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복종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녹취자: 김명진
위대한 기독론이 담긴 우주적인 기독론의 서신서인 골로새서에서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사소해 보이는 삶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이루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들에 종사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우리의 삶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 우주적인 경륜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정에 주는 전체적인 교훈 중에 첫 번째 교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명령 합니다. 아내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아내들에게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을 우리에게 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남성의 편을 들기 위해서, 남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가정의 질서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 특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부모와의 관계가 있고 아래로는 자녀들과의 관계가 있지만 가정의 기본 단위는 아내와 남편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아내와 남편의 결합이 부모와의 관계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경우에는 우선권을 부부간의 관계에 두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기초로 해서 이하의 모든 질서들이 기초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남자를 먼저 흙으로 만드십니다. 이 흙이 히브리말로 ‘아파르’라는 말이 티끌입니다. 아주 하찮은 것으로부터 인간의 육체가 창조 되었고, 육체는 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이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아다마’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보면 그것은 ‘땅’이라는 단어에서 아담의 이름이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돔’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봅니다. ‘에돔’이라는 뜻은 붉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두 단어는 어근이 같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땅은 진흙땅이 많았기 때문에 땅 자체가 붉으니까 거기에서 ‘에돔’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땅, 티끌, 아담, 이 모든 것이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자는 그렇게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를 잠들게 한 다음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왜 하나님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만들지 여자를 남자의 몸에서 나오게 했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남자가 여자 없이 홀로 사는 시간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면서 아담이 홀로 거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면서 하나님이 아담이 홀로 있다는 것을 몰랐다기보다는 아담으로 하여금 혼자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신 후에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 그가 아담의 마음에 매우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여자들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남자의 몸에서 만들어졌다. 남자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우월하다고 생각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땅바닥에 늘 있는 흙이라는 원재료가 더 고급 재료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갈비뼈가 고급 재료입니까? 또 아무래도 신제품이 이전에 나온 제품보다 훨씬 더 우수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은 이 인간의 몸 중에서 많은 뼈와 살이 있는데 갈비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에서 여자를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에게 짓밟히고 지배 받도록 발바닥의 뼈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가까운 곳에서 남자의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그 뼈와 살을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남자에게 주셨던 똑같은 영혼을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셔서 여자에게도 주셨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동등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비를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위하여’라는 전치사와 ‘돕는 배필’을 보면 ‘위하여’는 누가 누구를 위하여 기여한다는 뜻이 있고, 돕는 배필이라고 했으니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주장을 하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남성 우위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오해입니다. 히브리어 텍스트를 직접 보면 ‘에제르케네게또’라는 말이 나옵니다. ‘케네게또’라는 단어는 히브리 전치사입니다. ‘케네게뜨’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말에는 적합한 표현이 없는데 영어에는 적합한 표현이 있습니다. Corresponding to 라는 단어입니다. 그에게 맞먹는, 영어로 Correspondent는 펜팔을 주고받을 때 상대방을 뜻하는 것입니다. 외무부장관이 한국의 Correspondent를 만났다는 것은 한국의 외무부장관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동등한 관계에서 Correspondent라는 단어를 쓰지 하위에 있는 상전과 종에게는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저는 25년 전에 히브리어 본문을 읽으면서 그것을 발견하고 한참을 기뻐했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남녀 성 평등주의자입니다.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 사실은 정확하게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이 우리말에는 수식어 형용사 하나에 명사가 나오지만 히브리말로는 ‘에제르’라는 하나의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시편에 그 단어가 나올 때 주체가 하나님으로 연결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의 뜻은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니,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로다. 