광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 사람을 슬픔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너무나 혹독한 시련과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이 사람을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그렇게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쓴잔을 많이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었지만 거기에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저는 이 사람을 슬픔의 사람인 동시에 또한 영광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언제쯤 썼을까요. 시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흥미있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마땅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저 막연히 추측하기는 시의 내용을 보면서 이제 대체적으로 다윗의 인생에서 이 시를 어느 지점에 갖다 놓으면 가장 어울리겠는가를 보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죠. 27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죠.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그리고 뒤편으로 넘어가면서 원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으로 볼 때에 확실히 이 시는 아마 사울에게 왕이 되기 직전에 사울에게 추격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운 때를 지내던 그러나 믿음이 충만하였던 그 때를 그 때에 쓰여진 시이거나, 아니면 왕이 된 이후에 몇 번의 시련기, 예를 들자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에 겼었던 혹독한 영적인 시련기나 혹은 그 후에 왕국을 이끌어 가면서 겪었던 몇 번의 반란들, 이런 것들 속에서 이제 깊이 어려움을 당할 때 쓰여진 시일 가능성이 많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무서운 것이 두려운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두려운 것이 참 많이 있어요. 넉넉하게 살던 사람들은 가난해 지는 것이 두렵고 그리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질병만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질병 만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큰 두려움은 자기가 버림 받았다라고 하는 느낌 일 것입니다. 그것 만큼 두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다윗은 오래전의 일들을 다시 회상하면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아자브니라고 되어 있는데 나를 떠났으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저 다윗의 부모님들에게 오늘 이 개역성경과 같은 번역은 잔혹한 것이 되겠죠. 나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렸어도 여호와께서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 번역은 너무 잔인한 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평범하게 번역을 하자면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떠났거니와 여호와는 나를 받아주시리로다. 이런 정도의 번역이 되겠죠. 하긴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사고 자체를 이쪽이 아니면 이쪽,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많이 있었어요. 즉,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면 다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번역을 해도 히브리 사람들의 정서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겠죠. 그런데 이 다윗이 오늘 새삼스럽게 내 부모는 나를 버렸거니와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다윗이 원수들에게 둘러 싸여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가운데 문득 하나님의 선하심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게 되니까 문득 그 하나님의 선하심,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이 자기의 육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자신의 엄마와 그리고 아빠, 자기의 부모의 사랑보다도 훨씬 크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면서 대적들에게 자기 자신이 둘러 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이 아버지로부터 뼈저린 깊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었을 것이다라는 암시가 성경의 여러 곳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 다윗이 이새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의 아들 중에 사울을 이어 왕이 될 기름부름 받을 자가 있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갔을 때, 아버지의 생각에는 그 덩치 좋고 그리고 인물이 훤칠한 기골이 장대한 그러한 자기의 큰 아들들만 기억에 있었지, 이 다윗은 아버지의 마음에도 없었던 그러한 암시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기름을 부으려다 하나님이 말리시자 이 아들이 다냐라고 물었을 때, 비로소 생각났던 아들이 다윗이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전쟁에 나아갔을 때에도 아버지의 관심이 다윗의 안전, 다윗의 안위 보다는 전쟁에 나가있는 자기의 큰 아들들의 안부에 훨씬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전쟁터에 다윗을 보내서 굳이 형들의 안부를 묻도록 그렇게 지시한 것만 보더라도 어쨌든 이 아버지의 마음에 다윗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살깊이 새겨진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다윗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표현 방식이야 다르겠지만, 그러나 어릴 시절에는 부모의 깊은 사랑 속에서 자라야 할 권리가 아이들에게는 있습니다. 오늘 이 논제를 약간 벗어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것은 사실입니다. 다윗이 깊은 신앙의 세계 속에 들어와서도 수시로 그 부모가 자기를 버린 것을 상기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회로 삼았던 것은 매우 귀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렸을 때에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다윗의 의식과 신앙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패역하고는 좀 종류가 다르지만 그와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는 거죠. 소위 이야기하는 상처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상처의 치유, 상처의 회복 이런 것들을 말하는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상처의 치유라든지, 상처의 회복이라든지 그러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경험한 이 치유의 경험, 내가 경험한 이 회복의 경험은 뭐냐라고 말하는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이것을 보여주는데, 이 다윗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부모에게서부터 사랑을 깊이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로부터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할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자란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경험들이 있었어요. 거절당한 경험이 있었단 말이죠.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그래요. 그러한 자식에게도 그렇고. 그러한 거절당하는 경험들이 상처가 되었는데 그렇지만 상처가 있었어도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의 신령한 은혜 안에 살 때에는 오늘 이처럼, 내 부모가 나를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선하심이 더 돋보이고,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로 더 많이 피하고 싶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너무나 춥고 외로운 시간들을 보내기 때문에 주님의 따뜻함 품에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그러한 마음을 가졌어요. 언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갈 때에. 