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 3:21)
녹취자: 김명진
골로새서는 아주 위대한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 첫 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약 주후 62년경에 이 책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때에는 교회에 영지주의라는 큰 이단이 일어나서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있었고 그 혼란스러운 때에 사도바울은 원숙한 신학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 위에 어떻게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그 그리스도와 교회, 가정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그리스도는 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에베소서에 이어서 골로새서에서도 똑같이 그려내고 있으며 교회와 신자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중심이시라는 것을 훌륭하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 나신 분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아주 세세한 우리의 삶이 온 땅과 하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서신서 끝자락에 와서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이 모든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주가 되셨는데 바로 그 그리스의 뒤에서 이 모든 세계의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회복되는 그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골로새서 끝자락에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있어서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각 구성원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전제하에서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구성원인 남편, 아내, 자녀, 부모들이 하나님을 믿되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정에서 각자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자신의 덕목이 있는데 그 덕목을 올바르게 실행하며 살아 갈 때 이 가정이 제대로 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덕목은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덕목은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내가 복종하기 때문에 사랑해주는 반대의 급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도 해주지 않는데 복종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말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일단 복종해봐 그러면 사랑해 줄테니까 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가정의 덕목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남편의 지위나 힘이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따뜻함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나의 가정을 통해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어가는 분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덕목은 공경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해주었는가, 그것에 의한 반대 급부가 아닙니다. 자신을 믿는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이 온 세상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에게 예수님이 명령 하시는 바가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의 덕목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를 향한 아비의 덕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노엽게 하지 말아라.”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은 아비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어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비와 어미가 모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지만 특별히 아버지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가능성이 엄마보다 많기 때문에 “아비들아 너희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경륜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서 가정이라는 경륜을 주신 것입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 세계를 모두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한 사람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빚으셔서 그 흙으로 빚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그래서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가진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 하와는 그 아담을 잠들게 한 후에 갈비뼈를 취해서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만든 것처럼 똑같이 하와도 흙으로 만드셔서, 히브리어 성경책에는 ‘아파르’로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아파르’는 ‘먼지, 티끌’입니다. 그런 것으로 여자도 만드셔서 생기를 불어 넣어 또 한사람을 만들지 않고 한 사람만 만드셔서 그 사람에게서 또 한 사람을 만드셔서 여자를 만드셨고, 그 다음에는 두 사람의 생식의 결합을 통해서 출산을 통해서 인류가 계속해서 태어나게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엄밀히 말해서 한 사람만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넓게 보면 두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온 인류가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여자를 이끌어 아담에게 데려오셨을 때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백했습니다. 이는 히브리 문학에서 최고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 고백을 우리는 흔히 남녀 사이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식 주례에 많이 쓰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 있느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부부이기 이전에 인류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남편과 아내로서만 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나는 가인, 아벨, 셋, 그리고 계속 태어나는데, 태어난 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그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을 하게 되고, 형제사이에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백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원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는 가정과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타락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지 않았다면 교회가 필요 없고 가정으로서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을 했기 때문에 가정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부가 결혼을 해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끝까지 유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혼합니다. 같이 살아도 치열하게 미워합니다. 원수같이 생각하고 심지어 서로를 죽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낳아도 부모가 자식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 자식이 부모에게 그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고 동기간에 그런 고백을 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들어와서 행한 일입니다. 다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 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 되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 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다 파괴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절대적으로 소외된 존재가 됩니다. 이런 인간들을 다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그런 인류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이렇게 망가진 인간 하나하나를 고치고, 그렇게 고쳐진 인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교회의 지도하에 가정을 꾸려나감으로서 그렇게 망가진 인류가 서서히 서서히 고쳐집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질 때 그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하나가 되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때가 되기까지 인류의 일부분을 먼저 뽑아서 하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몸으로 만드시고 그 몸을 확장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데 그 만들어진 몸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모든 지체들이 고백해야 할 것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온전해져 가고 확장되어 가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이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첫째는 바르게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알게 하기 위해서 가정을 주셨을까?