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녹취자: 이보배
사도가 로마서 10장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주권에 대해서 말합니다. 결국은 순종하는 자들도 있고 불순종하는 자들도 있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방의 사람들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11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만물은 주께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불구하고 유리창 하나 사이에 두고 하나님이 않 계신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주권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그 주권 안에서 모든 인간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모든 존재들 뿐 만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피조물이 그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말하면서 형제들아 부릅니다. 누구를 부르느냐 하면 믿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아 이것이 주권 앞에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면서 형제들아 그러는 것입니다. 복종하고 순종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면서 이제는 형제들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니까 형제들아 이것이 바로 너희들이 드릴 진정한 영적예배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2절에서 그러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을 드리는 진정한 영적인 예배가 가능해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 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시대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원리가운데 하나는 사도는 예배에다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다 말하면 제사로 비유합니다. “그 제사로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너희 자신이 재물이 되어야한다. 너희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연보만 드리지 말고 먼저 자신을 먼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얘기하는데 “그것이 너희를 먼저 드리고 자신을 주께 드리는 사람이 헌금을 내지 않겠느냐?”라고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은 사실은 사도가 문득 “너희 자신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재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리는 진정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주님자신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가장 훌륭한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인데 그럼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영적인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느냐 한다면, 우리 자신이 아무리 우리 편에 서서 대답을 한다고 해도 쉽게 아멘이라고 말 할 수 가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몸을 드리는 거룩한 영적인 예배로서의 삶을 못살고 있습니다.
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으면 그다음에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받은 그 정신대로 나아가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 들이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가 신령하게 드려야 만이 좁은 의미의 예배를 신령하게 드려야지만 넓은 의미의 예배를 신령하게 드릴 수 있는 힘을 우리들이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순환관계인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벽을 쳐가지고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위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며 사는 사람의 삶이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데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런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만물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그 하나님이 자신들의 주인인데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자기의 주인에게 하는 것을 보십시오. 세상이 주인도 아니잖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자기 월급 주는 사람인데도 그 자기에게 자기가 삶을 의탁하고 있는 그런 상사들에게 하는 것들을 보라 이거죠. 신하가 나라의 임금에게 하는 것들을 보고, 그리고 관리들이 상관에게 하는 것 들을 보고 또 상급자에게 하는 것들을 보고, 또 직원들이 회사 사장에게 하고 자기위에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섬기면서 자신을 드리면서 사는데 그런데 그 모든 이들을 보내시고 그리고 모든 권세의 주인이신 하나님아버지 그 모든 나라와 그리고 온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형제들조차도 하나님에게 진정 자신의 몸을 드리는 영적인 예배로서의 삶을 못 삽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가 형제들아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주님의 주권을 말한 다음에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며 살아야 되는 사람인데 사실 그렇게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은 오늘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오늘 우리들이 2절을 가지고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도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영적예배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 가장 커다랗고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이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라고 말합니다. 항상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심각한 도전과 위협이 되었던 적수가 무엇 이었는가 하면 이 세대입니다. 주님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늘 그 시대는 항상 그 시대의 흐르고 있는 정신 그 자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세대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시련을 주는 시대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하지 않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마음의 욕심을 따라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아서 옛날의 믿지 않던 인생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의 삶의 방식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맛을 잃어가면서 세상 속에서 섞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대를 자꾸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제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고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에서 하는 것은 원래 의미대로 무슨 말 인가 하냐면 요 앞에 가면, 붕어빵을 팝니다. 