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들만 가까이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죄인이라 낙인이 찍히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을 보면서 당시의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비유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입니다.
이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라고 하는데 백 마리의 양을 기르던 어느 목자의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유목을 많이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 짐승들을 데리고 목초지가 있는 곳을 다니며 풀을 먹이고 그래서 자신의 산업을 일구어갔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목자는 백 마리의 양을 먹이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백 마리의 양을 데리고 먹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은 매우 가난한 축에 속하는 그런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양떼 백 마리를 데리고 목초지가 있는 곳을 가서 풀을 먹이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서 이제 다시 그를 한번 세어보니까 백 마리가 풀을 뜯으러 나갔는데 사실 세어보니까 아흔 아홉 마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 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를 거기에 두고 안전하게 두고 한 마리를 찾은 목자의 이야기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때는 아마 저녁때쯤 되었을 것이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그 양을 잃어버렸는지 잘 알기도 어렵고 또 그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할지라도 혹시 험한 길에서 만약에 이 목자가 넘어지든지 하면 양 한 마리를 찾는 것보다 손해를 입을 수도 있었고 심하면 강도를 만나서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자는 한 마리의 찾아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 한 마리가 당시에 얼마나 했는지 잘 모르지만 요즘에 양 한 마리가 얼마나 되는지 며칠 전에 호주에 갔을 때 물어보았더니 우리나라 돈으로 약 14만원 정도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양 한 마리 값을 생각한다면 사실 목자가 그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자는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목자의 마음을 그들에게 공감 있게 소개하심으로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목장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비유에 보면 목자의 마음을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 마음이 잃은 양을 찾는 마음입니다. 이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은 양 한 마리의 가격을 염두에 두어 찾는 마음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이 얼마나 아까울까. 벗겨 팔면 털이 몇 푼이고, 달아 팔면 고기가 얼마인데 그렇게 계산을 했기 때문에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이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은 그 양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 마리의 양을 목자가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하셨기 때문에 있는 사람입니다. 만물이 원인이 없이 존재할 수없다는 것이 과학이고 그 과학적인 추론의 끝은 존재로 갑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 존재의 상태에서 존재하게 된 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치이지만 성경은 우리가 반문하기를 만드신 이가 없으면 어찌 우리가 존재하겠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부터 성경의 모든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 이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백성이고 모든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에 주시지 않는 매우 특별한 영혼을 우리에게 주셔서 당신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닮은 성품을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 교제하고 가족관계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 때문에 지어진 것이고 인간은 그 지어진 세계를 돌보도록 사명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관리자로 두어서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이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하늘에는 하늘나라를 만드셔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맞게 돌보고 가꿈으로서 인간은 바로 그 위치에서 행복을 누리게끔 지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는 잃어버린바 되지 않았는데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자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또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트려져서 모두 망가진 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을 함께 공급받아야지만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정신들은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통해서 공급을 받고 먹고 입고 아름다운 지위를 누리고 적절한 교육을 받고 정신의 위로를 얻는 이런 것들이 필요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생명의 은혜를 공급받아야지만 영혼이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런 영혼을 통해 공급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를 끊어졌으니 비유를 하자면 컴퓨터는 좋았는데 프로그램이 모두 망가져서 작동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프로그램이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지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고양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보다 가치 있고 높은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잃어버려졌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찾아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던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양이 목자를 잠시 떠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 목자에게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고 마을회관으로 달려와서 마이크에다 큰 소리로 너 어디로 도망갔니. 내가 모르지만 빨리 10분 안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반쯤 죽을 줄 알아. 