여호와의 도우심이 내게 가깝도다. 이때의 단어가 ‘에제르’인데 군사용어입니다. 전쟁터에서 나옵니다. 전쟁터에서 우군과 적군이 치열하게 싸우는데 아무래도 열세입니다. 밀리고 있는데 패배할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 저 멀리에서 흙먼지를 날리면서 함성 소리를 내면서 응원군이 달려옵니다. 그 응원군이 ‘에제르’입니다. 그래서 패할 것 같은 전쟁을 뒤집어서 승리로 바꾸어주는 군대를 가리켜서 ‘에제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텍스트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게 볼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려고 하면 더 이야기가 많지만,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인간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이 세상의 기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인간의 육체의 삶은 철저하게 물질의 원리를 잘 따라야 합니다.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습관을 몸에 배게 해서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건강에 보탬이 되게 살아야 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쉬는 것, 자는 것, 운동하는 것, 모든 것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기는 덜한데 미국에 가보면 불가항력적으로 뚱뚱한 사람이 있는데 보면 ‘저렇게 할까?’ 마음먹은 대로 하면 안 되고 몸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모든 물질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가 행복해지고 건강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을 추위로부터 보호하고, 배고픔으로부터 보호하고,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물질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자신을 그렇게 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이 세상의 자원들을 마련하고,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갑니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체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정신의 작용에 의해서 지배되고 정신과 영혼이 올바른 방향으로 육체의 삶을 이끌어 줄 때, 그 삶이 덕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땅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온 영혼은 이 땅에 있는 먹고 마시고 입을 것으로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온 또 다른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몰랐던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곳간을 크게 짓고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으니 내 영혼아 즐기자.”라고 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그렇게 먹고, 마시고, 호화롭게 연락하는 생활로 영양을 공급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진리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그 만나, 그 생명의 말씀,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건강한 영혼이 되어서 우리의 육신을 지도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의 생명은 영혼이요,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사랑, 하나님이 그렇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존귀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혼 사유 가운데 가장 황당한 사유는 성격차이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하나님이 남녀를 창조하실 때 성격차이가 있게 창조하셨고, 부부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성격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격차이가 없으면 연애할 때는 신이 나는데 결혼할 때는 보따리를 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보, 오늘 기분도 그런데 까짓것 우리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 가서 제일 비싼 음식이 은그릇에 나오는 그 멋있는 음식을 먹고 즐겨볼까?” 할 때 아내가 “좋아.”라고 한다면 한 끼 먹고 와서 보름은 굶어야 하고 몇 번 그렇게 하고 나면 카드빚에 시달립니다. 그럴 때 오히려 행복하려면 “여보, 오늘 기분도 그런데 제일 멋있는 호텔에 가서 기분 좀 내게 가서 밥 먹자”라고 할 때 아내가 된장찌개를 탁 갖다 놓고 “중심 잡으시오.”이렇게 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히 아담을 창조하시고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첫째 명령을 문화 명령, 혹은 노동 명령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화가 노동을 통해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이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이 말씀 안에 여자의 창조가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생육하고 번성합니까? 당연히 여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명령은 종교 명령, 혹은 신앙 명령입니다. “모든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것이 종교 명령입니다. 종교명령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문화 명령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1965년경에 린 화이트라는 학자가 『세계의 환경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 논문은 세계적으로 환경연구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획기적인 논문이었습니다. 두껍지는 않습니다. 그 논문의 결론은 오늘날의 비참한 환경의 파괴의 책임은 기독교의 가부장적 가르침에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그 논문의 논지에 모두 동의 하지는 않지만 결론의 상당부분은 맞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인간이 이 모든 세계의 주인이고 가장 존귀한 자라는 사상을 갖고,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신 세계는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을 전적으로 잘못 해석을 했습니다. 옛날 전제국가 개념으로서 구절을 해석을 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성경의 장면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업어 나르시는 하나님, 그리고 40년 동안 보호하시는 하나님, 가나안의 타락한 역사 속에서도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에게 와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는데... 