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5)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녹취자 : 이솔, 이새봄
오늘 이제 강론 제4번 참된 영적 쇄신에 길 이것을 우리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 오늘 여섯번째 수업을 다섯번째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누가 먼저 해 볼까요? 김민아 학생부터 한번 해볼까요?
김민아 : 강론 들으면서 저의 삶도 점검하게 됬지만 가장 많이 점검하게 되었던 건 영혼에 대한 제 태도를 많이 점검했던 것 같아요. 아이들 안에 일어나고 있는 잡초들에 대해서 대개 너그럽지 않았나. 요즘 아이들이 유치부를 맡고 있는데 핸드폰이나 아니면 진짜 귀신 만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제가 너무 대수롭지않게 여겼던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 많이 회개하면서 죄에 대해서 너그럽지 않은 사람이 돼주고 또 그 잡초에 대해서 뽑아내 줄 수 있도록 말씀을 귀경하게 하시는 마음을 귀경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 라고 하면서 아이들 영혼을 놓고 많이 애통하는 시간을 가졌고요. 그리고 제 평생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모임을 만들다가 죽는게 아니라 죽이는 모임을 만들다가 인생을 마친 사람이 있다 라는 말에 아 나의 부족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 그런 사람들과 영혼들을 위해서 더 아파하며 진리의 말씀을 붙들면서 또 불순종한 영혼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날마다 구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승우 : 저도 방금 발표해주신 학우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들으면서 최근 들어서 너무 제 안에 있는 그런 가시와 엉겅퀴를 긍정하지 않았나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수님의 강론에서 언급하셨다시피 내 모습 이대로라는 가사 그리고 업글을 많이 사람들이 좀 좋아하고 저 또한 되게 좋아합니다. 찬양도 좋아하고 기도할 때도 내 모습이 이렇지만 받아달라고.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약간 나는 죄인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 나는 하나님 저 죄인인거 아시잖아요. 이해해주세요 라는 그런 저의 완고함이 좀 숨어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짜 죄에 대해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마음으로 그런 정신 상태로 내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중간에 생각을 좀 하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는데 저한테 하는 말 같아서 조금 깜짝 놀랐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이 강론을 들으면서 좀 의지를 다시 한번 굳게 잡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 그러니까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으옵소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만이 그 찬송을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거죠.
최주현 : 저는 강론에 들어가면서 잡초 얘기를 하셨을 때 내 안에 있는 잡초들이 사실 조금씩 조금씩 있었는데 이 잡초들이 작았을 때 그냥 나중에 뽑아도 되겠지 이런 생각을 갖고 계속 키워 갔던 거 같아서 내가 좀 더 하나님 안에서 정말 뒤집어진 한번 아예 갈아엎어서 새로운 밭을 만들어서 묵은 땅이 되지 않게 내가 신앙 생활을 할 때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작은 잡초라고 그 때 바로 바로 뽑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세원 A : 저는 먼저 묵은 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이전에 정말 풍성한 소출이 있었고 열매가 맺어졌던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온전히 그 곡식과 정물 그런 걸로만 가야만 하는 생명력과 영양분을 내가 지금 어디로 보내고 있지 라는 생각을 대개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열매 맺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영향분과 그런 생명력이 진짜 그냥 아무런 쓸데없는 잡초들과 그런 것들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 되게 많이 들었고 그리고 너무 무서웠던 거는 교수님께서 그 반복되는 죄악에서 무서운 게 나무가 된다고 말씀 해주셨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던 것 같아요. 내 묵은 땅에 나무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리고 나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서 아픈 땜에 그 나무를 베는 것을 미루고 미루면 않되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막연함이 되게 많이 남았었고 얼마나 아플까 라는 그런 두려움이 정말 컸던 것 같아요. 그걸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여기다 불을 지르고 잡초를 뽑고 나무를 베고 그런 과정들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되게 많이 하면서도 또 위로가 됐던 게 교수님께서 뽑히는 만큼 심겨진다고 말씀해 주시고 또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말씀해 주시면서 말씀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아프지만 뽑으려고 너무 힘들지 나무를 베려고 조금씩 의식적으로 그렇게 묵은 땅을 귀경할 수 있도록 전적인 순종으로 나아갈려고 하는 다짐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 호주를 한번에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물론 종류는 좀 다를지 모르겠는데 고사리 있잖아요 고사리. 고사리를 계속 내버려 두니까 엄청나게 큰 나무가 되더라고 사람 키 한 두배 넘는 나무가 되더라고. 그래서 그 고사리가 우리나라에서 나는 고사리하고 똑같은 종류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나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저렇게 엄청난 나무가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김태웅 : 교수님 강론 속에서 전에는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던 그 마음 밭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 그 마음 밭이 어느 순간에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교수님의 강론을 여러 번 들으면서 제 자신을 스캐닝 했을 때 제 안에 미움이라는 게 있었어요. 교수님께서 그 가시와 엉겅퀴 중에서도 아주 깊은 뿌리 그 중에 미움과 그 중에 하나가 미움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제 안에 그 미움이 있었어요. 이 미움은 여기서 말씀 드리기 좀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암튼 제 자신을 그 교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바꾸어 제 자신을 이렇게 돌아보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어떤 반동 같은게 들었어요. 처음에는 하나님께. 그러다가도 결국은 내 모든 기도와 말이 결국은 나를 망치는구나. 나를 망치는구나. 결국은 이유야 어쨌든 니가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했고 또 두개를 악을 낳는구나. 또 하나의 악을 니가 낳는구나. 그 마음이 저를 막 강하게 쳤어요. 너무 강하게 치고 강하게 쳤구 결국은 환경 그런 환경 속에서 니가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두번째 하나님 말씀이 저를 쳐서 사실은 제 자체 어떤 소감을 적으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이번 한 주가 한 주가 너무 괴로웠어요. 정말 그런데 결국은 그 교수님이 그 고백 내 평생 가장 귀한 것은 주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저한테 아주 딱 다가 왔는데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고백이 그래도 제가 어떤 환경에 있고 어떤 순간이 있더라도 이게 제가 타협할 수 없는 제 마음 이예요.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엎드렸어요. 교수님. 하나님께 엎드리는 시간이었어요. 일주일 동안.
