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며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녹취자: 이 솔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두 주 동안 방학하고 오랫만에 만나네요. 그렇지요. 날씨가 어마 무시하게 덥습니다.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때인데 건강 관리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물하고 소금 많이 드시고요. 그리고 체력을 잃지 않도록 뙤약볕에 활동을 자제하시면서 컨디션 유지를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다시 게으름 끝이 보이지요. 7과로 되어 있는 책인데 벌써 6과를 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자 그럼 한번 내용을 같이 볼까요.
성경 구절이 나오지요. 이제 직역을 한번 해 봤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괄호에 있는 것까지 모두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주의 깊게 생각하라. 그리하여 지혜 없는 자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처럼 행하라. 그 시간을 아끼면서 행하라. 왜냐하면 그 날들은 지금 악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제 세계에 종말이 온다. 그게 이제 마지막 때 사상이죠. 그렇죠? 이제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세계가 끝나는 때가 오는데 마지막 때가 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지혜가 없어진다. 이건 핵심이 결국 뭐예요? 결국은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하는 이 사상을 잃어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다는 거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결국은 인생의 질서라고 하는 것은 계단을 올라가는 인생의 질서라는 것이 결국은 세계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데서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셨고 또 하나님이 어떤 뜻을 정하셔서 질서가 있으니까 그 질서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게끔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몰라요. 근본적으로 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러니까 당연히 시간을 끊임없이 낭비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가치 있는 일에는 열심을 내지 않고 쓸모없는 일에는 열심을 내고 이렇게 살아가니까 결국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지혜가 없어져서 시간을 낭비한다 이 뜻입니다. 뒤집으면 반대가 되겠지요. 마지막 때라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지혜를 소유하게 되면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쓰게 된다 이런 뜻이 되겠지요.
참 그렇죠. 뭐 살아가는 삶의 구조 그 주거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갇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니세요. 물론 그런 아파트에 못사는 사람들이 지금 너무나 많아서 걱정이지만 홍콩에 가면 우리는 조그만 집을 닭장이라고 그러잖아요. 홍콩은 비둘기장이라고 그래요. 아주 좁은 공간에서 몸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사는데 홍콩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현대 문명의 여건상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그런 작은 공간에 닭장보다 좀 큰 곳에 갖혀서 살고 매일매일 생업을 하고 이런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마치 양계장에 갇힌 것 같이 살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은 그래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마음은 호방하게 품고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작품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산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물질이 아니라 의미를 따라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게 뭘까요. 뭐 같아요, 여러분 보기에 양계장이죠. 사실은 비건이 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많아요. 왜냐하면 1년에 육식을 위해서 도축되는 가축이 약 600억마리쯤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물론 거기에는 소나 돼지 심지어 닭, 오리까지 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 그림을 한번 사진을 보시면 이게 정상적으로 시골에서 그 달걀을 낳는 그 닭의 그림이 아니잖아요. 시골의 닭은 어때요. 그 아침이 되면 할머니가 계란 어디에 낳는지 찾으시잖아요. 막 돌아다니면서 그래서 앞마당 뒷마당 그리고 풀숲에까지 뛰어다니다가 알을 낳잖아요.