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아직 아무 것도 모릅니다. 태어나서 만나는 첫 번째 세계가 엄마입니다. 아빠도 잘 모릅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고 눈을 엄마와 눈을 맞추면서 이 아이가 자랍니다. 그래서 엄마가 만나는 최초의 세계입니다. 그 가슴에서 아이가 성장하면서 엄마의 표정의 희노애락을 보면서 이 아이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고, 옳은 것이 무엇이고, 틀린 것이 무엇이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엄마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엄마가 “습~” 하면 이 아이는 자기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아, 착하다”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다음에 만나는 사람이 아빠입니다. 그렇게 가정 속에서 아이가 자라면서 알게 되는 그 앎의 대상이 하나님, 세계, 인간, 나, 이 네 가지 대상에 배워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출생입니다.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면 엄마가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없으니까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도 올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는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이 세계가 왜 존재하는지도 가르쳐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지식이 올바른 지식일 수 없습니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출생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 자신이 누구인지 부모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참으로 하나님 앞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지식을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는 지식 가운데 이성을 통해 섭취할 수 있는 지식이 있고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기술은 이성을 통해서 배울 수 있고 학교에서 하는 학문도 이성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그분을 믿을 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것, 그리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성으로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런 지식을 어린 아이 적부터 엄마아빠의 품에서 자라면서 엄마아빠로부터 지식을 배우되 믿음으로 그 지식을 받아서 수용하는 그런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자식들을 보면서 “아직 어린데 뭘 알겠어. 더 커야지”하는데 아닙니다. 크면 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 그때 아이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엄마 품에서 자라다가 젖을 떼고 세 살, 네 살쯤 되면 호기심이 엄청나게 증폭합니다. “엄마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아침부터 밤까지 귀찮을 정도로 묻습니다. 그런데 이때 부모가 잘 대답해 주지 않으면 아이들의 물음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소통할 수 없는 폐쇄적인 아이가 됩니다. 그래서 궁금할 때 “엄마, 이 세상은 누가 만드셨어?”, “하나님이 만드셨단다. 우리가 죄를 지었단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단다.”이런 것을 가르쳐 줄 때 아이들은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은 이 처럼 바르게 알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생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이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을 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놓고 인간이 누구이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가르쳐 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되게 살게 하시려고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참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만드셨고 나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나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서 많은 물건들이 있는데 이 손에 있는 마이크는 사람의 작은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 있는 전깃불은 환하게 밝혀 우리로 하여금 주변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기둥은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이것은 성경을 놓기 위해 누군가가 만든 것입니다. 이런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은 목적이 모두 연관을 이루면서 이 장소를 하나님이 예배하기 적합한 장소로 만들고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도 하나하나의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어우러져서 이 세계 전체를 향한 목적이 있을 것이고, 인류 전체를 묶어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는 하나의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해서 학식과 성별, 문화와 능력, 모든 것이 각각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 세상에 지으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모든 목적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자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 가정에 태어난 것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티끌만큼도 이바지 하지 못합니다.
로마의 사상가 가운데 ‘마르코스 툴리우스 키케로’라는 사람이 잇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술은 물질을 사용하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덕은 자기를 사용하여 인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물질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공급받고 소비함으로서 지탱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서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육체는 땅의 자원을 사용하면 되지만 영혼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 하늘의 자원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 진리와 말씀을 통해 공급되는 사랑과 생명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열흘 쯤 굶으면 힘이 없어서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없을 것이고 삼십일 쯤 굶으면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12시간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견디기 매우 힘듭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기술이 계속 개발이 되면 그 기술이 이미 있는 사물들을 사용해서 우리의 몸을 아주 편안하게 만드는 재화를 생산해 냅니다. 그것이 먹는 것일 수도 있고, 입는 것을 수도 있고, 보아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바르는 약일수도 있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영국이 17세기 청교도 시대 때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27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 배우고 빨리 빨리 장가들고 일찍일찍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나서 인간의 생명이 이제 80세, 90세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과학자들이 예견하기는 평균수명이 120세까지 늘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과 기술이 우리의 육체를 섬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인이 되어서 자식들이 다 떠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그 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80세 쯤 되어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면 40년가량을 불편한 가운데 그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 기술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는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LG에서 광고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썼습니다. 우리를 편리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해서 편합니다. 잔뜩 먹고 살이 쪄서 난리입니다. 모든 것을 자동으로 만들어 놓고 살을 뺀다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덕입니다.
