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의 정체와 인생의 행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73:28上)
녹취자: 장미연
우리는 언젠간 죽습니다. 그러면 묘비에 뭐라고 쓸까요? 많은 멋있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 묘비에 이렇게 써달라고 미리 부탁을 남기고 죽는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편지에 봉함해서 자기 장례식 때 사회는 누가 보고 기도는 누가하고 설교는 성경 어느 본문으로 누가 설교를 하고 축도는 누가하고 광고는 누가하고까지 다 적어놓고 봉함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교회사에서의 인물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죽으면 전기를 쓰기 위해서 자료들을 많이 모으고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 살아서 전기 작가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죽었습니다.
(예화) 인도네시아에서 왔던 선교사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그 얘기 한 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네들이 신전 쪽으로 선교를 한 번 갔는데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대만 쪽에서 온 목회자였던 거 같습니다. 백 몇 세 까지 산 할아버지가 있더랍니다. 구십 몇 세에 주님을 영접하고 “오래 사시니까 좋으세요?” “네, 좋지요. 내 인생의 마지막 원수가 작년에 죽어버렸습니다.” 정말 복수하는 방법은 오래 사는 거다. 조지 버나드 쇼라고 하는 극작가인 사람이 묘비위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스탕달은 “살고 쓰고 사랑했다” 멋있지요? 돈 많이 썼다는 얘기가 아니라 글을 썼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건 교만 같습니다. 페스탈로치.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노라” 감동이 됩니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 헤밍웨이. 과연 그 사람 같습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쓰시겠습니까? “나의 사랑 열린교회” 그렇게 쓰실래요? “구역장 내 인생에 참 살고, 쓰고, 사랑했다.” 한 번 써보십시오.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문제 1)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고 있는 고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경험이 없습니까? 이 고민의 끝에서 시인이 내리는 결론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여러분이 그러한 고민의 끝에서 내렸던 결론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십시오.
시인이 했던 고민은 ‘왜 의인도 고난을 당하는가? 왜 악인은 형통한가? 정결의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거였습니다. 73편에 나오는 내용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던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이렇게 한 번 본 것입니다. 자기가 다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하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니까 하나님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근데 보니까 악인도 너무 잘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을 때는 그래도 비참하게 죽겠지 그랬는데 그것도 아니고, 죽어서도, 예를 들자면 꽃상여에 싸여서 화려한 리무진에 실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받으면서 장례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원래 정승이 죽으면 가는 사람이 없어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같습니다. 이 시인은 자기하고 그 사람을 비교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아침마다 진책을 당하는 도다.” 아침이 무슨 시간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니까 ‘김 집사 그렇게 밖에 못살아?, 박 권사 내가 준 은혜가 얼만데 너 그거 밖에 못 살아?, 김 목사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게 얼마나 큰데 너 겨우 그렇게 밖에 못 하니?’ 이처럼 진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말합니다. 아침마다 진책을 받고 울고 회개하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시니 하나님 거스르고 사는 인간들은 정말 비극적인 삶을 살겠다. 가서 봤더니 그게 아니라 시험이 들 정도로 잘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에도 잘 죽고. 잘 죽는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삽니다. 갑자기 낙심이 확 듭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시인은 깨닫게 됩니다. 성소에 들어가서 모든 사태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우리의 살았던 모든 삶에 대한 보상과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결국은 이 일정한 시간 내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고 죽을 때도 편안히 죽는 그 사람이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불공평하다.’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고백하는 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렇게 많이 고통을 당하니까 미래에는 어마어마한 복이 있을 거야.’ 그것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매일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고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심,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정말 내게는 큰 복이다. 라고 그 고백을 시인이 하고 있습니다.
