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일사각오의 신앙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녹취자: 조경훈
1. 이사야 53장 9절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됩니까?(153-154)
여기에 제가 사역을 달았습니다. 사역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지 한 번 보십시오. “백성들은 메시아에게 죄인들과 함께 한 무덤을 할당했으며, 그의 높은 무덤은 한 부유한 자와 함께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속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하고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한 번 관찰 해 보겠습니다.
“백성들은 메시아에게 죄인들과 함께 한 무덤을 할당했으며…” 왜 그랬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아주 하찮게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과 한 패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무덤을 할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욕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높은 무덤은 한 부유한 자와 함께 하였다.” 에서 왜 이것을 높은 무덤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솟아나게 했다든지 그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 중에 한 명이라고 여겨서 죽였고 무덤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그렇게 할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고 한 부유한 자와 함께 있게 하셨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높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부유한 자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나 악한 자들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죄 없이 잘 살다가 죽었는데 국립묘지는 못갈 망정 그런 데는 없지만 흉악한 죄수들만 모아놓는 무덤이 있는데 장사도 안 지내고 시체를 던져버리고 흙으로 던져버리는 그 곳에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불명예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유한자 혹은 존귀한 자와 함께 있게 하셨는데 왜냐하면 그 분은 잘못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말로도 잘못한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라고 풀이가 됩니다.
그래서 묘미가 있습니다. 그림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 지내셨는데 죄인들과 묻힐 그 분을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서 건져내셔서 그의 무덤에 안치하신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신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돌이 굴러갔다고 했는데 그런 식의 무덤의 문은 아무 무덤에서나 선택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라고 합니다. 굉장히 고급스럽게 엄중한 중요성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무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죽음이 인간의 숙명이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처음 인간에게, 이후 태어난 인간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죽음은 각각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 봅시다.(155-158)
여기서 크게 우리들이 거론할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담과 하와 그 사람들이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가보지 못한 것은 언제나 무섭지 않습니까? 한 번도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치 못했던 이후의 세대,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이 자연스러운 적이 없었던 그리스도가 맞이한 죽음,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머리띠도 없었을 땐데 이렇게 하고 다녔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여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옷까지 입혔습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 같지가 않고 자라나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나온 옷 같습니다. 어쨌든 옷을 입고 머리띠까지 하고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이렇게 쓰는데 이것이 이렇게 되면 붉다는 뜻이고 이렇게 되면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다 같은 어근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담은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일반명사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고유명사가 사실 보통명사가 된 것입니다. 부르스타 회사에서 만든 부르스타가 보통명사가 되었는데 이와 같은 것이 아담의 경우입니다. 하와는 이렇게 쓰는데 아마도 이 이름은 ‘살아있다’ 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생명이라고 봅니다. 하와인데 영어로는 이브가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사이에 라틴어 성경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옮길 때 그대로 이것을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브라는 단어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생명나무 실과를 주셨습니다. 이 실과는 신비한 실과가 아닌 보통 실과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 금지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고 너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따먹고 범죄를 하게 됩니다. 이후에 심각하게 물밀듯이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면서 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모든 인간들과 모든 자연적인 피조물들이 하나의 사랑 안에 있었고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만물들은 인간에 의해 선의를 받으며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인 자연의 질서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에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슬러서 원수가 되어 살게 만들고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는 어떤 도덕적인 필연성을 지니게 만듭니다.
내일 자유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필연성에는 물리적인 필연성과 도덕적인 필연성이 있습니다. 당구공을 때리면 모서리를 맞고 또 다른 공을 맞으면 맞은 공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필연입니다. 만약에 누가 완벽한 조건을 맞추어서 공을 때리는 것을 재현한다면 천 번을 때려도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물리적인 법칙이 적용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정확합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수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학은 그런 것들의 정확한 규칙을 발견하는데 상수(oonstant)에 무엇을 도입하든지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1,000 이하에서는 A값이 나오고 1,000 이상에서는 B값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필연성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속에 악이나 선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을 도덕적인 필연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 주체가 되서 하나님과의 판단과 상관없이 자기 좋은 데로 살려는 필연성이 인간에게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욕망이 아주 강하게 발현이 되고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의 비존재(non-existence) 없는 것을 열망하게 됩니다. 미움이 그런 비존재에 대한 열망입니다. ‘진짜 보기 싫어.’ 이 뜻은 적절하게 통제하니까 그것으로 끝나지만 욕망이 강력하게 확장이 되면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살인의 뿌리를 미움이라고 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움의 문제는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지금은 거의 안 듣는 시리즈인데 지하실 교회에서 1995년쯤의 설교가운데 ‘미움과 용서’ 라는 5개로 된 시리즈인데 4번째 설교를 중간까지만 하고 잘렸습니다. 왜냐하면 지하실에서 불이 나 정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저는 설교를 하고 교인은 들었습니다. 전기로 녹음을 한 것이라 녹음이 안됐습니다. 그것이 풀려져 있는 게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라는 책으로 나온 것인데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충분히 인생이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가족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주적으로 미움의 문제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인류에 대한 우주적인 계획에 정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미움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항상 내포합니다. 그것이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을 자신의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 기사에 의하면 아벨도 제사를 드리고 가인도 제사를 드립니다. 전통적으로 해석하기를 아벨의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고 가인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는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하나는 안됐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충분한 설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나오는 제사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풉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제물이 어떤 재료였는지 상관없이 그 제사가 열납된 것이고 그것은 곧 그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인의 경우에는 그 반대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문제를 풀 때 이렇게 봅니다. 제물을 드린 것도 깊이 관계가 있다고 보고 제물의 종류도 믿음과 관련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후 즉시 희생의 제사에 대한 계시를 주셨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단언을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가인과 아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볼 때에 다른 것이 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시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을 보면 시기가 납니다. 외모에 대해서 추호의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별로 시기심이 안 드는데 내가 지식에 관심이 있으면 누가 시기가 납니까? 나보다 동일하거나 훨씬 어린 나이인데 내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 우리는 시기심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기심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이고 나는 나의 삶입니다. 내 삶의 고유성은 지식이나 외모 물질적인 환경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독특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공감을 해야 합니다.
