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신11:18-19)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그들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서 주님이 주신 가나안의 복들을 누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읽은 부분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자녀를 교육하기 훨씬 어려운 상황이 될 텐데 그때에 어떻게 그 자녀들을 가르치고 주님의 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원래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거기에 있는 족속들을 남김없이 모두 징멸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들과 전쟁을 하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이 아주 산 높은 곳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일이 찾아 내어서 토벌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그 일을 다 수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모형론적으로 보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어도 여전히 그 하나님의 나라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죄와 악들이 파해지고 사단의 권세들이 부서져 버렸지만 아직도 신자 안에 죄가 남고 그 남은 죄들은 교회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죄가 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순수성에 끊임없는 도전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도 긴장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날의 이 영적인 형편에 아주 훌륭한 모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 간 후 신앙이 서서히 서서히 나빠진 것이 아니라 어림잡아서 5년에서 10년 사이에 갑자기 신앙이 확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신앙의 하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원래의 원주민들과 교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열정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정한 정신들은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모두 끝나고 그 땅을 점령하고 나자 고난이 그쳤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격하게 신앙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결국은 4가지 싸이클이 계속 돕니다.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번영, 타락과 회개, 그 다음에 용서와 축복이 함께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4가지 싸이클이 계속해서 돕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서 극도로 번영하였을 때 하나님을 백성들이 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겸손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매일매일 목숨을 건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땅을 차지했고 그리고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떠돌면서 만나를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때와는 비교될 수 없는 번영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한 가나안 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멀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애굽하고도 가깝고... 그러니까 아주 일찍이 문명의 혜택을 누렸던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하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받았을 문화적인 충격은 아마 한국의 시골 촌 사람이 뉴욕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40년 전에 그 놀라운 번영과 물질문명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너무 편안한 것을 누린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움막치고 살던 사람들이 62평 래미안 아파트에 들어간 격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 열렬히 매달리고 몸부림 쳐야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 번영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정죄를 지키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약간 옆가지로 나가는 것 같지만 그러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별로 그런 질문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목사님 대책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번영을 주실 때 우리가 꼭 그렇게 뒤로 미끄러지고 타락할 수 밖에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넉넉하고 평온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체가 모순 아닙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면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하나님을 찾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고난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면 잘 보십시오. 고난을 당할 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고난 속에 들어 있는 자동적인 힘이 아닙니다. 고난은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도 못하고 타락하게도 못합니다. 그 고난이 우리의 환경인데 그 환경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그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포악한 사람들이 되게 만들기도 하고 그 고난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도 합니다. 어제 신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해병대에서 일어났던 총기난사사건... 총기를 난사해서 4명이나 죽인 그 형제가 그 군인이 펑펑 울면서 내가 미쳤던 것 같다고, 내가 왜 그랬는지 도저히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울면서 법정에서 진술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생스러우니까... 그 고난이 계속 겹쳤을 때 이 젊은이가 이것을 해석하고 자기가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파괴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일생에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와 복 속에서도 우리들이 부패하지 않고 그런 신실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다음 세가지중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고난 속에서 계속 헤맨다 1번, 번영속에서 헤맨다 2번, 번영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간다 3번, 어느 것이 좋겠습니까? 3번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길이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이유를 먹고, 입고 번영하는 것에서 찾는 사람들은 고난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이점에 있어서는 저도 반성을 해야 되겠습니다만 우리가 과연 주님의 분부대로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꼭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안 도와 주시면 우리는 못 먹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있을까요? 