이게 그게 아니라 지금 한번 다시 그림을 보시면 권장하는 사항이 A4용지 한 마리의 면적에 닭을 한 마리는 둬야 된다 이렇게 본대요. 그런데 실제로는 A4용지의 하나에 두 마리는 들어가는 것 같아요. 저거 보세요. 완전히 저렇게 하고 그다음에 위에는 사료통이고 아래는 알 낳는 거잖아요. 저것을 요즘은 친환경으로 나오는 것도 있다고 하지만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보면 막 그냥 등불을 환하게 켜가지고 닭들을 잠을 안 재우고 모이를 줘요. 그러니까 이게 밑에 계란이 꽉 찼잖아요, 계란이 쏟아지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실 닭이 달걀을 낳는 것도 결국은 생식의 수단이잖아요. 그 알을 낳으면 닭이 그 알을 품고 품어서 새끼를 까고 하기 위해서 알을 낳는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도룡뇽의 알이든지 개구리 알이든지 다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낳기만 하면 족족 인간이 싹 쓸어 가는 것이죠. 저 그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우리가 혹시 저렇게 생각 없이 살면 저렇게 그 닭장에 갖혀서 알만 낳는 사람이 아닌가. 내가 열심히 사료를 먹고 미친 듯이 알을 낳는데 누구를 위한 것이가?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는 거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걸 한번 이렇게 그림으로 옮겨봤어요. 열심히 지금 사람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일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있는 그림은 뭐냐 하면 겨우 먹고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먹고 살만큼만 생각을 갖는다면 조금만 일하면 될텐데 큰 아파트를 사고 싶어요. 그리고 돈을 통장에 많이 넣어 가지고 있고 싶어요. 사람들하고 신나게 댄스파티도 하고 여행도 가고 싶어요. 그리고 또 백화점에서 저렇게 쇼핑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서 우아한 식사도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해요? 소비를 그렇게 많이 해야 되니까 이제 단순히 돈 버는 표준을 소박하게 먹고 사는데다가 정할 수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벌어야죠. 욕망이 생겼으니까. 그게, 그게 바로 이제 이거예요. 이건 잘못 썼네요, 이거는 이렇게 써야 되겠지? 그래서 이게 게으름을 영어로 번역한 책 이름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게으르고 이렇게 되는 거지요.
여러분은 한번 어떠신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욕망의 크기 자체를 수입을 늘리는 것도 우리가 신경 써야 될 일이지만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서 수입을 늘리는 노력을 함께해야지만 안정된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 다음 보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리절루션이라고 하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가 어려서부터 어떤 신앙적인 주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을 하다가 이거는 일생 동안 내가 해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으면 특별 기도를 하고 혹은 금식을 하고 그리고 일생 지키도록 말하자면 자기 서약문을 작성을 해요. 그게 저것보다 훨씬 더 많아요. 백 몇가지가 되는데 수십년을 걸쳐서 쌓인 거지요. 그 첫 번째 결심한 게 저게 아마 열아홉 살, 스무 살 한 이십 대 지금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그 회심하고 나서 그때 그 십 구세 이십 대 그때쯤 아마 썼던 것으로 기억되요. 그래서 에드워드 전집 제16권 753쪽에 나오는 것인데 한번 보실래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의 전생의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자.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게 이제 그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이게 충돌을 하지요. 서로. 그런데 이제 에드워드는 이것을 나란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 맥락 안에서 그 영광을 통한 행복, 영광을 통한 유익, 영광을 통한 기쁨 했기 때문에 같은 말에 동의 동어 반복이라고 봐도 돼요. 그리고 그 후로부터 몇 년이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일곱번째 결심문이 나오는 데 내 생에 마지막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때에 마지막 순간이 주님이 오시는 순간 아니예요. 그때에 주님 앞에서 해야 되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이 되면 그러면 지금이라고 하지 말고 그 어떤 것이든지 절대로 하지 말자. 그래서 결국 이게 하나님의 영광과 맞닿아 있는 결심문이에요. 이렇게 사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심을 하지만 이렇게 잘 못살지요. 만약에 이렇게 살수만 있다면 사실 인생을 가장 보람있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쉽게 이야기 하면 이만큼의 인생이 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한 사람에게 이만큼의 인생이 주어졌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게으름으로 이만큼을 낭비했어요. 실제로 실제로 산 건은 이만큼 밖에 안되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별로 게으르지 않고 나머지 삶을 다 살아냈어요. 이 사람은 95세까지 살았고 이 사람은 65세까지 살았어요. 누가 더 긴 인생을 산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연적인 수명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건강 식품도 먹고 생활 습관도 바꾸고 그건 조금씩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가실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 아니겠어요.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고 부지런히 살아야되요. 그래서 조금 아프면 쉬어야 되고 또 놀고 싶으면 놀아야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내 팽겨둔 채 그렇게 하면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뒤죽박죽되지 않겠어요? 해내야죠. 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맞죠.