내일 설교를 좀 어려울 것이지만 쉽게 할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보십시오. 자유의 문제를 3년 내지 5년 가까이 내가 씨름하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삶이 있는데 이것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 의해 반복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전 세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마우지라는 새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뿔 달린 흰꼬리 원숭이가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요리해서 먹을 것이라면 둘 중에 더 맛있는 것이 우등하겠지만 그런 용도를 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밖에 안 남았다면 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비교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어쩌면 저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되면 분명히 나에게는 저 사람보다 다른 어떤 점에 있어서 저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다면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70억의 모든 사람이 하나 쯤은 6,999,999,999명 보다 낳은 것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능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불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만의 아주 독특한 삶에 내 인생에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일깨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전 세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 새를 뜨거운 물에 털 뽑아서 구워먹고 그 다음 점심이면 배설해 버리는데 최후에 남은 한 마리가 멸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을 찬송해 줘야 됩니다. 그런 사람을 주셔서 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바를 저 사람의 탁월한 재능으로 기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약에 그가 자신의 좋은 재능을 가지고 기여할 줄 모르고 나쁜 짓을 행한다면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되 올바르게 재능을 사용하지 못한 그 사람을 매우 불쌍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비록 너 만 한 예술적인 재능은 없으나 그렇게 못된 짓 하며 살면 안 된다고 사랑으로 계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계는 빛나고 내가 그 사람처럼 잘나지 못한 보람이 있습니다. 동의되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뭘 쫍니까? 쫄 필요가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화보에 나올만한 미모를 지닌 사람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누가 몇 세기에 한 번 나올 만 한 기가 막힌 철학자나 사랑가나 예술가나 문학가가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톨스토이 같다면 누가 책을 보겠습니까? 자기 책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주체가 돼서 살아가가는 것입니다. 가슴에 와 닿습니까?
두 번째로 인간의 숙명을 보겠습니다. 인간이 생명이 충만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경험주의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학습을 통해서 사랑을 배운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사랑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태어날 때 아담과 하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즉시 즉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속에 선행된 어떤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보다는 작고 곤충보다는 큰 어떤 날아다니는 물건을 발견하게 됐을 때 저게 뭘까? 하면서 이 안에서 파일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주루루룩 하고 움직이면서 동물 아니고 광물 아니고 플라스틱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하는 것은 이미 이 속에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이 왜 생명입니까? 육체의 생명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육체는 먹고 마시고 적절히 해야 삽니다. 설교 준비를 일주일 내내 했는데도 모자라서 하다가 결국 내일 설교할 것을 두 토막으로 나눠서 2주로 나눴습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었는데 요만한 만주 세 개 하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니까 힘이 솟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힘은 음식과 마실 것들을 통해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육체의 생명인데 영혼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살아있게 만드는 그 힘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만들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의로 대하도록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바로 사랑이니까 생명이 관계 속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쉽게 시기하고 누구하고도 잘 지내지 못하고 일은 둥글고 마음은 네모지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안살 수 없는 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속에서 알지도 못하지만 혹은 안다고 하더라도 생각만 할 뿐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런 생명이 부재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구원하셔서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말 쓰지 않습니까? 순장님. 저 너무 곤고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O miserable man that I am!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모자라서 곤고한 것입니다. 네 끼만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 육체가 매우 피곤한 것을 느낍니다. 육체의 생명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많은 죄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죄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이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이 죄에 대해 형벌을 당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기운을 매일 매일 느낍니다. 도저히 살기가 싫고 너무 너무 곤고한 영혼의 죽음도 경험합니다. 육체의 죽음도 느낍니다. 어제까지 괜찮은데 온 몸이 떨리고 뼈가 쑤시면서 도저히 일어나지도 눈도 못 뜨겠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면 팔다리를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고 땅 속으로 깊이 꺼져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생명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상당히 소진되거나 박탈된 것입니다. 박탈은 사고 같은 것에 의해서 충격을 받으면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면서 생명의 기운을 급속하게 박탈을 당하는 것입니다. 노화는 천천히.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너는 죽어야 마땅 하느니라. 그래도 네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음식을 만들며 봉사했으니 하나의 자비를 베풀겠노라. 어떤 방법으로 죽기를 원하느냐?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폐하. 늙어서 죽기를 원하옵나이다. 늙으면 죽음의 기운이 천천히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고 사고는 순간적으로 박탈당해 버리는 것이고 타살이나 치사는 한 번에 박탈당해서 생명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에 우리는 매우 익숙해 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과는 상관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종속되시고 죽음의 모든 고통을 다 겪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짐작 할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3.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에서 알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온유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온유함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습니까?(159-161)