왜냐하면 쌀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미 자신의 자원과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간절한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숨쉬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흡기에 중대한 질환이 있는 환자 이외에는 그렇게 기도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신앙의 관점이 물질의 많고 적음, 번영, 육신의 질병과 건강 이런 것들이 신앙의 초점처럼 들어와 있으면 이것이 결핍될 때에 신앙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채워지고 나면 주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를, 물론 그런 것에도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뿐만 아니라 이럴 때 있지 않습니까? 정말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목메이게 될 때에 우리 어떤 느낌이 듭니까?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은 이렇게 큰데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나의 인격도 이것밖에 안되고, 나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도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이럴 때 우리는 깊이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 해결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룩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일수록 우리 자신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한번 결혼식장에 갔습니다. 조그만 결혼식장이었는데 지금은 사진기가 좋아서 그러는지 별로 안그러는 것 같은데 그때에는 사진을 위한 조명을 예식장 안에 모두 설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진 찍을 때가 되면 조명을 올리는데 환하게 비추이는데 제가 원래 눈이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사진을 찍는데 왠 점이 그렇게 많습니까? 어두운데 있을 때에는 모두 멀쩡한 사람 같았는데 곰보가 아닌 사람이 없고 점쟁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비추이는 거룩의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의 찬란한 빛이 찬란하게 비추일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패성, 우리에게 남은 죄, 우리의 결함 이런 것들을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쌀독에 잔뜩 들어 있는 일반미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창고에 걸린 갈비나 굴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재물을 주셔도 너희는 그 재물에 마음을 기울이지 말라고 경고 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중요한 설교를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힘이 사상의 힘, 또 하나는 윤리의 힘, 그것을 이어주는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그런데 대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상의 힘을 빼 버리는 것이 무지입니다. 은혜의 힘을 빼 버리는 것이 부패입니다. 윤리의 힘을 빼 버리는 것이 방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상, 우리의 지성을 끊임없이 무지의 상태를 좋아하는, 빛 보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것 때문에 사상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견고하게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아주 극단적으로 좌파 쪽에 선 사람들의 책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당연히 제가 부분적으로는 동의가 되고 도움을 받았지만 전적으로는 물론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끄러운 게 있었는데 독서량이 어마어마합니다. 어마어마한 책을 읽어서 극단적인 좌파의 사상을 세운 것입니다. 나는 책을 읽고 세운 것이 아니라 그냥 익숙해진 대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부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신론 속에 살려는 사람들도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유신론 속에 살고 하나님 의지하는 신앙 속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얼마나 견고하게 무장하여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 성경을 읽은 것으로 전기에 나옵니다. 물론 성경을 읽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었고 성경을 낭독하게 하고 숨을 거두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구약교수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는데 학생들이 찾아가 문병을 하니까 말을 하더랍니다. 이렇게 보니까 의식은 없는데 말을 하는데 시편1편이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이것의 방해꾼이 무지입니다. 무지는 악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끊임없이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고 이기고 그래야 합니다. 은혜의 적수는 부패입니다. 은혜 안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부패하지 않습니까? 썩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아닌 것은 썩지 않습니다. 질문하나 할까요? 독버섯이 썩는 것 보셨습니까? 독약에 좀이 쓰는 것 보셨습니까? 못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양잿물이 쉬었다는 것 보셨습니까? 그래서 못 마신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항상 부패는 좋은 것에서 일어납니다. 사단이 천사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습니까? 그래서 넘어졌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습니까? 그래서 사단의 세계에서 반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 천사 쪽으로 전향했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사단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악한 것에서는 부패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선한 것에서 부패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가 들어오자마자 사단은 이것을 부패시키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죄된 욕망은 부패의 씨앗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에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 형편없는 인간이더라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공정한 태도도 아니고 사랑이 있는 태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3년 전에 말도 안되는 인간이었는데 그 사이에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고 2년 전에 훌륭한 성도이었는데 부패해서 막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한 시점에서 그 사람을 영웅화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적수는 부패입니다. 그 다음에 순결한 생활의 적수는 방종입니다. 그것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마음속에나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II. 성도의 큰 의무
