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돌이키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말3:7~9)
이제는 이북이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탈북을 해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아주 많아졌고 무엇이 허술해서인지 이제 넘어오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한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이북에서 넘어오면 그것은 국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뭘 하다 넘어온 사람이든지 남한에 넘어오면 열렬한 방송과 그리고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돈도 모아서 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라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귀순자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귀순이라 이 말은 가서는 안 될 곳을 간 사람을 가르쳐서 귀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귀순이라는 것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가리켜서 귀순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국에 태어난 사람은 한국에 돌아올 때 귀국이라고 말하고 외국으로 갈 때는 출국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가장 다급한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명령을 하실 때 가장 다급해지실까 그게 바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보다도 더 급한 명령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문제는 나중 문제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못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가 허물이 너무나 큽니다. 그리고 염려, 근심과 걱정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중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돌아와서 이야기 하라에요.
(예화) 요즘은 하도 바빠서 신문 볼 시간이 없습니다만 이렇게 보면 사람을 찾는 광고가 많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다 용서하니 돌아와라’ 심지어는 ‘네 원하는 대로 다 결정 냈으니 돌아와라’ 아마 시집장가 갈 사람들이 혼사를 집안에서 방해를 했던 모양이죠 ‘인정해줄테니 돌아와라’ 또 빚 때문에 도망간 것처럼 보이는 어떤 아낙네를 찾는 광고는 ‘아무개엄마 빚 다 갚았으니 빨리 돌아오시오’
다른 것은 나중 문제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품이요 하나님 곁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먼 길로 떠났다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만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전혀 하나님을 안 믿고 살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로 갔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믿는 자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포함해서 모든 이 세상의 인간이 누구의 품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모두 영생할 수 있는 주님의 품안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데리고 놀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을 만드셔서 당신이 하기 싫으신 일들을 인간에게 시키시려고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족관계가 되기를 원하셔서 당신과 함께 사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믿는 자든지 믿지 아니하는 자든지 모든 자의 조상이 오직 아담과 하와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품안에 있던 사람들이요, 하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날마다 살아갔기 때문에 특별히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신앙적인 사고방식이 분리되지 않았고 일반 은총의 세계와 특별은총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 된 삶 속에서 그들이 살았습니다. 노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은 함께 가정을 꾸려 나아가면서도 주님의 면전에서 사는 그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호흡했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뜨려지고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존재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감으로써만이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하님의 계시를 떠나면 그건 필연적으로 인생에는 커다란 고통과 실패가 찾아오게 되는 법입니다. 만족과 진정한 자유보다는 억압과 그리고 불만족이 가득 찬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과 몇 천 킬로미터 차이 밖에는 되지 않는데 적도상에는 그렇게 뜨거워서 사람들이 벌거벗고 다니다시피 하고 몇 천 킬로 뒤로 물러선 남극과 북극에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녹지 않는 그런 빙하의 지대입니다. 태양으로부터 몇 천 킬로 멀어져도 그런 엄청난 추위와 그런 얼음으로 가득 찬 세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부터 인간이 멀어질 때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커다란 슬픔과 냉담함과 어두움이 깃들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을 인간이 만족해하던 만족해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당신 곁을 떠난 인간을 바라보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길을 나서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용하실 수 있는 모든 도구를 통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환경을 사용하시고, 상황을 이용하셔서 당신 곁을 멀리 떠난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는 이 일에 지치지 않는 열심을 품고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열망이 이렇게 간절하고 뜨겁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많은 은혜를 주셔서 오랜 세월동안 사랑을 나누고 함께 사귀며 사랑의 비밀을 쌓아간 당신의 자녀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신의 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아갔을 때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열렬하고 간절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부르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여러분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좋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깨닫는 것 없이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슴에다가 깊이 이 십자가를 새기고 살아야합니다. 무엇인가 내 욕심과 내 욕망대로 살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래,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사신 바 된 주님의 것이다.’ 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다니는 것은 내가 돌아다니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요 우리 주님의 소유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셔서 분명히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들인데 당신의 곁을 떠났을 때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고통스럽고 아프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감정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당신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신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없이 사실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철이 드는 것입니다. 철이 들수록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몽둥이와 방망이로 효자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려 길러야 효자가 나온다 그러는데 때렸기 때문에 삐뚤게 나간 사람도 많고,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효자가 나온다 그러는데 인격적으로 대해 줬기 때문에 부모를 하찮게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철이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자식입니다. 여러분 몇 살 때 쯤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까?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만 이것을 하면 혼날꺼야, 그거 말고 나는 이것을 꼭 하고 싶은데 이 일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 아버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우리 어머님이 내가 이런 식으로 이 일을 결정한 것을 아셨다면 얼마나 마음 상해하실까, 이러면서 자기의 소원을 접어둘 나이가 몇 살 때쯤 됩니까? 몇 살 때쯤 되는 것 같아요? 