목사님 : 어쨌든 아마 내 생각에는 사람이 지금 가장 쉽게 끊어 버리지 못하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 가운데 하나가 사랑과 미움이에요.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는 게 쉽지 않고 그보다 더 힘든 건 미워하는 것들을 버리는 거예요. 오늘 발표한 형제는 시간이 더 알고 싶으면 열린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면 설교 시리즈 중에 미움과 용서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한 25년 전에 설교한 건데 한 다섯개 정도로 되어 있는데 들어 보시면 좀 더 진전이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이승찬 학우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이승찬 : 교수님의 강론에서 이제 묵은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 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강론을 듣고 나서 저는 사람들이 왜 그에 밭을 가꾸기를 그칠까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중에 언젠가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경건이 동기가 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언젠가 꼭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그의 밭을 가꾸기를 그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올바른 동기로써의 경관이 부재한다면 그 자리를 무엇인가 대체 한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래서 그 경건이 아니라면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열매를 결코 맺을 수가 없고 오히려 다른 열매가 맺히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그렇게 될 경우에 제 생각에는 신앙생활이 그때 이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가야 함은 아는데 올바른 동기의 회복에 올바른 동기의 회복에는 이제 잘못된 동기로부터 파생된 그런 삶을 다 파산해야 된다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에 이제 경건의 회복을 마다하고 결국에 하나님과 딜을 하게 되는 그런 인간이 제게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런 인간을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애통하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향한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다는 것을 이번에 가장 많이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경건을 회복해야함이 정말 절실하구나. 나 같은 인간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동수 : 저두 그 첫번째로 이 모습 이대로 받아 달라는 그 고백이 진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 세상에 것을 유지하면서 세상에 있는 나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주님 앞에 이 모습을 받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낮아지고 회개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갈아엎은 그 상태에서 의지할 것이 주님밖에 없다는 고백으로 나가는 것이 진짜 이 모습 이대로의 진짜 의미인 것을 깨달았고요. 그리고 교수님께서 후반부에 이제 청년 때에 신앙과 중년과 노년 때에 신앙이 이제 굉장히 다른 것을 많이 보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찬양 가사가 오랜 세월 찾아서 나가라는 주 밖에 없네 그 찬양을 청년 때는 그렇게 잘만 부를 수 있고 노년기에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감격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고 말씀 하셨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과연 지금 사회적으로 굉장히 얽매이는 것이 적은 이 나이 때도 또 많이 부족함을 느끼는데 하물며 중년의 시기와 그리고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시기가 되었을 때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고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지금과 같이 마음을 찌르는 그런 아픔을 그때도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구요. 그래서 또 한가지 기도 제목을 추가하게 되었는데 제가 나이가 들어서 백발이 된다고 할지라도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하나님 말씀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 제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홍은성 : 저도 이번 주 강론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도 묵은땅이라는 게 한때는 옥토와 같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전부를 다 하나님께 드리는 열매를 맺는 옥토일 때가 있었는데 그것들이 우리가 마음 밭에 자라는 잡초와 어떤 가시덤불과 같은 것들을 늘 제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묵은 땅이 되어서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한때는 정말 열정적이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받쳐서 그 첫 사랑을 느꼈던 그런 때가 있었다면 우리가 정말 우리 삶 가운데 이런 것들을 주의하지 않고 살면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정말 예레미아 선지자가 멸망을 예언한 그 때와 같은 마음 상태로 우리가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들을 해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모두가 은혜를 받기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잡초를 제거하고 무성히 나의 마음 밭에 자란 가시덤불을 엎지 않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들은 약간 어거지고 가식이고 그럴 수가 없다는 말씀이 약간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부분적인 어떤 고충들이 아니라 시술들이 아니라 대대적인 삶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나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런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고치고 갈아엎는 그런 밭을 갈아엎는 것 같은 그런 힘듬과 아픔이 필요하다는 말씀 가운데 정말이과정들이 쉽지 않고 어렵겠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아픔과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하겠는가라는 말씀이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예수님 덕분에 이 과정들을 견딜 수 있고 해나갈 수 있겠구나 라는 다시 한번 더 어떤 결단과 의지들이 들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재원B : 저는 강론을 들으면서 이제 고난주간인데 제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제 마음이 어떻게 보면 묵은 땅이지 않았을까 라는 것을 고난주간을 새벽 특별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 그거랑 연결시키면서 내 마음이 결국은 묵은 땅이라는 것을 강론을 들으면서 생각하게 됐는데 그럼 이제 이 묵은 땅에 있는 어떤 잔돌이나 잡초나 돌멩이들 이런 것들을 걸러내어서 옥토로 되어져 가는 그런 과정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제가 이제 그런 거를 제가 좀 자존심이란 게 있어 가지고 그런 걸 꼭꼭 걸러 내고 하는거가 제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 이 강론을 들으면서 이 고난 주간이랑 연결시키면 이 묵은 땅을 어떻게 해서 옥토로 되어져 갈 수 있을까 라는 걸 좀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저의 죄된 모습을 회개하고 정말 내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걸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떠는 그런 모습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라는 것을 강론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목사님 : 여러분들은 화전민에 대해서 잘 모르죠? 