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회심 집회(중등부)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찿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 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2-27)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 지은 사람들을 죽이는 형집행의 방법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예수님이 죄가 없었는데도 사람들이 십자가 못 박기는 했지만 이 십자가의 형벌 자체가 죄인을 죽이는 방법 이었으니까 예수님이 죄가 있다 라고하는 재판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그 본문의 앞에 보면 예수님이 받으신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같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이 재판은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선 죄가 없으신 분이었는데도 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재판은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또 혹시 잘못되어서 죄가 없는 사람이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법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죄 있는 사람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처형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재판장인 빌라도도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예수님의 죄를 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 주었으니까 이것은 잘못된 재판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때 유월절에는 죄수 한사람을 특별사면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그렇게 사면해 주고 싶어 했는데 사람들은 죄를 하나도 짖지 않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죄를 많이 짖고 살인을 하고, 반란을 일으킨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은 놓아 주게끔 판결을 했으니까 이것은 정말 인간 역사상 가장 잘못된 재판 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왜 이렇게 빌라도가 사람들을 두려워 했을까에 대한 답이 나오는데 당시에 유월절이었기에 수 많은 유대인들이 이 재판을 하는 빌라도의 법정 앞에 온 언덕을 인파가 구름떼 깥이 에워쌓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게 해달라고 데모를 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것 같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만약에 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로마 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는 해직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 주었다 라고하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땅에 계신동안 가르쳐 주신 가르침이 옳은 일에는 잘 따르고 그른 일에는 따르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의로운 가르침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은 정말 잘못된 재판이고 불의한 재판 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순종하듯이 이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시면서 그러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럴까?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도 되지 않는 이 잘못된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당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 무엇이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냐면 예수님께 실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어 다니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만명을 먹이던 병든자를 고치던 그 큰 능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규합해서 로마를 두들겨 업고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을 가져 오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고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고,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면서 그들의 상처 받은 영혼, 망가진 마음에 다 쏟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섰을 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의 발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흔들면서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면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열렬한 환영 이었는지 ‘온 성이 소동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할 정도로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그 후에 하시는 행동을 보면서 이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 뒤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성공을 시기하는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모함을 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심과 실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악한 사람들의 계략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런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작정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고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는 이 지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이 지워준 그 십자가를 지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 하시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인간에게 다스리게끔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아무렇게나 창조된 세상이 아니라 네등급으로 창조된 세상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존재하기만 하는것 땅, 흙, 돌, 물, 공기 이런것을 두 번째는 살아 있는것 식물들입니다. 세 번째는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지각하는것 동물들입니다. 지각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지성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는 인간을 창조 하셨습니다. 인간이 그 맨 꼭대기에 있으면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이땅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살아 가는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과 무생물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인간은 오직 한분만을 섬기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분을 섬기면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이세상에 창조하셨다는 사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 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왜 살아야 되는지 공부해야 되는지 오늘도 죽지 않고 오늘도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도 이유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은 아주 뛰어나게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 하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하나님과 한 가족처럼 지내는 자녀로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함께 불멸하도록 창조 되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가족처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큰 행복을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짖게 된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부르셨는데 인간은 그것이 싫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동산에 있는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이 하나님이 그렇게 째째 하십니까? 과일이 많은데 그것 하나쯤 따 먹었다고 하나님께서 그러십니까?”