백발이 얼룩얼룩 하여도 이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 정말 인격적인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인간을 때려서 신앙생활을 시키겠으며 누가 인간을 억압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도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나는 창과 칼로 무장을 하고 여러분들에게로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런 무장도 없이 여러분들에게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검을 사용하여 자기를 보호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고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저 칼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전대도 없이 그저 오로지 지팡이 하나를 들고 길을 나섰던 복음 전도자들처럼 주님도 그렇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지만 모욕하는 자들이 있으면 모욕을 받으시고, 때리는 자들이 있으면 맞으셨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이 있으면 박해를 당하셔야 했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대로 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고난과 희생의 넘치는 삶을 살면서 당신이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면서 일생을 사노라면 언젠가는 아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철 들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시며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철났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여기서 너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 그 은혜 아래서 먹고 그 사랑 안에서 마셨던 사람들 생명과 모든 건강과 모든 인생의 안전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고, 주님이 지켜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고, 안전을 책임져 주시므로 그들에게 피할 바위가 되고 산성이 되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랑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돌아오지 않은 것보다도 더 사악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존재일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받은 놀라운 은총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렸고,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대단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치고 나는 깊은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흉악하고 이렇게 쓸모없는 인생이 바로 나였구나, 이렇게 소망 없고 스스로 새로워질 가능성이 없는 존재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결국은 나의 산 것,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찬란한 태양처럼 자신의 마음을 압도하고 의식의 세계를 그 은혜가 지배하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 훌륭한 일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욕망을 절제하며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지난 과거를 떠올리기에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가 너무나 놀라와 그 은혜가 놀랍고 그 은혜가 너무나 큰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큰 사랑과 그 은총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제일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고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 비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언제나 고개를 들 수 없는 비참한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나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그 불타는 사랑으로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데 내가 하나님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스러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그런 마음이 신앙적으로 철든 마음이라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을 하는데 우리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치는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임무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베끼게 하는데 그런 생각 이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살아가야 할 규례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매일 시작하면서 너희 그 조상 때부터 나 여호와의 규례를 떠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멀어지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그런 깊은 두려움과 떨림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일수록 나는 제법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서 돌아오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이것은 내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느냐 얘깁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그 삶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지불했던 희생을 계산하고 고난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말입니다. 주를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우리의 의식을 채우고 우리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야 할 것은 주님께선 우리와 같이 가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나, 주님의 그 비할 데 없는 큰 사랑과 감당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쏟아부어주신 그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어서 우리가 사랑한 것이 있다면 부득불 나 같은 죄인 살리셔서 돌이키지 않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는 우리에게 이런 큰 은혜 베푸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충만할 때나 갈급할 때나 평탄할 때나 고난의 먹구름이 가득할 때나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심지어 죽은 이후에라도 우리 때문에 주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성도가 말이죠, 죄에서 떠난 삶을 살수록 이상하게 죄에 대한 설교를 더 많이 원해요. 그리고 죄 가운데 살수록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한 말씀을 더 많이 필요로 하면 할수록 그들은 죄에 대한 설교를 싫어해요. 이유가 뭔지 제가 설명해 드릴 테니까 여러분들 가슴팍에다가 깊이 새기고 가라구요. 그 무엇 때문이냐 하면은 결국 눈이 가득 내렸을 때 눈을 치우지 않으면 길이 나지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죄로부터 떠나면 떠날수록 성결한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생겨나요. 왜냐하면 정결하지 않은 곳에는 신령한 것이라는 것, 신령한 것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제 아무리 무릎 꿇고 기도원에서 박수를 치면서 펄쩍펄쩍 뛰어도 사람이 정결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받은 은혜는 다 가짜예요. 거짓이라구요. 정결함, 이 정결함은 단지 주님을 위해 돈을 많이 쓴다, 주님을 위해서 주일을 잘 지킨다. 주님을 위해서 쓸데는 팍팍 쓴다, 뭐 이런 성격의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기본적으로 부어질 때에 우리의 육체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위에 부어진 것, 우리가 이 정결하다는 말은 네모반듯한 생활을 해 나간다라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쨌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더러운 것들을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그런 마음이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빛이 깊이 깃들 때에 우리는 끊임없는 갈망이 이 속에서 자꾸 생겨나는데 인제 그것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이전에 타락하기 전에 인간이 하나님과 누렸던 그 완전한 사랑.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그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깊고도 진실한 사랑의 흐름이 있는 그러한 행복의 상태 사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자기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잖아요. “환난이냐 위험이냐 적신이냐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 근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신령한 사랑이 우리에게 깃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죄예요. 그래서 그 죄는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비춰오는 그 빛을 은혜의 빛을 가리어서 그래서 우리 속에 깊은 어두움이 깃들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필요로 할수록 그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완전한 교제와 참된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죄를 치워 버리려고 하는 죄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이에요. 그건 그것대로 놔두고 그 위에 하나님의 신령한 사랑을 더 받고 싶다는 이런 마음을 근데 이것은 자기의 계산이고 생각이지 소용없다 이 말이죠.