화전민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문자 그대로 불을 붙여서 밭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어요. 이제 1950년대 전쟁 끝나고 나서 60년대 화전민은 이제 어떻게 하냐면 도저히 마을에서는 먹고 살 수 없으니까 가족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요. 산으로 가고 산에다가 불을 질러요. 그렇게 산을 얼마큼 태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일부러 불을 지른 거죠. 그러면 다 타겠죠. 나무도 타고 풀도 타고 다 타겠지요. 대개 이제 그렇게 불 지르는 계절이 이제 가을 늦가을 그렇게 가을에 불을 질러요. 아니면 한 2월 새싹 나기 전에. 그러면 마른 나무니까 잘 탈것 아니예요. 그리고 이제 얼마큼 불을 지른다면 이제 통제할 수 있게끔 해놓고 불을 지르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꺼요. 그리고 이제 그 다음에 이제 다 타버렸지요. 거기서 아무 것도 안 남았어요. 다 탔어요. 탔는데 나무가 뿌리까지 타지는 않잖아요. 그 다음에 곡괭이를 가지고 그 나무들을 다 뿌리를 캐내는 거야. 그렇게 캐내지 않으면 작물을 심을 수가 없어요. 뿌리를 다 곡괭이로 두들겨서 하나씩 하나씩 다 패낸 다음에 그 다음에 굵은 돌멩이들을 다 패네요. 그리고 거기에 남자가 여기에다 쟁기를 짊어지고 여자가 뒤에서 쟁기를 붙들고 그리고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무들을 다 태운 제가 거기서 섞이면서 비옥한 땅이 되요. 거기에다 감자라도 심어서 그래서 그걸 이제 농작물을 생산해서 끼니를 이어가며 살았던 거예요. 그러다 이제 1960년대 중반쯤 와서 이렇게 낮으니까 산이 전부다 망가지는 거야. 그래서 이제 군사 정권 들어선 다음에 강제로 전부 다 아주 적은 돈을 주고 다 도회지로 내 몰아 버리죠. 그 사람들이 삶이 아주 비참하게 되요. 그래서 이제 뭐 노동을 하면서 지게를 품을 팔면서 그렇게 도시에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철저한 쇄신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다 얘기를 한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하고요 다음 주가 4월 7일 이고요 그 다음 주가 4월 14일이고 4월 21일이 중간고사 기간이에요. 그래서 중간고사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해드리도록 하고요 다음에 4월 7일이 아니라 4월 14일 날 4월 14일 날 오실 때에는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린 책 가운데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을 모두 읽고 레포트를 내셔야 돼요. 그래서 못 받으신 분 있으면 조교에게 얘기하세요. 아마 다 받으셨겠죠. 그래서 그 책을 4월 14일 날 오실 때에는 강론을 듣지 말고 그 책을 들으시는 건 자유인데 강론 레포트는 쓰지 말고 자기 깨어짐을 2주 동안 다 읽고 그걸 한 페이지로 써서 제출하시고 그리고 4월 14일 날은 자기 깨어짐을 가지고 우리들이 나눔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지난주에 이어서 강의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4장 4장 페이지 수로 제14페이지입니다. 4장이 주는 내용이 긴데요 다 못하겠지만에 하는데까지 4장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에서 다룰 내용은 마음과 시간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왜 시간이라는 문제가 이렇게 중요하냐면 결국은 우리의 마음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외부에 사물들을 보고 냄새 맞고 듣고 감촉하고 맛보고 하는 것들을 통해서 외부의 세계를 경험하게 돼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들이 감각이라고 불러요. 감각. 그래서 다섯개예요. 다섯개는 바깥 세계의 사물들을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실어 오는 창문과 같은 거예요. 당연히 만약에 우리가 앞을 보지 못한다든지 혹은 귀가 들리지 않는다든지 냄새를 맡을 수 없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이제 외부 세계에 사물들에 대한 정보를 우리의 마음속에 실어 나르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죠. 이렇게 되면 이제 마음속으로 이것들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많은 방해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게 이제 말하자면 장애에 불편 아니겠어요. 그 대신 이제 또 새로운 감각이나 훈련으로 그런 모자라는 부분들을 잘 보충하겠죠. 그죠. 그래서 어쨌든 감각이 있어요. 그런 감각 세계에서 정보를 실어 나르고 그러면 그 실어 날은 정보는 당연히 감각 기관을 통해서 뇌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으로 내려오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마음 안에서 그 날아온 것들에 대해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판단하고 하는 일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되겠죠. 그걸 통해서 우리들이 여러 가지 행동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또 무엇을 가질 것이냐 버릴 것이냐 등등에 선택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당연히 거기에는 도덕적인 문제들도 함께 결합이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또 하나 이제 시간이 중요한 그런데 그런 것들이 결국은 시간 속에 있는 사물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우리의 마음은 시간의 흐름을 종종 거스르거나 초월에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볼까요. 어제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어렸을 때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또렷이 기억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기억은 시간에 비례해서 명료도가 결정되지만 어떤 기억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당시 받았던 충격에 비례해서 기억이 되는 거죠. 이해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시간이라는 결국은 밖에 있는 사물과 인간의 의식 속에 이렇게 걸쳐 있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하나에 시간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상대적이다 라고 하는 걸 보여주는 거죠.
