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의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녹취자 : 오희열
제가 보니까 여러분도 연세가 꽤 되신 것 같습니다. 결혼의 때가 이미 지나신 분도 계시고 공생애가 끝나 가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이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정말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기타 등등의 이야기들을 오늘 풀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히브리 성경에 “아파르”()는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티끌”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그 티끌은 이미 있는 재료입니다. 이미 있는 재료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창조하시고 두 번째는 “후~”하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후~”하는 동작 그 자체가 영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땅에서 육체로 지어지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되어 둘이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히브리말로 “네페쉬 하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고 나면 당연히 그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서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두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두 가지 종류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육체가 땅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자원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어야 합니다. 세 끼 정도만 안 먹으면 기운이 없어지고 화장품도 며칠 안 바르면 사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변한 몇 사람들이 지금 감옥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변합니다. 그래서 이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아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철이 들면, 인간이 이 지상의 자원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자원입니다. 저는 그것을 천상의 자원, Heavenly resources 라고 부릅니다. 천상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그 어떤 지상에 있는 자원이 아닌 영적인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두 자원이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에게 부어질 때, 그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더 논변을 펼치면, 거듭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꼭 그렇게 육신의 자원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 잘 먹고 입을 것 잘 입고 화장품만 잘 바른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은 아니고 그들에게도 뭔가 정신적인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것도 조금 더 설명하자면, 그 두 가지가 조화되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한 형태를 갖추며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것을 이 주제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지상의 자원만을 가지고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깨달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원을 참된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원이라는 것은 크게 생명과 사랑이라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사랑은 본질적인 언어이고 생명은 상대적인 언어입니다. 그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우리가 그 자원을 가지고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실 텐데, 우선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내자면, 결혼을 하든 독신으로 살든 그것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문제는 독신으로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은 결혼 생활을 할 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간을 굉장히 긴 시간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과 몇 시간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잠시 아담이 혼자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들기로 결심을 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화법과 인간을 이해시키기 위한 사람의 화법이 공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뭔가를 하시고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아담을 홀로 창조해 놓고 보니까 그게 별로 안 좋다고 생각하셔서 당신의 결정을 취소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화법으로, 그것을 인간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눈높이를 맞추듯이 낮아진 상태에서 설명하시기 때문에 이런 묘사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신학에서는 “아콤모다치오”, 영어로는 “accommodation” 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장고한 시간이 흘렀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여자를 창조하시는 것을 행동에 옮기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다시 또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또 다른 사람을 만드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의문입니다.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그것을 재료로 해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남성우위론자들은 이것을 해석하면서 남성우월주의를 끌어들입니다. “봐라, 시간적으로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 비해 우월하다. 또 두 번째로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빚으셔서 만드셨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의 몸의 일부를 재료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가 원 창조이고 거기에서 파생되어 창조된 것이 여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골동품이 아닌데 시간의 순서가 중요하기 보다는 신제품이냐 구제품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나중에 창조된 것이 훨씬 신제품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재료인데, 남자는 원 재료가 기껏해야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고급의 재료로 창조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를 위하여 내가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하셨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도와주는 역할이 그 인생의 의무라고 하면서 결혼생활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난센스입니다. “돕는”이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는 두 단어이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한 단어로 “에제르”()라고 나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응원군”이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전세가 기울 때, 저 멀리 지평선에서 먼지를 뽀얗게 날리면서 응원군이 옵니다. 그 응원군에 의해서 사기가 돋아나고 전세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이 “에제르”라는 표현은 시편에 많이 실려 있는데 “도움”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니”,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라”, “여호와여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겸손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앙망하며 바라보는, 그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종류의 도움을 “에제르”라고 부릅니다.