그 붕어빵을 잘 사먹었습니다. 내가 자주 가니까 나만 가면 하나씩 더 줍니다. 나는 이제 목사라고 얘기 안 했습니다. 목사가 가서 풀빵 사먹는 것도 그렇고. 목사 된 다음에는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근데 할머니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우리 붕어빵은 딴 집 붕어하고 다릅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돌아다니면서 붕어빵을 사먹은 다음에 마지막에 우리 집에 옵니다. 우리붕어가 제일 노랗고 맛있습니다.”라고 이게 밀가루국물을 갔다가 부으면 다 붓는 것 같아도 기술이 필요 합니다. 어떻게 굽나 봤더니 틀에다가 놓고 이 밀가루 국물을 타서 주욱~~ 붓습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팥을 ‘툭’ 집어넣으니까 몇 분 지나면 이렇게 줄 줄 줄 흐르던 밀가루가 거기 들어가고 나면 진짜 붕어가 되어서 나타납니다. 몇 분 지나고 나면 금붕어가 탁~~되어서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본받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헬라어 원래 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틀에다 놓고 ‘탁’ 찍어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찍어내지 않습니까? 차깍, 차깍, 차깍... 찍어 낸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 믿고 결혼적령기가 된 처녀들을 한 번 100명 모아놓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계를 내 봅시다. 그러면 뭘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시집갈 궁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골라서 시집가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만 신실하고 좋으면 그러면 지게라도 같이 지겠다는 그런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그거는 드라마 같은 것을 보기를 좋아 하고 소설 속에서 읽기를 좋아하지 자신은 그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여러분들을 틀처럼 찍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찍어내서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제품처럼 찍어내는 것입니다. ‘탈칵’ ‘탈칵’ 그렇게 해서 나이가 들면 붕어빵 찍히듯이 ‘찰깍’하고 찍히는 것입니다. 한 마리 툭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생긴 것도 틀리고 가문도 틀리고 교육의 정도도 틀리고 다 틀린데. 그러나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것도 똑같고 희망사항도 비슷하고 모두 다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고 신앙이 없고 결혼적령기 되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돈 많은 집 그리고 건강하고 돈 많고 자기사랑해 주고 그런 남자하나 만나가지고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이 아니겠느냐 이것입니다. 무슨 고상한 것을 찾으려고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한 번 결혼해본 사람이 초보운전보다 더 좋다.’ 이런 생각들이 전부 다 세상의 생각들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찍어내는 것입니다. 아주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가끔 보다 보면 20년 전이니까 74년도쯤의 영화를 봅니다. 그 때 보면 참 창피해서 못 보겠습니다. 칼라는 호떡처럼 크고 그리고, 넥타이는 여기 묶는데 주먹만 하게 묶고 짧긴 배꼽 위에 까지 올라오고, 머리는 이렇게 또 길어서 장발이고, 꼭 볼 때 남의 나라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제가 머리를 깎고 서울에 나가면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 하냐면 “북에서 왔습니까?” 간첩이냐 이것입니다. 왜 목사들까지도 머리를 기르고 다니던 시대였습니다. 신학교 교수들도 장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 신학교 교수들도 장발 이었다 말입니다. 지금은 누구도 머리 기르고 장발하고 나팔바지 입는 사람 없습니다. 그때는 나팔바지를 길게 해서 온 동네를 청소하고 다녔습니다. 애 하나 들어갔다 나왔다 지금 그러고 여러분들이 머리장발 하고 나팔바지 입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물건 나왔다고 합니다. 연구대상이라고 합니다.
안합니다. 그런데 왜 안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합니다. 불편해서입니다. 그 때는 그 불편한 것들을 잘 견뎠습니다. 경찰들이 가위하고 센티미터 자 가지고 거리를 누비고 다닐 때도 센티미터 자는 왜 누비느냐하면 처녀들이 걸어가면 세우고 스커트 길이를 쟀습니다. 왜 경찰도 밥 먹고 할 일도 되게 없습니다. 센티가 몇 센티 넘으면 경범죄로 처벌됐습니다. 아십니까? 알 리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머리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때는 답답했는데 왜 그렇게 잘 하고 다녔습니다.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딴사람이 안하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제일먼 저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그 사람을 좇아가면 선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세상이 우리를 찍어내는 것입니다. 다 쫓아가는 것입니다.
나이 어린 형제자매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잔소리하면서 “아이야. 옷이 상스럽게 그게 무엇이니?” 그렇게 욕해도 그분들도 옛날에 다 부모한테 그 소리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바로 세상이 그렇게 찍어내는 것입니다. 찰깍 찰깍 그리고 거기에 찍혀서 턱, 턱 턱. 제품들이 만들어 내지는 것입니다. 자 겉모습만 그렇게 사람들이 하고 다닙니까? 다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겉모습만 어머니든 할머니든 그저 머리 길면 볶아서 라면처럼 파마하고 다니는 걸 봤는데 언젠가는 머리가 흑인들 온 것처럼 쭉 쭉 뻗게 파마를 했다는데 무엇으로 했는지 쭉쭉 뻗은 파머가 유행입니다. 너도 나도 전부 다 그거 하고 다닙니다. 무슨 그 유행을 쫓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다 야단입니다.
우리같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몇 년 전에 입던 양복을 입으려면 촌스럽습니다. 그런 것들이 찍어내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찍어내는 줄 아십니까? 속에 생각을 찍어내니까 문제입니다. 예를 든다면, 저희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사실은 오늘날처럼 택시운전수가 여자를 태워가지고 납치를 하고 윤간을 하고 이런 복잡하고 끔찍한 일들이 사실은 거의 몰랐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외국에 영화들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우리들이 항상 이제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가끔 영화 보면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오락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속에서는 사실 사람 하나 죽으면 끔찍한 것인데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오면서도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찍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 들이 교회도 지배하고 신학교도 지배하고 직장도 지배하고 여러분의 가정도 지배하고 모든 것을 다 지배합니다.