집나간 아들을 눈이 짓무르도록 매일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엄마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 남자와 여자에게 투사시켜서 그 둘이 서로 정신적으로 결합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남겨 두셨던 아름다움과 완성의 가능성을 일구어 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과일이나 따먹고 뛰어놀 것이라고 하는데 지겹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이나 섬김이 필요 없을 만큼 최고로 예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만물을 보실 때 인간이 보는 것과 다릅니다. 인간은 시간 안에서만 사물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의 관점에서 한꺼번에 만물을 보십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한꺼번에 만물을 보는 것을 단순지라고 하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만물을 보는 것을 선견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것은 사라졌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나간 시간, 오지 않은 시간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시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보고 심히 아름답다고 말씀하실 때, 아름답다는 표현은 지금 있는 것도 아름답지만 미래에 그것이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완성될 때의 아름다움까지 한꺼번에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6일 창조가 끝난 세계 안에는 현실적으로 이미 아름다운 것과 최고로 아름답게 될 가능성을 내포한 세계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그 모든 것들을 돌보고 가꿈으로써 가능성 있게 내재해 있는 아름다움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활짝 꽃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복한다는 것은 소유권이 아직 미치지 않은 지역으로 가서 그것들을 자신의 통치 영역 안에 두는 것을 정복한다는 것이라면, 다스린다는 것은 한 나라의 임금님이 이미 자신의 소유가 된 나라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 국민을 모두 행복하게 하고, 국가의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모든 사물들을 돌보고 질서 지운다는 가리켜서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말로 왕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이미 여자가 창조될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정복한다는 것은 남성에게 적합한 것입니다. 개척, 정복, 투쟁 등. 그러나 여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잘 돌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행복은 더 큰집, 더 큰집, 경기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강북으로, 강북에서 강남으로, 강남에서 압구정동으로, 이러면서 평수를 늘리는 것이 남자의 보람일지 모르지만 여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집이라도 어떻게 화단을 만들고 여기에 무슨 꽃을 심고, 어떤 가구를 들이고 하는 것이 여자의 행복입니다. 결론적으로 서로 성격과 성향이 다른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어야지 같은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 차이라고 이야기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다룸을 깊이 인정하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아내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바라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가 후져 보이지만 디자인을 아주 좋아하고 건축도 꽤 합니다. 우리 교회를 거의 제가 설계해서 짓고 일하고 디자인하고, 교회나 어느 건물에 들어가서 색깔, 형태, 디자인이 맞지 않으면 굉장히 힘들고 누가 내 앞에 나타났는데 윗도리 아랫도리의 색깔이 맞지 않으면 학대를 받는 느낌입니다. 우리 집사람도 잘 하지만, 그렇지만 저는 집에 가서 벽지 하나 내 마음대로 바르지 않고, 의자 하나를 내 마음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내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면 그렇게 싼 것을 사지 않고 훨씬 비싼 것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색깔도 딱 맞추어서 예쁘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천정 색깔도 그게 아닌데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보 탁자 사왔어.” “아이구, 좋네.” 속으로는 ‘진짜 촌스럽다.’ “여보, 이거 어때 내가 바꾸었는데.” “너무 좋아. 아주 좋아.”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말도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35년 째 같이 살았습니다. 한 번도 식탁 앞에서 투덜대지 않았고, “와이셔츠를 왜 다려 놓지 않았어? 내 양말 어디에 있어?”라고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 말다툼 한 것이 19년 전이었습니다. 차이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여자를 준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아내가 나와 다른 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도움을 받고 내 인생이 얼마나 안전해지는가, 그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 때문에 오히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아내의 마음이 불편하면 그것은 열등감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는 남자만 못하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커다란 죄가 들어오는 이 끔찍한 일들이 결국은 타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 자체가 가정의 질서가 깨지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먼저 그 열매를 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그래서 뚝 따먹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언약을 받은 당사자는 아담이었습니다. 먹어 하고 줍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멍청하게 그것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는 인류에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된 결과로서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모든 아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이성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여 교회를 이루어가게 하신 것처럼 아내를 남편에게 복종하게 함으로서 가정 속에서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이 모든 질서들이 올바른 자리를 잡으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게 될 위대한 우주적 경륜에 우리의 가정이 이바지 하게 하신 것입니다.