예를 들자면 요즘은 그렇게 못하게 되지만우리 어렸을 때는 항상 뭘 잘못하면 무릎 꿇고 복도에서 이렇게 손을 들고 서 있었어요. 손을 들고 서 있는 학생에 30분이라는 시간과 게임에 빠져가지고 정신없이 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에 30분이라는 시간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인간의 마음속에서 당연히 다르겠죠. 그죠? 물리적으로 재면 똑같은 30분이지만 느끼는 시간은 훨씬 다를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들고 있으면 정말 시간이 안 간다고요. 30분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언제 벌써 30분이 됐나 또 돈을 넣어야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식 안에 있는 시간의 상대성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소위 우리가 결국 자아라는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 자아라는 것이 결국은 만약에 우리의 생김새가 자아라고 한다면 그럼 사실 우리 자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잖아요. 왜냐하면 지금 수업 들어 올 때 9시에 여러분 수업 들어 왔는데 정확히 9시 41분이거든요. 그 동안에 여러분들이 늙었단 말이야. 41분이나 늙었잖아. 이거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는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결국 자아라고 할 때는 이러한 우리의 외관에 육체나 이런 것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무엇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럼 도대체 그 자아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아는 시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기억은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기억이 됐는데 왜 우리가 그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은 반드시 시간에 비례하지 않을까 라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사유를 통해서 우리들이 마음의 정체를 살피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번 챕터에 목적이에요. 이 정도로 서론적인 강의를 하고 그리고 이제 강의 안으로 돌아가서 한번 보겠습니다.
14페이지입니다. 4장입니다. 마음과 시간. 하나님은 소멸하는 물질이 아니시니 시간에 매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시간 모든 사물은 시간 안에서 변해요. 물질은 시간 안에서 닳고 소멸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인간의 영혼이나 마음은 성향이 바뀌고 작용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되는거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 저는 이제 이렇게 위생에 대해서 좀 까다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깨끗한 곳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제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 하루에 한번씩 걸레질을 해야 돼요. 하루만 안 하고 나면 그 다음에 손으로 이렇게 문지르면 하얀 먼지가 쌓이는 거예요. 어디서 났을까요? 들어 온 사람도 별로 없고 창문도 꼭꼭 닫아 두었는데 그 먼지의 정체는 모든 사물들이 부서지는 가루예요. 가루. 책이 부서지고 천장에 있는 벽지가 부서지고 그 다음에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이 부서지면서 그 분해되는 가루들이예요. 가루들. 그래서 누가 들어오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그 사물들은 가루가 되는 방식으로 분해되고 가루는 더 작은 입자로 더 작은 입자는 더 작은 알갱이로 마지막에 결국은 화학 기호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화학 기호도 열을 가하면 변화가 일어나는 거구.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물들은 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질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거죠.
아까 여러분 41분 늙었다고 했는데 45분이 됐어요. 45분 늙었어요. 더 젊으졌을리는 없지요. 늙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렇겠지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지만 이렇게 한 10년 전 사진을 딱 보면 내가 내 거울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늙었구나. 아니면 아 이땐 내가 이렇게 젊고 싱싱했구나 어렸구나. 지금은 이렇게 이제 맛이 갔구나. 이런 것을 계속 느끼는 거죠. 어느 순간부터 거울 보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예요. 왜냐하면 시간 속에서 분해되어 가는 중이에요. 안으로는 노화가 찾아오고 겉으로는 계속 분해되어 가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인간의 육체도 마지막에 무로 돌아가는 거죠. 안티 에이징은 이제 그런데 어느 정도 항거 하는 거죠. 늦추면서 항거를 노화를 늦추면서 항거를 하는 거죠. 그건노력을 열심히 하면 그것도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어요. 그렇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결국 무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좀 더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없으신 분으로서 흘러가는 시간을 초월하신다. 존재가 그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니 그가 만물을 바라보시는 것도 또한 시간을 초월하신다. 2.하나님께서 만물을 아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아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신다. 잡는 방식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 자체 이신 삼위 하나님을 함께 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당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으신 완전한 자기 앎의 하나님이시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모두 알려져 있다. 이렇게 봐야되요.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무한한데 어떻게 모두 알 수 있느냐? 무한한 하나님이니까 알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사실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아요. 우리 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우리 마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의학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의사들이 보기에는 아주 우수운 수준의 의학 지식이예요. 마치 영혼에 대해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이 보기에 사람들이 자기의 영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아주 하잘 것 없어 보이듯이 이것도 공부를 해야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의사가 그분도 서울대를 나온 의사인데 고등학교 때에 학력고사를 전국에서 20등을 했다 그래요. 그런데 의사가 됐는데 솔직히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환자들은 의사가 인간의 몸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를 알면 무서워서 병원에 못 올 겁니다. 바꿔 얘기하면 그렇게 평생을 인간의 몸에 대해서 공부한 의사조차도 인간의 몸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아주 하찮을 정도로 일부분만 알고 있다. 너무나 많은 부분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있다. 그러니까 노화에 매커니즘 같은 것들이 밝혀진 것도 얼마 안 돼요. 인간이 늙는다는 건 모두 다 알지만 어떤 메카니즘으로 인간이 늙어 가는가 라는 텔로미어 이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온 거 정말 얼마 안 돼요. 전부 다 1900년대 중반 이후에 나온 논문들이고 그리고 노벨상 수상 연구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동안까지는 인간이 늙어가면서도 어떤 메카니즘 속에서 늙어가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거의 잘 모르는 거죠. 그래서 이제 과학자들은 텔로미어에 관한 거에 대해서 테크놀로지가 만약에 생긴다면 인간에 생명을 150세 정도까지는 연장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하고 아니면 더 과학이 발달된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도 나올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모르겠어요. 그것도 이제 공부해보면 되게 재밌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만물을 보신다. 