가장 잘못된 번역은 “내가 그를 위하여”라고 되어있는, “for”라는 전치사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표현하자면 몇 가지 의미를 갖는데, “대신한다”, “이익을 위한다”, “대표한다”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두 번째인 “이익을 위하여”라고 해석을 한 것인데 히브리 성경에는 “케네게도”()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영어로 옮기면, “corresponding to”가 됩니다. 제가 번역을 하자면, “그 남자와 상응하는”, 혹은 “그 남자와 대응을 이루는 여자를 만들리니” 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을 가지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결혼의 제도를 만드셨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여자를 창조하셔서 두 사람이 함께 사회를 이루게 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기쁘셨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렇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결혼시키실 때 그렇게 된 토대가 있습니다. 그 토대는 사랑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있고 난 후에 결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은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여자였기 때문에 아담이 고백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교제는 모든 인류가 나누기를 원하는 교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아담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날 가인도 엄마와 아빠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했을 것이고 엄마, 아빠도 아들을 향해서 똑같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태어나는 아벨과 셋을 향해서도 형제들이 모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 1천억 명이 살고 갔다고 보는데, 만약 인류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 1천억 명의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라고 하는 단 하나의 사랑을 공유하면서 사회를 이루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지문을 보면, 1천억의 인구가 살다가도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이 없듯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모든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성향까지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이유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은,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와 딱 맞는 사람이 자기의 짝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연애할 때는 신나는 일일지 모르지만 결혼하기에는 적합한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결혼의 원리는 오히려 반대의 사람을 만나서 이 사람이 있는 것은 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이 사람에게 없는 것은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관계로 부르시는 것이 결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가 아주 기분파라고 합시다. 그래서 한 번 만나면 아주 으리으리한 곳에 가고 1인분에 몇 백 불 씩 하는 고급 식당에서 먹어서 한 주 급여를 모두 써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남자가 “우리 두 주일 만에 만났는데 1인당 500불짜리 최고급 식당에 가서 분위기 잡아보자!” 했을 때 여자가 하이파이브를 쳐주면 연애할 때는 너무 신나지만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그런 얘기를 하면 여자가, “정신 차리고 우리 집에 된장찌개 끓여 놓았으니까 가서 그거나 먹자.”하면서 김을 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배필이라는 것입니다. 짜증나십니까? 살아보십시오.
그래서 결혼에 대해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물론 결심한다고 다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는 우선 자기에게 결혼에 대한 소명이 있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특히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사도바울이 임박한 종말을 예고하면서 독신으로 살기를 권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 독신이냐 결혼이냐를 먼저 판별해야 합니다. 모든 소명 받은 사람들이 독신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독신도 자의적인 소명이 있고 타의적인 소명이 있을 것입니다. 타의적인 소명은, 외모에 의한 소명, 성격에 의한 소명, 등등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결혼을 해야 할 것인가, 독신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말입니다.
독신으로 살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독신의 동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일에 마음과 신경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그분을 섬기며 종말이 가까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나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확고한 부르심이 자신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적으로도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소명이 있는 것 같은데 끊임없이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런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내적인 힘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심하게 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젊었을 때는 자기의 욕심만을 제거하면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면 외로워지고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이 혼자 늙어가야 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을 다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오직 그분만을 신랑으로 모시며 그분만을 위해서 동정녀로서 살겠다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일단 그런 결심을 했다면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우울하고 수도원적인 독신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모두 여 전도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선교사가 될 수도 있고 평범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고 나면 아주 기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남에게 의탁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있는 경제적인 여유, 좋은 친구, 보람을 느끼며 종사할 수 있는 일, 관계, 이런 것들을 가지면서 매일매일 독신으로 얽매이지 않으며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면 결혼에 소명이 있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아까 그렇게 독신으로 사는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혼도 똑같이 주님을 위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결혼을 해서 내 모든 마음을 알아주는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서 구름에 뜬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결혼은 있지도 않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3박4일 정도는 계속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거룩한 독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엄청난 사랑이 있어야 하지만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시집가고 장가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해서 성경은 어마어마하게 거룩하게도 묘사를 하고 모든 세속적인 일 가운데 가장 세속적인 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노아의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기록합니까? “그때도 시집가고 장가갔느니라.”고 합니다. 가장 세속적인 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소명은 무엇입니까? “결혼을 해서 한 남자를 만나 둘이 함께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훌륭한 자녀들을 양산해서 그 아이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길러 내가 혼자 조용히 살다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 갈 것이다.” 라는 강력한 소명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서 결혼과 사랑과 연애에 대한 낭만을 갖는 것입니다. 문학작품이나 매스컴, 드라마 등에서 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인상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그 사람들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재벌 2세가 어느 날 나타나서 자기에게 푹 빠져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에게 올인을 하고 자기는 싫다고 도망가는데 끝까지 따라와서 결혼에 골인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드라마, 재벌 2세들은 그런 드라마를 보지 않습니다. 대개 그렇게 황당한 꿈을 꾸지 않으면 현실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난센스입니다.