여러분 누구나 잘 아시는 프랑스와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원래의 명은 이제 랑겔로스라고 해서 이제 천사라는 이름이 붙였는데 이제 만종이라고 글을 불려졌어요. 저 뒤에 보면 요기 이렇게 보면 교회가 보이지요. 거기에 종소리가 들여오는 것 같은 그런 거예요. 여기에 굉장히 비밀이 있어요. 아세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비밀의 세계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여기에 이렇게 바구니가 하나 있어요. 이걸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자 확대됐잖아요. 뭐 같아요? 감자예요. 감자. 그런데 참 재미있는게 말이지요 이 그림을 분석하는 학자들이 이것을 광선으로 투시해서 그 밑에 있는 이게 원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덧칠한 그림이었다는 것을 밝혀냈어요. 그러면 원래 그럼 이 바구니에 뭐가 있었느냐? 사람들이 추측하는데 분석을 해본 결과 아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아이가 아직 갓난아이가 죽었을 거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그 아이를 가지고 와서 그 주님께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리며 이 아이를 보내는 바로 여기다가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 보내는 의식을 치루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을 나중에 아마도 누군가 주위의 사람들이 이게 너무 끔찍하니까 그러지 말고 여기 이거를 다른 걸로 바꿔라 해서 이렇게 감자로 다시 덧칠해서 집어넣고 이렇게 해 가지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쨌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실한 노동과 경견한 신앙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지요.
프랑스에 집회가 있어서 갔을 때 여기를 들렀는데 지금 저게 1857년이니까 지금 백 한 칠십년 됐잖아요, 백 한 육십 년 전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가면 저 풍경 그대로예요. 하나도 개발 안 했어요. 그리고 진짜 거기 서있으면 저기에 그 교회당이 보이게 똑같아요. 아주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 한번 그 심경을 느껴 보는 거죠. 아이를 잃고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노동하고 그러면서도 신앙으로 그 슬픔을 승화시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저 삶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경외를 표하는 것이지요.
참 그래요. 선물처럼 좋은 건 없어요, 그렇죠? 그러나 선물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하지요. 그렇지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헤로디아가 받쳐 올렸던 세례 요한의 목은 최악의 선물이었죠. 그렇지만 따뜻한 선물도 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위로를 주셔요. 대게 위로는 선물이에요. 기도 응답도 선물이고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좋은 일자리를 주시는 것도 선물이고 또 언젠가는 지체한 사람이 자기가 승진했다고 아주 기뻐서 보고를 하더라고요. 얘기를 해 주더라고요. 그런 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선물 아니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선물을 받고 싶어 하지 선물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보다는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한번 오늘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오늘이라는 선물을 정말 우리에게 주셨는데 오늘이라는 선물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감격하고 있을까? 아 오늘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선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죠. 아 이렇게 어제는 풀잎처럼 말라서 죽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선물을 주셨구나. 이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하루가 된다면 오늘 하루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그 다음에 장년이 되고 그다음에 이제 중년이 돼서 배도 나오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잖아요.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결국은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우리는 늙어가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서 연애 편지를 쓰는 거지요. 그래서 일이삼사라고 되어 있는데 하루일수도 있고 한주 일수도 있고 일년 일수도 있고 그래요. 한 달일 수도 있고 매일매일 적어 내려가는 거죠. 그러니까 취소되지 않아요. 기록은 기록된 대로 주님 앞에 받쳐지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어디엔가까지 쓰다가 점점점 끝날 것 아니예요.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사망한 거 아니예요. 