복종하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휘포타스데스데’라는 그리스어입니다. ‘휘포’는 아래라는 의미이고, ‘타소’ 배치하다, 정리하다, 결정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복종하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남편의 아래에 배치해서 모종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복종한다는 의미는 아담의 타락 후에 가정의 질서가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무질서 속에서 수많은 불신앙과 반역들이 양산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남편과 아내에게 하나님이 명령을 주시는데 여기에서 이 편지를 받는 아내나 남편은 불신자가 아니라 골로새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상정하고 이 교리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대신 힘이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힘과 권력으로 더 강하게 누군가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우위에 있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시집을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기숙사에만 있고, 학교 다니다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자마자 밥하는 것, 콩나물 국 끓이는 것, 무채 볶는 것, 계란후라이 하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르쳐 줬습니다. 요즘도 우리 집사람은 요리에 있어서 자기의 멘토라고 하고 결혼한 첫해 둘째 해에는 보는 데에서 가르치면서 제가 김장을 담갔습니다. 첫해에는 최고로 맛있는 김치였습니다. 우리 아내가 들으면 짜증나겠지만 35년을 살면서 한 번도 아내가 해 준 것이 정말 맛있다는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으면 평생 맛있게 먹고 싶으면 3개월만 남자가 노력하면 된답니다. 시집을 와서 긴장하고 어려울 때 밥이 맛이 없으면 쑥 밀어 넣고 그냥 일어나서 묵묵히 출근하라고 합니다. 똑같은 국이 사흘에 한 번 나오면 쳐다보지도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달라고 해서 말아 먹고 그렇게 석 달을 하면 아내가 자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석 달 동안 늘 내가 해줬습니다. 그러니까 요리다운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입니다. 힘으로 누군가를 누르면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는 긴장되기 때문에 어차피 요리솜씨가 늘어나고 밥을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남편을 위해서 나물도 무치고 시장도 볼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들어서 폭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황혼이혼입니다.
결국은 부부라는 것은 사랑으로 결합되는 그 속에서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군대식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합의 본질은 사랑인데 질서가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부부가 일생을 살면서, 결국, 일생을 살면서 상대방에게 만족을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아무리 자기를 만족하게 해 준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고맙게 느껴지지 마음이 변질되면 상대방이 아무리 마음을 듬뿍 담아 섬겨줘도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자체가 싫은데 아무리 잘 해줘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나 장점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만족입니다. 내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뻐서 사랑하면 시간이 지나 얼굴이 맛이 가면 그 사랑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실직해서 사업이 망하면 아름다움이 없어집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런 만족애가 아니라 박애입니다. 이 사람이 예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것이 박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 준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는 사랑의 대상이지 아내에게 남편이 사랑의 원천이 될 수 없고, 남편에게 아내가 사랑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유가 되어서 그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이유가 되어서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면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이고, 그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못 배우고 심지어는 아무리 범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를 존귀하게 대해야할 근거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아내에게서 읽어내고 남편에게서 읽어내면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멸시하고, 천하게 여기고, 인간의 가치를 짓밟는 사상을 거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폭력입니다. 기독교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도 잘 해야 합니다. 죄를 경고함으로 죄인을 책망하는 설교는 필요하지만 그러나 죄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인간을 마치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된 사람인 것처럼, 짐승과 동격인 것처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을 우리가 자중해야 합니다.
(찬양)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 루야.