그러나 일단 그러한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예전에 이미 하나님이 치유하셨다라고 생각되었던 모든 미움, 원망 이런 것들이 전부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죠.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제도 필요없고 내일도 필요없고 오늘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오늘 이 다윗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이렇게 말할 때 뭔가 우리는 이 시편 후반부 속에 흐르는 문맥을 보면서 뭔가 이 다윗이 하나님과 그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를 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어떠한 마음의 감정들이 하나님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오늘 여기에서 다윗은 임마누엘의 은총을 구하고 있거든요. 즉,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뒤집어 말하면 심리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내 부모는 살붙이처럼 여겨졌으나 실상은 나를 버렸는데 여호와는 지금은 그 여호와가 나로부터 멀게 느껴지는 것같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 부모와 같지 않고 진실하고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국은 나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는 역설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들이 하나님이 나의 갈길을 보여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심리적으로 뭔가 갈길을 잘 모를 때, 우리는 주님의 그러한 성품을 회상하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죠? 그렇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뭔가 상처 받았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을 상기하게 되잖아요. 여기에서 다윗이 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그 종교 심리로 볼 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소원해져 있는 상태,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 않고 더 이상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고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다윗의 그 소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 아주 중요한 교리 하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느껴질 때, 그 때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우선 첫 번째는 이런 가르침이 나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자기와 임마누엘 해 주시기를 다시 말하면 자기를 영접해 주셔서 자기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는 임마누엘을 구하는데 그러한 임마누엘을 구하는 다윗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그러한 임마누엘을 위해서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탄원함으로써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해진 가운데 하나님과 임마누엘 하는 교제의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들이 소원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의 교제로 들어갈 수 있다는 평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평범하고 당연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가르침 만큼 우리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것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비록 그가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 아무리 이 세상의 사치나 향락, 이 세상 즐거움에 자기를 매몰한다 할지라도 본성적으로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한 욕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하는 욕구입니다. 물론 그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과 오래토록 영원히 함께 있기 힘들어하고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두 욕망은 늘 싸우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양쪽에서 팔을 잡아 당기는 것같은 팽팽한 영적인 긴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 속에 깊이 들어가고 나면 한 쪽은 결국은 그 팔을 놓게끔 되어 있고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과 임마누엘 하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기도 생활 속에서 드러나고 심지어 실제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심각하게 하나님과 매우 소원한 사이가 된 것이 느껴지고 나아가서는 영적인 공격들이 자신의 신앙 속에 깊이 느껴질 때 무엇을 통해 여러분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의 교제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이 있는 그러한 교제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실제 그러한 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깊은 마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느껴지고 그 분이 우리 안에 임마누엘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심오한 영적인 교제의 증거가 없이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라고 하는 증거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 다양하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깊이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오지는 않지만 어려운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관련된 오해받는 곳에서 우리를 건져내주셔서 우리의 일의 억울한 사정들을 풀어 밝히 드러나게 해 주시거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거나 혹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복을 주셔서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때 주님이 우리를 아직 버리시지 않으셨다라고 하는 다양한 증거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멀리 세상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문제는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은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고 우리의 명예를 높이 올리시거나 우리가 억울한 사정에 처했을 때 억울한 것을 탄원해 주셔서 오해를 벗겨 주시거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거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만족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정말 하나님이 나를 영접해 주시는 것, 무엇인가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포옹해 주시거나 당신 자신의 인격을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 깊이 체험하게 하는 영적인 교통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께 속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혼은 만족되지 않는다. 만족하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 했던 이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치친 증거들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러한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증하시는 이러한 체험들은 한번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늘 우리들이 그러한 체험속에서 살아야지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계명을 기쁘게 수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방법이 뭐냐 이거죠.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매우 소원해 있던 우리와의 그 관계를 하나님이 새롭게, 우리를 들어가게 하시느냐 이거죠.
