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사랑의 완성 스터디
녹취자 : 오희열
기독교에서 사상을 이야기할 때, 사상이라는 것은 생각의 체계를 가리키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논리적 정학성을 가지고 사물이나 삶의 모든 사태들을 판단하는 지식의 체계를 말합니다. 정학이란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인데 자동차를 예로 들자면 수많은 부품들이 정학성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어서 자동차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결혼이라는 부품 하나를 놓고, 어떤 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이것 사야하냐 말아야하냐, 어떤 때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 라는 식으로 얘기하면 안 되고, 기독교 사상이 주는 전체적인 사고와 가치관, 논리의 체계에서 이것이 어떤 부속품들과 정학을 가져야 하는가, 그리고 거기에 딱 맞아야지만 그 결혼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인간으로 지으신 목적, 세계를 창조하신 모든 목적에 부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중심 주제가 구속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인데, 그 웅장한 신학적인 구도 속에서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데 곁다리로 말하자면 아내도 남편에게 잘 해야 하고 남편도 아내에게 잘 해야 한다.”라고 말씀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썰렁하게 만듭니다. 사도바울의 눈에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이미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신자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남편과 아내로 설명하는 그 속에 이미 그 안에 있는 남편과 아내들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남편과 아내가 관계를 가져야할지가 이미 유비로 제공되고 있는, 자신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신도로서의 교회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 속에서 유추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 설교를 여러분이 들으면 조금 충격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이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아~” 하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뭐라고? 아내와 남편의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이라는 거야?”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기독교가 엄청나게 욕을 먹게 되는 이유와 기독교인들이 이상하게 사회 속에서 약간은 모순적이고 부정적인 존재로 나타나게 된 중요한 철학적 이유는 사랑의 개념에 대한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하시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수없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외 없이 ‘아가페테’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아가페테’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도 여러 주석가들은 같은 말의 반복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적인 엄격한 구도를 가지고 그 용어를 다르게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인데 이런 것은 해석의 문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실 때, 이 사랑의 개념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해하는데 그 사랑을 우리는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는데, 여태까지는 부모님도 사랑하고 친구도 사랑하는데 자기의 마음을 강력하게 끌고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에 있어서는 독점적일 정도의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연애를 하게 되면 부모와 집안의 동기간들과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연합의 고리들이 찢어지거나 깨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 안 받는 부모도 없고 동기간도 없는 것입니다. 보통 성숙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큰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리는 아이디얼 한 사랑이라는 것이 이런 달콤하고 자기 집중적인 사랑이 온 인류로 확장되는 것이 아가페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면은 있습니다. 자기가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할 때는 다른 사람하고는 공유할 수 없는 배타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성생활을 한다거나 같은 공간에서 24시간 같이 산다는 것, 이런 것은 빼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부착됨으로서 만족을 느끼고 즐거움을 얻는 이것이 온 우주와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되어서 완전한 사랑 속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개념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교에서도 이런 사랑을 말하는 종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사랑은 예수님 시대에도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더더욱 장가를 안 갔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말은 안 해도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게 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또는 교회 여기저기 붙어있는 “사랑합니다.” "I love you." 이런 것들은 쓰레기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실현 된 적도 없고 실현될 가능성도 없고,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지도 않을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그런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비교해보시면 압니다.