덕은 자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만듭니다. 자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이롭게 만듭니다. 그런 덕을 가정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기술은 삶의 수단이지 목표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와 이 세상의 물질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삶은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진정한 행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 올바르게 알게 하고 올바르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가정을 주셨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기 전에 신앙인이고 철학자여야 합니다. 인간이 누구이고, 인생이 무엇이고, 우리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이고, 하나님은 누구이고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고, 이웃과는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의 이 세계와는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훌륭한 것이고, 자기 자신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식을 낳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에게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말로 인격으로 때로는 책망하는 교육으로 때로는 어루만지는 칭찬하는 교육으로 아이들을 일깨워야 합니다.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노엽게 하다’라는 단어는 ‘에레띠제테’라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화나게 하다, 성질을 돋구다, 혹은 분노가 폭발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들은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마음에서 야수성이 일깨워진다는 것입니다. 존 화이트는 모든 인간은 그 가슴속에 맹수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야수성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교육에 의해서 잘 다스려지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할 때 이 야수성이 폭발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것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교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교도관이 “목사님, 꼭 한 사람을 만나고 가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누구냐고 했더니 사형언도를 받은 젊은이라고 합니다. 신문에도 크게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하면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돈을 달라고 하니 이 엄마가 아이를 너무너무 비참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엄마를 칼로 난자를 하고 엄마가 있는 방에 휘발유를 뿌려서 불을 질러서 잡혔습니다. 그런데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너무 여리고 착한 청년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괜찮다가도 가정의 달이 되어 TV에 이야기가 나오면 트라우마가 작동을 하니 꼭 만나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 해주고, 책도 주고, 그리고 기도도 해주고 왔습니다. 이런 야수성을 일깨워서 이 아이가 지성에 의해서 삶이 통제가 되지 않고 분노에 자신의 의지를 쉽게 굴복시키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이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일을 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사람이 바로 아비입니다.
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냐면 “낙심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낙심하다’라는 단어는 희랍어 성경에 ‘아듀모신’이라고 나옵니다. ‘듀모스’라는 단어는 감동을 받다, 혹은 정동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아’는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네 자녀를 노엽게 하면 네 자녀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열정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열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희랍어에서 절망하다 혹은 정신이 없어져 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적절하게 마음에 올바른 방식으로 감동이 계속 주어져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열정입니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어 그래서 학자가 되고 싶어. 아니면 열심히 예술을 해서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아니면 슈바이처처럼 가난한 사람을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파.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다가 죽을 거야.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듀모스’, 감동이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위대하다고 할 때 그것은 돈이 많거나 재산이 많아서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갑부 아버지를 둔 사람의 자식들은 모두 위대할까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정신의 크기입니다. 정신의 크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성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의 크기입니다. 지성이 뛰어난 사람은 학자 같은 사람이 되고, 감성이 뛰어난 사람이 예술가 같은 사람입니다. 두 개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아주 탁월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덕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감동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불구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일이 반복될 때 자녀들은 감동 받을 수 없는 절망하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것들이 왜 그러냐하면 부모들이 자식을 지나치게 책망하는 이유는 부모가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에 대한 기대를 자기가 자식이라면 되고 싶을 그 것을 자식에게 투사를 시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자식을 욕하고 때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지 나 잘되라고 그러는 것이냐”라고 합니다. 