문제 2) 자신의 참된 정체를 모른 채 그저 욕망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마땅히 깨달아야할 인간의 참된 정체는 무엇인지 생각을 나누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 밤에 불을 켜 놓잖습니까? 지금은 사실 나방이나 날 모기들이 옛날처럼 많지는 않습니다. 농약을 많이 치고 전자파도 있고 해서. 옛날에는 진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면 불을 켜 놓습니다. 그러면 나방이 새카맣게 날라듭니다. 불에 탁 부딪혀서 ‘앗 뜨거워’ 하고 튕겨 나갑니다. 도망가는 사이에 잊어버립니다. 그럼 다시 돌격합니다. 우리 열린공간에 있는 살충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볼트수가 굉장히 셉니다. 동료가 타서 죽는 것을 보고 갔다가 다시 돌격해서 쾅 부딪혀서 ‘칙∼’하고 죽습니다. 그것처럼 인간이 욕망을 찾아서 갑니다. 그게 결국은 궁핍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물질의 궁핍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궁핍입니다. 삶의 기쁨이 그와 같습니다.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포르노그라피에 빠진 사람들 있잖습니까? 그게 결국은 물론 죄이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기쁨을 얻는 방법을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은 외골수로 사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그게 정서적으로 관리가 안 될 때 굉장히 불안합니다. 살면서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이탈할 정도로 그렇게 되면 안 되지만 인생을 살면서 자잘한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그런데 덜 빠집니다.
(예화) 한 번 상담편지를 받았습니다. 상담은 늘 편지가 이메일로 들어옵니다. 그런 고민을 무지하게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게 “죄니까 그것을 끊어라. 그건 물론인데 그것과 함께 꼭 고려할 것은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많이 개발을 해라. 그것 말고도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참 많다. 그래서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한 번 찾아봐라.” 그러고 거기에서 어려서부터 문화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순화를 위해서. 우리가 영화를 감상을 한다든지, 연극이나 예술 작품이나 놀이나 이런 것들이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항상 그것은 칼과 같아서 잘못하면 미친 듯이 빠져 들어가 버립니다. 근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이탈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것을 어떻게 건강하게 자기 삶을 재활하는데 그런 것들을 활용 할 것인가? 사실은 정말 어떻게 보면 우리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한 문화, 예술, 문학 그 이외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이런 것들을 지나치지 않게 조금 씩 조금씩 하면서 자신의 정서를 관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라들을 욕망을 채워 미친 듯이 갑니다. 그건 하나의 극단적인 예였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돈 버는 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 미친 듯이 거기에 미쳐서 모든 걸 다 끊어 버립니다. 그게 짧게 보면 멋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사람은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한 가지 일만을 일평생 긴장 상태에서 온전히 매진하면서 성자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관리를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존 스터트 목사님 같은 경우는 이분의 책을 쓸 정도였습니다. 새의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누가 일화를 가르쳐 주었는데 한국에서 몇 번을 집회를 와 달라고 요청을 해도 안 오시더랍니다. 그래서 어떤 단체에서 이메일에 목사님이 여기 오시면 비무장 지대에 모시고 가서 아주 볼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새들을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어느 목사님은 자전거 타는 걸 그렇게 좋아하신답니다. 실화입니다. “목사님 우리 지방인데 꼭 집회를 오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지금 너무 선약이 많아서 못 갑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바로 옆에 한 20 키로 정도 기가막힌 자전거 도로가 있습니다.” “날짜가 언제라고 했지요?” 그렇게 무엇인가 그런 속에서 살아가야지 우리들이 롱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영화구경을 다닌다더라 무슨 취미가 있다고 할 때 너무 그렇게 색안경을 쓰고 보면 안 됩니다. 물론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존재를 합니다. 뭔가 부어지는 겁니다. 휘발유통 같기도 하고 머그컵 같기도 한데 육체는 육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부어지고 영혼은 영혼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육체는 이 당에 있는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을 위해서는 천상의 자원이 필요한 겁니다. 이것 두 개가 골고루 잘 갖추어졌을 때 그때 우리가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문제 3) 인간비참의 정체가 궁핍이라면 이것을 해결하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궁핍’ 어느 쪽으로든지 궁핍이 되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너무 궁핍해도 인간이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무리 없어도 나는 그것에 전혀 매이지 않는다. 이럴 수 있다면 또 어느 정도 해방 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인간은 지상의 자원을 매일 매일 매 순간 소비하면서 사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지상의 자원이 없이는 인간이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남들을 돕는다고 할 때 사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들이 내다봐야합니다. 그것은 인류적인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성경에 의하면 선을 행하되 믿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 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제와 선행 이런 것들은 모든 인류가 궁핍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1993년도인가? 터키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가 도달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보냈습니다. 컨테이너 박스에 엄청난 양의 구호물자가 온 겁니다. 사람들이 너무 감사해서 다 받아서 뜯었습니다. 옷부터 시작해서 먹을 거 등등 필요한 침구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 열고 뜯어보니까 밑에서 성경책이 쭉 나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으면 좋겠다. 열심은 이해하는데 그게 이제 선교의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 사람들이 엄청난 물품을 받고 분노하면서 무슬림들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궁핍하기는 하지만 종교를 팔아서 구호품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다.” 