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참된 행복의 길
녹취자: 이경순
시편 73편 기자는 인생의 모순을 보며 고민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정론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신정론이란 신은 정당하다는 것인데 어떻게 신이 정당할 수 있겠느냐 무슨 뜻이냐 하면 악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이 올바르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고민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우리에게 다 있을 것입니다.
문제 1) 지혜란 무엇이며, 이 지혜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대부분 아이 그 사람은 지혜가 없어 이런 것들은 대부분 자연적인 지혜를 우리들이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자연적인 지혜에도 관심을 갖지만 그러나 종교적인 지혜에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지혜의 정의는 우리의 사고를 명료하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단어를 쓸 때 그것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내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몇 년 전에 교회에서 나누어 드린 신학용어해설집 나누어 드렸는데 어플에 들어가서 김남준 치면 김남준 어플이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김남준 서가라고 나옵니다. 읽은 책이 없습니다. 하고 나온 곳에 들어가면 신앙과 인생의 어울림 이것과 관련된 책이 나오고 사는 것과 아는 것의 어울림 하고 나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만들어줬습니다. 이천만원 이상 들어간 것이랍니다. 책에 들어가면 예를 들어서 부교역자 파일을 쳐서 미리보기 하면 책을 사서 모을 수도 있는데 여기에 들어가면 핸드폰에서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해설집이 나옵니다. 무료로 주는데 다운을 받으면 책을 읽다가 바로 치면 다운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남준 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어플을 받으셔서 핸드폰에 깔면 됩니다. 공짜로 제공이 됩니다. 굳이 두꺼운 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라고 하는 것이 데피니션(definition)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무엇이냐.’ 인데 지혜는 사물들의 원리들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는 능력입니다. 지혜와 지식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식이 없이 지혜가 생겨날 수 없지만 지식은 많은데 지혜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가리켜서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앎이지만 지혜는 이것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아는 판단능력입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것과 관련될 때에는 자연적인 지혜라고 부르고 도덕과 관련될 경우에는 도덕적 지혜라고 부릅니다. 같이 일을 해보면 구역식구들 중에서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탁탁해서 아주 깔끔하게 하는 일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부터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지혜가 좀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발을 하고 발전을 해야 합니다.
‘신자에게 지혜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이 있는데 선한 일로부터 시작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사람은 살아있는 한 어떤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생리적으로 주어졌고 어떤 것들은 후천적으로부터 생겨나고 어떤 것들은 교육을 통해서 심겨지고 하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이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향성이란 인식하거나 의지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이 모든 작용이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것들이 경향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미국의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걸렸는데 알고 보니까 수백억의 재산가의 딸이었습니다. 플라스틱 카드 들고서 자기가 원하는 것 다 살 수 있었습니다. 성향이 이속에서 무엇을 훔치는 성향을 가지고 생겨난 것입니다. 대도 조세형이라고 있었는데 서른 몇 살에 도둑질하고 고관대작들의 집을 다 털고 물방울 다이아도 다 훔쳐가고 높은 사람들은 자기는 절대 도둑 안 맞았다고 하고 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교도소 가서 15년 살고 나와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초정해서 강사로 정신없이 불려 다녔습니다. 나는 조금 불안했습니다. 조금 빠르다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고 좀 두고 본 다음에 부르지 강단을 내어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3년 간증하더니 일본에서 절도죄로 붙잡혔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보안시설이 얼마나 제대로 되어 있는지 검사해 보았답니다. 지금도 교도소에 있을 것입니다. 자꾸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경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경향성이 좋은 것이 생겼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좋은 게 아니라 별로 안 좋은 것이 생겼을 때에는 그만큼 인생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내재된 경향성이 올바른 인식 및 의지의 수행을 막습니다. 잊어버리지 말고 평생 기억하셔야 될 그림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는데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은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사실은 실제라기보다는 기능입니다. function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이 작용하는 function입니다. 기능입니다. 영혼과 마음이 있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 느끼는 것은 마음 안에서 모든 게 일어납니다. 선과 악을 무엇을 택할 것인지 마음 안에서 결정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수없이 싸웁니다. 