만물을 초시간적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심은 그것이 시간 세계 속에서 인간에게 경험되므로 하나님 자신은 정동하시지 않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정동은 경험된다.3번 하나님은 홀로 계시며 만물 안에 또한 계시며 당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며 모든 것들은 움직이시고 당신이 세우신 뜻은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뜻을 따라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친히 바꾸심으로 홀로 있으면서도 만물 속에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마음은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삶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둘을 나누어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시간에 묶여서 인간에게 그것이 한꺼번에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로는 마음과 시간 둘째로는 마음과 자아의 관계이다. 마음과 시간. 첫째로 마음과 시간이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 사실을 숙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마음과 육체와의 관계 안에서. 첫째로는 마음과 육체와의 관계에서의 시간이다. 인간의 모든 실천하는 행동은 마음 안에서 먼저 그 행동의 발생을 위한 생각과 욕망과 의지의 선택 작용이 앞선다. 특히 도덕적인 행동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마음은 어떤 행동을 낳는 필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외가 있죠. 예외가 바로 반사행동이에요. 예를 들어서 뜨거운 걸 이렇게 붙었는데 여기서 대뇌에서 다하고 복잡한 작용을 거치기 전에 이게 내가 그걸 집었는데 뜨거우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것을 놓게 되죠. 반사행동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대뇌를 거치지 않고 소뇌에서 바로 작동을 해서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거죠.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에는 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정이 있고 결정이 있기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정서가 기울게 되고 기울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는 생각의 파악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 복잡한 과정을 다 거치면서 우리의 마음은 수많은 행동들을 생산해 내는 공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느냐에 따라서 매우 활발하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행동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거죠. 그것이 여러분 번아웃 경험해 봤어요? 도저히 더 이상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완전히 번아웃 되어 버렸어요. 쉽게 얘기하면 진액이 다 빠져버린 거죠. 그러면 어디 가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먹고 싶지도 않고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잖아요. 그 마음은 심각한 질병 상태에 있는 걸 보여주는 거죠.
마음이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라 만약에 마음에 방향이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고 선을 향하고 은혜를 향하면 행동을 하되 아주 선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많이 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 자체가 그쪽으로 쏠려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까? 내가 어떻게 저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도울 수 있을까? 남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봉사하게 되고 하는 거죠.
그런데 방향 자체가 욕망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그럴 경우에 많은 행동을 하면 할수록 많은 악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다 이렇게 수렴해서 보면 결국은 인간의 마음속으로 수렴이 되는 거죠.
삶은 잘 들으세요. 삶은 그 마음의 펼침이고 마음은 그 모든 삶의 접힘이에요. 다시 모든 행동과 삶은 감춰진 마음이 펼쳐진 것이고 그리고 마음은 펼쳐진 것들의 접힘이에요. 결국 두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고는 인생을 바꿀 수가 없는 거예요.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이 돈이 없으면 가난한 나쁜 사람이 되고 돈을 많이 벌면 부자인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공부를 안하면 무식한 나쁜 사람이 되고 공부를 많이 하면 유식한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높은 지위에 못 오르면 별볼일 없는 나쁜 사람이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유명한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그 굴레는 결국은 벗어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라는 이 종교의 유익이 무엇이냐면 거의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리스에 철학자죠.철학자이자 과학자인데 헤라클레이토스가 자기 책에서 얘기하는데 인간의 본성은 운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유사한 이야기를 해요. 그 철학자들이 고대로부터 사람을 다 볼 때에 마지막 도달한 결론은 뭐냐면 아 인간의 본성은 안 바뀐다. 나빴던 사람은 결국은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사는 거지 그게 바뀌지 않는다 라는 걸 보여주는 것 이지요. 마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대로 떨어지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악한 마음도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고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고칠 수가 있다면 굳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겨 날 이유도 없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한번 이건 정말 아니다 라고 하는 여러분 자신의 잘못된 태도나 생활 습관 하나를 지적해보세요.
그리고 한번 고쳐 보려고 해보세요. 고칠려고 결심하는 그 순간 엄청난 힘이 내 안에서 고치지 못하도록 항거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오. 탄식했던 그 심리에요. 거기에서 결국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고칠 수 없다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서 성령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다 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이제 기억해야 되는 것이다.
계속 보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수많은 작용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아도 그것들은 인간 마음 안에 이미 실제하는 경향과 성향의 영향을 받으며 발생한다. 인간의 마음이 어떤 강한 버릇과 경향성에 사로잡힐수록 마음과 행동의 어떠함이 갖는 필연적인 연관은 증대되는 것이니 이것이 은혜로운 마음에 틀이면 하나님을 향해 사랑해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사랑을 낳고 이것이 사악한 틀이면 악한 행동들이 아주 쉽게 산출된다. 인간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이러한 많은 정신 작용들은 그 사람 자신에게 모두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엊그제 제가 그 한번 기사를 봤거든요. 깜짝 놀랐어요. 너무 깜짝 놀랐어요. 뭐냐면 이라크에서 전쟁이 있었잖아요. 아프카니스탄에서도 전쟁 있었어요. 최근에 미국이 치른 전쟁을 얘기하는 거죠. 아프카니스탄의 전쟁이 있었잖아요. 이라크에서는 약 5000명 정도의 미군 병사가 죽었어요. 근데 참여한건 아마 15만 명 정도가 전쟁에 참여했는데 너무 놀라운 것은요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월남전이나 아니면 이라크 전쟁 그 다음에 아프카니스탄 이런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이 미국 군인이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살을 하는데 1년에 4000명이 자살을 해요. 하루에 열 한명씩 자살해요. 그런데 그 전쟁이 다 끝나잖아요 끝나기 전에도 일단 사람들이 귀대를 하잖아요. 미국에서 철저하게 신경을 쓰는게 뭐냐하면 이 마음 치료예요. 말하자면 심리적인 치유. 왜냐하면 전쟁에서 자기 옆에서 동료가 폭탄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는 걸 본 거예요. 그 트라우마가 잊혀질 수 있겠어요? 그리고 폭탄에 맞아서 기관총에 맞아서 자기 다리가 날아가 버리는 거. 그런 경험이 쉽게 잊혀질 수 있겠느냐고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전문가들을 붙여서 철저하게 케어를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군인들도 월남전에 가서 참전하고 돌아온 사람들 제가 몇 사람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뭐가 이렇게 돌아와서 길거리에서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다 쏴 죽여버리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 전쟁에서의 그 트라우마가 그런 식으로 폭력으로 남는거예요. 우리나라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살하고 트라우마 때문에 죽었을 거예요.