하나님께 자신을 잠잠히 내어 주신 온유함입니다. 인간이 나에게 악을 행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온유해 지는 비결은 참아야지. 참아야지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냐하면 내 인생의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있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일어난 모든 일은 좋은 일이라면 좋게 될 것이요 나쁜 일이라면 하나님이 그 나쁜 일을 좋게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 때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에 연관을 어떻게 지을지 모를 때에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찬양)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유명한 스패포드(H. G. Spafford) 선교사가 대서양에서 모든 가족을 잃어버립니다. 나중에 깨닫고 배를 타고 가족들이 실종된 바다를 지날 때 슬픔을 누를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은 찬송가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담대함이고 믿음의 유익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용의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맡기시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4.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은 무엇으로 성취됩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일사각오의 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61-164)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대신 나를 살리셨으니 이제 나의 인생은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삶이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단순한 개인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죽으시면서도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하셨던 행복한 그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얘기합니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도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단 하나도 혼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복합물(composite things) 복합 사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것 하나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이 속에 결합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적하고 추적해서 내려가는 단위가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분자, 원자, 쿼크 더 작은 단위까지 내려가지만 사실 그것도 인간이 다 발견한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세계는 세상 끝날까지 다 추적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모두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훌륭하게 하나님의 존재의 모습을 본 뜬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로 존재하지 않게 만드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상록을 인용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 정신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면 시간을 흘러 갈 것이고 당신도 갈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결국 세상 만물이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존재하듯이 나라는 인간의 존재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자기 자신은 그 안에서 영혼과 육체 영혼에서 나오는 작용인 인간의 지성과 의지, 이런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상호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나의 커다란 우주 속에 함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이라든지 가치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관계의 설정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가가 정의되는 것이지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거 다 상관없이 다 필요 없고 나는 오늘 행복하면 제일이야.’ 하고 사는 것은 광기입니다. 그런 광기들을 니체나 이후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배울 것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에 대해서 이루어진 모든 사유가 단절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문학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왜 그것이 중요하냐 하면 인문학이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최종적인 답일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보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세계와 우주를 향한 경륜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아서 내가 잘생겼든지 못생겼든지 많은 재산을 가졌든지 안 가졌든지, 내가 지식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뛰어나든지 뛰어나지 않든지, 내가 예술적인 탁월한 재능이 있든지 없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의미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보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애국자에게는 대통령이 되냐 장관이 되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를 일사각오의 사랑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죽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나를 위해 죽을 차례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한 사랑 안에서 발견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우리들이 조금만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것은 정말 비이성적인 일입니다.
5. 이사야 53장 9절의 하반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선한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두 가지 깨달음은 무엇입니까?(164)
죄인으로 죽으셨으나 존귀하게 안치됨과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죄인들의 무덤은 그리스도를 깎아 내리고 죄인 중에 하나로 보려는 하나의 시도였는데 부자의 무덤에 묻히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자의 무덤에 묻히셔서 예수가 존귀해 지셨다고 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모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리마대 요셉을 부자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복음의 빛이 비췄고 그는 담대하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른 구원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는지 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 대속의 효과와 복음의 능력은 빈부와 귀천의 구별 없이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온 우주에 미친 대속의 효과와 상관없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167)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의 의미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하게 전하는 길은 여러분들이 남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다르게 예뻐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해서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커다란 우주적인 경륜 안에 놓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사는 것도 두렵지 않고 죽는 것은 더더욱 무섭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이나 돈에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런 데서 찾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남다른 삶이고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것을 알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21절을 읽음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