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버려야 할 마음: 강퍅한 마음 (1)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녹취자: 이솔
버려야할 마음 강퍅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퍅은 이렇게 써도 되고 또 이렇게 써도 됩니다. 강퍅한 마음 그다음에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 한 30페이지 정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문제1번. 마음지킴은 크게 두 가지 실천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강퍅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드럽게 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이게 그 ‘스켈로’라는 말입니다. 희랍어로. 이게 ‘스켈레톤’이라는 피골이 상접했다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냥 말랐다고 생각하지 말고 북어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북어를 가끔 몽둥이로 씁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때리면 되게 아픕니다. 그런 상태가 강퍅한 것을 가리키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강퍅함에 성경적인 용래를 보면 시편81편에 그 마음에 강퍅한 대로 내버려 두어 그 다음에 예레미야서 9장에서는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를 쫓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강퍅한 마음의 3가지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진리에 대해 무감각하다. 진리를 받아도 ‘아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자극을 받지 않는 마음. 두 번째는 이것이 만약에 지성이라고 한다면 요건 당연히 정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항상 정서를 갖고 말씀하시는데 그 정서에 흔들리지 않는 것 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 강퍅한 마음이 결국은 지성, 정서, 의지 이렇게 세 방향으로 모두 나타나서 전인격적인 인간의 본성을 이루게 됩니다.
문제2번.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감지력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걍퍅한 마음의 첫 번째 특징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진리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진리에 대한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많이 알지 못해도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제 마음에 돌멩이 같이 된 것인데 이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이렇게 짜증을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에게 전해지면 항상 그 말씀이 그에게 감화를 주고 자극을 줍니다. 그래서 못 깨달은 것을 깨달았을 때 새로운 감동이 오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배워가는 기쁨이 있는데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도 듣고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섬기지만 이것들은 하나의 외형적인 것이고 이것이 참된 말씀을 듣는 것, 참되게 예배하는 것, 진정으로 섬기는 것, 참되게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마지막에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마음이 강퍅해져있으니까 자기가 굳이 형식주의자가 되지 않으려고 해도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이 자기는 굳어져있으니까 난 말씀도 안 듣겠다 예배도 안 드리겠다 기도도 안 하겠다 섬김도 안 하겠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하나님을 맞보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하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해결을 해야 합니다. 신자로서 모든 의무를 다한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마음을 드리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3번. 강퍅한 마음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정서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관련하여 강퍅한 마음의 두 번째 특징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하나님의 정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는데 영혼이 없는 칭찬, 그 다음에 마음이 실리지 않는 덕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시된 말씀에는 하나님이 그 말씀을 우리에게 안하실 수 없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믿음과 이성이라면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 두 개는 나누어지지 않고 밀접하게 결합이 되어 있어서 지성적으로 깨닫는 그 곳에 정서적인 움직임도 함께 따라오고 지성과 정서가 있는 곳에 의지가 함께 따라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강퍅한 마음은 정서 자체가 무감각합니다. 드라마를 보고 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은혜에 대한 감격이 기본적으로 메말라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어도 사람이 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 다는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메마르고 거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들어도 웃어넘길 이야기들이 마음이 돌멩이 같아진 다음에는 하나 하나 들으면서 마음이 진리를 밀쳐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것을 자기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두 가지의 마음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무감각한 정서를 갖게 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러면 가슴 아플 때도 있지만 행복할 때도 있고 놀랄 때도 있지만 짜증나도 있을 때가 있듯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감정이 풍부해지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의와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도 분노가 생기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에는 자기도 아파하고 눈물이 나고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 것들이 정서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문제4번. 의지가 죄의 소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신자의 마음에 나타나는 반응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잠시 죄에 사로잡히면 잠시는 떠났었는데 다시 그 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거짓된 신앙의 틀로 돌아옵니다. 거짓되다 라는 것은 참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삶 생각이 일치가 이루어져서 마치 기타줄이나 피아노가 조율이 잘된 것처럼 화음이 나와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미신적인 것을 준수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속담이 이르기를 개가 토했던 것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더러운 웅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응하였도다. 