(예화) 중국에 가니까 자금성이라고 하는 청나라 시대의 큰 궁궐이 있습니다. 축구장 몇배씩 되는 궁궐이 아홉 개가 모여서 어마어마한 궁전을 이루었는데 거기 중앙에 가보니까 왕이 앉았던 의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청소부가 왕이 계신던 곳을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황제만 앉는 의자에 앉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살살 가서 한번 털석 앉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앉으면서 “야! 좋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황제가 보았습니다. 그 사람을 죽일까요? 살릴까요? 죽이겠지요. 왜 그럴까요? 그 의자에 좀 앉았다고 그 의자가 닳는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요? 그 의자가 닳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의자에 그 사람이 앉는 의미가 무엇이냐면 내가 황제 였으면 좋겠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황제에게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일 인것입니다. 혹시 청소하다가 그 의자의 다리를 뿌려 뜨렸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리를 안 부러뜨려도 거기에 앉았다는 사실은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바로 그런 끔찍한 죄를 하나님 앞에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고 영혼이 즉시 죽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을 잘 알수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인간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 몇년 몇백년 기껏해야 몇십년 살다가 죽는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계속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그 죄를 물려 받고 아버지가 빚을 지면 자식이 빚쟁이가 되는 것처럼 그 죄는 계속 물려 지면서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 많은 역사가 일어 난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발달한 과학의 시대에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그것처럼 바보 같은 질문이 없습니다. 만약에 지옥이 없다면 우리들이 이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에서 악하게 살면서도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고, 착하고 선하게 사는데도 고생만하고 고통당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그런 불공평한 일에 대해서 어떤 판결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신뢰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지옥이 있다 없다라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신 존재가 확인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죄속에서 태어나서 태어날때부터 영혼은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 받을 수도 없는데 인간 존재의 탁월함은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캄캄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면 우리의 육체는 엄마 아빠가 결혼해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엄마 아빠가 결혼을 해서 온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그래서 우리 몸속으로 들여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육체는 기껏해야 70, 80년 살다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부모를 몰라 보는것이 죄 이겠습니까? 육신의 부모를 몰라 보는것이 더 큰 죄 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엄마 아빠가 여러분들을 태어나게 했는데 여러분들이 엄마 아빠를 알아 보지 못하고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도 부모를 알아 보지 못하고 고아처럼 살아 간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신의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30, 40년이면 헤어 집니다.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영원히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과 관계되고, 천국에서는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많은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기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모르는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비침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지 하나님을 믿죠. 누구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인간인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 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계속 알려 주셨습니다. 그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을지를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이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찬송)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가장 중요한 이유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 오신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예전에는 말로만 하나님이 들려 주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그리고 숨쉬고 사랑하시면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너무 사랑하신다. 너희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말씀만 하시는것 보다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이 모두 보는 그 앞에서 회개해야 할 예루살렘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 간음하다 끌려온 여자를 하나님이 그냥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 보다는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짖지말라. 이렇게 말씀해 주심으로서 병든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주린자를 먹이시는 그 모든 삶을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사랑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생생하게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보여주신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성경을 가르칠 때에,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실때에 생생하게 보여 주셨던 그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말씀을 깨닫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이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그래서 가슴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오늘도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와 같은 더러운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나고 평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죽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는 분 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누구도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겷한 영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지만 하나님앞에 갚아 질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빚을 지면 빚을 갚아야 하듯이 하나님에게는 의로운 성품과 사랑하는 성품, 대표적인 두 성품이 있습니다. 의로운 성품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이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숙제를 많이 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숙제를 내 주는데 어떤때는 그 숙제를 하기 위해서 새벽 1시, 2시까지 숙제를 해야 했습니다. 영어 선생님이 특히 살인적인 숙제를 내 주셨는데 중학교에 처음 입학한 학생에게 영어 한과를 50번을 쓰든지, 150번을 읽든지, 외워오든지 세가지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외워놨다가 숙제 검사할 때 못 외우면 얻어 맞는데 그러니까 차라리 150번을 읽고 갔는데 그것을 읽다가 더듬거리면 150번을 읽은 녀석이 그것도 못 읽냐고 하면서 패면 맞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보험은 50번을 써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50번을 밤새 써 가지고 갔는데 그 다음날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안 했다 그러면 그 선생님이 미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수가 있나? 그래서 숙제 안하고 논 친구들하고, 숙제 한 나하고 똑같이 대접을 해준다면 그것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은 죄 지은 그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셔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망가뜨린 죄입니다. 