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평하게 하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녹취자 : 이미란
평화는 무엇입니까? 평화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던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입니다. 똑같은 의미입니다. 평화란 하나님의 질서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 속에서 실현된 상태입니다. (지난주에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나오는 구절을 설교 시간에 들었습니다.) 질서에서 떠날 때 평화가 사라지고 질서로 다시 돌아올 때 평화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질 때 그 평화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또 자연의 세계와도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 그게 평화입니다. 원래 ‘샬롬’이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동그랗게 하나 다 있는 빵을 샬롬이라고 보고, 온전해서 흠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 정신, 영혼까지 모두 함께 누리는 상태 그게 평안인 것입니다. 듣고 보니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그게 뭐 실현이 가능한가, 현실에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정말 느낄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없으니까 그런 질서가 깨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한 그 사람들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괴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이 싸웠을까요?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되고, 깨지고 나니까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의 세계에 대해서도 무자비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도 끊임없는 약육강식과 투쟁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은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냐면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적의라고 하는 것은 적대적인 의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반감과 대적입니다. 전자는 정서의 문제, 후자는 의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이 생기게 되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한 거리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중심주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이 살아가고 있는데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면 각자 주장하기를 내가 원하는 질서로 들어와라, 내가 원하는 질서 속으로 들어와서 네가 복종을 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에고 센트리즘’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은 질서끼리 충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결국은 모두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실제로 누리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
평화가 실현되어야 할 영역은 어디입니까? 크게는 세 개입니다. 가정, 가정에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팔복의 사람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평화를 주는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교회는 영원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계속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화평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교회가 가정이 얼마나 화평한가 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진짜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교회에서 얼마나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를 보면서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진실한 신앙이 있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이 사회입니다. 이게 더 퍼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과도 그리스도인이 들어가니까 화평이 이루어지더라, 또 다른 갈등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화평이 이루어지더라 하는 것이 기대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탐욕이 망쳐놓은 자연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화를 누리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분열과 갈등, 무관심과 차별을 극복하고 화목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존엄하게 생각하고 인종차별이라 이런 것들이 없이 가난한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하는 그러한 모든 삶의, 정신의 평화, 이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의’는 ‘of’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형용사를 명사를 이용해서 만듭니다. 영어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라는 말이 그런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쓰인 곳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기도 했고 이스라엘의 왕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했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보면 특히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이름이 왕들을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왕들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이 있으니까 왕이 맘을 나쁘게 먹으면 백성들이 생지옥 같은 사회를 살게 되는 것이 가능하고 왕이 마음을 너그럽게 먹으면 평화로운 나라가 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했지만 믿음 안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냥 사람들이 불러만 주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으로써 이 사람이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베드로후서 1장 4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져 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져 갈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성에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평화를 만듦으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더 야비하고 자기 이익에 대한 충돌로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만들며 살아갈 때 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질서의 싸움입니다. 세상 나라는 세상의 질서를 자기 사랑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 이루어지려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자기는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바로 세상 나라도 평화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도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 나라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힘과 권력으로 상대를 누르고 자기의 질서를 강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질서를 확정된 사람은 행복하겠지만 그 질서에 억압받는 사람들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떠올려 보면 일본이 세력을 확장해서 동남아를 다 지배하고 자기네 질서를 강요했습니다. 대동화 공영이라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이 모든 세력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로 재편해서 모두 공동의 번영을 이루겠다고 하는 건데 그것은 자기네 얘기입니다. 그 질서를 강요하니까 지배받는 나라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고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게 민족에서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게 바로 결코 세상 나라가 자기 사랑을 통해서는 평화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팽창하니까 그게 그렇게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겹쳐서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나라의 국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세상 나라의 국민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국민입니다. 두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던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룬 사람이니까 은혜 생활을 잘해서 그 평화를 내가 간직하면서, 교회 안에서 아직도 죄가 남아 있고 자기 중심성이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당한 반감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그 속에서 더 많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평화를 증진해가는 방식으로 자기가 교회의 하나 됨에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한 알의 밀알에 되어서 가족들이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족들의 이익이 둘이 충돌하면 자기가 완충 지대 역할을 하면서 자기가 손해를 보고 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라도 서로가 충돌하지 않도록 화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가치가 아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늘 뜯어먹히고 이용당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관용과 평화의 의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이렇게 모든 사람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간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참 평화의 하나님이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맺음말 부분을 함께 읽음으로써 오늘 공과를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 나라가 자기 사랑의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질서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 안에서 그 평화를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최고의 섬김은 평화를 만드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 하십시오. 그 평화를 먼저 자신이 누리고 또한 이웃에게 전하십시오. 그 평화를 누리며 사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역원, 구역장들은 이것을 마음에 잘 담고 자기 실제 생활에 잘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 팔복을 안 한 것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문자를 풀어봅시다. 평화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질서가 사람과 자연 만물 속에 실현된 상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세상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그 후 어떻게 변했습니까?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량하게 돌보았습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고 자기중심적인 질서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평화가 실현될 세 영역, 가정, 교회,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해서 마쳤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새 책이 나왔는데 어제 사인회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이 사 갔습니다. 지금 서점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주 예쁘게 만든 책인데, 이 책을 오늘 공과 공부 들어오신 분 중 댓글을 달아서 응모를 해주시면 추첨을 해서 세 분에게 이 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일날 발표 받으시면 연락이 갈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공부 어떠셨습니까? 여러분들, 팔복이 모두 끝나기 전에 더 많이 변화되어서 주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팔복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행복을 묻는 많은 사람에게 우리가 행복이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