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녹취자 : 오희열
제 7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모든 교회와 선교의 많은 문제들은 그 문제점들을 추적해서 들어가다 보면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입니다. 이 질문으로 모아지게 되면서 결국은 올바른 성경적인 신앙을 찾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우리 교회에 영국교인이 출석을 했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다음에 가족에게 돌아가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얘기를 했던 가족들이 굉장히 불쾌해 하더랍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 1)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를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한 2년 전에 여름 수련회에서 다룬 것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두 번째 “왕 같은 제사장”, 그리고 “거룩한 나라”, “소유가 된 백성” 이렇게 나옵니다. 이 “택하신 족속”이라는 표현은 선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모두를 규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인데 왕은 통치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를 서서 죄가 많은 불결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세 번째 “거룩한 나라”, 이것은 구별된 나라입니다. 두 가지 의미라고 가르쳐 드렸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배타적으로 봉헌되었다”는 것입니다. 식당의 한 자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서 다른 사람은 앉지 못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었습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봉헌된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도덕적 완전성이 거룩함인데 그 거룩함을 본받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 자기가 미천함을 깨닫고 도덕적 완전성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네 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했고,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접붙여 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 본질이 사회 속에 나타나게 될 때 선택, 사명, 구별, 사랑,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문제 1-1) 택하신 족속(선택):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아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두 같이 읽겠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전 1:2) 성경을 읽을 때 국어 공부를 하듯이 잘 뜯어서 보십시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합니까?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라고 합니까?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는데 그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미리 아심을 따라서 택함을 받은 것이니 우연히 일어난 사건, 혹은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경에서 “안다”라는 것은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그 말이 사용될 때 대부분 “사랑한다”는 말과 통합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나쁜 놈을 향해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응징을 상징하는 것이 되겠지만 택한 백성에 대해서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알았노니”, “내가 너를 아노니” 하신다면 그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그래서 “안다”는 것은 그런 표현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순종함과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카이퍼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창조되었으나 타락했다”만 생각하지 말고 “타락했으나 창조되었다”라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타락한 것이 엄청난 사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창조된 사람이고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가지셨던 인류를 향한 선한 계획을 지속하고자 하시고 그것이 바로 구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았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창조하셨던 목적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목표들은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이바지 하도록 정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이나 생각이 그렇게 가지런하게 정리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런 창조의 목적에 근접하게 될 때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양심의 가책이나 불안정한 삶들이 상당히 많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청계사 쪽으로 산책을 하는데 여러 개의 현수막에서 눈길을 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울부짖는 사자 앞에서도 떨지 않는” 이런 비슷한 구절이었는데 그리스도인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는 자라도 삼키기 위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역사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담대하게 사는 사람은 무서워서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교 안에도 모든 진리가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면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에서 가르쳐주는 것에는 허위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구원의 길도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길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사상 하나가 있는데 “알라가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한다.” 그리고 “알라는 자연의 일부나 인간 영혼의 일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초월해 계신 타자이시다.” 이런 사상은 사실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입니다. 세계 어느 종교를 찾아봐도 기독교의 이런 사상에 동의를 하는 종교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그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관과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대해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진리라는 것은 원래 모두 하나님의 진리인데 그 중의 일부를 떼어다가 자기들의 세계관으로 가지고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끼워 맞춘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변호, 변증을 통해서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그 진리의 자리가 거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빛처럼 살아간다는 의미의 한 부분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다 배운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1장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하나님이 계시고 미리 아시고 선택을 하십니다. 그리고 창조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중생, 회심이 이루어지고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한 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아시지 않고 이렇게 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것은 목표입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택하실 때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현재가 불안정하고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불확실하고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경험합니다. 연약한 지체들, 혹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면서 매일매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도 우리가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기 때문이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기뻐하셨고 내가 세상에 창조되기 전에 나를 선택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구속하셔서 때가 되매 나로 예수를 믿게 하시고 주님과 살아오게 하셨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나머지 일들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선하신 주님의 손에 그것을 맡기면서 우리의 인생의 미래를 잘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불안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아멘. 