그러면 그 죄의 크기가 얼마나 크겠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와서 불장난을 하다가 쓰레기통 같은것을 하나 태웠다고 한다면 “그러지 마라” 그리고 끝납니다. 그런데 10층짜리 건물을 모두 태우고 이 안에서 사람이 30명쯤 죽어 버렸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창조된 세계를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세계가 다 더럽혀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죽음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위해서 인간에게 그 죽음을 선고하면 모든 인간들이 다 죽고 창조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었을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죄 짓기 전에 죄가 없고 흠도 없는 깨끗한 상태의 사람이신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인간들이 죄를 지을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짐승을 죽여 드리던 제사가 바로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그림자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서 이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사람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 재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셨을 때에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로 보인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예수님께 쏟아 부으시고 예수님을 처형하셔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모두 치르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 였습니다. 그 계획을 알고 있는 예수님은 조용히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에 대해 통용되던 두가지 규례가 있었는데 첫째는 십자가를 지고 가기전에 채찍에 맞는 일 이었고 또 하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올라 가는것 이 두가지가 십자가 형벌속에 통용되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으신 다음에 로마의 군병과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넘겨져서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 갔습니다. 거기에서 옷을 모두 벗기고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에 맞으셔서 예수님 당시의 채찍을 연구하던 신약 고고학자에 의하면 당시 통용되던 채찍은 말 채찍처럼 기다란 채찍이 아니라 아홉가닥으로 된 채찍이었는데 채찍 끝에는 금속이나 뼈를 깍아 만들어 놓은 날카로은 갈고리라 달려서 벗은 죄수의 몸에 후려치면 살점이 후두득 떨어지는 그런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기는 커녕 그 채찍에 맞다가 절명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하니 예수님이 브라이도리온에서 맞으신 그 채찍이 바로 그러한 채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왕국 수비대에서 잔악한 군인들에게 에워 쌓이셔서 그래서 예수님은 그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무슨 잘못된 일을 하신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이라고는 죄 많은 이세상에 내려 오셔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눈먼자를 뜨게 만들어 주시고, 심지어 가족들로 부터도 버림받은 불쌍한 인간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문둥병이 걸린자를, 가족들도 버린 그들을 어루만져 고쳐 주셨고 그리고 귀신이 들려서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인간들에게 다가 오셔서 그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고, 빈들에 여우도 자기의 집이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 였습니다. 이 모든 창조된 생애는 예수님이 창조한 세상 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만드신 세상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태어났을 때 자기땅에 오신 것 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하고 욕 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일생동안 당신 자신을 다 내어주시는 희생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잘못 하셨습니까? 주린자를 먹이고 병든자를 고쳐 주었는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에 심한 채찍질로 예수님의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게 만들었을까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금도 흠이 없으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멸시와 욕을 당하셨을까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이 벗은 몸에 채찍질을 가할 그때에 우리도 그 손에 피를 묻힌 사람들입니다.
또하나의 규례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인데 무려 150kg쯤 되는 무거운 나무 십자가 였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짊어 지시기 전에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아무 힘이 없게 되었을 때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었으니 그 가시는 팔레스타인에서 자라는 약 7cm미터의 길이가 되는 그 끔찍한 가시관 이었습니다. 그것을 사정없이 예수님의 몸에 눌러서 씌웠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온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었고 그 가시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낭자하게 피가 흘렀습니다. 벗으신 그 몸에 수 많은 채찍들을 맞으신 자국이 있는데 그 위에 사람들은 왕이 두르는 붉은 망토를 두르며 네가 평소에 왕이라고 그랬으니까 왕 한번 해봐라 하고 예수님에게 그 보자기를 씌우고 손에는 황금의 홀 나라를 통치하는 지휘봉 대신 시궁창에서 자란 하챦은 갈대를 그분의 손에 들려 주었습니다. 좋으신 예수님을 정말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장 한번 명령하시면 모든 사람을 죽이실 수도 있고, 천사를 군대와 같이 이땅에 불러 내리실 수도 있는 분 이었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이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는 방법이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수치와 모욕을 그대로 감당하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벗은 몸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이 못 박혀 죽으실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가고 계셨습니다.
(찬송)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러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남자, 여자, 여러분 같은 청소년들, 나이 많은 어른들, 할머니 할아버지 모든 사람들이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신기하게 그 사람들을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라고 두 부류로 사람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누구 였냐면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구경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구경하던 무리들 구경하던 백성들 이런 표현이 성경이 그 뒷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구경하면서 따라가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벳사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을 때, 그 중에는 그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고 배 불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중에 대부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 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자기들의 죄를 위해서 올라 갈 그때에 사람들은 차갑게 예수님을 구경하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교회안에 있지만 아직 예수님앞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 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늘 교회에 데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당연히 교회가는 줄 알고 밥 먹을때는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나같은 더러운 인간 때문에 고귀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셨을까? 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 되었을까? 예수님이 나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는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인가 하고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슬퍼해서 예수님의 아픔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구경하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한달전에 여러분 동생들이 여기에서 회심 집회를 했습니다. 친구 하나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막 눈물을 흘렸습니다.