어떤 사람은 이거를 길게 써내려가고 살아 있는 동안 한 칸 한 칸 받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이라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제가 여기로 평촌으로 이사 왔을 때 2002년도 4월 30일이였는데 벌써 20년이 되어 가잖아요. 그런데 잠깐 동안 지난 것 같아요. 정말 잠깐 사이에 흘러간 것 같은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더 지나가고 나면 제가 없을지도 모르지요. 또 공과 공부했던 분들은 천국에서 우리가 공과공부 없이 교제로 만날지도 모르겠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되게 웃기는 이야기가 있어요. 존 키이츠라고 하는 영국의 시인이에요. 저는 젊었을 때 이 사람 시를 좋아했는데요 나이보면 스물여섯살에 죽어요. 90살의 영문학자가 평생을 키이츠를 연구했는데요 죽을 때가 다되었는데도 너무 키이츠는 너무 심오해. 내가 알기에는 너무 높은 세계야. 그리고 죽었대요. 정작 연구 대상인 키이치는 스물여설살에 죽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야기하는데 작가의 문학의 세계나 설교자의 설교의 세계도 똑같거든요. 평평하게 가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되는 경우가 없을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보면 이렇게 이렇게 평범하던 설교가 어느 한순간에 확 솟고 확 솟고 확 솟고 이러다가 일생을 마치는 거예요.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나중에 점점 이렇게 신통치 않아져서 인생을 마칠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나 작가의 정신의 세계로 보면 사실은 후퇴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거죠. 거기에는 뭔가 계기가 필요한 거죠. 그래서 어떤 작가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전쟁을 격었다든지 아니면 독재와 독재를 경험하면서 가족들의 불행을 경험하였던지 아니면 무슨 자기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든지 이럴 경우에 작품 세계가 비약적으로 발전되고 확장되고 확장되는 그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같은 걸 보면 사실은 죽음의 막바지까지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묘사들이 나오잖아요. 결국은 문학의 힘이예요. 결국은 정신의 고양 정신이 변화되는 것 없이는 새로운 작품 세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게 저도 뛰어나지는 않지만 작가로서 매일매일 경험하는 바예요. 그리고 그런 작가의 마음에 아무 변화도 없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금방 들켜요. 무언가 하나님이 작가의 마음을 헤집고 지나가셨다고 하는 것들도 독자들에게 숨길 수가 없어요. 물론 그 작품이 모두 다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느낄 사람을 느낀다는 거죠.
그래서 아마도 이제 이 키이치가 20대에 이게 해브리즈 제도에 있는 영국 저 쪽 끝에 있는 섬이예요. 그래서 이제 아이오나 섬이나 스파르타 섬 이야기를 아주 고적한 곳을 여행하면서 그때는 이런 건축물들이 그때부터 있었는지 나중에 지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그림으로 볼 때는 그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지어진 것 같아요. 이게. 그 성 그 정상에 오르면서 무엇인가 커다란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존 키이치 시의 세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데요. 여러분에게도 인생에 있어서 그런 계기가 마련되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세계도 충분히 고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공과 어떠셨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찍은 사진 2장을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양수리입니다. 예쁘지 않나요? 아주 절묘한 그림이 절묘한 구도이지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그 길목에서 구름떼가 강물처럼 모이듯이 산봉우리 사이로 몰려들고 있는 장면이고 그리고 도망하려는 쫓겨나지 않으려는 낮과 밀고 드려오려는 밤이 만나는 시점이에요. 실제로 봤을 때는 이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웠어요. 카메라가 아이폰이 아니어서 더 좋은 카메라였으면 더 작품이 나왔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물로 하나만 더 보여 드릴게요. 이거 어떠세요? 그러니까 시간이 좀 더 지났는데 밤이 아래 아래에서부터 밤이 이렇게 삼키면서 하늘로 어둠의 세력을 확장해가는 광경인데 여전히 저 구름이 저렇게 아주 신비스럽게 빛나고 있고 산 아래에 비치고 있는 작은 불빛들은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밤이 와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하는 애틋한 그 자연 속에 있는 아주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의 애틋함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안 느껴지시면 할 수 없구요. 작가로서는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무더운 여름철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우리 이책의 대망의 마지막 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