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돌아온 욥바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 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36-42).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욥바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큰 이유가 여기에 두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면 제일 먼저 도르가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마다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해 집니다. 다비다라고 하는 이름인데 이 사람이 도르가 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신실한 믿음으로 이웃을 위해 사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애를 썼던 이 사람도 결국 병이 들었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었는데 가까운곳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해서 불러 와서 갑자기 도르가라고 하는 신실하고 영향을 많이 끼치는 여제자가 죽었으니 당황한 마음으로 베드로를 불렀던것 아닙니까? 베드로가 왔더니 많은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면서 도르가가 평소에 저희와 함께 있었을 때 자신들에게 구제해 주었던, 직접 만들어서 구제해 주었던 겉옷과 속옷들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면서 도르가가 이렇게 오랬동안 우리 곁에 있으면서 사랑과 선행으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라고 하는 것을 베드로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르가의 섬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선행과 구제의 소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동네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도르가라고 하는 여인이 구제하고 선행하는 일이 아주 많았는데 그 이웃에게 한 좋은 일 가운데 한가지가 옷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그 재주로 옷을 만들어서 그래서 헐벗은 사람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안 나와있지만 인심 사납게 예수 믿는 사람만 주겠다 이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욥바의 헐벗은 사람들에게 힘 닫는대로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은 무슨 신문에 나거나 방송을 타거나 텔레비젼에 출연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안 여 제자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돌 보셨을 헐 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가 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성경을 복음서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잘 믿고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레네오스라고 하는 2세기의 교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면 사도요한의 제자이던 폴리갑이 있었습니다. 그 폴리갑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그러니까 속속 사도쯤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 분이 아주 대학자였고 니케아 종교회의가 에서 가장 괄목할만하고 정통적인 교리를 세웠던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경회에서 여러분에게 선보이려고 하는 세상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라는 이 교리도 사실은 기독교 역사상 그 분이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기초로 최초로 수립한 분입니다. 그 교리에 대한 자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힘들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래도 한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한번 최초로 풀어서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 되심의 교리를 한번 세워보려고 합니다.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 대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이 많고 논변이 많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잘 믿고 착하게 사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약을 하면 잘 믿는 것은 착하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착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도덕의 기준으로 착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착한 삶입니다. 그래서 그 착한 삶이 악한 삶에서는 나쁜 삶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핍박도 받고 박해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거짓된 세상에서 참된 사람들이 되어 빛된 착한 삶을 살아라 그 착한 삶은 우리 안에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개신교 사람들은 이점에 있어 많이 고쳐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전파가 자꾸 가로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이 도르가는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여제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이 세가지 의미로 씌여집니다. 마데테스라는 단어 인데... 첫째는 가장 넓은 뜻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르킵니다. 그것보다 약간 좁은 의미로는 어떻게 쓰이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자기의 업으로 삼은 사람들, 무슨뜻인가 하면 꼭 그사람이 전도자나 사도들이 아니더라도 예수님 시대때 예수님을 계속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0인의 전도대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고 예수님의 70인 전도대 속에는 들지 않아도 그렇게 생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고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를 부업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두번째 그룹이고 가장 좁은 의미로 쓰여진 것은 열두제자만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제자라고 하는 명칭이 제가 보기에 두번째에 해당하는 명칭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떤 으미에서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던 평신도들 중에서 그래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열렬하게 복음을 전하고 능력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그냥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평가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착한 삶이 있었기 때문에 욥바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때 하나님 중심을 떠나서 행하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 중심에 서서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을 떠나서 행하는 경우는 이런 것입니다. 연초에 김준성 목사님이 세배를 하겠다고 왔었는데 자기 동네에 교회 하나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성찬을 가지고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오는 사람마다 무조건 성찬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개념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것을 잘하면 맨 처음 교회 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적으로 비칠수 있겠습니까? 또 안산인가 어디에 있는 교회 하나는 교회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도 예배를 드립니다. 밑에 주일날 어디 가실분들 환영합니다. 이것은 서비스를 해도 너무 지나친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옆에 이런 교회를 세우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날 안 나와도 되는 교회입니다. 헌금만 통장으로 넣으십시오. 무슨 교회는 안 생기겠습니까? 