미국은 그걸 철저히 관리를 해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관리해요. 그런데 결국은 그래도 1년에 4천명씩 자살을 한데요. 그런데 그 통계를 듣고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1년에 4000명이면 사실은 거기 이라크 전쟁에서 죽은 미국 군인이 5000명밖에 안 돼요. 10년이 지나가면 그거에 열배가 죽는 거예요. 사람이. 전쟁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잖아. 그래서 결국은 그 인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인간 자신도 파악을 잘 못하는 거예요.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걸 공부하고 우리의 마음을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어떤 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을지 어떻게 주님의 도움으로 이 마음을 다스려갈 수 있을지를 공부하는 것은 인생에 기본적인 사용 설명서예요.
그런데 정말 무지할 정도로 공부를 안해요. 그러니까 온몸으로 부딪혀서 산산조각이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다가 살다가 죽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하고. 그렇게 되면 안돼요. 기독교는 마음에 종교예요. 여러분 성경 읽다가 보면 마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성경에 많이 나오는지 한번 폰으로 한번 찾아보세요. 어마어마할 거예요. 그렇게 마음에 대해서 성경이 많이 말을 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방증하는 거예요. 공부해야 된다는 거죠. 계속 보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과 욕망을 품은 후 의지의 선택을 거쳐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은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까지 마음 안에 있는 바를 쉽게 잊지 못한다. 이는 시간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로써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심에 있어서 자신을 아시는 것처럼 익숙하게 알며 또한 마음 이후에 산출된 모든 삶을 시간과 마음의 벽에 상관없이 한 번에 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한 행동을 하기 전에도 악인을 알아보시며 또한 의로운 행동을 하기 전에도 그 의인을 아신다.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서의 시간. 기억은 영혼에 속한 가장 중요한 지성적 작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경험의 해석, 미래의 상상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찰라로서의 현재는 박막의 시간으로써 길이를 잴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박막의 현재를 지나 인간의 기억 속에서 과거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 도달하지 않은 시간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미래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미래는 현재를 통해 과거로 흐르는 시간이며 현재를 현재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인식이 되는 것이며,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는 정확하게 현재로써 이게 현재의 길이는 잴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미래와 과거에 대한 인식이 있으므로 현재가 인식된다는 의미다. 인간이 어떤 시점을 현재로 삼아 사물을 바라볼 때 과거의 기억 속에 회상이 발생하는데 이때 회상 속에서 떠오르는 기억 속의 관념들이 현재 바라보고 있는 사물들이 전달하는 관념들과 조합하게 된다.
이때 이 사람은 현재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을 통해 현재의 사물을 인식한다. 미래로부터 현재로 흐르는 시간은 순차적이지만 현재를 거쳐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시간의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 기억 안에서는 시간이 순차가 사라져 영원의 닮은 꼴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한에서는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여 만물을 보심과 같이 본다. 시간과 공간의 개입으로 인해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의 전후 관계, 동일 사물의 전권과 후권 사이의 관계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미래를 거쳐 현재를 지나 과거를 지나가던 시간과 사물에 대한 기억들은 시간을, 시간의 흐름을 배제하고 원인과 결과의 거대한, 거대한 도해만이 기억의 평면에 남게 된다. 마음은 이러한 기억의 평면 도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시간의 전후와 상관없이 불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불러내어진 기억들은 마음 안에서 현재화되어 새로 경험하는 현재의 사건인 것처럼 현재적으로 정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지난 시간에 발표 못 하신 분, 한 세 분 남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고하경 학생? 강론 들은 거 소감 얘기해 주시겠어요?
고하경 : 강론이요? 네. 저는 마음밭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엉겅퀴와 잡초 같은 게 씨가 날라와서 마음에 심겨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게 한 번에 생기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이렇게 자란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그게 결과가 순종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 저 상황을 봤을 때도 하나님이 어떤 것을 가지고 순종하라고 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저 스스로도 뭔가 하나님과 타협하는 것 같이,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못하구요. 제가 한 달 뒤에 하겠습니다. 세 달 뒤에 제가 좀 더 성숙해지면 하겠습니다. 이렇게 했는데 사실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성숙해져가며 그걸 순종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된 것들이 되게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저의 모습들을 많이 되돌아보게 됐던 것 같습니다.
신주혜 : 강론에 대해서 나누는 건가요 혹시? 저도 강론 들으면서 마음밭에 대해서 목사님께서 많이 말씀해주셨는데 초반부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한때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던 사람이 오히려 세상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심하게 세상에 막 빠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우선 지금 상태에서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 가운데에 있지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한때 이렇게 하나님을 인생의 목표로 삼다가 다른 것에 마음을 두게 되면 이렇게 쉽게 마음밭이 많이 망가질 수 있다라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있어야겠구나. 저도 안전하다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 하나하나 내 마음의 욕심과 뭔가 세상에 대한 정욕이 있을 때 그걸 바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면서 기도하고 말씀 가운데에 잡아내야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죄죽임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가 총체적인 순종이라고 하셨는데 아까 그래서 제가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삶의 작은 부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지 못하실 영역이 없다라는 걸 늘 기억하면서 순종을 해야 된다 또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또 추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보다 현재 나의 삶을 쓸어버리고 결단이 필요하다라는 거를 좀 많이 느꼈던 강론이었습니다.
