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혼, 기도 속에서 강해짐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사 58::9)
녹취자: 이경순
1. 기도가 주는 첫 번째 유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셨고’라는 것은 시인이 간절히 기도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경험하였다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음을 다해서 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응답을 해 주셔도 자기가 기도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에 남지 않으니까 응답에 대한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의 일생동안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응답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날로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용조 목사님이 둘이 손잡고 성경공부 하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혼하는 부부가 있는데 손잡고 새벽기도 나오는 부부들 중에는 이혼하는 부부가 없답니다. 기도가 성경공부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힘이 강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이런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해결이 되는데 이 해결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어도 가족들 중에 그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도움의 손길을 느끼고, 기도를 별로하지 않았던 사람은 그런 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절실하게 의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아주 깊은 경륜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설교시간이나 강의를 통해서 다 말씀드렸지만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마치 당신이 기도해야지만 아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나를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기도 속에서 쏟아버리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결국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기도가 주는 두 번째 유익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못하기 때문이고, 또 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운동을 들고 하나는 독서를 들겠습니다. 운동은 안하면 너무 하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면 할수록 이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운동에 취미가 없다는 자가 있는데 열심히 해봐야지만 그것도 취미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쁜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만 좋은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할지 안할지 해봐야지 압니다. 그것도 제대로 아는 사람한테 배워야 됩니다. 그러면 근육이 점점 더 발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문에 가끔 나오는 시커먼 근육을 가진 미스터 코리아처럼 될 것은 아니잖습니까? 요새 그 사람들이 대부분이 약을 주입해서 그렇게 된다고 심각하게 다룹니다. 핏줄이 팍팍 솟고 힘줄이 솟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나올 수가 없답니다. 약물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는 거랍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 하고 부럽다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생활화기에 적합할 정도의 몸이 되면 괜찮습니다. 너무 힘이 없어도 생활하기에 불편합니다. 그리고 너무 살이 쪄도 생활하기에 불편합니다. 한참 살 찔 때는 제일 힘든 게 발톱 깎는 것이었습니다. 살이 쪄서 잘 안됩니다. 눈이 나쁘니까 더 더욱 잘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안경을 써도 잘 안 보이는데 다리 올리기가 힘이 드니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다른 사람이 발톱을 깎아 주는 것도 쉽지 않고, 또 해달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그런 것들을 극복하면서 살자는 뜻에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책 읽는 것을 예를 들어봅시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책읽기를 싫어합니다. 글자로 된 것 그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하면 안할수록 아주 간단한 것도 읽을 수가 없을 정도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까 심각하게 그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했던 그런 지적인 담론과 생각을 촉진하는 내용들을 이젠 아예 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개인의 독특한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사회라는 거대한 탁류 속에 그냥 휩쓸려버려 자기를 상실한 채 흘러가는 아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것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은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라는 것은 ‘자기가 관계 자체와 관계를 맺는 관계다’라고 어렵게 설명을 합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거대한 사회 속에 일반화되어서 탁류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가고 싶다, 이것을 먹고 싶다, 이것을 입고 싶다, 라는 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는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자기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은 사회의 거대한 흐름 자체가 그렇지 않게 흐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현실을 매우 개탄하는 것입니다. 비디오나 영화 같은 것에 빠지듯이 사람들을 푹 빠져들게 하는 그런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때로는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같은 작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그런 탁월한 재능이 부럽기도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것은 어차피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고 누구나 그렇게 변신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진리를 다루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도 합니다. 우리는 신변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다루는 사람들이니 현대인들에 맞게 글을 써야 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 물론 능력의 문제도 있습니다- 어차피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소위 이야기하는 ‘고전’이라고 하는 것들을 거의 안 읽으니까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생각을 할 수 없으니까 좀 더 높은 수준의 글들을 못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되풀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참 어려우나 하나를 잘 읽어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고, 그런 것들이 여러 번 되풀이 되고나면 이런 것을 개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정신의 수준 속에서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더 설명하면 재미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점점 성장해가고, 성도의 가장 큰 복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끄러집니다. 그런데 다시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미끄러졌을 때 그때에 늘 경험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들이 신앙을 통해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지만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조금 더 말하자면 오늘 인용한 성경 구절입니다.
3. 우리의 영혼에 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4. 영혼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혼의 힘’이라고 하면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육체의 힘이라는 것도 가만히 보면 대상과 관련이 됩니다. 내가 힘이 없다고 하는 것을 언제 느낍니까? 평소에는 능히 들었던 물건들인데 갑자기 들 수 없을 때 내가 힘이 없음을 느낍니다. 평소에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물건인데 가지고 다니는 게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에 우리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느끼듯이 마찬가지로 영혼의 힘도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늘 감당하던 일인데 갑자기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부담이 되고 심지어는 화가 나고 짜증이 나면 영혼의 힘이 뚝 떨어지게 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영혼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힘은 관계를 맺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올바를 관계를 맺고, 심지어는 자연의 모든 사물들을 방탕하게 쓰지 않고 절제하며 사용하면서 관계를 맺는 것, 그 힘이 영혼의 힘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히브리어가 “타르히베니”라는 말입니다. 앞에 있는 말은 이인칭 남성형으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뜻이고, ‘니’는 일인칭으로 접미사입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형태가 되면 ‘굳세게 하다. 튼튼하게 하다. 담대하게 하다. 확신에 차게 하다.’는 뜻이 됩니다.