그래서 늘 연약하면서도, 매일매일 죽음을 직면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 얼마나 감사한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공로 없이 선택을 얻은 우리” 라고 했는데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1: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오늘 오후 시간에 김성구 목사님이 설교하신 것처럼 선택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 우리의 행위,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고 할 때는 그 의미가 ‘쓸데없다,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그 은혜에 대한 기억이 너무 크니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자신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도덕폐기론이나 도덕무시론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면 할수록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실까?’ ‘나를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내 인생을 향한 계획은 무엇일까?’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길일까?’ 이렇게 생각해야만 삶에 안정성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며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뭔가를 잡았다거나 누렸다거나 명예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잃어버리는 때가 오는데 그것 때문에 불행하고 결핍을 느낀다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문제 1-2) 왕 같은 제사장(사명): 이 성경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설명을 듣기 전에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통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사장은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고 나서 이 제사는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심심하다고 해서 뒤뜰에 불을 피우고 짐승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바베큐 파티이지 제사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런 구약의 불편함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약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배시간이 의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 정확하게 말하면 중재자 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중보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 개인에 대한 중보자는 제사장이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한 사람밖에 없지만 제사장은 아주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만 1만8천 명 정도 있었다고 어떤 주석가는 이야기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많은 제사장들의 역할은, 누가복음에 보면 번차, 순번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봉사를 하는데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가 있으면 제사장의 중재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제사장이요”라고 할 때 이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세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유일한 중보자는 그리스도 밖에 없지만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어서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면에서는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뒤잇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인에게 남아있는 중보자적인 역할이 “기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을 대속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사도운동을 펼치는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목회자는 사도들이 했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죄도 사하고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해주는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는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의무가 아니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굉장히 신성한 중재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섬김 기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드리는 기도에 한해서 지칭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총회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을 빼기로 결의한 적이 있습니다. 대신 ‘섬김 기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중재의 기도, 혹은 섬김기도, 이것은 신학적으로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국가 단위로 제시가 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십니다. 신약과 구약을 압축해서 딱 하나로 데려가면 그 “약속”이라는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단위로 제시된 것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방나라들에게 이스라엘이 중재자가 됨으로써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지식과 사랑과 모든 것의 덕을 입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치되고 이것은 선교대상지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껍질이 깨어지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우리가 모두 연합되어서 거대한 온 세계의 국가를 거룩한 하나의 교회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제사장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의 역할은 아까 설명드렸듯이 이 자리에 불신자들이 오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데 “나”라는 이 한 사람이 교회 구성원이니까 “나”는 제사장 나라 속의 한 백성이 되어서 제사장 나라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커다란 목적의 줄기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잘라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니까 답이 나오질 않는 것입니다. 조금 기도해서 뭔가를 응답받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자만하고 그래서 또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나면 괴로워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살려주면 다시 살려주신 의미, 복을 주신 의미, 나에게 평안과 행복과 심지어 성령의 은혜를 주신 목적을 잘 모르니까 또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의미없는 삶이 계속 되풀이되고, 그것을 확대한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시대에 살아가던 삶인 것입니다. 특히 사사 시대에 그러했습니다.
문제 1-3) 거룩한 나라(구별):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거룩’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ἅγιός)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거룩의 객관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웠듯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느낌을 받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와 관련한 거룩의 주관적인 의미는 죄된 행위로부터의 구별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성별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구별입니다. 나의 행동 때문에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정체성은 세상 백성의 정체성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받은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 속에 섞여 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나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전 인류의 한 구성원입니다. 대륙으로 보면 아시아의 한 구성원입니다. 더 작게 보면 대한민국의 한 백성입니다. 더 좁게 보면 경기도 도민, 안양시민, 의왕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서울 시장 후보가 나왔는데 다들 좋은 사람 같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양시민인 저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괜히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는데 두 정체성이 충돌할 때는 당연히 이 세상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5)”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해주신 목표입니다.