김혜원 : 저는 그 질문하신 것 중에 잡초를 왜 대수롭지 않게 우리가 생각을 하는가에 대해서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정말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이게 죄인가? 뭔가? 무뎌지고 되게 그냥,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상관없고 약간 이런 식의 태도가 돼버리는? 그래서 약간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배째라'라는 형식의 태도로 변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좀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주 고난주간이기도 하고 좀 새벽 예배를 나가면서 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기도하고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훈 : 그래서 그 마음을 좀 돌아보게 되었는데 사역 초반에 할 때는 이제 코로나라는 게 막 터져 있는 시기에서 이제 유초등부 사역을 하고 있는데 부모님들이랑 아이들이 이렇게 마스크를 좀 이렇게 걷어서 동네 놀이터나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나눠주자, 라고 이제 얘기를 했는데. 부장님이나 이제 부목사님이 이 얘기를 들으시고 이제 부모님들이나 부모님들이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다,라는 답변을 받아서 진행하지 못했던 것,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걸 보면서 교회가 이래도 되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역을 진행하면서 이제 초반이 지나고 하면서 이제 1년 차가 됐는데. 그 가운데에서 이제 부모님과 부모님들에게 좋은 관계를 갖게 되고 아이들도 저를 이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아이들에게나 부모님에게나 저 자신도 스스로가 부담스러운 말이나 뭔가 부담을 주는 그런 말들을 덜 하게 되어서 이러면 안 되겠다라는 그런 경각심이나 긴장감을 갖게 되었던 그런 강해였던 것 같고요. 그리고 이번에 특별히 고난 주간에 이제 강해를 듣게 되었는데 큰 잡초는 많이 없을지라도 큰 나무가 있으면 지속적으로 이제 크게 되는 그런 큰 나무, 그런 양분을 빨아들이는 그런 나무가 있으면 이리 망하나 저리 망하나 적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지속적인 그런 죄가 반복되는 그런 죄에 대해서같이 가는 거다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은연 중에 그렇게 가지게 되었었는데 그런 그 나무를 베어내는 그 고통을 수반하,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면서 묵상하면서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이번 고난 주간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이태양 : 강론을 듣고 하면서 마음밭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됐는데 회개를 하고 내 안에 있는 이 죄악들을 해결하는 과정 가운데, 오늘 뭐 수업을 들으면서도 느꼈지만 그 내 마음의 방향성을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총체적인 회개가 가능하겠구나라는 생각을 좀 하게 되었어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억제하고 끊어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끌어 올라서 그래서 내 모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은혜가 필요한 거구나, 내 의지가 아니라 은혜가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네. 자 이제 아까 조금 아까 설명했던 현재 미래 과거 그리고 기억의 관계를 한번 도표로 보겠습니다.이제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은 시간은 이제 이렇게 흘러가잖습니까? 이렇게? 이렇게 흘러가면 당연히 그 현재겠습니다. 현재인데 사실은 그, 이 현재는 사실은 시간을 잴 수가 없습니다. 진짜 그 시간, 시간에, 얼마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라고 하는 건 길이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겁니다. 내가 '현재'라고 말하는 이 발음하는 순간에도 벌써 현재라는 시간이 흘러가잖습니까? 그러니까 말을 마치고 나면 이미 현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거 어쨌든 가상의 시간입니다, 이거는. 그리고 그 다음에 미래의 것이 현재를 통과해서 그래서 과거가 됩니다.
자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이제 여기서 이렇게 1번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2번에 사건이 발생하고 3번의 사건이 발생하고 4번의 사건이 발생을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당연히 이게 제일 먼저 발생했겠습니다. 그렇죠? 이게 첫 번째로 발생하고 그 다음에 이게 그 두 번째로 발생했겠죠? 그렇죠? 두 번째로 발생하고. 그 이게 세 번째로 발생하고 네 번째로 발생합니다.
근데 이것들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게 원인이 되어서 이게 발생한 거고 그 다음에 이게 원인이 되어서 이게 발생한 겁니다. 이게 원인이 되어서 이게 발생한 거고. 그렇게 될 때, 시간이 전개되기 전까지는 사실은, 여기까지는, 여기에 있을 때에는, 여기에 있을 때는, 이 사건은 알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하는 것은 아직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또 다음 사건이 발생하고 다음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근데 이제 이게, 이제 이렇게 했는데 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들어올 때는 이게, 이게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1번이 이렇게 들어와서 여기에 마음에 맺히게 됩니다. 2번은 이렇게 와서 여기에 맺히게 됩니다. 당연히 시간적으로는 이게 제일 먼저 일어난 거고 그 다음에 이게 발생한 겁니다. 그 다음에 3번은 이렇게 들어와서 여기에 맺히게 되고 4번은 이렇게 들어와서 여기에 맺히게 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게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서 기억 속에 입력이 되면, 그 다음에 이 시간의 선후 관계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1번, 2번, 3번, 4번이 이렇게 인과관계만 남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인과관계만 남고 시간은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어, 이렇게 되면은 결국 인간 인간 속에서 이제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 인간을 보실 때에, 인간을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실 때에 여기에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이 인간은 이렇게 시간을 지나갈 거 아닙니까? t, t1, t2, t3, 그리고 시간이 이렇게 지나갈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하나, 사람은, 사람은 시간 안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요것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렇게 요렇게 보실 수도 있고 한 번에 모든 걸 보실 수도 있고. 이 하나님이 보시는 것, 이거를 이렇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보는 거를 '현견지'라고 부릅니다. 그다음에 이런 거를 초월해서, 초월해서 한 번에 모든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에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을 가리켜서 '단순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실 단순지로는 못 봅니다. 항상 시간이 흘러가는 그 시간 안에서 사물을 봅니다. 그런데 기억 속으로 들어올 경우에는 단순지의 방식으로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단, 이미 경험된 일들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첫 시간에 제가 이렇게 설명해 드린 기억이 날 것입니다, 아마. 인간이 이렇게 있고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 있고 이게 의식인데 이 의식에, 의식에 일종의 막이 형성돼 있는 겁니다. 이렇게 그러면 여기에서, 여기에서 이렇게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자연을 만나거나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 이 사건들은 어, 감각을 통해서 이렇게 들어오게 되겠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여기에서 많은 느낌들을 경험하게 되겠습니다. 그렇죠? 정동입니다.