요즘 볼 세도 별로 없는데 텔레비전에서 김수현씨가 쓴 드라마 한다고 해서 새파란 아이들이 엄마 아빠한테 반말 지껄이고 자기네 할머니 고모가 앉아 있는데 와서 쉰 세대라고 쉰 늙은이들이라고 하고 텔레비전에 마구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항감 없이 웃으면서 낄낄거리면서 그것도 나이 먹은 사람들이 끌끌거리면서 듣고 다 받아줍니다. 요즘 아이들은 다 그렇다 하는 것들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시대에 순종하면서 의식과 모든 생각들이 찍히는 것입니다. 찍힐 때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는 찍히지 않고 이 시대가 우리를 찍을 때는 순종하면서 탁 탁 찍혀서 붕어빵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규격화되어갖고, 그렇게 우리를 세상이 빚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를 찍으려고 할 때에 우리를 찍어서 똑같이 그렇게 틀 속에 집어넣어서 주조하려고 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강한 저항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길입니다. 저항하고 있습니까? 시대가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강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기다 비쳐놓고 그것이 옳지 않을 때는 시대에 물결이 그렇게 흘러가도 나는 거기에 야합 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제로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형제가 하나 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자기가 분명히 학교를 안 나갔는데 그래서 이 과목은 ‘F’가 나오려니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점수가 나온 것입니다. 그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출석을 안했는데 점수가 나왔다고 했답니다. 근데 교수는 출석을 했는데 점수가 않나왔다고 하는 줄 알았답니다. 교수가 왜 점수가 안 나왔냐고 보는데 이때서부터 이때까지 안 나왔는데 친구들이 대신 대답을 해 줘서 점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것 들이 시대에 찍히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붕~~ 하고 차를 타고 가는데 경찰이 차를 세웠습니다. 속도계를 들이 대면서 경찰이 “선생님 속도위반입니다.” 그러니까 운전하는 “사람은 얼른 끊어 주세요.”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경치가 너무 좋아서 조금 밟았는데 사실 속도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한 번 봐 주십시오!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나부터도 그러지 않습니까? 사실 나부터도 이 경찰이 “그러십니까? 봐 드려야죠!” ‘아, 봐 주려나 보다.’ “면허증 좀 보여 주세요.” “아저씨 점심값이나 주세요.” 그 때 돈을 준다면 세상에 찍히는 것입니다. 그 때 뭐라고 합니까? “스티커를 끊어 주세요.” 이게 그 시대의 틀에 안 찍히는 것입니다.
누가 속도위반으로 걸렸는데 경찰이 봐 주겠다는데 오천원주면 될 거를 그거 걸리면 오만원이나 벌금을 내는데 부정직하다는 이유로 “끊어 주세요. 내가 당신에게 뇌물을 줄 바에야 스티커를 발부받고 내가 국가에 헌금 하는 것이 낫겠소.” 하고 주머니에 넣고 올 때 세상에 찍히지 않는 것입니다.
짐바브웨인가 거기서 선교사들의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믿는 자 들의 새로운 운동이 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불법이 판치고 개발도상국이니까 뇌물과 부조리가 심한데 어느 정도 심한상태인가하면 주민등록을 떼러갔을 때 돈을 주지 않으면 떼 주지를 안을 정도로 거기서 예수를 믿고 회심한 사람 몇 몇이서 세상이 이래서 안 되겠다 하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회보를 만들었는데 뇌물을 받지 않는 창구 이름을 적어서 ‘아무개 동사무소 호적담당 몇 번 이름 아무개 아무개교회출석’, ‘아무개 동의 복지후생 담당 몇 번 창구’ ‘이름 아무개 아무개교회출석 집사’ 이렇게 해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파문이 일었습니다.
이것이 시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다는 것은 수동적인의미가 아니라 저항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 없다.’ 그러면서 그 시대가 자신을 찍는 것을 ‘싫다’하고 강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 시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 하는데 세상은 원래 그렇습니다. 세상은 진짜 머리가 하야 질 때 까지 아무리 날을 새면서 기다려도 세상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던 시대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고 그리고 불법한 것들을 쫒아서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있는 물결을 거슬러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하는 모든 것 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니다.’라고 거절 할 수 있는 저항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화) 지난번에 의사들 모임인 수련회에 갔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산부인과를 갔는데 푯말이 적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오시는 환자분들께 알려드립니다. 낙태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범죄입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낙태를 취급하지 않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산부인과 차려놓고 낙태를 하지 않는다면 돈을 벌겠습니까? 그것은 변호사가 변호사 사무실 차려 놓고 법원에 드나들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거 해가지고 산부인과 돈 버는 거 아닙니까? 성경이 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절해야 합니다. 깡통을 차더라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시대에 틀에 찍히기를 거부하면서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하나님께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하나는 그렇게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세상이 우리로 말미암아 변화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썩었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얘기하는데 예수 믿는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자신 있게 썩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지 의문입니다.