그래서 오늘 모세는 성도의 큰 의무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모세가 주고 싶었던 한마디의 유언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이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계속하려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하라는 부수적인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율법사가 율법 중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서슴없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아주 친절한 해설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그것이 성도의 큰 의무입니다. 여러분 새긴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무나 돌맹이 같은 데에 파서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월이 많이 흘러도 돌멩이에 파진 글씨가 또렷이 남고 나무를 깊이 파서 남긴 흔적들이 거기에 있어서 글자를 우리에게 표명하고 그래서 그 의미를 우리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새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긴다는 뜻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항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말이 우리의 마음에 하루에 오고가는 생각이 10만 가지라고 합니다. 그 10만 가지 생각들 중 상당수는 언어라는 수단으로 오고가는 우리의 상념들입니다. 그 상념들이 쉽게 쉽게 우리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주 중요한 것인데도 도저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이 이것을 잊어 버렸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슴에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물 위에 글씨를 써도 우리는 그것을 물 위에 새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새겼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면서 자신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은혜의 유지 없이는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가슴에 새기라는 것은 말씀을 한번 듣고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자기의 마음속에 영향을 행사하게 만드는 것 그것입니다. 때로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은 사람인데 대화를 해 보면 어수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독서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엄청나게 많이 읽었는데 소화가 안된 상태에서 마음에서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신대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하루에 백 오십 개씩 단어를 외우고 했는데 이제는 어쩌면 저녁에 읽으면 아침에 새롭습니다. 다섯 개 이름을 외우면 하나만 기억이 나 낙심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새로운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예전에 읽으면서 내가 감동을 받거나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었던 책들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굵직한 생각들이 가슴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말발이 서지 않습니다. 한마디 하면서 세권, 다섯 권, 여섯 권 인용을 하고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말의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남 보이라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읽었던 책을 반복해서 읽는 습관들을 들이려고 애를 쓰고 읽어보면 그렇게 열심히 줄을 쳐 놓고 'very important, 라틴어로 노타베네 써놓고 동그라미를 쳐 놓고 색깔로 칠해놓기까지 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많이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총명해지는 약이 있다는데 그것이라도 먹어볼까 심각하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슴에 계속 새기는 것 그것이 성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마에 통을 달고 다닙니다. 되게 웃깁니다. 그 통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영하는 호텔에 가 보면 조그만 상자가 문에 매달려 있습니다. 열어 보면 그 속에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든지 놓지 말고 가슴에 새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목회를 하면서 통계를 내보면 말씀에 은혜가 없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가정은 한 가정도 없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숙제를 내 주어도 안 해줍니다. 그리고 부모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라 이 책을 읽어 보아라 절대 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왜 독서를 안하는지 아십니까?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책을 읽은 것을 못봅니다. 들어오면 텔레비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큰 텔레비전을 보고 아이들은 조그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폰 그것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 감동을 많이 받을 때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을 수 없는 자발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교회가 그것을 해 주어야 되지 않냐고 하는데 아닙니다. 부모 책임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보조적입니다. 자녀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을 제대로 양육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빗나가서 무법한 자들이 되면 부모는 그 책임을 대부분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
III. 자녀들을 위한 섬김