시집올 때 아주 고왔던 얼굴이, 제가 결혼하기 전에 집사람의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더니 탤런트와 결혼하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아줌마입니다. 육체의 형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 파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더 하나님을 믿고 아름다워지는 아내와 남편의 영혼입니다. 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남편은 아내와 남편이기 전에 신앙의 동지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똑같은 구도의 길을 가는 진리의 동지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 남편과 아내는 사랑으로 결합된 가운데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신적인 질서 속에서 서로를 존귀히 여기는 복종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 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은 맨날 교회에 가서 집사이고 장로인데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어.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잖아, 사랑도 안하면서 뭐야 당신” 그러면 남편은 “야야 너 맨날 교회에서 봉사하고 기도시간에 울면 뭐 하냐 남편에게 복종을 해봐라. 사랑을 하나 안하나. 성경에도 복종하라고 먼저 나오잖아” 기억해야 할 것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주 안에서 옳으니라.” 이것은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남편은 이 성경 구절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밑에 구절이 아내들은 없다고 생각하고 각자 자기에게 주시는 명령을 붙들고 살아야 참된 가정의 질서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가끔 자매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 결혼하고 싶어요.”, “해라, 너는 얼굴도 예쁘고, 돈도 잘 버니까, 나이가 좀 먹어가기는 하지만.”, “저는 요, 정말 공부 많이 안 해도 돼요. 고졸이어도 괜찮아요. 돈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벌면 되잖아요. 얼굴도 저는 별로 보지 않아요.” 그냥 “그래, 마음을 비웠구나.”, “그러면 어떤 남편을 만났으면 좋겠니?” “제가 존경할 수 있는 남편이었으면 좋겠어요.”, “너의 길은 두 가지이다. 위인전을 읽으며 혼자 살거나 30년 연상의 남자 중에서 찾아라. 그러면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나이에 존경할만한 남자가 있겠으며 그러면 그런 남자가 있으면 왜 나이 많은 저 같은 여자에게 장가를 들겠습니까? 더 젊은 여자에게 가지. 되지도 않는 꿈을 꾸며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더 황당한 여자도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학벌은 아무거나 괜찮아요.”, “저는 마음을 그래, 마음을 비웠구나.”, “그냥 변호사이면 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 입니까?
깨어진 가정이 있습니다. 가정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회복은 어느 날 만나서 “여보, 내가 잘해볼게”, “나도 잘 할게” 이렇게 해서 회복되는 가정이 거의 없습니다. 질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 속에서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 속에서 뭐가 잘 못되었나.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이면 가정의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태만하면 않 되고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입니다. 그런데 맨날 놀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잘해보자고 뜨겁게 눈물을 흘려도 그 상황이 개선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서를 회복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질서의 강요는 인간성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질서가 없는 사랑의 강조는 결국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가정에 계속해서 사랑이 유지되게 만드는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하되 가정의 질서를 세워 감에 있어서 남편이 머리가 되고 아내가 그 머리에 복종하는 질서인 이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힘이 센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상처가 되고 원한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정 시리즈를 매년 설교를 하는데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설교를 했는데 아내와 남편이 차를 타고 가면서 아이들을 뒤에 태우고 계속 투덜거렸습니다. “우리 목사님 정말 이상해. 우리같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누가 이혼을 생각한다고 80분이 넘도록 시간을 이혼을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게 절실하게 설교를 하실까? 나 오늘 설교시간 내내 스트레스 받아서 죽는 줄 알았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아주 심각하게 말을 합니다. “여보, 나는 생각 한 적 많거든.” 그게 사람입니다. 남편들이 미친 듯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50대까지 삽니다. 그리고 53~4세쯤 되면서 직장에서 밀려납니다.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정말 허무하게 살았습니다. 돈을 버느라고 가족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고 아내에게도 잘 해주지 못했다는 반성이 생깁니다.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야지. 그것은 엑스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인 자기의 생각이지 아이들은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빠, 아빠 하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가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시작해서 조숙한 아이는 그때도 필요 없습니다. 초등학생 때 이면 그것도 끝납니다. 갑자기 천사처럼 되어서 “딸도 사랑해”, “아빠, 왜이래” 아빠가 2층에 올라오면 아이들이 내려가고 아빠가 내려오면 아이들이 위로 올라갑니다. 자꾸 쫒아 다니면 아이들이 밖에 나가버립니다. 아내를 위해서 결심을 했어. 요리도 배우고 열심히 방도 쓸고 시장 갈 때 바구니 들고 따라다닙니다. 