그러면 결국 결혼하든 안 하든 우리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결혼하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결론이 났습니다. 1번으로 갈 사람은 1번으로 가고 2번으로 갈 사람은 멈칫할 것입니다. 결혼을 할 마음은 있는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목표가 있어서 결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내가 정말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의 동기를 신앙화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내 인생의 동기를 그것에 의해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그냥 방황하며 사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살아도 계속 한숨 쉬면서 시집 간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 살든지, 결혼하도고 불행한 친구들을 만나면 혼자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날만 기분 좋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다음에는 지지고 볶으면서 남편이 잘 해줄 때는 나도 살만하다고 우월감을 느끼고 남편이 잘 못해주고 아이들이 속 썩일 때는 내가 왜 시집을 왔을까 하면서 up and down, up and down 하다가 늙어서 죽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재밌겠습니까? 그래서 첫 번째 결론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독신으로 살든 결혼하고 살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를 자신 속에 가져라! 그것이 소명의 발견입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서,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하는 것에 아니라 결혼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선택해주느냐는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저는 현실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자매들은 형제들이 자매들을 볼 때 가장 첫 번째로 두는 우선순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 인격? 집안? 이런 것은 모두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기가 너무 하찮은 사람이 될까봐 장식을 바라는 것이고 기본적으로는 예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신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결혼은 인물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인격이 훌륭한 자매와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많은 시련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목사님,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그래, 말해봐라.”, “목사님, 저는 평범한 자매를 만나서 평안한 삶을 살기보다는 그림 같은 자매를 만나서 연단을 받고 싶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게 남자들의 마음입니다. 선을 보고 오면 여자들은 다양한 것을 물어봅니다. “성격은 어떠니?”, “학교는 어디 나왔니?”, “부모님은 뭘 하시니?” 하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똑같은 것을 물어봅니다. “만났니?”, “응, 만났어. 굉장히 착해.”, “예뻐?”, “집이 부자야.”, “예뻐?”, “그 사람 아버지가 큰 회사를 가지고 계셔.”, “예쁘냐고 묻잖아!” 합니다.
자매들이 형제들을 볼 때는 무엇이 1순위일지 생각해보십시오. 머리에 든 것이 없는 형제들은, “내가 허우대가 멀쩡하고 잘 생겼으니까 이만하면 자매들의 마음이 끌릴 거야.”생각하지만 “땡!”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는 것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주 못 생긴 자매를 두고 주위에서 엄청나게 칭찬을 합니다. 성격이 좋고 순종적이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등등 수없이 칭찬합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형제가 아무리 잘 생기고 키가 180cm이고 얼굴이 무슨 배우를 닮았다고 해도 자매들은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 뭘 보는지 아십니까? 능력을 봅니다.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 세속적으로만 보지 마시고 리더십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능력입니다. 거기에서 여자들은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형제들은 나이가 40세가 먹도록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매력입니다. 그것은 여성들의 미모만큼이나 굉장히 여성들을 끄는 매력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강의가 계속 될수록 굉장히 우울해집니다. 엄마, 아빠가 예쁜 유전자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물론 뼈를 깎고 살을 붙이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은 그리 권장할만한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외모에 대해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편하거나 마음에 심한 부담이 될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온화한 원리주의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영어에 “cosmetic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화장품입니다. 어디서 온 단어인지 아십니까? 희랍어 cosmos 에서 온 것입니다. cosmos 는 “우주”라는 뜻도 있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품은 질서가 없는 얼굴을 질서가 있는 얼굴처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일단 화학작용이 일어나야만 관계가 성립합니다. 딱 볼 때 어떤 chemical한 작용이 일어나서 그것이 진실로 봤든지 어둠 속에서 봤든지 화장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겼든지 아니든지에 상관없이, 일단 chemical한 작용이 일어나야만 마음이 끌리고 대화가 오가고 관계가 세워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외모에는 아무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크롱 대통령과 같이 사는 분은 그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외모로 볼 때는 끌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강력하게 끌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별로 그런 일이 없지만 전에는 교회에서 자매들이 저에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 시집 보내주세요.”, “너도 못 간 시집을 내가 어떻게 보내 주냐?”, 하면서도 이야기를 해 줍니다. “내가 장담할 수는 없는데 내가 하는 세 가지 말을 잘 들으면 내가 열심히 노력해보마. 첫째는 기도를 열심히 해라. 두 번째,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라. 그리고 세 번째는 매일매일 예쁘게 하고 다녀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지키는 자매들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못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편한 대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화장을 잘 하고 다니라고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눈길이 안 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거기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자신을 가꾸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여러 부분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리스도인은 단지 예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능력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결혼하지는 않습니다. 맨 정신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그런 것이 그 사람과 chemical 한 작용이 일어나는 첫 번째 원인은 되겠지만, 이제 그것과 함께 다른 것을 고려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안 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풀어야 할 문제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서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산 넘어 산입니다.