양에게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송을 양이들을 수도 없거니와 설령 듣는다고 할지라도 양은 그렇게 자기의 힘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자가 양보다 귀하지만 자기보다 천한 그 양을 찾아서 산 넘고 물 건너 그 양을 잃어버린 곳까지 찾아가서 그 양을 건져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다리가 약간 불편한 장애가 있으신데 사모님도 그러십니다. 두 분이 결혼하셔서 아이를 낳고 사역을 하시는데 아이를 쌍둥인가 연년생인가 해서 서너 살 든 애를 한번에 세 명이나 낳습니다. 그래서 이 세 아이를 잘 기르고 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선교사무실에 앉았는데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여보, 사모님이 거의 우는 소리기에 왜 그런가 하니 아이를 잃어버렸어. 그래서 누구를 잃어버렸나 했더니 셋 다 그랬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며 목사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도착했는데 진짜 세 명 다 없어졌습니다. 그 동리는 저도 오래 살던 동리인데 그 동리가 하도 생긴지가 오래된 동리라서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정말 어른도 찾기가 어려운 동리인데 세 아이가 단체로 흩어진 것도 아니고 각기 작별 인사를 하고 각각 골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두 분이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교회에다 도움을 요청해서 평일인데 온 성도를 교회에 나오라고 그래서 골목골목 성도들을 풀어놓고 세 아이를 지명수배를 내렸습니다. 그러더니 한 시간 찾더니 저기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모님 한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사모님이 막 달려가서 애를 끌어안고 울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삼십분 지나더니 또 하나를 찾았습니다. 둘을 찾은 것입니다. 이제 됐잖아요. 셋 중의 둘을 찾았으니 삼분의 이나 찾았는데 이제 들어가서 쉬지. 그게 아니라 둘을 찾으니까 사모님이 더 서럽게 우십니다. 너희 둘은 찾았는데 하나는 어디에 갔는가 하고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기 아들을 찾는 엄마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떠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갖는 것이 별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라 그냥 순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 피붙이 살붙여주고 피 붙여 주고 이렇게 해서 태어났는데 이게 엄마 아빠의 사랑 속에서 자라오면서 자기가 그렇게 존재 자체를 부모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정말 밤낮으로 애를 쓰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어 아이를 길러놓으면 이 녀석이 자라서 백번 잘해주다가 한번 제 마음에 안 들면 엄마 아빠에게 대들고 마치 자신의 인생은 엄마 아빠가 있어서 우울한 것처럼 그렇게 그릇 행합니다. 입이 이렇게 부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잘 모릅니다. 그러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 알게 됩니다. 너무나 부모의 사랑을 모른 나머지 어떤 때는 부모 밑에서 계속 있다가는 내가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안을 박차고 가출을 합니다. 며칠 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즐거운 밤을 지낼 때 그때는 집을 떠난 보람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며칠 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곤고함이 밀려오고 그때에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철이 드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가르치던 청년자매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그랬더니 벌써 중년 부인이 다 되었습니다. 어떻게 지내니? 그러니까 목사님 말도 마세요. 여호와의 기업이 왜 그렇게 고달픕니까? 애들이 너무나 힘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힘들게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우리 엄마 아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엄마의 마음이고 아빠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원래 창조되었을 때는 그런 하나님과 함께 한 집에서 살던 가족이었는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족에서 떠나 가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한참 살다가 보니까 그 다음에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니까 그런 집이 있었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희미하게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야지 되겠다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말씀을 듣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을 멀리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다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불효하게 자신의 옛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귀환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자기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가격에 상관없이 그 양이 고통 할까봐 괴로워하면서 그 양을 찾아 나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이렇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시고 보이지 않는 순결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무지와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좀더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흠 없는 분이셨지만 그러나 분명히 한 사람이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대가를 당신이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고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또한 사람이신 그분이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년 동안이 세상에 사시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방법을 우리에게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이 하신 일은 세 가지로 나누는데 첫째는 참으로 자신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의지할 때가 없이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인정을 베푸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그리고 소외된 자를 위로하시고 고통하고 아파하는 자들을 어루만지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져보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차근차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시켜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이 어디고 자신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비참한 인간들이 되었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새사람, 새 인생을 살수 있는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신 일이지만 이것보다 더 뛰어난 