옛날에는 전기가 엄청 귀했습니다. 독재정권과 투쟁하기로 유명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님이 강단에서 이 불의한 독재정권이 무너져야 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소리소리 질렀는데 죄송하게도 강대상에 들어오는 전열기히터하고 사택에 들어오는 히터가 계량기를 통과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도전이라고 합니다. 바깥에서 따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욕하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선 자신이 그 시대에 틀에 찍히기를 거절해야 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붕 타다가 “속도위반입니다. 봐 드릴까요?” “싫습니다. 끊으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도 그 시대에 찍히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됩니다. 그 때에 이 시대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것 이라는 기대를 세상 사람들이 갖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영적인 예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틀에 찍혀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공무원들은 뇌물을 받고 이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거절하며 그 시대의 틀에 그렇게 찍히기를 거절해야 된다고 성경이 먼저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인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인 예배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어야 그것이 그가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뀌고 변화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천만금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사람이 바뀌면, 새 사람이 되면 새 인생이 그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많은 재물이 주어지면 그 인생이 더 불행해 집니다. 바뀌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많은 권세가 주어지고 권력이 주어지면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이 더 불행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사람이 변화될 때 그 변화는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된 삶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영적인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하고 그래서 그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더 깊고 살아있는 관계를 누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며 가야 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애써서 포도를 비싼 돈을 주고 사다가 깨끗이 씻어서 알알이 따서 항아리에 담고 설탕을 넣고 뚜껑을 닫고 포도주가 익을 만한 곳에 두었습니다. 일 년 쯤 지난 다음에 뚜껑을 열었는데 포도는 포도대로 돌고 설탕은 설탕물대로 돈다면 여러분들의 그 모든 노고가 얼마나 가련한 것이 되겠습니까? 변화되어야 됩니다. 아무것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 물속에 들어 있다가 그 설탕하고 섞인 포도는 무슨 맛으로 먹겠습니까? 싱싱한 것도 지금 배부른 판에 뭐 하러 먹겠습니까? 변화되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던 것처럼 포도즙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일단 변화하기만 하면 완전히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다른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질적인 완전한 변화가 오게 되면 다른 인생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영적인 변화입니다. 그 변화 없이 신앙생활이 바뀔 리가 없습니다. 삼년 전 삼년 사년이 흘러도 여전히 똑같은 변화 받지 못하고 젊은 시절에 하나님 믿는 일에 게으르고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친구들 쫓아다니면서 즐겁게 놀던 사람이 나이 먹어서 변화 받지 못하면, 젊어서는 그래도 스키나 메러 다니고 모터보트나 타러 다녔지만 나이 먹으면 기력도 없어서 화투장 패나 뜨고 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 받지 못하면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람의 삶이 똑같은 것입니다. 젊어서는 젊음을 즐기기 위해서 돈과 쾌락을 쫒고 나이 먹어서는 안정을 얻기 위해서 돈과 쾌락을 또 찾는 것입니다. 그런 삶과 단절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영적인 변화입니다.
몇 달 전에 서대문교도소에 가서 죄수들한테 설교를 하는데 대단했습니다. 아무개 장로님 나오셔서 기도해 주시겠다는데 기도가 살아 있습니다. 외부에서 기도해 주러 왔나 했는데 파란죄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뜨겁게 잘 하는 사람들이 왜 감옥에 들어와서 죄수복을 입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거기에 있는 교도관 말하기를 목사님 여기 와서 예수 믿는 직분 자는 대부분 들어올 때 수표 부도나서 들어오는 사람이 90프로가 되고 완전히 날라리로 들어와서 변화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지존파 살인범(김현향)입니다. 사람을 죽여서 사시미회 뜨듯이 포를 떠서 석쇠에다 구운 사람 아닙니까? 인간입니까? 인간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만 사명감을 갖고 전도하는 어느 여 집사가 있었습니다. 정말 귀합니다. 사형이 확정되어서 전도를 하는데 처음에는 씨도 안 먹힙니다. 자기네들 끼리 여자는 엄마도 믿지 말라고 하는데 어느 여 집사가 와서 전도한다는데 믿겠습니까? 그러더니 그 마음이 돌아서서 나중에 편지를 썼는데 복사해서 보여줬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젊고 귀한 날을 무지막지 하게 살았는지 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뭔가 눈에 씌운 것이 분명하지 정상적인 생각으로서는 그런 인생을 살 수가 내가 그래도 주님이 나를 계속 그런 불의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모르다 편안하게 죽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잡히게 만들었습니다. 사형수가 되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게 하니 집사님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면서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I was blind but now I see.”