폭력을 행사합니다. 사랑이 없는 집착과 미움을 발전을 합니다. 이 아이는 권력이 없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계속 부모의 책망을 받으면서 찌그러집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감동받을 수 없는, 열정을 함양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네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폭력과 폭언입니다. 자녀들을 향해서 어려서부터 폭력과 폭언을 퍼붓는 것입니다. 심하게 때리고 폭언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가정에서 존중을 받으면서 자라지를 못해서 기를 펴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방치 속에 이 아이를 무관심하게 내팽개쳐 두어 버립니다. 이 아이는 버림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아이에게는 부모에게로부터 받는 어마어마한 폭력입니다. 첫째아이를 낳아서 서너 살 쯤 되었습니다. 엄마가 배가 불러 이 속에 동생이 있다고 해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엄마가 어느 날 병원에 갔습니다. 산후조리원에서 두 주쯤 있다가 애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그 아이를 끌어안고 예쁘다면서 관심을 보이고 자기는 관심에서 소외됩니다. 그 때에 서너 살 먹은 아이가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부인과 남편이 사는데 어느 날 남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와서 “새 첩인데 이 집에서 같이 살 거야.”라고 하는 충격의 2.5배입니다. 어른들은 어리석어서 그 아이가 그런 충격을 받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마어마한 충격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의식 있는 집에서는 아이가 보는데서 아기를 낳습니다. 엄마가 잉태하고 아이를 갖고 그 아이 때문에 입덧을 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엄마가 동생을 낳는 자리에 아이가 있으면서 그 광경을 보이면서 이해를 시킵니다. 그러면 그 충격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부모들은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내 자식에게 잘못한 것이 뭐가 있는가? 무슨 상처를 주었는가?”라고 하는데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에 자매 하나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를 잘 한 이유는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빠가 있는데 항상 차별대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오빠보다 공부를 잘 했을 때 아빠가 “네가 오빠보다 낫구나.” 이 딱 한마디,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공부하는 것으로 불탔습니다. 부모가 보기에는 아이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는 인간성이 망가지면서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악기나 기계하나도 막 다루면 망가지는데 인간이 얼마나 미묘한 것이겠습니까? 특히나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떻겠습니다. 부모들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릇된 모본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자기에게 가르쳐준 신앙과 인생의 원리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 때 아이는 권력이 때문에 “아빠, 아빠는 왜 가르쳐 준대로 살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이 아이에게는 없습니다. 아이는 말하지 않지만 아이에게 선악에 대한 지식과 판단을 구둣발로 짓밟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는 그렇게 한 줄도 모르는데 아이에게는 어마어마한 폭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의 이유를 통해서 결국은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져버립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잘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열정이 있는 사람이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고, 희생적인 엄마아빠 밑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자기 자녀를 향해서 희생적이고 헌신적이고 부모 역할을 잘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한 아이에 대해서 못해주면 그 아이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엄마에게서 참 엄마가 어떻게 아이에게 해야 하는지를 못 배웠습니다. 참 아버지가 어떻게 가정을 책임지고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지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고 싶어도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녀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에게 또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혁명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계속 대를 잇습니다. 여기에 결혼 적령기의 아들을 둔 부모에게 충고를 하겠습니다. 신앙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그 딸을 위해서 아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있는 집안의 규수를 데려 오면 틀림없습니다. 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부모에게도 팁을 하나 주겠습니다. 어떤 녀석을 사위로 삼을까? 자녀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가정에 대해서 강력하게 책임감을 둔 아버지를 둔 아들을 택하면 됩니다. 빗나가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식을 거의, 성경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거의 사육 수준으로 아이를 기르는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인생에 그대로 고통이 되어서 피 흘리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인생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고, 덕스러운 삶을 살아서 사랑의 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신앙과 함께 터득해서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여러 가지로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식을 낳아서 사회생활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주고 기독교 신앙을 잘 전수 시켜서 덕스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시켜 주었으면 그것으로 부모는 거의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입니다. 