여기서 끊임없이 마음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선과악의 갈등이 일어나기도하고 많은 갈등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육체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치 수많은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공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function인데 실제는 영혼입니다. 마음의 성향은 영혼과 육체를 들락거리는 통로입니다. 마음으로 들어온 어떤 생각들이 반복되면서 영혼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깨닫습니다. 변화가 됩니다. 이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혼의 변화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행동의 변화도 가져옵니다. 요약해보면 영혼 안에 경향성이 생기는데 이 경향성이 결국은 힘입니다. 마음 안에서 힘입니다. 습관도 힘입니다. 모두 힘입니다. 뭔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그쪽으로 자신의 알지 못하는 무엇이 밀어붙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영혼 안에 있는 것은 인크리네이션(inclination),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반영되면서 성향이 됩니다. 이게 디스포지션(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것이 자기 몸에 익숙해지면서 습관이 되는데 이것이 해빗(habit)입니다. 해빗(habit)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비투스(habitus)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것인데 반복된 습관으로 형성되는 특질입니다. 그것이 해빗(habit)입니다. 이 도표를 마음에 그려놓으시면 설명하기 좋습니다. ‘영혼-경향성’, ‘마음-성향’, ‘육체-습관’ 이렇게 그려 놓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방황하면서 어느 길도 갈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를 앎으로써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한 다라고는 것은 경외하며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게 결국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원천입니다.
문제 2)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결핍을 느끼지 않고 자족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일까요? 스스로 살아가는 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한사람은 뇌가 있습니다. 무뇌는 아닙니다. 한사람은 장기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본성적인 지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성의 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일반계시의 빛입니다. 양심, 그 다음에 인간의 도리에 대한 반성, 생각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과도한 욕망을 억제하고 삽니다. 그래서 불신자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욕망을 절제하며 사는 것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악인에 비해서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또 이런 사람들이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지만 잃어버릴 가능성을 극복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자기가 어떤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잃어버려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진정행복하려면 조건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어야 되고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환경이나 시간 어떤 것에 의해서 박탈되지 않을 수가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또 한사람은 굉장히 불행한데 결핍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며 살지만 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있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런 자기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비참을 비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자기기만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 3)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확증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공과 공부했던 『인간과 잘 사는 것』 산상세미나에서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들어보셔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전부다 핵심으로 요약을 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관계입니다. 관계를 잘하고 있으면 그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관계라고 할 때 관계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가는 우리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입니다 오늘날 영화를 보면 사람을 굉장히 외롭게 합니다. 어저께 제가 고등학생들 데리고 공각기동대에 대해서 특강을 했는데 혹시 공각기동대 보신 분 있으신가요? 문화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공각기동대 한번 보세요. 만화 원작을 봐야지만 사실은 진짜인데 재미는 없습니다. 지루합니다. 할리우드판보세요. 변색되기는 했고 어설프게 끝났는데 보기는 편합니다. 한번 보세요. 인터넷으로 보세요. 돈 내고 보시는 거 아시죠? 오늘 저녁때 보세요. 주일날 그런 것 봐도 됩니까? 하는데 괜찮습니다. 볼 때 뭔가 이 안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목사님이 말했으니까 한번 내가 보자하고 보세요. 다 보고나면 마지막에 어떤 느낌이드냐면 ‘에이 만화네.’ 그런데 굉장히 많은 철학적인 도전과 질문들이 사실은 만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으로는 인간이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인간이 누군가를 의심해 보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 일본사람들과 프랑스사람들 같습니다. 그만큼 엄청나게 외롭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 다 보면 그런 모든 기계 문명 속에서 인간은 미친 듯이 자기를 위해 기계를 만들었는데 기계에서 말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낍니다.