처음에는 토하는 것을 버렸는데 더러운 곳에서 나와서 씻었는데 그 다음에 신앙이 사라지니까 옛날에 하던 행실로 다시 그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누구도 대가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타나는 그 사람의 행동과 언행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원래 본바탕이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들이 일평생동안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성화되어가는 삶인데 성화라는 것들도 말씀의 지속적인 작용이 있을 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미워했다가 용서했던 사람인데 다시 미워하고 예전에는 버렸던 것들인데 다시 탐욕을 갖고 그것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성화 생활은 나는 이미 도달했다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십자가의 감격을 유지해야하는 것입니다. 죄악에 대한 깨달음이 옵니다. 이미 벌써 마음이 너무 딱딱해 졌기 때문에 자기가 순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떠났던 죄로 돌아가고 거짓된 신앙의 틀로 돌아가고 진실함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미신적인 것들입니다. 점치고 그런다는 뜻이 아니라 예를 들면 자기가 말씀으로 깨닫고 인격적으로 자기가 주체되는 삶을 사는 대신 예를 들자면 자기가 어떤 봉사를 많이 하면 자기가 복을 받는다든지 하는 이런 헛된 생각에 붙잡히게 되고 신앙이 인격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뭐가 나오는 것 같이 그런 태도를 갖게 됩니다. 비인격적인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는 굳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공부를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내적 부패성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은혜 안에 살지 못할 때에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개인이 죄를 지어서 이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도 처음에는 두렵지만 두번 세번 네번 반복해서 지으면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고민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깝게 보면 결국은 매순간 마음을 지키는 데에 실패하고 무너지기 때문에 이렇게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문제5번.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근본적인 이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는 내적 부패성과 은혜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원죄를 지음으로 그 후손들이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는 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가 죄를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은혜 생활을 못하면 이렇게 다시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 생활에서 멀어지면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굳은 마음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결국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내적인 부패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삶을 살아야지만 마음이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와 말씀의 은혜가 매일매일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은혜 안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 같지만 사실 좀 다릅니다. 앞에 이야기는 내적인 부패성이라는 존재론적인 원인을 가리킨다면 이건 실제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 때에 마음은 굳어지지 않습니다. 굳어졌다가도 다시 은혜 안에 돌아오면서 그 마음이 다시 부드러워지고 약간 굳어지려고 하면 다시 부드러워지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어야 하는데 이게 오랜 기간 동안 은혜 안에 살지 않음으로써 은혜의 정서 자체가 끊어지게 됩니다. 단절이 됩니다. 단절이 되면서 결국은 말씀과 성령의 영향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경험하지 못하고 냉담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깊은 영적인 변화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 같은 깊은 영혼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문제6번.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실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두 개입니다. 개인의 범죄와 마음 지키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강퍅하게 되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면 자 이렇게 물음표가 나오잖아요. 이건 이미 은혜에서 미끄러진 상태입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생각이 많아지게 되고 그리고 은혜에서 멀어질 때에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 난 몰라. 누가 알아요. 자기 인생인데 누가 알겠습니까? 이렇게 됩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졌는데 그러다보면 이 안에서 죄된 본성들이 다시 다 솟아 오를 것입니다. 적절한 기회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의 기능이 저하되고 그 다음에 죄에 대한 저항력이 뚝뚝뚝뚝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범죄를 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범죄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것이 내가 질병에 걸리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해서 걸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습관에서 떠나고 나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환경에서 멀어지면 멀어진 것만큼 질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질병이 노력에 의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질병에 걸리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범죄도 그런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질 때 범죄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하게 되는 것도 맨 처음에는 착상된 죄된 생각의 씨앗이 떨어지고 이것이 결국은 범죄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게 맨 처음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죄를 짓고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지킬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다 굳어지고 이미 벌써 세속에 다 노출되고 죄에 노출되어버려 지킬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처방은 우리가 또 배우겠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에서는 아주 놀라운 일들이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에 세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