서양의 경우는 만 18세, 한국의 경우는 대학에 다닐 때까지 부모 옆에 있으려고 하니까 23, 24살까지 해주었으면 다 해준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아이가 길바닥에 나가 혼자 살아도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오늘 성경은 아비들아 라고 이야기 합니다. 엄마에게도 자녀를 노엽게 할 위험이 없지는 않은데 확률적으로 아비에게 훨씬 더 많습니다. 엄마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식의 허물을 계속 덮어주고 심지어 자식이 망가질지도 모르는 위험해 처해도 그 자식을 때려서 바르게 하기 보다는 용서하고 덮어주려고 하는 것이 엄마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138개국 젊은이에게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감동을 주는 말을 순서대로 쓰시오.’라고 했더니 1위가 엄마, 흑인에게나 백인에게나 미국 사람에게나 한국 사람에게나 엄마입니다. 2위가 열정, 3위가 사랑 등인데 아빠는 70위 밖에 있다고 합니다. 생각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젊은 분이 많이 있는데 어렸을 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갖고 추억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저도 잘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젊으니까 잘나가고 바쁘니까 자식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습니다. 미친 듯이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은퇴를 하면 자식들과 있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2층으로 올라가면 아이들이 1층으로 주르륵 내려옵니다. 아이들과 TV라도 같이 보려고 앉으면 아이들이 슬그머니 2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은 아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 자녀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그가 내 자식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아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아이를 창조하실 때 이 아이와 아빠인 나 사이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있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셨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선물이 바로 분재입니다. 분재는 성장 억제제를 주어서 나무를 잘 자라지 못하게 해서 늙어서 나이가 많은 나무인데 조그맣게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싫어하는 것이 새장, 어항입니다. 새장이나 어항을 집에 놓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새장은 너무너무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습니다.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분재를 보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라게 철사 줄로 다 감았습니다. 그런 선물 들어오면 철사를 다 풀어주고 밖에 내놓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그런 식으로 기르면 안 됩니다.
나에게 체험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에게는 두 자녀가 있습니다. 한 아이는 지금 29살이고 오늘 6시 경에 딸을 낳아서 애기 아빠가 되었고 나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결혼 하고 7년 만에 첫째를 낳았습니다. 둘째는 큰 애를 낳고 6년 만에 태어나서 이번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딸은 문제가 없었는데 아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너무 예쁘고 공부를 정말 잘 해서 1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시험을 보면 계속 백점을 맞았습니다.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도서관에서 선생님이 나가라고 할 때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30개월 되던 때에 모든 생활 언어를 다 통달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아빠와 주고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오줌은 가리지 못했습니다. 말도 정말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노래는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재가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천재가 5학년 때부터 실망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성적도 뚝뚝 떨어지고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먹는 것만 먹어서 살만 많이 찌고 정리정돈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좀 해봐도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저도 경험이 없으니까 아버지에게 그런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혼을 내줬습니다. 대부분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이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제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제가 집회를 간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운전하고 집회를 가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얘야, 너도 내 아들이고 네 아들도 너에게 아들인데 내가 너를 다루는 방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네 아들을 대하는 구나’ 운전하다가 차를 멈추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에게 기대를 가져본 적은 있지만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아이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가 티격태격하고 말로 다툰 지가 19년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다툰 것의 대부분은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렇게 깊이 회개를 하고 돌아봤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로서 어떻게 다루셨는가.