A. 말씀을 가르침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는 자녀들을 향한 섬김을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인데 오전에 설교한 바와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오디오와 비디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 여러분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훨씬 실감이 나지만 소리 나지 않는 화면이 안 나오고 음성만 나오는 텔레비전, 음성 안나오고 화면만 나오는 텔레비전 둘 중에 어느 것을 켜 놓겠습니까? 저는 둘 다 꺼 버리겠습니다. 시커먼 화면을 보면서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특별뉴스가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글자도 안나오고 소리도 안들리고 소리가 벙어리처럼 나오는데 그것을 보고 있겠습니까? 집에 가서 한번 해 보세요? 그것을 보고 있을지... 꺼버릴 것입니다. 산란스러워서... 세상 사람들이 똑같습니다. 비디오만 나와도 꺼 버리고 오디오만 나와도 꺼 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심정이듯이 세상 사람들도 이 오디오와 비디오 모두를 필요로 하고 여러분의 자녀도 오디오와 비디오를 모두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여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열렬하고 진실하게 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자녀들이 아! 기도는 하여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디오 비디오 다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둘 다 없습니까? 그래서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번에도 미국에 갔더니 조그만 아이가 아빠를 따라 다니면서 맨날 목을 끌어안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아빠 이건 뭐야?” “아빠 어디 가지 마 나랑 놀아!” 그래서 제가 황금기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뭐가 황금기입니까?” 교리를 가르칠 황금기다. 일 년만 지나면 달라진다. 지금 가르쳐라. 무릎에 놓고 잠깐 아이와 놀아 준 다음에 무릎에 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믿기 어려운 교리들도 이 아이들이 마음 속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이해가 안돼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해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B. 말씀을 받아들이게 함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개념있게 교육을 시켜서 바른 태도를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른이 말씀할 때에는 귀 담아 듣는 거다,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는 올바른 태도로 듣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고등부 교육을 해 보니까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변화가 잘 됩니다. 그러면 공부 못하는 자녀들 부모는 사기가 조금 저하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변화가 잘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모두 그런 것은 아닌데 확률적으로 이 아이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똑바로 앉아서 듣는 것이 습관화 되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산만합니다. 그러니까 30분을 설교하는데 5분도 안듣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흔들리는 커피 잔에 물을 붓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부을 수가 없습니다. 다 쏟아지지... 그런데 가만히 있는 아이들은 물론 이 안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태도가 집안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단정하고 집중하는 아이들은 훨씬 변화가 빠릅니다. 물론 그래도 변화 안 받는 아이들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른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중생하고 회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거듭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이런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야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그 말씀의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일정기간 젖을 먹인 다음에 이유식을 하는데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 이유식을 쪽쪽 빨아 먹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렇지만 어떤 아이들은 싫어하고 계속 도리질을 치고 젖을 구합니다. 그런데 점점 젖을 주지 않고 이유식을 주면 아이들이 이유식에 대해 맛을 알아 그것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두리안이라는 과일이 있습니다. 똥냄새 나는 과일입니다. 그래서 호텔마다 그것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x표를 해 놓았습니다. 정말 구립니다. 그렇게 더러운 냄새가 나는 과일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원래 음식을 가리지 않는데 유별난 음식은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디를 갔는데 선교사가 우리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차장을 왜 가냐고 했더니 굉장히 좋은 것이 있으니 목사님 따라 내려오라 했습니다. 주차장을 내려갔더니 차 본네트 위에 놓고 두리안을 깨는 것입니다. 똥냄새가 나서 나는 간다고 했더니 잠깐만 계셔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거의 죽어가던 사람이 업혀서 싱가폴에 왔는데 거기에서 열흘 동안을 밥을 안 먹고 두리안만 먹고 나서 걸어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그렇게 나를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먹으라고 하는데 먹을 수가 없습니다.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맛있다고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세 번만 먹으면 그 다음에 그것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파는데, 까서 냉동시켜 파는데 무지하게 비쌉니다. 왠만한 사람들 못 사먹을 정도로 비쌉니다. 현대백화점 같은 곳에 가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먹고 뒷맛이 구리한 것이 괜찮습니다. 청국장 먹은 다음에 나는 것처럼... 그래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건 그 자체에 절대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일어났을때 그 물건들이 나에게 땡기는구나... 땡긴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술 먹는 사람들이... 똑같이 아이들이 회심해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땡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아이를 뒤치다꺼리를 하듯이 계속 들고 다니면서 그 아이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기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땡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고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이 회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아이들을 회심하게 하는 것은 은혜의 샘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상을 교육하고 순결한 생활을 가르쳐주고 은혜를 일깨워주어서 이 은혜의 힘으로 생각과 삶 사이의 이 은혜의 힘을 공급 받으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IV. 결 론
이것이 부모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하나님 말씀 잘 가르쳐서 아! 그것이구나! 목사님! 더 테이프 듣고 싶어요! 더 책 읽을게요! 더 살게요! 하면 뭐합니까? 순결한 생활이 없는데... 순결한 생활이 이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그 다음에 그렇게 살 은혜가 없는데... 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지식이 없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삶의 의지가 없고 이렇게 들쭉날쭉하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 은혜의 샘을 터뜨리지 않으면 아무리 잘 가르쳐주어도 아무리 이렇게 살라고 표지를 제시해 주어도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가을이면 우리 부모들의 마음이 무거운 추수철이 다가옵니다. 회심집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