일을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셨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였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주님 앞에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의 대가를 짊어지고 그 대가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대가없이 예수님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게끔 만들어주셨으니 이는 마치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친구가 와서 우리를 위해서 벌금을 내고 우리를 형무소에서 꺼내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당신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셔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지은 많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진노하셨지만 예수님이 그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죄인에게는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갈 마음이 생겨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물질만 있으면 살 것처럼 이야기하고 젊음만 있으면 살 것처럼 용기를 내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것만을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아가게 할 영생의 자원이 필요한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자원입니다. 그것을 얻고 누리기까지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상태에서 있는 것입니다. 잠시 한눈을 팔고 한눈을 판 사이에 친구 양들은 모두 떠나고 목자도 떠났는데 혼자 남아 있습니다. 이 양이 어디엔가 유리하면서 온 다리가 가시에 찔리고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목자가 찾아와서 손을 내밀어 그를 그 난관에서 건져주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참된 아버지이신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어거스틴이 고백했던 것처럼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그렇게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길에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이 여러분 가까이 다가오셔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고난도 이기고 시련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도우십니다. 전에는 외톨박이였고 운명에 매여서 사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그 아버지를 힘입어 하늘의 모든 은혜의 자원들을 누리면서 이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두 번째로 왜 이 목자가 그토록 간절히 위험을 무릅쓰고 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양의 약점을 목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무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나 표범은 날카로운 발톱과 입, 이빨이 있어서 자기를 공격하는 맹수들을 물어뜯고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떤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뿔은 없어도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 도망칠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카멜레온 같은 것은 주위의 숲 속에 색깔에 따라 색깔이 변해서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은폐합니다. 고슴도치 같은 것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뾰족한 이빨은 없어도 온몸을 웅크리면 밤송이처럼 되어서 사나운 맹수라도 쉽게 그것을 먹이 감으로 먹지 못하도록 자기를 보호합니다.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스컹크 같은 것은 최악의 경우에 방귀를 뀌어서라도 자기를 보호합니다. 미국에 한번 갔을 때 아름다운 동리에 들어섰는데 이상한 냄새가 동리에 가득합니다. 이게 뭔가 그랬더니 온 동리에 스컹크가 돌아다니면서 방귀를 뀌어서 이 동리가 냄새가 나는 동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너무 골이 아픈데 그분들은 일부러 문을 열어놓고 그 냄새를 즐기는 것을 봤습니다. 어떻든 동물이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는데 이 양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인간처럼 넙적한 어금니로 풀이나 씹을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상대방을 물어뜯을 수가 없고 또 빨리 달려갈 수 있는 다리도 별로 없고 뿔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찐빵처럼 말려서 마치 이것은 ‘내가 양이요’ 하는 명찰정도지 전혀 누구를 공격할 수 있는 그런 뿔이 아닙니다.
그럼 왜 수많은 짐승 가운데 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은 그렇게 양으로 비유하시기를 좋아하셨을까요? 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양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마치 양이 목자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고 혹시 목자 없이 존재한다면 맹수의 밥이 되기가 십상이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살수 없도록 그렇게 창조하신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의지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면 순종하게 되고 의지하는 그 속에서 인간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와서 열심히 나를 사랑하고 노동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내게로 와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보십시오. 그들이 누리고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입니다. 더 많은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애쓰지만 성공해봐야 손에 넣는 것은 이 땅의 자원인데 그것으로서는 그의 영혼을 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인간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어느 집에 아들 둘이 있어서 다 커서 장가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보냈습니다. 큰 며느리가 먼저 들어오고 이어서 둘째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첫째 며느리는 그야말로 모범생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를 나오고 하여튼 가정에서 배운 바도 많고 그래서 모든지 잘합니다. 밥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고 심지어는 아파트를 되팔아서 돈을 남기는 투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하여튼 모든지 잘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전혀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큰일 때가 되면 자기가 시장을 다 봐서 책임감도 강해서 딱 해서 한상 딱 벌어지게 차려놓고 시부모님 오셔서 잡수시라고 그러고 다 치우고 마지막에는 자기는 링거를 맞고 그날 밤에 누워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이 큰며느리에게 뭐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뭐든지 박사처럼 똑 부러지니까.