아우렐레이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 위인이 있습니다. 4세기 때, 4-5세기 때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그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했는데 친구로부터 이제 전도를 받고 그리고 이제 자기가 너무 고통스러운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말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를 잘 깨닫고 나니까 얘전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한편으로는 열렬하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죽으러 가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어느날 정원에서 막 아무렇게나 엎드려서 미친 듯이 이제 그 울고 있었죠. 이 양쪽 사이에 긴장이 너무 심해서 막 잡아 당기는 것 같아서, 죽을 것 같아서 말이죠. 막 괴로워서 울고 있었죠. 그 때 아이들이 아, 들어라. 읽어라. 집어 들어서 읽어라. 집어 들어서 읽어라. 동요 가락이 울려 퍼졌어요.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성경을 탁 펼치면서 로마서를 읽다가 회심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당신과 멀어진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새롭게 당신과 임마누엘 하도록 깊은 영적인 교제속으로 불러들이시는 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심으로 그 일을 하신다 이거죠.
오늘 성경을 보면 뭐라 그랬냐 하면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주의 길로 가르치소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주의 길을 가지고서 나를 가르치소서. 그 뜻이에요. 주의 길로 나를 가게 하소서, 그 뜻이 아니라 주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주의 길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게 주의 길이다. 이 주의 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시인을 가르쳐서 깨닫게 함으로써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것 같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불러 들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건강하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면서 살 때에 그렇게 되지만, 그러나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따라서 삶은 이제 방향을 잃고 요동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밀한 교제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나님께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방법도 역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들에게 깨닫게 하심으로써 소원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깊이 임마누엘 하는 관계로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기에서 그러면 여기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한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시키시는 분이 누구냐.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한 미각을 스스로 회복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러면 도대체 그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키시는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거죠. 이것도 이것도 사실은 이것도 사실은 회개를 설명할 때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설명과 유사한 설명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회개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케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할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역사 하신다, 그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장작을 쪼개는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잘라도 장작이 잘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산에서 베어온 통나무를 떡국 모양으로 썰어서 장작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이거죠. 더군다나 도끼를 가지고 그렇게 떡국을 썰 듯이 나무를 썰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죠. 시도를 하면 안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시도할 이유가 없다 이거죠. 평범한 그러한 원칙이 아니라 이거죠. 마찬가지로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에요. 성령님만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맛을 회복시켜 주셔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실 수가 있으셔요. 성령님 이외에는 누구도 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교리가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번 경험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험이에요.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목회자인 저를 깊이 신뢰하고 그리고 제가 시키는 대로 잘 순종하고 싶어하는 의지와 욕구를 가지고 있어도, 있어도 있어도 성령님이 말씀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으면 자기는 그렇게 원하는대 사실은 되지 않는 경우들을 많이 봐요. 그 때마다 저는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아, 이 목양이라는 것이 확실히 정말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하는 인간 관계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인간 관계 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구나를 느낍니다. 자기도 내 말에 순종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원해요. 하겠다고 약속을 해요. 그런데 뭐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없는 거예요.