예전에는 눈이 멀었었는데 지금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게 원래 가사입니다. 이전엔 내가 눈이 멀었으나 이제는 눈이 뜨게 되었습니다. 그 시를 쓴 사람도 뭐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냐면, 아프리카 가가지고 총 들고 가가지고 망태기 들고 가가지고 들입다 총 들어 쏘면서 산책 나온 토인들 잡아다가 미국에 갔다 팔아먹는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악질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된 것입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 ‘예전엔 내가 눈멀었으나 이제는 내가 보게 되었나이다.’ 그런 영적인 변화가 바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변화입니다. 그런 영적인 변화를 받지 않고는 우리 신앙생활에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예수를 믿어서 교회에 나온다고 변하는 게 아닙니다. 뭐가 변하였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다 만약에 아마 여러분들이 김목사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을 위에서 뚜껑을 딱 열고 마음을 확 볼 수 있는 그런 어떤 그 말하자면 망원경을 하나 주셔가지고 그 새카맣게 표시가 된다면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기겁을 하고 두 번 놀랄 것입니다. 한 번은 뭐냐 하면은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다니 한번 놀랄 거고 두 번째는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그 속에 있다니 하고 두 번 놀랄 것입니다.
진정한 심령에 변화가 오지 않으면 그러면 신앙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심령의 변화를 받으라고 성령이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아주 심각한 요구입니다. 이거는 그냥 권고하는 게 아닙니다. ‘얘들아 너희가 심령의 변화를 받으면 좀 더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심령에 진정한 변화가 없으면 너희의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릴 수 없고 너희의 인생이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서의 삶이 아니면 너희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라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변화와 가족의 영혼의 변화와 그리고 자녀들의 진정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변화를 받아야 된다.’ 어떻게? 우리의 영혼의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 말씀을 우리가 깨달으면서 우리가 진정한 영적인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없는 영혼의 변화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한 것만 녹음을 해도 수백 개 테이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못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영혼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영혼이 상한 심령이 되어서 주님 앞에 썩어가기 전에 먼저 눈빛이 시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는 그런 눈빛들이 시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된 빛과 소금으로써의 맛이 가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미각이 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말씀답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말씀 속에서 깨닫는 것을 즐거워할 줄 모르는 무지몰각한 사람들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이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깨닫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깨닫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 그 때 우리는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를 수없이 깨닫게 하셔도 그것가지고 변화가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의 마음을 새롭게 하라.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마음은 우리가 새롭게 해야 합니다. 각오를 하고 뜻을 세우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2000명인데 앉을 자리가 160자리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신문을 깔고 앉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어떻게 추첨을 하는지 뭘 하는지 뽑아가지고 데리고 옵니다. 그러니까 못 들어온 죄수들은 이쪽에 밥그릇하고 숟가락을 철창 밖으로 내밀고 ‘시작’하고 그리고 막 두드린다고 합니다. 이제 데모합니다. 거기서. 나도 못 가봤는데 하여튼 막 두드립니다. 찌그러져하고 두드립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백 명이 그러니까 어떤 소리가 나겠는지 한번 점심시간에 실험을 해보십시오. 그러면은 그 주동했던 사람들은 잡아다가 또 쥐어박고 그럴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얻어맞고 독방에 들어가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나오고 싶어서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열한 경쟁을 뚫고 2000명 가운데 160명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눈빛이 달라집니다. 눈빛이 다릅니다. 왜? 얼마나 거기를 자유롭게 걸어가지고 올 수 있는 일주일에 유일한 시간 아닙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모하면서 오겠느냐 말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한번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 인생에 있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유일한 기회다.’ 새로워지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정말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하나님 앞에 나와 보십시오 우리 부흥회 했지 않습니까? 부흥회 했습니다. 그리고 또 4월에는 십자가 사경회를 할 것입니다. 강사가 바뀌었습니까? 장소가 바뀌었습니까? 뭐 아니면 무슨 여러분 다 아는 얘기지만 내가 무슨 사경회라 그래가지고 뭐 산속에 들어가서 특별히 설교준비를 뭐 옛날에는 그저 슬슬 하던 거를 사경회 때는 그냥 꽉꽉 해가지고 그렇게 오는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경회 때는 사람들이 왜 와서 은혜를 받습니까?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새롭게 각오를 하고 오는 것입니다. 옷 입고 오는 차림새부터 벌써 다릅니다. 사경회는. 깨끗하게 딱 정장을 하고 와서 ‘오늘 은혜 받아야지’ ‘오늘 마지막 날인데’ 마지막 날은 뭐가 마지막 날입니다. 끝나고 그 다음 다음 날 주일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새롭게 하니까 사람들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고. 