그런데 이 둘째 며느리는 정 반대입니다. 늘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할줄 아는 게 없습니다. 시집은 어떻게 왔는데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잘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시어머니에게 그냥 무작정 체념 몰수하고 게기는 것 그런 것은 잘합니다. 그래서 그날도 전화가 옵니다. 어머님, 저 둘째입니다. 웬일이니? 오늘 우리 집에 좀 빨리 좀 오세요. 네 집에 왜 가니? 내일 우리 남편 생일입니다. 아니 그럼 내일 아침에 가면 되지. 밥을 누가 해요. 나는 아무 것도 못하는데. 네 신랑 밥하는데 내가 왜 가니. 그러니까 그래도 어머니가 해주셔야지 돼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어머님이 없으면 쓰러지지요. 어머니가 일어나면서 도대체 딸을 시집을 보냈으면 뭐라도 가르쳐서 보내야지, 쥐뿔도 할줄 모르고 말이지. 매일 잠이나 아침 늦게까지 잠이나 자고, 이런 것밖에 할 줄 모른다고, 투덜대면서 가십니다. 가보니까 뭘 사다놓고 준비를 하고 있나 했더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뭘 사야지 돼요? 할 수 없이 시어머님이 따라가면 바구니를 들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사서 뭐 좀 하나 보니까 칼질을 하는 것도 무 두 쪽을 쓸고 손가락을 한쪽 쓸고 이러니까 시어머님이 볼 때 말이 안 됩니다. 야야. 치워라. 야, 너는 그렇게 못하나. 무릎 꿇고 앉아서 죄송해요. 어머님, 네가 도대체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개기는 빼놓고. 그리고 시어머님이 다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어머님이 툴툴댑니다. 네 형님을 봐라. 너는 어떻게 그 모양이니? 도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니? 진짜 걱정된다. 애비 밥이나 해서 먹이냐. 이렇게 구박을 하고 시어머님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만 내심으로 진짜 예뻐하는 며느리는 첫째 며느리가 아니라 둘째 며느리입니다. 자매들은 계속 기이하다는 표정을 짓는데 기이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시집갈 때쯤 되는 자매들에게 가끔 얘기합니다. 야, 이제 가면 잘난척하지 마라. 무조건 못한다고 그러라. 그리고 사실은 잘해라. 그런데 바보 같은 자매들은 사실은 쥐뿔도 못하면서 겉으로만 잘하는 척 합니다. 그러니까 큰 며느리는 완벽한 모범생입니다. 자신이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며느리도 가끔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어머님의 태도가 분명해집니다. 것 봐라. 너 혼자서 뭘 그렇게 잘하겠는가. 어떻게 매일 그렇게 실수인가. 하고 말하지만 둘째며느리가 실수하면 뭐라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그만두라.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자기가 다 만들었거든. 자기가 다 했는데 먹으면서 짜, 싱거워, 그러면 결국 자기 욕하는 것 아닙니까? 그만두라. 그럴 수도 있지. 물 좀 부어서 먹어라. 이게 사람도 이렇게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서 기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생기게 되면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보면 늘 오뉴월 햇빛과 같은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폭풍이 지나고 흑암을 지나야할 일도 있고 때로는 아무도 모르게 어두운 밤길에서 홀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때 누가 여러분 곁에 계십니까? 독일속담에 나오는 것처럼 ‘알레이스카이 알라인’ ‘모두들 혼자일 뿐입니다.’ 진짜 인생에 필요한 그 시기에 가까이 있어주는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러면서 인생의 고난의 때를 가장 달콤한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지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가까이 계셔서 지금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만일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게 한 가족 공동체의 가정생활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그렇게 깊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그렇게 하나 되게 해주시겠다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뭘 내놓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여러분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 고단하고 외로운 인생의 길에 주님이 당신의 어깨를 빌려드리고 싶어 하십니다. 내게 와서 쉬어라.
세 번째로 보면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바 된 우리를 찾아 나서신 것은 그 관계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목자가 나섰고 그리고 결국은 그 목자가 어디선가 후미진 곳에서 아파 울고 있는 양을 찾았습니다. 아마 그 양은 목자와 그리고 친구들을 잃어버리고 나서 갈 데 못 갈 데 다니면서 가시에 찔려 온 다리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피 맺힌 그 발을 하고 있는 사랑하는 그 양을 목자가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손을 쭉 내밀어서 그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내 주었습니다. 그때 이 양은 얼마나 안심했을까요?