성령님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달게 느껴지게 만들 수 있고 그 말씀을 향해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실 수 있고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저항 없이 심겨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원인자에요. 성령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기가막히게 그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게 되는 그러한 일들은 일어나지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을 하나 찾아내라 그러면 다윗과 같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러한 소원을 강력하게 가지고 자기가 자기와 하나님 사이가 심각할 정도로 멀리 소원한 관계가 되었을 때에 자기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의지적인 집중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면 어느 순간까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까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키시면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그 찾는다라기 보다는 그저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깔대기를 꽂고 기름이 병속으로 들어가듯이 이렇게 빨려들 듯이 쭉 들어가는 것을 느껴요. 그 여러분 경험했으니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설명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이죠. 어느 한계까지는 어느 한계까지는 우리들이 말씀을 깨달으려고 내가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성령님께서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켜주시는 순간이 되면, 그러면 우리는 아 우리들이 뭔가를 집중을 해야 되겠다. 인내를 해야 되겠다. 내가 이렇게 참을성이 없으면 안 되지. 졸면 안 되지 그러한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말씀이 깨달아진다기 보다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에 깔대기를 꽂으시고 기름을 말씀의 기름을 부으시는 것 같이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그러한 상태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고 말씀의 미각을 충만하게 회복했을 때, 여러분 말씀을 듣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는 것, 그래서 뭔가 희생을 치루고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느낌을 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한번 그렇게 이야기 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렇죠. 정말 말씀의 미각을 성령이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부으실 때, 그 때에 우리들은 그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그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을 향해 집중하고 그 말씀이 자기를 향하는 것을 경험하죠.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대게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자신속에 심겨지기를 원하는 그러한 강렬한 소원이 동반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사실을 오늘 성경이 입증하고 있는 거죠.
다윗은 자기가 곤경에 처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임마누엘을 구하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서 갖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고 이어서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신앙 인생을 인도해 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아주 단순하고 다윗에 의해서 평범하게 입증된 신앙의 원칙들을 무시하거나 뛰어넘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하나님 앞에 인도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 하기 보다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밀어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깃 들여 있는 것이에요. 표현이 인도일뿐이지. 자기가 하나님을 달고 가고 싶어 하는 그러한 마음이라 이거죠. 그러니까 언제든지 상당히 많은 기도가 쓸데없는 노력으로 끝날 경우가 많다 이거죠. 우리들이 인생에 있어서 고난을 처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많이 기도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우리의 기도는 많이 낭비됩니다.
그러나 이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가 어떠한 곤경에 처했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자기를 버리지 않고 용납하시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구했습니다. 그 임마누엘의 사귐을 구하면서 하나님과 거리가 소원해졌을 때 그러한 깊은 교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는 비결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가르치심으로써 자기가 그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사귐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렇게 영적인 사귐을 자신에게 주시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어디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고 그렇게 인도받는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것이요. 자신에게는 행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성도는 누구일까요. 고난을 당하고 있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거나 심지어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가장 불행한 신자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신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릴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폭풍의 시련을 지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뭐 대수입니까. 오늘 이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원수로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이상합니까. 원수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나를 대하여 엎드린 자들, 다시 말하면 다윗이 걸어간 인생의 길에 매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에 벌 때같이 일어나서 다윗을 단칼에 쳐죽이려고 하는 그 악한 자기를 숨기고 순식간에 자기를 공격하려고 하는 야비한 자신의 인생의 대적들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대적들이 없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 벌 떼와 같이 일어나서 졸지에 자신을 습격해서 넘어뜨리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원수들인데 그러한 애들 때문에 자기의 길을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구하고 있어요. 뭘 믿는 것이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에요. 