똑같이 기도하는데 왜 힘들게 헉헉 거리면서 땀을 흘리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기도가 잘 되는 게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신통력이 깃들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높아서 하나님하고 좀 더 가까워서 기도가 잘되는 것입니다? 63빌딩 올라가서 기도하면 응답이 막 불 떨어지듯이 떨어지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올라가는 동안에 뜻을 세우고 ‘하, 내가 기도해야지’ 각오하고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하고 그러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그 속에 기도할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읽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이고 또 그래도 6장씩 읽으면 테이프 교환권 6천 원짜리 주는데 없는 살림에 6천원이 어디여.’하고 성경을 읽으면 뭐가 들어옵니까? ‘오늘도 주님.’ 무릎을 딱 꿇고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일용할 양식을 안주시면 나보고 뭘 붙들고 살라는 말이옵나이까?’ 눈물로 기도하고 성경을 탁 펴면 그 성경이 그 성경이 아닙니다. 다른 성경이 내 마음에 다가옵니다. 다른 성경이 내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렇게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마음을 내가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믿으면 안 돼.’하고 한 번 머리를 흔들고 새롭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각오를 딱 결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게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그렇게 새롭게 출발하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 때 영적인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번 사경회 때 또 전혀 변화되지 않던 몇 사람들 변화되기 시작하잖습니까? 명예가 있으니까 내가 누구라고 말은 안 하는데 맨날 와가지고 졸거나 아니면 멍하니 딴생각 여기 딱 올라와서 보면 다 압니다. 누구는 계돈 생각하고 누구는 집에 두고 온 애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애원에 찬 눈빛으로 ‘목사님, 40분이 넘었습니다.’ 이것이 들립니다. 내가 다 들립니다. 그냥 ‘목사님, 시계 좀 보십시오.’ 걱정마십시오. 계속 보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귀에 들려옵니다. 왜? 마음에 변화를 새롭게 받지 못하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냐? 끝나고 집에 빨리 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빨리 온다고 해서 빨리 보내주면 11시 20분 전쯤 나와서 기도할 텐데 그런데 빨리 온다고 빨리 안보내주니까 이왕이면 11시 꽉 채워서 가자 그리고 11시 넘어서 꾸역꾸역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동네에 마트가 하나 생겼는데 배추 값이 한참 비쌀 때입니다. 그런데 동네에다 전단지를 확 뿌렸습니다. 그게 뭐냐면 선착순으로 천포기 배추가 들어왔는데 시장에서 5,000원, 6,000원 하는 배추가 단돈 천원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아침 9시에 문을 연다고 하는데 아침부터 나와서 줄을 서는데 나는 이게 무슨 배급 타는 줄인 줄 알았습니다. 쭉 서서있습니다. 그리고 문 열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침에. 그 배추 좀 사려고. 한 사람 앞에 두통씩 밖에 안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집안 식구들 다 데리고 와서 뒤에 줄서서 김장을 하려는데 그것을 싣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시 예배인데 11시 5분에 나오는 것은 무슨 심사입니까? 슈퍼마켓에서 배추 할인 판매 한다고 그래도 30분 전에 나가서 떨고 식구들까지 대동해서 깨워서 나가는 것이 돈 버는 거다 해서 조그만 애 까지도 데리고 나가서 줄 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했으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이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오다 차가 교통사고가 나든지 어떡하든지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매주 늦으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문제이지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허쉘 포드 목사님이 그랬잖습니까? 집사님들이 주일을 안 지키는 것입니다. 심방을 가서 왜 주일을 안 지키냐 물었더니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주일이 중요합니까?” 목사님이 눈이 동그래져서 “뭐가 중요합니까?” “아니, 성경에도 이르기를 짐승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에도 그놈을 꺼내야 한다고 하는데 농장에서 소를 하도 많이 기르니까 소가 구덩이에 처박혀서 살겠다고 낑낑거리고 있는데 그걸 두고 종소리를 듣고 내가 교회당에 가야겠습니까, 그놈을 꺼내야겠습니까?” 그러니 목사님이 “맞습니다. 집사님. 꺼내야합니다. 교회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그 불쌍한 짐승인데 거기에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주인을 찾는데 교회에 나오시면 안 됩니다. 꺼내셔야합니다. 근데 집사님, 자주 빠지면 팔아버리십시오.” 웅덩이에 자주 빠지면 팔아버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다 늦을 수는 있습니다. 근데 그것이 계속 웅덩이에 빠지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그게 전부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은 증거 아닙니까?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은 증거.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은 증거가 아니냐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변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속에 계속 누적되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집회를 갔습니다. 그 집회에 정말 영구대상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근데 어떻게, 어떻게 수소문을 해가지고 포항인가 어디서 강원도에 집회를 찾아 온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찾아 온 것입니다. 근데 그것도 일주일 내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하루만. 시간이 없어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못 받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못 받았겠습니까? 받았습니다.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요즘 돈 한 푼 가지고 벌벌 떠는 시대인데 그것을 설교 한편 들으려고 포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강원도까지 올라와서 듣고 새벽에 다시 또 되짚어서 내려가는데 그 딱 한편 들으려고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벌써 임하는 마음이 다릅니다. 왜 그러냐면 밑천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밑천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비행기 왕복표에다가 설교한편 들으려고 최소한 10만 원 이상 날렸습니다. 