우리 교회에 노총각 전도사님 하나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사회에서 존경받는 의사였습니다. 어느 날 너무 행복한 얼굴로 다니는 것을 보고 불렀습니다. “뭐 좋은 일 있니?”, “그렇지 않아도 목사님께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니?”, “제가 결혼을 합니다.”, “오! 정말 축하한다.” 그런데 사귄지 한 6개월쯤 되었는데 바로 결혼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 썩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충분히 아는 시간이 필요한데 6개월이 조금 안 되었는데 결혼한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같이 인사를 왔는데 정말 예쁜 자매였습니다. 너무 좋아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나중에 그 전도사님을 따로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OO 전도사, 좋지?”, “네.”, “많이 좋아?”, “엄청 좋아요.”, “그런데 내 말을 명심해라. 이제 결혼식을 올리고 살다보면 이런 날이 온단다.”, “목사님, 저는 지금 좋은데 왜 겁주고 그러세요?”, “들어봐.”,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가슴이 꽉 막히고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이 사람과 어떻게 일평생을 사나? 하며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내 말을 기억해라. 아, 결혼은 사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로 살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네, 목사님.” 하고 돌아갔습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주일간 휴가를 받아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돌아와서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앉아봐라.”, “목사님, 그 날이 빨리 왔습니다.” 신혼여행을 가서 이틀째에 다툰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숨을 쉴 수 없는 절망감이 밀려들면서 이틀을 살아도 이렇게 힘든데 저 여자와 어떻게 그 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이 인격적인 미성숙과 사랑의 부족에서 오는 것인데, 어떤 자매들이 이런 토론 시간에 저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 결혼하고 싶어요.”, “해라.”, “다른 자매들은 그 남자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공부를 얼마큼 했는지, 재산이 얼마고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학벌이 어떤지, 외모가 어떤지에 관심이 많은데 저는 한 가지만 만족시켜주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형제와 결혼 할 수 있어요. 다 필요 없고 제가 존경할 수 있는 형제를 만나고 싶어요.” 정말 굿 아이디어 아닙니까? 언제든지 그 품에서 쉴 수 있고 풀밭에서 뛰놀 수 있는, 한 없이 너그럽고 정말 사랑으로 가득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졸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자매에게는 두 가지 대안이 있는데, 하나는 30살 연상에서 찾아봐라.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경험했던 사람 중에서 찾아봐라. 아마 있을 것이다. 세상을 달관하고 그렇게 너를 품어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꼭 이혼남이 아니더라도 아내를 먼저 보내고 외롭게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찾아봐라. 그게 싫으면 두 번째는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사는 것이다. 대리 만족이나 느끼면서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다. 백 번 양보해서 네 나이 또래에서 그런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왜 그 사람이 너한테 장가를 오겠니? 더 훌륭한 여자들이 많을 텐데 그런 남자가 어떻게 네 차지가 되겠느냐? 꿈을 깨라. 그리고 결국은 시집을 가도 내 수준의 남자를 만나서 지지고 볶으며 살겠지? 그래도 한 번 해볼 거야.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해야 한다.”