한 사람의 영성이 진실한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해서 단호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그 죄를 미워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성을 알 수 있어요. 제가 지금 이 교리를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면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남이 의식하지 못하는 죄를 정확하게 감지하고 그것의 궤계를 알아 맞추며, 그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마음으로 싸우려고 하는 지가 그게 영성의 측량도에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참된 하나님의 부흥은 예외없이 언제나 죄에 대한 외침으로 시작이 됐어요. 왜 돌아와야 되는데 돌아오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은 죄야. 죄의 사슬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죄에 대한 진지한 견해를 갖지 않고는 그는 결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죄에 대한 진지하고 투철한 견해를 갖지 않고는 결코 여러분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물론 세속적인 부흥회에 들어가서 불 체험을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불은 성령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기쁨을 체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뭔가 별다른 체험의 세계로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분들이 뭘 체험하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 삶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말합니다. 아니, 어디로 돌아오라는 겁니까? 아니 그 땅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살고 있는데, 어디로 돌아오라는 겁니까? 애굽으로 돌아오라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 이스라엘에서 먼 나라로 갔습니까? 아닙니다. 거기 있습니다. 어디로 돌아오라는 겁니까? 그건 장소적으로 돌아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많은 백성들이 이 말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있는 많은 교인들에게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고 하나님 말씀하실 때 그만이 자기를 향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듣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여러분 돌아오라고 주님 말씀하실 때 정말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전 멀리 떠나 있습니다. 남들은 저를 보고 거룩한 성도라고 말하고, 너 만한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전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라진 완전한 기쁨,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이런 것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교회 나오고 반듯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교회에서 직분이 올라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 내 일이 성공하고 내 사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주님 이것은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나는 언제나 없습니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당신이 계시므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주님이 안 계신데 그래서 뭐합니까? 사람들에게로 받는 존경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 많은 재물, 잘 풀리는 사업, 행복한 가정, 화목한 부부관계, 의좋은 형제자매들의 관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서 봤는지 어디서 읽었는지 아니면 꿈에서 떠올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한 컷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패물과 많은 보석과 선물을 보따리 보따리 사들고 온 남편에게 울면서 한 여자 다 집어던지면서 당신이 내게서 멀어졌는데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런 것들 가지고는 살 수가 없어요. 물질 없이 세상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걸로만 산다는 것은 그 것 없이 사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적당한 사랑 없이는 우리는 외로워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 하나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것 없이 사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 되시고, 그분이 없는 삶은 그분이 없는 죽음만큼이나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있으면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의 참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이런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까? 한 모금의 물과 한 주먹의 빵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까? 인간의 사랑과 그리고 인간이 인정해 주는 것들로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멋모르고 몸으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시 맛보고 나면 예리한 칼이 되어 쓰라린 고통으로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순간의 쾌락과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꾸는 미련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잠시 있다가 부서져 없어지는 세상의 보물들에 대한 탐심 때문에 이 주님의 사랑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겨울에 거지들이 언 발을 녹이기 위해서 감싸는 거지발싸개와 같은 자기의 의,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이 목메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살았으나 죽은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슬픔이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백발이 얼룩얼룩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얼굴에 골 깊이 주름이 패여 멀리 인생의 황혼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도 깨달을 줄 모르는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곁을 떠난 이후로부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게 한 가지 일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의 그 불손종과 사악한 방종함.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져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예배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참된 본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 때문에 그 죄인을 돌아오게 하시는 그 일이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망가진 세상은 하나님이 한마디의 말씀으로 다시 고치시고 재창조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 그 사랑을 읽어버리고 죄와 불순종으로 망가진 인간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죄인들에게 회개라고 하는 수단을 주셔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덧붙이시기를 만일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라도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것은 천사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당신께로 돌아온다면 당신도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이 말도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습니까?