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정말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아이를 불렀습니다. 공부도 그때 최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우리 집사람에게 “도대체 당신 사명이 무엇인데 아이를 그렇게 놔두어서 아이가 이 모양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때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정신이 없던 때입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옷가게에 가서 옷을 다 벗기고 하나씩 운동화까지 다 새로 사줬습니다. 입혀 놓고 보니까 살이 쪘어도 훨씬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한 번도 성적표를 보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호되게 야단을 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기도만 하고 사랑해줬습니다. 그러면서 변해갔습니다. 사랑이고 관계입니다. 함께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성경의 가르침과 사상을 아이에게 흘려보내고 아이의 아픔을 내가 느끼고 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깨뜨리고 파괴하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도 자기의 능력입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면서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고 하면 모든 수재는 조폭의 집안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다 공부해서 천재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이 되었지만 지금 총신 신대원가서 3학년 졸업반입니다. 지금도 그런 이야기 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부끄럽습니다. 왜 아이의 아비가 되어서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의 상당 기간을 그렇게 우울하고, 외롭고, 부모로부터 소외되고, 아프고, 그렇게 자라게 했을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더러운 죄인인데 자기 아들을 주셔서 나를 구원하셨는데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나를 기다리셨는데, 저는 이 생각을 하면서 후회가 됩니다. 말씀 안에서 이 아이가 한없는 자유를 누리며 그렇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딸이 23살이지만 좀 더 리얼하게 허그 하고 교회 마당에 교인이 수 천 명씩 왔다 갔다 해도 상관하지 않고 뜨겁게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합니다. 집에 들어갈 때 아내는 항상 문을 열고 들어가서 “딸아” 이렇게 합니다. 이런 것을 부모로부터 받아 본 아이들이 시집장가 가서 자기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 애들 때문에 속상해 죽겠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애들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양말, 바지, 티셔츠 심지어 여자 아이들이 속옷까지 팽개쳐 놓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딸아이 방 책상위에 화이트보드가 있어서 ‘방구석이 개판이니 빨리 청소할 것, 아빠’하고 썼다고 합니다. 한 달이 되어도 지우지를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틀렸습니다. 교육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지우지 않는 것이 반항입니다. 빨리 가서 지우고 아이들이 옷을 확 던져버리고 가면 당신이 가서 차곡차곡 개라. 빨래 거리는 갖다가 빨래 통에 갖다 넣고, 뭐 그렇게 아빠가 대단한 존재라고 깨끗이 갠 옷 위에 메모지를 한 장 써서 “요새 입시 준비하느라고 스트레스가 참 많지? 아빠가 기도할게. 사랑해 우리 딸.” 또 그러면 또 그렇게 합니다. 또 그렇게 합니다. 그 옷 좀 정리하고 방 좀 정리 하는 것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입니까? 저는 사실 심방을 가서 정리를 하지 않은 집에는 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살까? 나는 수없이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해도 끝나고 나면 다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과연 아들과의 관계를 파괴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정리를 하지 않은 아이들이 창의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합니다. ‘정리를 되게 못하는 구나.’ 예전에는 ‘이렇게 개판으로 하는 애들이 뭐가 될까?’ 했는데 이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 창의력 하나는 끝내 주는구나.’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그까짓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기다리셨는데, 변하지 않을 때도 변할 때까지 기다리셨는데……. 그렇게 사랑하면서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가 항상 마음속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신앙 안에서 하나님 앞에 꿈꾼 대로 살아갈 수 있는 감동과 열정을 간직한 상태에서 살도록 그 아이를 보호해 줘야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미숙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깨달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가능성을 보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이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면서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아이는 부모가 무엇인가, 부모가 누구인가, 그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해 주었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관계가 깨졌다면 복원을 하셔야 합니다. 깊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아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면서 신앙 안에서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가도록 아이들을 인내를 가지고 사랑하며 가르치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이 자식만 바뀌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바뀌지 않는 자식을 다루면서 부모인 우리를 계속 바꾸어 가십니다. 새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가 이 가정에 태어난 것, 내가 우리 엄마의 딸인 것, 우리 아빠의 아들인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게 그런 아이들로 자라게 해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