자매들이 결혼에 환상을 갖는 이유는, 눈에 콩깍지가 쓰인 형제들이 자매들에게 대쉬를 하고 자매의 마음에 아주 아닌 경우에는 안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호감을 보이고 가능성이 있을 때는 부지런히 대쉬하는 형제와 결혼하게 됩니다. 에펠탑을 지었는데 파리 시민들이 그 날부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창문을 열면 어디서든지 에펠탑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저게 무슨 흉물이냐! 저것 좀 치워버려라!” 하니까, 시장이 나와서 “그러면 20년 후에 다시 여러분의 의견을 물어서 그때에도 보기 싫다고 하면 뜯어 버리겠습니다.” 했습니다. 문만 열면 지겹게 보이던 그 에펠탑을 20년을 보다가 정이 들어버렸습니다. 나중에는 그걸 보는 것이 너무 좋아진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파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된 것입니다. 아주 아닌 사람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호감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꾸준히 그 앞에 서 있으면 언젠가는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그렇게 형제들이 대시를 합니다. 모든 생업을 제쳐두고 이 땅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한 여자에게 올인 하며 대시를 합니다. “나는 너 없이는 살 수 없어. 너 아니면 나는 독신으로 살 거야.” 더 심하게는, “너와 결혼하지 못하면 나는 죽어버릴 거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감정에 확 끌려서, 그것도 짧은 시간에 그렇게 끌리는 사람들은 그 감정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감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남녀가 함께 살다가 남자가 죽으면, 그 남자와 지긋지긋하고 힘들게 살았던 여자가 빨리 재혼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던 여자가 빨리 재혼하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전자 같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통계를 보면 한 남자와 살면서 많은 시련을 겪고 남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 두 번째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별로 없답니다. 그런데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사람들은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사실 그런 삶도 별로 좋은 삶이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아까도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는데, 연애는 저절로 되는 사랑이라면 결혼은 될 때도 있지만 해야 하는 사랑인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연애할 때의 사랑은 둘이 바닷가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수평선에 지는 저녁노을을 보는 것입니다.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작은 배를 타고 물보라를 맞으면서 노를 저어서 필사적인 힘으로 어떤 항구로 가야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바닷가에서 어깨동무했던 그 사람이 파도를 헤칠 때 그 사람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감정이 충만하고, 여자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오빠, 오빠가 내 프러포즈를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이런 사람은 절대 피해야 합니다. “네가 나와 정말 결혼하고 싶다고? 한 번 생각해보자.” 하고 갔다가 어느 날 나타나서,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한 번 해볼까?” 하는 사람이 훨씬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청교도들을 참고하자면 청교도들의 결혼방식은 연애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어떤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을 공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어느 자매에게 잘 맞을 형제를 찾아서 그 형제와 자매를 잘 아는 사람이 서로 잘 맞을 것 같다고 하고 짝을 맺어주면 무조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귀어봅니다. 그리고 상대가 좋은 신앙의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결혼을 하고, 결혼하기 전에 최고도의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지 않고, 그것이 서로의 사랑을 가꾸어가는 출발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이 사람과 친구로서 살아갈 때 참 기분 좋은 사람일지를 생각하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항상 사랑의 감정에 들떠 있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끊임없는 자기 죽임의 연속입니다. 먼저 결혼한 친구를 만나서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만나면 좋은 얘기만 할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눈물 나는 사연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결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시련과 난관을 이기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 힘은 남편이나 아내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문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를 가지고 결혼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함께 여러 가지 난관을 헤쳐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 아닙니다. 결혼하고 나면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시누이, 기타 등등 그 집의 강아지까지, 형제도 마찬가지로 자매가 좋아서 결혼했는데 자매의 형제들이 일곱이면 그들의 가족들까지 하면 열네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장인, 장모까지 하면 열여섯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집의 강아지까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그것을 감히 쉬운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진공상태에서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자녀를 낳고 살면서 이런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그런 삶을 영위해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그 어떤 에너지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매우 특별한 에너지들이 그 안에서 역사해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가정에 어두운 먹구름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런 희생과 인내, 몸부림을 포기하는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모가 되는 것만큼 위대한 직업은 이 세상에 없다.” 거기에서 부모가 든든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그 자녀들이 무한히 부어지는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아빠의 도덕적인 모범을 보면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삶을 보면서 교과서에 나오지 않고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도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 사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치의 혼돈 속에서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한번 가치관이 빗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방종한 인생을 산 사람은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계의 미래는 가정에 달린 것입니다. 가정에서 두 사람, 엄마 아빠의 모본이 자녀에게는 거의 절대적입니다.