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장소적인 뜻이라기보다는 이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땅히 베푸실 수 있는 그 큰 사랑과 은혜의 특권들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약속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능자가 되셔서 그들을 시련과 억압 속에서 구하시고 고난과 위기 속에서 그들을 지키시는 바위가 되시고, 그들이 피할 산성이 되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서 그들 가운데 살아계신 여호와가 실제로 계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았던 그때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무엇인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게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뭘 잘하면 잘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동안에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범죄 한 이스라엘 명백히 범죄 했기 때문에 이제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심판에 대해서 예고를 하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의 음성은 또다시 마지막 기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게로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래서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 어떤 과거를 지니며 살아왔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다시 시작하자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 시작하자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주 세밀하게 생각하면서 이 본문을 보면 무엇이 보이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 회복하기 어려운 정도의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능욕하며 제사의 제도는 살아있지만 그 정신을 모두 짓밟으면서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새빨갛게 범죄한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근데 지금 주님의 관심은 이들의 당신 앞에 죄를 지으며 살아온 이 과거의 수많은 잘못에게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혹시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까, 거기 있는 거예요. 제 말 이해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반복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날 동안 범죄 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더러운 죄의 오물들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맞아야 마땅합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들이 지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죄 그게 아니라 혹시 이들이 지금 돌이키지 않을까 거기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거예요. 이럴 때 있잖아요.
(예화)어린 아이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싶어요. 그냥 줄 수가 없어서 이미 마음속에는 주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문제를 이미 낼 때, 알아맞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요. 그런데 이걸 주면서 계속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자꾸 힌트를 주는 거예요. 결국은 알아맞히게 하려고 그래서 알아맞힌 기쁨과 그 마음에 알아맞힌 자에게 주는 이 상품도 함께 주려고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래요. 그래서 솔직히 어떤 때는 성경을 쭉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냐 하면은 하나님이 자존심을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어떻게 하나님이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화날 때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저렇게 까지 하셔야 될까 라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에요.
(예화)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옛날에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심방을 죽 하셨습니다. 제가 모시고 인제 여집사님 권사님들하고 모시고 다녔습니다. “오늘 점심은 어디로 가나” “아무개 집사님 그 집으로 갑니다.” 그랬더니 길거리에서 그 할아버지가 벌컥 화를 내시는 거예요. “너희들이나 가라 난 안가. 내가 그 집에서 배알도 없이 밥을 먹으란 말이고” 무슨 사연인고 하니 교회에서 험한 말을 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이었어요. 떠났는데 잘될 리가 있어요. 죽도록 터지고 돌아왔는데 아마 하나님이 넌 그래도 그 교회로 가라 그랬었나 봐요. 기왕 돌아 올 것 같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면 비겁하게 굴지 말고 떳떳하게 목사님 찾아가서 무릎 딱 꿇고 목사님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이런 이러한 누를 끼쳤고 이랬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갔고 사실 목사님도 싫어했습니다. 나가서 몇 달 살고 보니까 그 길이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길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 주님이 보내주셔서 다시 왔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정말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이제는 진실한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신앙생활해서 문제없잖아요. 근데 슬며시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미안하니까 다른 사람이 하게 되어있는데, 자기가 나서가지고 이번 심방점심은 자기가 해주겠다고 그러니까 화해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밥을 채려놨으니 이게 유교사상 체면, 체통을 강조하는 이 양반목사님이 화가 벌컥 난거예요. 그래가지고 또 뭐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분만 그렇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분이나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네가 정말 나와의 화해를 원하느냐 돌아오겠다고 하는 네 말이 진실이냐 네가 나에게로 돌아오면 나도 너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이전에 제가 지은 죄는 어떠합니까? “야 그게 문제가 아니다. 네가 나에게로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러면 내가 너를 용서해주마.”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르게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반듯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 같으면서도 곤고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주일은 빠집니까? 십일조를 거릅니까? 헌금을 안 합니까? 구실을 안 합니까? 뭐 빠지는 게 없습니다. 살아온 과거도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너무도 곤고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오히려 십일조도 떼어먹고, 교회도 불규칙하게 들쑥날쑥 하면서 범죄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지금은 마음속에 깊은 기쁨과 환희를 느끼면서 살아가요. 그 뭐 때문이에요? 