(찬송) 이 벌레같은 날 위해 그 은혜 받으셨나
고사리같은 손으로 가슴을 치며 그 어린 동생이... “예수님! 나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는 계속 쳐다 봅니다. “울지마 울지마” 이것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과 못 만난 사람의 차이입니다. 왜 그러 셨을까? 왜 사랑의 예수님이. 왜 더러운 우리들을 위해서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까? 그리고 멸시와 욕을 다 당하시고 일평생 우리를 위해 봉사한 적 밖에 없는 그 사랑의 예수님이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 나의 죄가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나를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두려워 하며 떨리는 눈물을 흘리는 그것이 여러분 속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 없으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심이라고 하는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앞에 지은 자기의 모든 죄들을 회개하는 것과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전적으로 믿는 것, 이두가지가 합쳐진 것이 회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심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전도사님 이었을 때 20년도 더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된 아이들을 데리고 이렇게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1학년 밖에 안된 초등학교 아이가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로 인하여 몸의 피를 흘리신 죄인 받으소서. 누구도 억제할 수 없도록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나면 그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뭐가 생기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찬송)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한 그 말씀이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에게는 그런 회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떡 주고 물고기 주고, 병 고쳐 주고 그럴때에는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예수님을 다 배반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회심 안하면 반드시 배반합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배반 합니다.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을 교회에 이끌지 않는 한 언젠가 배반을 합니다. 선생님들이 여러분들을 붙들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배반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무리의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중에 어떤 사람들은 저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백성들하고 틀렸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백성들은 슬리퍼 끌고, 귀에 리시버 꽂고 그리고 팝콘 먹으면서, 껌 씹으면서 그러면서 예수님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갈 때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던 예수님, 브라이도리온에 끌려 가는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길에서 기다릴 때 잠시후 예수님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내동댕이 쳐 지듯이 골고다 언덕에 오르는 길에 나타 나셨습니다. 150kg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나타 나셨습니다. 여자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 이었을 까요? 왜 백성들은 구경하며 가는데 이 여자들은 그렇게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갔을까요?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에 없었던 그 무엇이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 이었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아무 희망이 없던 나 같은 인간을 찿아 오셔서 고쳐 주신 예수님 가족들도 나를 버리고 그리고 친구들도 나를 모두 떠나서 외톨박이가 되어서 병든 몸이 된 나를 찿아 오셔서 치료하시고 고쳐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이 여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릴 때 먹이고 아플 때 고쳐 주시고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는 한번도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 이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언제나 기적을 구하면서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이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고 나타 나셨을 때 막 가슴을 치며 슬퍼 했습니다. 이 여자들은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나쁜일을 하신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세상에 오셔서 하신것은 우리를 사랑해 주신 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이세상에 오셔서 사랑하는 자녀처럼 돌보시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고귀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여러분은 모르시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이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여자들이 애원하는 울부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갈수록 흐느껴 우는 이 여인들의 울음 소리는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그렇게 목 놓아 울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을 수 있었다면 아마 그러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그렇게 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1904년에서 1906년 사이에 인도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 선교사가 가 보니까 어른들은 다 예배드리러 가고 동네에는 조그만 애들이 모여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너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찿아갔는데 6살, 7살밖에 안된 아이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너를 버리고 가서 우니?” 그리고 물었더니 이 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아저씨 우리는 엄마가 없어져서 우는것이 아니에요” “그럼 왜 우니?”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오늘 우리들이 울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여러분 믿어지지 않겠지만 지난달에 우리 교회에서 우리나라 나이로 4살, 만으로는 3살밖에 안된 어떤 어린 아이가 복음을 전할 때 억제할 수 없이 흐느껴 울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3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의 마음에도 선생님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마지막에 이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마음 깊이 그분이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는 예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중에 하나인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런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랑은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고 나 하나밖에 없었다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을까요? 안 오셨을까요? 당연히 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여자들의 마음에는 그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서 그래서 이렇게 슬피 우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따라가는 여자들이 통곡하며 예수님을 살려 달라고 울부 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골도다 언덕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의 손위에는 기차의 레일에, 침목에 박히는 못과 같은 것으로 박았습니다. 그리고 가시관을 쓴채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넣었고, 그 창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지나 허파를 뚫고 예수님의 심장을 터뜨렸습니다. 요한사도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흐르는 물과 피를 보았다고 하는 그 물과 피가 바로 이렇게 흘러나온 물과 피였습니다. 그래서 그 피를 다 흘리셔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 받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손을 십자가에 못 박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습니까?
(찬송) 망치소리 내마음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세상에서는 항상 그분과 동행하면서 살게 만들어 주시고, 어려울 때 예전에는 외로왔는데 이제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돈으로, 벼슬로, 우리의 선행으로 무엇으로도 아니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그렇게 못 박히고 죽으셨다는 사실,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래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회심과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만을 이 여인들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