문제 1-4) 소유된 백성(사랑): ‘소유되다’의 의미를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소유되다’는 말의 헬라어는 “페리코이에신”(περιποίησιν)이라는 단어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아서 보시면 참 편리합니다. 한글 개정개역부터 시작해서 NIV, RSV, NIV 2011년, KJV, 그리고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나옵니다. 옛날에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책을 한 가방 가지고 다니며 봐야하는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한 20개씩 펴 놓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어플리케이션에서 보면 한 화면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는 처음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많이 쓰인 단어입니다. 당시 히브리어를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했는데, 이 헬라어 단어를 원래의 히브리어로 바꾸면 “세굴라”()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보석”입니다. 세 단어로 되어 있는데 “사갈”이라는 단어는 “감추다”라는 뜻입니다. 피동여성분사입니다. “감추어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수치를 감추거나 값진 것을 감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신혼 때인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섬뜩했습니다. 외출했다가 둘이 집에 들어갔는데 구두 발자국을 보니 온 집안을 돌아다니고 장롱과 서랍을 다 뒤져놓았습니다. 가져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양말 한 짝을 집어 들더니, “이건 못 찾았겠지?”하는데 그 양말 속에 금반지 같은 것들을 넣어 두고 묶어서 서랍에 넣어둔 것입니다. 그것을 도둑도 찾지 못했습니다.
감추려고 했던 것은 소중한 것이니까 감추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감추고 싶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너무 소중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보석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감추고 싶은 것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우리 남성 여러분은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무릎을 꿇었습니까? 안 했습니까? 오늘도 하나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반지라도 하나 선물해 주십시오. 그러면 아내들이 매일 그것만 볼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것을 적용해서 아내들에게 이야기하십시오. 남편들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면 늘 남편을 바라볼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별로 웃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유”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값진 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랑입니다.
문제 2) 하나님께서는 어둠에 있던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빛은 무엇이며, 빛 가운데에 거하게 됨으로써 인간이 누리게 되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빛은 물리적인 빛, 윤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사는 것”에서 찾아보시면 나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신학적인 빛입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주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선언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신학적인 빛입니다. 신학적인 빛은 반드시 윤리적인 빛을 열매로 맺게 됩니다.
그 다음 문제입니다. 문제 3)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불러주신 것은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덕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그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조금 복잡해 보입니다. 원래의 덕의 개념은 올바를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된 의미입니다. 또 종속적으로 보면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은 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이 덕입니다. 이것을 “아레떼”(ἀρετή)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속성이 영원 안에 있는데 이것이 시공간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자연, 인간, 교회, 이런 것들과 하나님이 맺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유추하거나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끊임없이 도와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국정농단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가 “정권만 바뀌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하는데 대화 내용이 다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씩 둘씩 껍질이 벗겨지면서 진실이 바깥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그것도 결국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성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시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의 시행방식에 대해서 유추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단한 덕의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데도 하나님이 붙잡으신 손을 놓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본받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는 영혼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런 관계를 갖지 못했는데 그 힘으로 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힘이 너무 없으면 하나님과도 관계를 올바르게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주시는데도 하나님을 미워하고 부정합니다. 교회와의 관계도 파괴하고 깨어진 삶을 삽니다. 마지막에 그런 파괴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덕을 선포하는 방법은 언어로 선포하는 방법과 존재로 선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써 ‘진리는 이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 선교사들, 진리를 변증하는 기독교 학자들과 같은 자들은 굉장히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존재자체로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재의 울림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덕을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반드시 그 덕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선포를 언어의 선포와 존재의 선포로 합니다. 존재의 선포는 인격과 삶입니다. 언어의 선포는 사상과 지식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벧전 1:8)” 이것은 목 메이듯이 감격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만 아니라 각처에 퍼졌는데” 울먹이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고 하면서 “정말 훌륭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덕을 선포하는데, 그 유업의 상속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 소망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에 시달리고 죽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우리 육체를 파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1. 민족 명절에 불신 가족을 전도하게 하소서.
2. 명절 예배에 온 가족들에게 큰 은혜를 주소서
3. 구역장(순장)들이 여리고성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받는 본을 보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