우선 목사들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로봇 목사가 자기보다 설교를 더 잘합니다. 목사 때문에 골치 아플 필요 없이 로봇 하나 사다 여기다 놓으면 그것도 원하는 것 교인들이 투표해서 이번 주 무슨 설교 20분, 30분, 40분. 신학적인 설교, 교화적인 설교, 감정적인 설교. 한없이 인간이 외로워집니다. 공각기동대를 다 보고나서 느끼는 것이 한없이 인간이 외롭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결국은 관계입니다. 그 영화는 관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그래서 결국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냐면 나라고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는 내가 누구인지가 확정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를 끊어버리면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게 입각점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인간이 누구냐고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답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학생들하고 카프카의 변신을 할 때보다 어저께가 더 뜨거웠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도 마지막에 느끼는 것 그것뿐만 아닙니다. 많은 현대의 소설들이 인간이 내가 누군가를 하는 것을 규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불안한 것입니다. 쾌락에 자신을 던지고 그담에 정신을 산만하게해서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고 있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담에 똑같은 논리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제멋대로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외로움을 언제나 가져옵니다. 자식들 다 큰 다음에 한없이 외로워하는 그런 분들 있는데 그것도 성숙의 과정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인간의 사랑으로서 연연해지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내 인생의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나는 그 사람의 사랑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게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사랑받았으므로 행복하였노라가 아니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 하는 그 아름다운 시가 통영에서 나왔습니다. 유치환의 시입니다. 그런데 불륜에서 나온 시라는 것을 아세요? 모르실겁니다. 어려운 인생입니다. 시만 남기고,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돼서 한 사랑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관계를 사람과만이 아니라 자연세계와도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사랑은 영혼을 가진 개체들과만 성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지만 개를 사랑한다고 그러는데 사랑한다는 말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의입니다. 좋아한다고 그렇게 하세요. 사랑 해를 남발하지 마시고 선의로 그래서 목사들이 요새 곤혹해 하는 게 있습니다. 개 장례식 안 해줘서 교인들이 삐쳐서 교회를 옮기고 아주 큰 시험에 드는데 그중에 권사님들도 있답니다. 그런데 나는 좀 해줄 수도 있지 나는 그런 생각입니다. 왜냐면 어차피 개위해서 장례를 드려주는 게 아니라 가족을 위로하는 것인데 가족들이 개를 너무 좋아했는데 그 개가 죽었다 그것을 담임목사가 다 쫒아 다닐 수 없겠지만 누가 가더라도 위로해 주고 목양적인 관점에서 많이 생각해보았는데 나는 가서 해줄 것 같아요. 그게 개가 아니라 돼지를 잃어버렸어도 나는 갈 것 같아요. 악어 기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닭을 끔찍히 새끼처럼 좋아합니다. 고양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엄청난 상실 속에 있을 때 죽은 개를 어떤 목사는 오버해서 개도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러는데 그건 좀 신학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거 같고 그렇게까지는 안할지라도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고 그것보라 결국은 개도 간다. 그러니까 주님을 잘 믿어라 난 그럴 것 같아요. 그대의 지체들을 개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살아라. 그것이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그거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함부로 막 보신탕 먹는다고 자랑하지 그러지 말고 상처받는 사람들 무지 많습니다.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숨어서 몰래 드세요 그렇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럴 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문제 4)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현자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인의 품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신령한 지혜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위대한 경륜에 있어서 지혜가 되시고 우리에게 지키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심으로서 우리가 실제로 지혜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니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두 가지입니다. 지혜와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야 됩니다. 지혜는 지성과 관련된 것이고 사랑은 의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고 이것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의지를 감화시킵니다.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로부터 두 기둥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지혜와 사랑을 주셔서 서로 자연을 정복하고 서로 관계를 맺게 만드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목양하게 하시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하고 성령으로 은혜를 주셔서 지식과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마지막 세계가 모두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충만한 지식과 충만한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 다음에 품격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정체성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정체성 두 번째는 관계있어서 덕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 덕을 베풀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품격이 있는 삶입니다.
문제5) 어떠한 삶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신령한 지혜를 어떻게 전달하셨습니까?
어떠한 삶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까?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신령한 지혜를 어떻게 전달하셨습니까?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살아야 할지 모르고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첫 번째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결국은 인간의 참된 행복은 생명에 있는데 영생에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하나님을 아는 그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행복한 상태가 단회적인 회심으로 도달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가 무엇이냐면 죄된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작용이지만 그러한 작용을 성령님께서는 지식과 사랑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자신 있게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이 무엇에 대한 지식이냐 하면 그리스도에 안에 이 모든 세상의 이치에 대한 지식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서 에서 사도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 지식을 가지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함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결국은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