그러니까 늦게 와서 안면 몰수입니다. ‘창피는 잠깐이고 은혜는 영원하다.’ 그러고 탁 깔고 그냥 밀고 들어와 앞자리에 딱 좌정하고 앉아서 설교를 듣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스펀지에 빨려들어 가듯이 그냥 뒷사람이 받을 은혜를 내가 뺏을 수 있으면 뺏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앞에 앉아서 가끔 튀기는 침까지 받아가면서 그냥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을 새롭게 각오를 하니까 이전에 안 들어오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걸 많이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신앙생활이 교회를 계속 다니면 어느 순간에 ‘쾅’ 하면서 불똥이 튀면서 신앙이 좋아지리라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 일어나는 것은 수 천 명 중 한 두 명입니다. 그 안에 들으리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마음을 새롭게 하고 각오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너무 웃기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내가 늘 설교 할 때면 하나도 듣지도 않던 애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대학생들이 모인 큰 집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거기를 쫓아왔습니다. 근데 거기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교회에서 만날 설교를 할 때는 듣지도 않고 시큰둥하고 고개를 위로 꼬고 앉아서 시계만 쳐다보고 있더니 어떻게 여기 와서 은혜를 받느냐? 공기가 좋아서 그러냐?”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가 “그때는 귀한 줄 몰랐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만날 들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을 안했습니다. 언제든지 가면 설교를 하니까 언제든지 가면 말씀을 들으니까 그랬는데 떠나가고 나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들으니까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그런 마음이 아니라 정말 그 마음을 새롭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리고 우리가 영적인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선하게 여기시는지 관심이 있습니까? 무슨 관심입니까? 그냥 나 좋은 대로 살아가면 신나는 것 아닙니까? 불편한 것은 다 나쁜 것이고 편한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신나는 것은 선이고 기분 나쁜 것은 전부다 악한 것입니다.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이 누구입니까? 자기 배입니다. 자기 배, 자기만족이 신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는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 가치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새롭게 되어져서 영적인 변화를 받아 신앙이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주님의 눈앞에 선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만날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 ‘우리 아빠는 돈도 없고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나서 나 해 보고 싶은 것도 못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갈까?’ 그러면서 투덜대며 살던 삶이 말하자면 변화를 받게 되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 내게 어떻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선이 내게 어떻게 아름다운 것이 되는가 하는 것들을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 주님의 선하심이 내 인생의 표준이 되고 기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를 버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선한 것이 정말 선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제는 주님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까 세상의 삶의 목표가 물질이나 명예나 세상에 있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기분이 제일 좋으냐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 같을 때, 그 때가 기분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그러니 뭐라 그럽니까? 나도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은혜 받은 사람들 다 똑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나도 너 안 부럽다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너 미쳤구나.”하고 말하니까 바울이 무엇이라 합니까? “그래 나 미쳤다. 내 소원은 너희들이 다 나처럼 미치는 것이다. 누구한테? 예수한테 미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선하신 뜻, 그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돈, 돈, 돈, 돈 하면서 돌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 인생의 분위기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게 되는데 세상이 계속 돌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함이 없는 재물, 뜬구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재물을 사랑하니까 사람이 신실하지를 않고 돈 사랑하는 사람치고 신실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순 거짓말입니다. 돈 사랑하는 사람치고 신실한 사람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약속 어기는 것을 떡 먹듯 합니다. 이리 말 뒤집고 저리 말 뒤집고 정신이 휙 돌 정도입니다. 못 배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삶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받으면 이전에는 주님이 좋아하시는지 불쾌하게 생각하시는지 신경도 안 쓰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아!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권사님, 집사님들이 모여 있는 선교단체인데 거기에 가서 설교를 하고나니 굳이 점심을 먹고 가라해서 갔더니 부대찌개인지 뭔지 3500원짜리를 시켜줬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것을 먹고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주님에게 기쁨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간단한 기도인데 앞에 있던 권사님이 “목사님, 그 말이 저에게는 너무 새롭고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뭐가 그렇게 충격적으로 들립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주님에게 기쁨이 되게 해달라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도록 사는 것이 쉬웁니까?” “어려우니까, 어려우니까 밥 먹을 때 마다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려우니까.”