몸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마음도 돌아온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오며 주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온 것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결국은 우리는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지금 사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들은 회개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 나 같은 죄인 위해서 아들 예수를 못 막은 그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해서 우리의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되고 고난과 위기 속에서 주님과 함께함을 경험하는, 그렇게 빛 가운데서 살고자 하는 사람 정결한 그 속에 신령한 빛이 깃들이는 그러한 성도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안 돼는 것입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추상적입니다. 그죠? 이렇게 예를 들자면, 기도의 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어요. 그리고 “자기를 죽여.” 그러면 금방 안다고, “아 그렇구나. 내가 살아 있구나. 그래 맞아. 내가 죽어야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고 근데 기도의 은혜가 다 사라진 사람한테는 “가난해져라 가난해져” “지금도 돈도 없는데 뭘 또 자꾸 가난해져라 그러나.” 그런 생각하는 거 “죽어 죽어지라고 죽어져” “말마 지금도 죽을 지경이야” 모든 게 추상적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그 질문하는 거예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어떻게 하면 주께로 돌아가리이까” 그러니까 주님이 그것까지 친절하게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11절에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 이 절 설교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구요. 근데 그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 그러고도 어떻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너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느냐” 왜 십일조를 떼어 먹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께 바쳐야 될 그 예물들을 착복한 이유는 무엇 때문에, 그것 간단해요. 하나님이 우습게 보이고 자기가 대단하게 보였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심,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것들을 바치지 않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십일조 다 할 겁니다. 우리 교회처럼 열심히 십일조하는 교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십일조뿐입니까? 자기 사랑의 끝이 돈이 아니에요. 네? 아낌없이 퍼주면서도 그 수많은 재물보다 더 소중하게 똘똘 뭉쳐서 가지고 있는 보화를 안내려 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아집, 그 잘난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 그리도 내가 모태 신앙인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수많은 세월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상한 신앙의 덩어리가 되어가지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져 있고, 은혜 하면은 자기가 한 가닥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 성경 하면은 자기가 뭔가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이제 가르쳐야 된다는 사상, 신앙 그러면 나한테 와서 물어보라는 사상, 이런 사람들은 돈은 하찮게 생각을 해도 그런 인간의 아집, 자만심을 돈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이기심의 발로요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거예요. 여러분들 정말 깨뜨려지기 원합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부스러지기를 원합니까? 상한 심령이 되기를 원합니까? 깨뜨려지고 부서져서 무너지고 파멸되고 완전히 부서지기를 원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합니까?
(예화) 얼마 전에 기존 어느 교회에 목회하러간 동역자를 만났습니다. 만나서 서로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면서 내가 그랬습니다. “많이 변합디까?” “죽겠어요” “장로님들은 변했습니까?‘” “아니요.” 아주 자신있게…
뭡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금보다 귀한 것, 어쩌면은 생명보다 귀한 것 그게 뭘까요? 목회자로써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학위보다 더 귀하고 생명보다 더 귀하고 지식보다 더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매일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마음, 주님의 그 큰 사랑은 날마다 새롭게 때문에 그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 사랑 앞에서 자기와 같은 이 부족한 인생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면서도 고귀한지를 깨달아서 난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만 높으시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마음.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그 끝없는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는 그 마음이 마치 어린아이를 생전 처음 대공원에 데려간 것처럼, 이 풀밭 저 꽃밭 저 들길을 뛰어다니면서 만나는 장소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부모의 손을 놓쳐도 관심 없고, 친구들과 떨어져도 상관없이 취한 듯, 그 공원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마음이 없이 그 인생이 산 것이 산 것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내게서 가져가셔도 그것만 언제나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택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못 전하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전할 수 있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다 죽으면 나보다 더 위대한 일하고 죽을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이루지 못하는 그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도록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런 마음을 가진 나 때문에 전혀 합당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여러분 매일 깨뜨려지고 있습니까? 정말 순간순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느냐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데 장로면 뭐하고 목사면 뭐합니까? 안수집사면 뭐하고 제직이면 무슨 필요가 있느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직분과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것도 다 세상 영광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고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이해하면 얼마나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얼마든지 우리는 이기심이 동기가 되어서 똘똘 뭉쳐진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기를 싫어하고 불량이 낳은 생각으로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며 살아갈 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해도 늘 깨어지는 사람들. 한 발짝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는 마치 3,4킬로미터 주님께로부터 도망한 죄인처럼, 가슴 아파하고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로 돌아오는 사람들. 잠깐 하나님의 집에서 외출했는데, 마치 가출한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자기의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제의 기쁨을 능가하는 오늘의 감격이 있습니다. 지금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깨어지는 삶을 통해서 내 힘과 결심은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쉽지만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겁니다.