자, 그러면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나의 영혼을 강하게 하셨나이다’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기도의 제목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데 기도를 통해 응답하심으로써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훈련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고 굳세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이 영아부에 봉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년만 봉사하고 나면 팔뚝이 아줌마 팔뚝이 됩니다. 애들을 계속 안고 움직여서 그렇습니다. 여전도사님들도 맨 처음에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이 오면 야리야리한데 한 2년만 사역을 하면 아주 강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강해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강해지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안이 급해서, 그것을 꼭 응답받아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육체의 힘이 필요하고 영혼의 힘이 필요합니다. 육체의 힘은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함으로써 단련이 되지만 영혼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이 강하다 혹은 약하다고 하는 것은 좀 전에 말씀 드렸듯이 영혼의 힘은 본질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 힘에 있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의지에 투영될 때에 영혼이 건강한 상태는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강하면 사람의 지성의 작용도 욕심에 이끌리지도 않고, 오늘 말씀드린 것처럼 착시현상에 휘둘리지도 않고 뭔가를 정확하게 보고 판단할 수 있으며, 감정도 인간의 충동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널뛰지 않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아름답게 반응하고 추한 것에 대해서는 추하게 반응할 수 있으며, 의지도 무엇인가 선한 것에 대한 아주 굳센 의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도 언급하기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한 것을 결심해도 그것이 공수표를 남발합니다. 말로는 선한 것을 결심하는데 자기 속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의지의 굳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래 의지박약가가 아닐까 생각하지 말고 은혜를 받으면 아주 놀랍도록 굳센 힘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나쁜 일은 굳이 영혼이 강하지 않아도 힘이 생깁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완고한 고집과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하는 무모한 마음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그것이 선한 쪽으로 갈 때에는 진짜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영혼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살고 싶은 쪽으로 좍 기우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죄의 가까이 가는 것이고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일평생을 이런 긴장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5. 영혼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선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수없이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지루한 설명이 되겠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영혼의 완전성입니다.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영혼에 얼마나 합치하는 완전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영혼에 대한 완전성이 있다면 또 하나는 내가 나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완전성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나답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덜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가장 나다운 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너와 같을 이유도 없고, 네가 나와 같을 필요도 없으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사람이 되어가고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의도하셨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영혼의 가치가 사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도 인간의 존엄성은 포기될 수 없으며 무엇을 주고도 인간의 존엄성을 바꿀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서 너무 화나는 기사가 자주 나옵니다. 베트남 이야기입니다. 베트남의 나이어린 신부들을 데려오는데, 장가 못 간 사람들, 아니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면 나이는 들었는데 어린 신부가 좋아서 데려옵니다. 현지에 가서 5일 안에 선을 보고 데이트를 하고 결혼식을 하고 첫날 밤을 치루고 돌아오는 것이 4박 5일 안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결혼이 되겠습니까? 결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격적인 깊은 소통이 없는 가운데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잘 산답니다. 제 주위에도 베트남 여성하고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혹 안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사건도 그렇습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현상들을 인간 존엄성의 측면에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돈을 주고 젊은 여성을 내가 사가지고 온다는 식의 사고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한 여자를 데려올 때까지 거기서 어학 훈련을 하고 숙박하면서 교육 받는 것을 모두 합하면 약 천 오백만원 정도 들어간답니다. 그래서인지 여성을 데려온 일부 남자들은 자기가 사람을 사왔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자기소유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 존엄성 측면에서 볼 때엔 그런 식의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좌파냐 우파냐, 노동자들 편이냐 고용주편이냐는 획일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사회를 그런 식으로 계급간의 투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측면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간곡하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단순히 누구를 더 살게 하느냐 못 살게 하느냐라는 식의 구조가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떠한 경우에도 그 존엄성이 존중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피부색이나 국적이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민주사회에서 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우리가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불평등이 너무 심해서 어느 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단호하게 항거하고 그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여담이지만 한일 관계 문제에서도 우리가 민족주의자가 되고 반일주의자가 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음 속으로 반일주의를 꿈 꾼 적은 결코 없습니다. 물론 한일전 축구를 하면 우리나라를 응원하고, 북한한테는 져도 일본한테는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일까지는 아닙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일 청구권 협상에 의해서 돈을 주었든지 안주었든지 –물론 돈을 받았습니다만 그것은 전쟁 속에서 일어난 아주 비인도적이고 불법적인 것들로서 이것을 보상의 전부라고 한다면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상관없이 한국과 일본의 대결의 국면에서만 보지 말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기에 한일관계를 잘 알고 있는 한 유대인이, 게다가 일본과도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일본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상식으로서는 한국인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합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너무 착하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바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가 한사코 원조물자를 보내주었는데 일본은 안 받겠다고 하는데도 제발 받아달라고 물자를 싸서 나른 한국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왜 일본을 가만 내버려두느냐고 합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독일로부터 받아냈습니다. 그러니 한국도 일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모든 사태들, 현재 진행 중인 경제 보복 아래 깔린 과거 위안부 만행이나 군함도 사건을 포함한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진 끔찍한 만행들을 한일 관계의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그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해서도 국가적인 참회를 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배상해야 됩니다. 부끄럽게도 전쟁 중 수없이 베트남에 버리고 간 ‘라이 따이한들’에 대해서, 필리핀에 가서 자행한 일들을 깊이 뉘우치고 국가가 용서를 빌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으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삶의 양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사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혼이 아름답다는 것은 영혼이 완전하다는 것이고, 영혼이 하나님과 인간 자연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님의 선에 합치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 영혼을 강하게 하십니까?
이런 펌프가 있습니다. 맨 먼저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막 틀면 물이 올라옵니다. 새 펌프는 한번 올라온 물은 잘 안내려갑니다. 그런데 오래된 펌프는 양쪽에 고무패킹이 삭으면서 물이 자꾸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펌프가 이렇게 작동하여 물이 솟아나듯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죄나 우리의 불결들을 쏟아버리게 하고, 은혜의 샘이 솟아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죄는 죽이게 되고 은혜는 생생하도록 살아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