주님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이 볼 때 너무 기뻐서 “네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나는 참 좋다.” “우리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참 좋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것, 그것이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분별할 수 있는 힘도 말하자면 눈을 가리고 있는 ‘was blind.’ 눈을 가리고 있는 이 비늘이 벗겨지는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나도 기뻐하게 되고 주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여튼 주님을 너무 기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떡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것을 너무 너무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시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사모함 들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이 하나님 앞에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렇게 영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영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싶어 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이 누구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요즘 TV에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는데 옛날에 자꾸 우리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할머니가 저를 김하고 고기를 하도 좋아한다 해서 김 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김하고 고기를 좋아하는데 고기를 먹을 기회가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진짜 먹고 싶을 때는 안사주고 언제 사주냐면 아파서 누워 있을 때 그 때 사준다는 말입니다. 그 때 이외에 누가 사주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이런 양푼에다 고기를 도살장에서 끊어다가 넣고 포대기를 덮고 고기 사라고 돌아다니는데 냉장고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불러서 사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아직 낫지도 못하고 너무 너무 아파서 누워있는데 너무 손자가 불쌍하니까 한 근을 끊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감히 볶아 먹겠습니까? 물을 한 솥 집어넣고 무를 잔뜩 썰어 넣고 푹 삶아서 줬습니다. 그런데 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어서 먹었는데 이게 통나무 조각 씹는 것 같습니다. 입맛이 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먹고 싶을 때 못 먹고 못 먹을 땐 먹으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도 이것이 우리 입맛이 싹 가버리면 그러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알고 싶지가 않습니다. 왜? 살고 싶지가 않은데 알수록 부담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불러다 놓으면 성경공부, 설교 듣는 것, 예배드리는 것 지긋 지긋 한 것입니다. 왜? 살고 싶지가 않은데 모르는 것이 약이지 계속 말씀 들어봐야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그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교회를 옮기려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설교가 너무 길다 그러고 별 소리를 다 합니다. 예배 시간이 길다 그러고 별 불평이 다 생겨나는 것입니다. 입맛이 간 것입니다. 짧아도, 짧아도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기 싫어합니다. 마음이 이미 굳게 닫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가 않고 자꾸 주님의 뜻대로 살기 싫은 사람보고 살라고, 살라고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뭐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꼭 살겠습니까? 가끔이라도 한 번씩 살면 그것도 하나님이 감지덕지 하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얼러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소망은 무엇이냐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죄악 가운데 있고 자신이 변화 받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는 이런 절박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얼마나 벼랑에 서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 그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웨일즈의 위대한 18c 부흥에 쓰임 받았던 결혼도 하지 않고 평신도로서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평생을 드렸던 하웰 헤리스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습니까? 주일날 와서 조는 것입니다. 설교도 뭐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냥 신나게 졸고 있는데 광고시간이 돼서 “이제 광고하겠습니다.”하면 그땐 탁 깹니다. 기가 막히게 깹니다. 그때는. 설교 시간에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자는 사람이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하면 번쩍 깬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깼습니다. 그런데 주보를 보면서 목사님이 광고 하시기를 다음 주가 성찬식인데 형편없이 사는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비수같이 와서 박힌 것입니다. 쾅! 나는 성찬에 들어갈 수 없도록 셔터 문이 내려져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날 저녁에 너무 너무 괴로우니까 견디다 못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지.’ 진짜 마음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종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 사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령을 물 붇듯이 부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사람이 변화됐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로서 웨일즈의 대 부흥에 주역이 됐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변화를 주셔서 각성된 사람들은 주님의 온전한 뜻을 알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가르침 받는 것이 고통이고 부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달고 그리고 아름답고 너무 너무 사모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이제는 대충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를 깎더라도 다듬더라도 내 소유를 잃어버리더라도 내 정금을 잃어버릴 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당하고 깨끗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사모하는 마음들이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변화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여러분 우리 툭 털어놓고 우리끼리 한번 얘기해봅시다. 1부 다이아몬드를 10만원씩 선착순 10명 줄 테니까 진로유통 앞으로 내일 10시까지 모이라 그러면 여러분 7시에 안 나가겠습니까? 난 나갈 것 같습니다. 나갔다 하면 그래도 몇 백만 원 버는데. 유아부실, 안 나갈 사람 손들어보십시오. 다 나가겠다고 그러잖습니까? 고개를 끄떡끄떡 하잖습니까? 다 나간다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변화를 받아야겠다, 변화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너무 짐스럽고, 변화를 받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여러분 거기서 살면 안 된다고 돌이키라고 외쳐도 마음에 감격 밖에는 생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안 살고 영적인 변화를 안 받으니까 오면 돈 내고 야단만 실컷 맞고 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단치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변화를 사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여기서 매 주일 아침 11시에 주먹 만한 다이아반지를 나오기만 하면 준다. 만약에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때도 여전히 나와서 이렇게 앉아있겠습니까?
사모하는 마음. 각오를 새롭게 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거기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켜 주신다면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바로 이런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고 우리가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영적인 변화를 받을 때 우리는 대충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보다 신앙생활을 형편없이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벌써 신앙이 뒤로 물러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온전케 하는 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처럼 살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 수는 없지만 부단히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사는 살아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와서 말씀 듣고 예배 길게 드리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 와서 열린 교회 다닌다고 자랑하고 이런 것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정말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마음으로는 우리가 영적인 변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 사경회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은혜 받은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내가 이전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가 ‘아! 내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변함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신실한 은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번 말씀을 통해서 정말 이번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 인생이 새로워지고 변화를 받아야겠다는 사모함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변화된 삶을 통하여 우리가 비로소 영적인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면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때 묻게 하는 모든 이 잘못된 생각과 사상들로부터 결별하고 날마다 새로운 각오와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씻고 씻어서 다시 세우십시오. 그 때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예배가 정말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