형제들에게 중요한 팁을 하나 주자면, 결혼 할 때 아주 중요하게 봐야할 것 하나는 어떠한 시련과 난관 속에서도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희생하면서 이 가족 관계를 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봐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아주 잘못되고 망가진 부모 밑에서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앙 안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자매의 엄마로부터 자식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자녀들은 웬만하면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엄마에게로부터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도 보면 자녀를 끔찍이 사랑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자는 그 여자의 엄마도 대부분 그렇습니다. 엄마가 그런 엄마가 아닌 사람은 희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로서 자기의 가정을 확고하게 지키며 그렇게 인생의 중심축을 붙들고 살아간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형제는 가정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고하시라고 주는 팁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예쁜 외모는 관계가 맺어지기 위한 케미이고 그 유효기간은 6개월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한 자매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저에게 인사를 하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설교가 정말 은혜롭고 맞는데 한 가지는 틀렸습니다.”, “그게 뭐니?”, “케미의 유효기간은 6개월이 아니에요. 5박6일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인간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완성되어(ready made)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존재하겠습니까? 아까 이야기 했듯이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더 좋은 사람에게 장가갑니다. 그런 자매가 있으면 그 자매는 자기 차례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래관계를 생각해보면, 그냥 비슷한 사람끼리 만난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자기가 성질이 못됐다고 생각되면 “나는 아마 이런 여자를 만날 거야.” 하고, 내 능력이 어느 정도 안 된다고 하면 “자매도 외모가 그 정도 되는 사람을 만날 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결혼은 결혼하기 전에 혼수 준비는 완벽하게 끝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 생활에 적합한 인간성을 준비하고 시집오는 여자는 없습니다. 물론 그게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완성된 사람이 만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가는 자기완성의 과정입니다.
아까 처음 이야기한 것과 연결이 될 것입니다. 저 남자와 같이 살아보니까 결점이 많고 결함도 많고 너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마지막에 찍은 게 왜 하필 이 사람인가? 하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결혼은 한 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 마음에 사랑이 꽉 차 있다고 해 봅시다. 상대에게서 결함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사람에게 저런 결점이 있구나. 아, 가엾어라. 자기도 그것을 모르네. 저런 결함을 안고 인생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무 불쌍해. 하나님이 나를 이 남자의 아내로 불러주신 것은 저런 모자라는 점을 보충해서 저 사람을 참 사람 되게 하라고 나를 불러주신 것이구나.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나를 그 일에 부르셨구나!” 하며 거기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가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예쁘다고 느끼면 사랑하게 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완전성이 잠식되어 갑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야기했습니다. “공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앗아가 버립니다.” 변해가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얼굴이 예쁩니다. 예쁘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나는 선택지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50세가 넘어가면 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아주 bright 한 자매와 좀 띵한 자매는 선택지가 다릅니다. 모이는 남자들도 다릅니다. 그런데 어차피 둘 다 60세가 넘어가면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도 못합니다. 학력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신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쉽습니다. 어차피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했는지 안 했는지 검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롭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혼에 대한 환상을 깨야합니다. 그리고 어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하면서 함께 인생을 살아가가는 이 일에 예기치 않은 어마어마한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많은 역경의 길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일과 기쁨, 세상의 행복을 따라서 이 결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너무 사랑하고 내 인생이 결혼을 통해서 어떤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소명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는 정말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말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는 이유들이 있지만 주님 앞에 나가면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 사랑이 그것밖에 안 되니?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너를 사랑하고 그 희생으로 너희를 교회되게 했다.” 그때 아내의 어떤 장점이나 부채의식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그 모든 결점과 결함, 많은 환경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그런 시련을 통해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닮아있다는 사실을 마지막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달콤한 꽃향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피를 뿌리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저 남자, 이 여자 때문에 내가 얼마나 행복해질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에 소명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주어서 저 여자를 사람답게 할까, 그렇다고 인간이 덜 떨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인간을 완성하는 기쁨 속에서 살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언제나 아픔과 기쁨, 슬픔과 환희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기쁨과 환희의 총량이 크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걷고, 그렇게 걸어간 모든 사람의 삶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아주 아름다운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둘 중에 하나의 길을 가게 되길 진심을 바랍니다.
다음에 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 년 후에 왔을 때 여러분 중 누구도 청년부에서 만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