굉장히 한국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성경을 넣어서 보냈던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좀 더 많은 지혜가 필요했다 생각을 합니다.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그 사람들이 궁핍으로부터 해방되어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하나님의 자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궁핍이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육체의 궁핍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아까도 오는데 저녁때 팀장들 모임이 있어 도시락을 먹기로 했는데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러워요. 점심 먹은 지 너무 오래 되서 당이 떨어져 송편 두 개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예민합니다. 딱 그 순간을 못 넘기면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영혼의 양식에 대해선 인간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들이 물질에 치우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의 자원으로 충족하게 되고 정신은 하늘의 자원으로 충족하게 될 때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문제 4) 그동안 여러분이 생각해왔던 행복은 어떤 것이었나요?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인생의 행복에 대해 새롭게 정립한 깨달음이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오.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일수록 할 얘기가 굉장히 많을 겁니다. 또 인생을 오래 살았어도 철이 안든 사람들은 할 얘기가 별로 없고 나이가 어려도 산전수전 겪으면서 그 신앙의 연단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알고 있던 어느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세미나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한 1년 동안 제가 인도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 교회의 집사였는데 그때 1987년도인가에 ‘그랜저’라는 승용차가 나왔고 그 승용차 값이 2천 5백만 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엄청난 값이었습니다. 그걸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36살에 그걸 타고 다녔습니다. 그랜저에 시동을 탁 걸면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해.” 사업을 해서 돈도 잘 벌고 가정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시련을 겪고 주님께 돌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 세상에 번영과 세상에 좋은 것들 정말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회개를 했습니다. 젊은 사람도 깨닫는 게 많습니다. 그렇지요? 인간이 결국 행복해지는 것은 사실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모든 것을 아우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십니다.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호등을 잘 지키고 세금을 잘 내고 나쁜 짓을 안 하고 신문에 안 나고 법원에서 출석통지서를 안 받는 것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이 ‘도’라면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원래 ‘도’와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일치하지 않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 ‘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이 ‘도’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참 불가사의한 존재다. 한편으론 하나님을 너무 너무 그리워하면서 또 한편으론 미친 듯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다. 떠나게 내버려두면 돌아오고 싶어 하고 돌아와서 안아주면 도망가고 싶어 하고.”그게 인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불일치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아레테 αρετη’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결국 ‘영혼의 힘’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정확하게 어떤 힘이냐면 타자와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그 ‘덕’이 많은 사람은 이상하고 다양한 사람들과도 잘 관계를 맺습니다.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덕’이 모자라면 자기 입맛에 딱 맞는 사람하고만 아삼륙이 되고 나머지 사람하고는 다 적대적인 관계가 되거나 관심 끊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덕스러운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이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객관적인 ‘도’에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합치가 된 상태가 결국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진실한 거고 그 자체를 도덕이라고 부르는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도에 합치하고자 가려고 하는데 많은 게 이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욕.’ 인간은 자신의 소욕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제일 존중히 여김을 받고 싶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그 사람에게 감투를 씌워주면 잘하는데 일단 감투에서 내려오면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들. 우리나라도 그런 정치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결국 자신의 소욕을 중시하는 사람들인 것을 봅니다. 그 다음엔 ‘무절제.’ 절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에서 이탈합니다. 그 다음에 ‘올바르지 않은 욕망’ 이런 것들 때문에 계속해서 이 덕을 흐트러뜨리면서 바깥으로 튕겨 나가게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마음을 드림’, ‘절제’와 같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런 작용들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덕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걸 가능하게 합니다.
문제 5)최고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복입니다. 자신은 올바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고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구체적으로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오.
최고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행복하고 명예 때문에 행복한 것은 별로 선교의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면 그건 다른 사람도 하는 거니까. 근데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즐거워할 때 사람들은 행복의 원천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공과의 전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