나는 초부터 시작을 해서 여러분 모두가 이런 마음을 유지한 상태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교회당을 버리고 빈들에서 천막을 치고 목회할 수 있습니다. 거기가 더 행복할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향한 그 불붙는 사랑을 알게 하실 때 그 사랑 때문에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자기가 몸은 하나님께 있었지만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 때문에 마음 쓰라려 하면서 깨뜨려질 수 있는 사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 상한 심령이 되어서 오로지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삶들이 드리는 예배는 거기가 초막일지라도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기뻐하실 것이며 돌아오는 당신의 자녀들을 인하여 미소를 머금을 것일 겁니다. 하나님이 일단 우리를 향해서 기뻐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은 당신의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서 표를 내지 않고는 견디실 수 없는 분이예요. 조금만 누구 사랑하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티를 내시는 분이예요. 그를 축복하시고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그래서 당신이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언제나 깨뜨려지는 사람들의 부서지는 마음이 있는 예배, 목사가 되어서도, 장로가 되어서도, 총회장이 되어서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예수 죽인 죄를 짊어지고 주님이 맡기신 교회를 위하여 상한 심령으로 어찌하면 정말 이 긴 세월 살아오는 동안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고,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를 통해서 주님의 모습과 향기가 더 사람들에게 번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그래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부서질 수 있는 사람 그 부서짐.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속에서 발견된 사람. 그래서 죄를 피해서는 완전히 죄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죄가 수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패역을 심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그 호미질 앞에서 도저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그러한 정결한 성도의 삶. 그래서 혈기도 죽고, 자기 의도 죽고, 교만도 죽고, 고집도 죽어서 나는 날마다 죽고 주님은 날마다 사셔서 그래서 기쁨으로 가득 찬 그러한 교회. 그것이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겠냐는 이 말씀입니다. 근데 왜 그런 일들이 왜 안 일어나느냐? 이기심 때문이에요. 자기에 대한 사랑, 자기의 소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물질에 대한 사랑을 여기서 지금 예시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일들 사랑의 뿌리에서 돋아난 한 가지 가지에 불가한 거예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자기 사랑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한 뿌리에서 수많은 악권의 죄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온갖 탐욕과 정욕과 죄악과 우상숭배와 시기와 분쟁이 자기사랑에서 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깨뜨려짐이 있겠느냐는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다스리는 교회가 동물농장이지 그것이 교회냐 이 말이에요. 정말 우리는 이런 자기사랑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사랑을 못 박아야 합니다. 안일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범죄자로 살인자로 낙인을 찍히시고 흉악한 죄인들과 함께 동무가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죄 없는 그 분이 흠 없이 사셔서 일평생 자기의 모든 것은 나누어 주신 그 분이 왜 그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범죄자와 함께 살인자와 함께 동무가 되어서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치욕스런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보다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유 그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선지자는 우리에게 아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일조 내라 그리고 돌아와라 이거는 십일조 자체만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불순종의 뿌리가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들을 다 용납하고 한풀 접고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용서고 죄는 죕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저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물질이 아까워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 마음,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이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무리 크고 놀랍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기 사랑의 사슬을 끊지 않고는 그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로 오셔서 보시면 뭐라고 말하실까요?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뒤집으실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주님 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는 것으로 나타날까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매달려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눈물과 부르짖음이 적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그 삶을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교회 출석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다면 그것도 자기사랑입니다. 못 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아껴서 내가 얼마나 잘 되겠는가 하고 못 박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사랑을 못 박는 사람들, 그 못 박음과 함께 당신께로 돌아오라 그 길은 쉬운 길입니다.
(예화)어느 영화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도망가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워서 배에다가 모두 묶어났습니다. 배가 난파 되었을 때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몸부림을 쳐서라도 그 쇠사슬을 끊은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사랑의 쇠사슬을 끊지 않고는 늘 우는 모습을 하고 늘 기도하는 모습을 해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돌아갔으면 하는 희망이 아니라 돌아가리라 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지난날 불순종하며 살아왔던 그 모든 과거의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돌아올 때에 그들이 행한 일들은 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들이 당신 품을 떠났다가 이제는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과 이제는 당신과 함께 영원히 있기를 원한다고 하는 사실이 그것이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