그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해 주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끔 자기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깊은 교제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만 하면, 자신의 대적들이 아무리 자기를 많이 둘러쌓여 있고 수시로 숨어서 자신을 공격하여 쓰러뜨리려고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도전을 받는 자신의 상황을 자신도 알 수 없는 놀라운 지혜로 하나님이 연결되게끔 만드셔서 결국은 그 원수들 때문에 오히려 형통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믿음, 그 믿음이 바로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떠한 상황에 쳐해 있던지 간에 그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만 하고 주님이 자신에게 주고 계신 음성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그 말씀의 미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다면 그가 어떠한 상황에 쳐해 있든지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을 평탄한 길로 데려가는 물결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영적인 세계가 없을 때에 바다에 이르는 바람은 단지 파도를 불러 일으키고 자신의 인생의 배를 뒤엎는 대적으로 밖에 남지 않지만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언제든지 들릴 수 있고 자기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든지 깨달을 수 있는 이 말씀의 미각을 소유하기만 하면 인생에 부는 그 바람은, 그 인생에 매달린 돛대로 인해서 그 배는 풍랑중에 더 가까이 항구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받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단지 지식을 쌓기 위해서 사경회를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러한 목적이라면 굳이 우리들이 사경회로 모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시로 사경회를 여는 것은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성경에 관한 어떠한 지식들을 우리들이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막혔던 부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풀고 하나님의 말씀의 깨우침이 아니면 도저히 더 이상 나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좌초된 삶을 새롭게 읽히고 시작하게 하기 위한 것이 이 사경회의 목적이고 또 사경회 속에서 우리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우리의 삶이 회복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이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를 열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간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의 사이가 소원하게 느껴지고 주님과의 교제로부터 우리들이 많이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심으로 소원한 하나님과 우리와의 매우시고 다시 임마누엘 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그 말씀을 통해서 미각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이해를 집중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하고 계시는 말씀이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깊이 이해하는 마음을 달라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그렇게 우리들이 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한주간 동안에 우리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다가오는 다양한 삶의 환경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지키고 사경회를 통해서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깨닫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고 환경을 정돈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해야 할 몫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몫이다 그러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벌써 사경회가 탁 시작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스탑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 이거예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일 이외에는 일체 정지하고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대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깊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소원해졌던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환경의 방해가 없도록 미리 이러한 삶의 가지치기들을 해서 한 주간동안을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비워 놓는 것,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몫이 아니라 우리가 할 몫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진지한 노력과 세심한 준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정말 지금은 비록 다소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온전히 소유한 삶을 살고 있지만 정말 그러한 삶을 꿈꾸고 있고 그리고 정말 당신과의 깊은 교제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을 주님이 확인하시게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급하게 생각하시는 것과 우리가 급하게 생각하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선 망가진 당신과의 관계를 고치고 우리들이 심각할 정도로 잃어버린 심각할 정도로 모두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밀함을 다시 회복시키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행하면서 살든지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영적인 선이 동기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이 너무나 고달프기 때문에 그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공식말고 하나님, 지금 내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런 저런 소원들을 하루 속히 들어주시고 더 이상의 조건을 치지 않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의 도리를 배워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단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돕는 그러한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참된 주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인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리의 삶의 현장을 만나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것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의 상황을 맞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로 부르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바로 우리를 당신의 말씀으로 다시 부르시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처한 문제에 하나를 모두 알수도 없고 또 모두 안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안다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말씀에 깊은 미각을 회복하고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속에 꿀같이 달게 느껴지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 싶은 어린아이와 같은 강한 이 소원함,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랑, 말씀의 즐거움, 그리고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말씀하신다라고 하는 그러한 분명한 자신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앙의 세계를 다시 여러분들이 회복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리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렇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어둠 속에서 인도하시는 방법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심지어는 도저히 여러분들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대적들이 시인을 향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처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생명을 노린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런 깊은 말씀의 은혜의 세계속으로 여러분들이 들어가기만 하고 그런 은혜를 여러분들이 회복하기만 한다면 그런 악한 원수들의 시도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들이 예전에 생각하지 못하였던 더 크고 평탄한 길로 들어서게 되리라고 저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서부터 여러분들이 마음을 깊이 모으고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지난 몇 주 동안 가족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면 이제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충만해 지십시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말씀의 미각 속에서 사는 훌륭한 계기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