아내도 신혼 초에는 그것을 원했습니다. 남편이 그러니까 나중에 그러더라고 합니다. “여보, 혼자서 어디 가서 놀 수 없어? 나도 좀 쉬자.” 그러면서 어느 날 한 번도 싸우지 않고 평생을 잘 살았는데 아이들 시집장가 보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여보, 왠만하면 도장 찍어.” 열어 봤더니 이혼 신고서입니다. “여보,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이혼을 해. 우리 한 번도 싸우지 않았는데,”, “수 십 년 동안 매일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어.” 그렇게 생각이 다릅니다. 바보입니다. 어느 남편이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불러서 유언을 했습니다. “여보, 걱정하지 마. 난 어차피 죽을 몸이니 내가 유언을 할게.” “그래, 들을 게.”, “나 죽거든 절대로 수절 하지 마. 나 같은 인간 생각하면서 당신 인생까지 외롭게 살지 마.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눈물을 흘리겠지만 속으로는 ‘우리 남편이 최초로 사람다운 생각을 하는 구나.’ 그러면서 남편이 “내가 결혼할 상대를 지정해 줄게. 아무개하고 결혼해.”, 아내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여보, 그 사람 당신 사업하면서 다 망쳐놓고 도망간 사람 아니야. 내가 왜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해?”, “복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그 산을 앞에서 뭐라고 큰 소리를 외치든 그 산은 그 아이의 그 소리를 받아서 메아리로 울려 퍼지게 합니다. 그것이 절대로 한 사람의 잘 못이 아닙니다. 그게 5:5냐 7:3이냐 하는 것은 교통사고 날 때 보험회사에서 처리할 때의 이야기이지 그러나 서로의 잘못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제로 7~8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 한 40대 자매가 있었는데 자기 친구가 너무 곤고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만나서 점심이나 먹자고 하면서 기습적으로 자기 친구를 데리고 우리 교회에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서울 근교에 사는데 남편이 지겹게 속을 썩여서 살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혼서류를 써서 자기는 도장을 찍고 남편과 싸우는 상황입니다. 그날 교회에 왔는데 하필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그날 80분 정도 설교를 했는데 정말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눈이 다 지워지도록 통곡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왜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또 도장 찍으라고 그러나 하고 너무 힘들어서 두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가 마주 보았습니다. 뭐라고 써 붙이나 봤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남편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다 내 탓이야.”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이런 여자가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인가. 결혼 생활 20년을 해오면서도 이런 경험이 없었는데……. 그러면서 여자가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울고불고 하면서 “아니야 여보, 내가 정말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잔인하게 괴롭히고 이혼하자고 노래를 했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이고, 그것이 되지 않은 이유는 망가진 가정 속에서 인간 같지 않은 자식들이 양산되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이 사람으로 사는 가장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엄마아빠가 그렇게 무한한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며 사는 삶의 그 원동력이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깨어진 가정, 그 가정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질서를 회복해라. 남편은 개척적이고, 모험적이고,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아내는 그 가정의 질서를 잘 지켜서 존중하고, 자녀들에게 참 인간의 모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적합하다, 딱 들어맞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 복종의 질서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이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고 한 사람을 일생동안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랑하는 과정은 자기완성의 과정입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는 포기와 그리고 자기완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우리에게 무한히 사랑의 능력이 내재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다툼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서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이기심을 부수고, 깨지고, 남편과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남편이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를 기꺼이 버리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질서, 이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내버려 두면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합니다. “인간은 진리의 빛을 떠나면 육체와 영혼 중 자기의 육체밖에 사랑할 줄 밖에 모르는 인간이 된다.” 그래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은혜를 베푸셨는지, 우리의 가정을 주셨을 때 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큰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하시는지 기대하면서 사소한 자기의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게 하면 남편이 나를 몰라줘도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아내가 내 맘을 몰라줘도 그때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에 내리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