그런것들은 선해 보여도 하나님을 떠나 선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을 끄거나 불을 꺼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가 되지 말고 그 빛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선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항상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맨 처음 개척을 할때 교회할 장소를 보러 다니는데 돈은 없고 세를 얻으려고 돌아 다니는데 한창 다녀보고 다니니까 그 다음에, 우리는 교회를 얏잡아 볼때 이층교회라고 하는데 굉장한 것입니다. 지하실에 살고 보니까 그 이층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인지 우리가 전도하러 다니면서도 길가에 있는 이층교회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 교회는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층교회를 할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디 지하엔가를 갔는데 가게가 나왔다고 하는데 한 30평 될까 하는데 세를 준다고 해서, 교회를 주는지 안 주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 보았더니 이쪽에는 이발소이고 이쪽에는 술집인데 우리가 가니까 주인이 뛰어 내려 오는 것입니다. 여기 가게를 얻으려고 한다고 하니까 여기 너무 좋고 여기는 손님도 많고... 가운데 가게 터가 있는데 시커머니까 양쪽에 있는 가게가 푹 죽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이발소인데 제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이발소가 아니라 퇴폐 이발소 입니다. 퇴폐할것 같은 여자가 나오고 저쪽에는 술집 아저씨가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한참 이야기 하다가 나에게 이 가게를 얻어 무엇을 하시려고 합니까 해서 교회를 하려고 한다고 하니 갑자기 낯이 싹 바뀌면서 교회는 여기 들어 오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거야 건물주 마음이지 당신 마음이냐고 하니까 이발소에 있는 여자가 뭐라고 하냐면 교회가 들어오면 우리가 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만난지 10분도 안 되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뭐하러 합니까? 그리고 자기가 먼저 주인에게 이야기를 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가 연락할 것이라고... 부동산 하는 사람하고...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이야기 해서 못 들어 오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못 들어갔습니다. 만약에 옆이 기독교 서점이었다면 우리 교회가 들어 갔을 때 얼마나 좋아 했겠습니까? 올바르게 자기의 빛을 드러내도 세상 모두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 믿는 너희 하고는 달라 예수 안 믿는 너희는 이단이지 잘못 믿는 너희하고는 달라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람이야 저런 사람이야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앞서야 할 것은 우리는 삶에 있어서 너희와 달라 그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착한 삶 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선한 마음을 품고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돕고자 하는 착한 마음, 이 도르가라고 하는 여제자가 이렇게 선행과 구제하는 일로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섬겼을 때에 결국 살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 오지 않았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욥바가 주님께로 돌아 오는 이적적인 역사가 나타 났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한번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한번 착하게 살아 봅시다. 안 믿는 남편에게 좀 더 착한 아내가 되고 신앙 약한 아내에게 더 착한 남편이 되고 또 신앙이 없는 우리 부모님에게 좀 더 착한 딸 아들이 되고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덕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그것이 복음이 전파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도대원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착한 전도대원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명감은 넘쳐도 그 사명감이 갑속에 든 칼 같이 잘 통제가 되어서 한번 전도하고 말 사람들이 아니라 매일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단정하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대해서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큰 은혜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베드로가 이 다비다를 기도해서 살려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줌으로서 우리 주님이 생사를 초월해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렇게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이 은혜의 역사가 되어서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끔 신앙심이 너무 불 붙는 사람들이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이 죽은 사람을 살렸다 그 다음에 25년 병 들었던 처녀가 죽었는데 우리가 철야기도 했더니 살아 났다 하는 황당한 소문이 있는데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야기 합니다. 사도시대때도 이런일이 일어 났으니까 지금도 동일하신 하나님 이신데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면 죽은자를 살려 주신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이 성경의 이야기는 두개의 해석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것은 전부 꾸며 낸 것이다. 죽는 사람이 살아 나는 일은 지금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옛날에도 있을 수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이성주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해석을 믿지 않고 이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사도들이 이 사람들을 살아 나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사도행전에 사도들의 역사에 죽은 자가 살아 났기 때문에 오늘날도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진짜 제대로 된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 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일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는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초자연적인 죽은자가 살아 나는 특별한 기적들은 주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복음을 인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그들에게 허락하시는 초자연적이고 단세대적인 권능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나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 하고 여태까지는 이 하나님의 계시가 묻혀 있었는데 내가 이제 새롭게 해석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역사적으로 늘 불건전한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린것 같은 기적을 일으켜서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 믿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 보다 더 훌륭한 것들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오늘날 이러한 사도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계시의 말씀을 올바르게 잘 전해 줄때 그들이 그 말씀의 찔림을 받아서 주님께로 돌아 오게 되는 기적과 같은 은혜의 역사는 영혼이 다비다처럼 죽었을 때 다시 살아 나게 되는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어찌하여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 나는 것만 못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전도를 잘 하는가 하면 영혼이 죽었다 다시 살아 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전합니다. 올 한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저는 교회가 이렇게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난 교회 그리고 죽은 영혼들이 다시 살아 나는 은혜의 역사로서 주님을 많이 믿게 되는 그런 한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을 위해 섬기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