오늘 성경에 보면 그 목자가 이 양을 어깨에 메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행할 짓을 치면 개 패듯 때려도 시원치 않은데 이 양을 타고와도 사실 다리가 아픈데 양을 메고 왔습니다. 양이 꽤 무겁습니다. 원래 성경이 쓰여 졌던 희랍어성경에 보면 이 어깨가 두개의 어깨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짐짝 매듯이 양을 맨 것이 아니라 뒤로 이렇게 양이 편안히 누울 수 있도록 메고 온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양을 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떠메었고 또 한편으로는 길 잃은 가운데 피곤해진 양을 안식하기 위해서 어깨에 메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목자의 행동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아마 때가 저녁때쯤 되었을 것입니다. 동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저녁 드셨습니까? 아직 안 먹었는데. 잠시 후 우리 집으로 오십시오. 왜? 제가 잔치를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왜? 제가 잃어버렸던 양을 찾아서 너무 기쁘거든요. 양 한 마리에 몇 푼이나 한다고 온 동리 사람들을 불러다가 저녁을 먹이면 그 돈이 더 들 텐데. 그런데도 그렇게 합니다. 설마 온 동리 사람을 불러놓고 그 불쌍한 양, 찾아온 놈을 바비큐를 해서 먹이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온 동리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결국 뭐의 표현인가 하면 관계를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고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거나 혹은 자기를 멀리 떠나가게 되면 애달프기는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을 도저히 감당 못해서 따라서 죽거나 혹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관계가 사라지고 나니까 혼자서 도저히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랑한 상대방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왜 나를 사랑하는가 하고 묻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질문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관계 자체가 좋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있던 그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더 이상 가출한 소년처럼 거리를 방황하며 불량배에게 얻어맞고 그리고 삶을 망치는 그런 인생을 계속 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참된 목자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고 계시니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고 그 부르시는 한편으로 오늘 여러분들을 여기에 모으신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5.18을 맞이하면서 신문에 나온 작은 기사를 보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14살 된 어린아이가 광주사태 때 25년 전 이야기입니다. 데모대에 휩쓸려서 집을 나간 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살아있으면 아이가 어느덧 4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될 텐데 그 어머니 하는 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아이가 집을 나간 후 25년 동안 한번도 대문을 잠그고 잠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 지금 밤이라도 당장 어머님!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 문을 잠글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집을 떠난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어서와 주께 오라
주님은 지금도 어떤 이유로 당신의 곁을 떠났든 떠나간 그 사람들이 다시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어린시절 주님의 품 안에서 살다가 6년이 넘는 세월동안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인생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고통을 경험하면서 어느 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이셔서 눈물을 흘리며 탕자의 귀로와 같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작은 교회당에서 울리던 그 녹슨 풍금소리를 여전히 기억합니다. 내 인생을 살면서 발견한 가장 완벽한 평화가 있는 그곳이었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누릴 수 없는 그 평화의 시간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분 홀로 살아온 그 날들이 이상한 날들이었고 신기하게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아오도록 만들었던 날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일까요? 요점은 간단합니다. 이렇게 목매이도록 우리를 찾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관여도 없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부터 멀리 떠났고 그래서 나는 죄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과 시련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리고 내 자신이 하늘의 모든 은혜와 영생의 자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곤궁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주님을 떠났기 때문이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선한 목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신 것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고난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모든 죄의 대가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사랑했고 세상에 속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주어진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면 의지하고 순종하며 착한 아들딸이 사랑하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교훈과 양육을 받으면서 자라는 것처럼 그분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랑하는 많은 동기간들을 만납니다.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변화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없었던 참된 하늘의 위로와 평강 그리고 주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하늘의 모든 자원들을 누리게 하십니다. 죽었던 영혼들은 살아나고 그 영혼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온전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주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되고 싶어 하셨던 그 사람이 되게 하게 하셨던 그 일을 하면서 잠시 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모든 희망을 걸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평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니 이것이 바로 신자의 일생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처럼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