어제 설교한 것이, 데미안을 보면 알을 깨고 나오면서 아프락사스에게 가는데, 이것은 힌두교적인 기능으로 선과 악이 융합된 상태입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가면 크메르제국이 힌두교를 기반으로 하는데, 사실 여태까지 철학의 금자탑을 쌓았던 사상이 힌두교이고 아주 포괄적입니다. 제가 놀란 것이 선과 악이 싸우는 전쟁의 장면이 나오는데, 큰 탑에서 나온 두 뱀이 싸우는데 뒤에 가서 보니까 싸우던 두 뱀이 한 마리의 뱀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세계관인 것입니다. 앞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모습들은 현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가지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뛰어난 인물들은 그런 사랑을 많이 확장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대체 누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면서 느꼈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감정들을 뛰어난 영성으로 모든 사람에게 느꼈겠습니까? 단 열 명에게 만이라도 확장해 본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결혼의 위치를 하나님이 우리를 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이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까하는 커다란 설계도 위에 결혼을 두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몰랐을 때가 알 속의 세계라면 그 속에서 생각했던 사랑의 개념은 타자가 없이 자기 밖에 없고 자기가 전부였지만 알을 깨고 나오면 나는 무한하게 넓은 수많은 타자들이 있는 세계 속에 아주 작은 한 개체일 뿐이라고 느낄 때 정의되는 사랑의 질서와 똑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알 속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그것을 깨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인데 이것들이 각각 질서를 가지고 관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두 가지 인데 현질서와 현질서가 지향해야 할 질서입니다. 그 질서 사이에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질서를 다 이해했을 때, 비로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어떻게 사랑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정의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로 볼 때,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생각들은 마치 한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 것처럼 안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는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더니 결혼하고 나서는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 오래 집착할수록 아주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 되거나 그런 것을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억압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피하려고 하는데 피하려고 할수록 사고방식이 고치지 않는 한 그렇게 피하는 것이 남편과의 실제적인 연합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악하게 적용하지 마십시오.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에이, 어차피 인간은 고독한 실존인데, 이게 해소가 되겠어? 너는 너고 나는 나지.’ 하면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결혼의 원리를 따르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것은, 첫째는 노력하고 대화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결혼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사역자로 나온 친구가 있었는데 부부가 크게 싸웠습니다. 이유가 남편이 볼 일을 보고 변기뚜껑을 닫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성경말씀을 어겼을 때보다 변기뚜껑 열어놓았을 때가 더 화가 나는 가치전도적인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스스로 한 번 물어보십시오. 이렇게 남을 구속해야할 필요가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지만 잘못된 사랑에 응답하는 방식에 대한 잘못된 욕구가 아주 많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다 만족시켜주는 것이 사랑의 끈끈한 연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연애시절에는 가끔 만나고 몇 시간이니까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상대방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결혼을 허락하신 뜻 자체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로 이런 것을 털어내고 정말 부부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얘기하면서 상대방에게 부탁하고, 그런 행위들에 대해서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화하며 서로 조정해나가는 일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마지막,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실존적인 고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사닥다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든 게 만족스럽고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한다면 기도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그리워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도 결혼은 가장 세속적이라고 표현하고 가장 신령한 것이라고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람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할 때 끊임없는 실망이 뒤따르고 인간은 그것을 만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채워지지 않는 남은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혼은 연애하면서 서로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정점의 상태를 결혼을 통해서 그대로 유지하거나 더 극락의 기쁨을 맛보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같이 못 삽니다. 그게 아니라 결혼을 해서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해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서로를 완성해 가는 것이고 결함이 있다면 저런 결함에 보태도록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날 아내도 자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소명으로 여기고 도 닦는 도구로 여기면서 그렇게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까칠하고 힘든 사람을 만났다면 상대가 아주 많이 다듬어져야할 사람이구나, 그래서 저런 센 사람을 하나님이 붙여주었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결혼했더라도 일수불퇴니까 참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자기를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너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데, 그것만 보여주니까 그렇지 전체를 보게 되면 그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오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잘못된 방식의 사랑 개념, 선악, 의지의 자유, 시간과 영혼의 문제, 그리고 그 다음이 사랑에 대한 것인데, 사랑에 대한 것은 사상적인 탐구가 없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니까, 흔히 우리들이 사회의 매체들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서 보게 되는데, 특히 재벌 2세가 평사원이나 계약직, 심하게는 알바를 사랑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알바나 계약직, 평사원이지 재벌 2세들은 그것을 보면서 감동받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을 꿈꾸면서 살 때, 자신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상실감을 느낍니다. 결혼의 이상적인 것은 처음에는 미숙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짐을 지고 가는 친구 같아져야하는 것입니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대화하며 해소할 수 있는 것은 해소하며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