그런 후에는 이게 이제 기억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모든 게 의식 속에 살아있지 않잖습니까? 그리고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어, 이번 학기에 아, 내가 졸업을 하는데 수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의식 속에 자기 들어올 거 아닙니까? 뭐 상장도 받고 꽃다발도 받고 상금도 받고 그랬겠습니다. 근데 그 항상 그렇게 항상 기억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 기쁨이 사라지고 기억의 기억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어떤 자극에 의해서 이것이 소환되는 겁니다. 이렇게 다시. 소환되면은 이 의식의 막을 건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게 매우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게 매우 기쁜 일이었습니다. 여기 소환이 되면서 여기를 출렁거리면서 수십 년 전에 지난 일인데 똑같은 감정이 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외로움, 그 때의 기쁨, 그때의 분노, 이런 것들이 다 살아서 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현재의 이렇게 만나는, 시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대상들로부터 인식하고 그 다음에 느끼고 그 다음에 결정하고 하는 작용을 통해서 마음이 움직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억 속으로 내려가 있는 많은 것들이 외부와 연관이 되어서 소환되거나 혹은 이 안에서 상상이라는 방식으로 스스로 소환하여 이것들이 섞이면서 수많은 인간의 마음의 정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인식과 정서와 결정을 하게 되는 아주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흔히 이야기하는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라고 하는 이야기가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이렇게 복잡한 작용을 거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도덕적으로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나를 지으신 목적들을 이해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느냐에 의해서,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 그게 반성입니다. 그게 반성이라고요.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우리의 마음은 사실은 항상 우리의 자아거든요.
근데 이것을 옳음, 영원한 올바름 혹은 진리라는 빛으로서 이것을 분리해내서, 그래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가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을 내가 느낀다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이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강론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이제 심각한 이야기들을 했는데, 근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여러분 스스로를 두둔했을 텐데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자기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악으로 이끌지 않고 선으로 이끌 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그거를 그 아주 신학적으로 경험적으로 상세하게 서술한 게 그게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이 과하고 지금 연결이 돼서, 이 내용하고 연결이 되기 때문에 내가 다다음 주에 그걸 여러분들에게 숙제를 내주는 것입니다.
다시 강의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6페이지 b번입니다. 마음과 자아. 인간이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아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실존은 자아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니 하나님이 어찌 계시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든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아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아는 영혼과 육체에 걸쳐 있는 자신으로서 기능하는 총체적 실체를 의미한다.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영혼을 소유한다. 그러나 영혼 자체는 자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자아의 범주를 크게 세 가지로 뽑았는데 감각 지각, 공통 감각, 그리고 이성으로 꼽았다.
감각 지각은 뭐냐 하면은 어떤 사물들을 크기, 모양, 색깔, 이런 것들을 우리의 감각으로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의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것이 자아의 첫 번째 범주고 두 번째는 공통 감각입니다. 공통 감각은 신테레시스라고도 하는데 그건 뭐냐 하면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잖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빨간 색깔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초록색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요점만 이야기하는 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상세하게 얘기해주는 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간접 화법의 대화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직접 화법의 대화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직접 화법의 아주 대가들입니다. 난 경상도 그 내려갔을 때 너무 놀란 게 대구가 부산인가를 내려갔는데 식당에서 막 싸우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왜 그러나 그랬더니 이랬다, 이랬다 아이가, 그러니까 여태까지 막 싸웠는데 그게 자기 얘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접 화법으로 옮기는 겁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정말 많이 사용합니다. 그 직접 화법을. 그런데 그게 굉장히 실감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같이 이제 서울에서 오래 자란 사람들에게는 좀 부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렇게 직접 화법을 많이 사용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든 감정을 넣어가지고 액션까지 하는 거는 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근데 어쨌든지 간에 그런 성향 근데 그런 성향의 차이가 다 있잖습니까?
그런데 공통 감각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이런저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 사람은 아름답고 좋은 것은 보고 싶어하고 끔찍하고 흉칙한 거는 안 보고 싶어 하잖습니까? 근데 누군가 사람이 바로 이 학교 앞에서 길에서 치어서 죽었다, 그러더라 그러면 인간의 마음은 아름다운 걸 보고 싶고 끔찍한 걸 보고 싶지 않은데 모두 밖에 나가서 그 광경을 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근데 그거를 보았을 때 어떤 사람은 그 끔찍하게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광경을 보면서 야아 정말 아름답다, 이러고 어떤 사람은 아 흉칙하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그게 공통 감각입니다.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피 흘리고 쓰러진 광경을 보면 다양한 생각을 갖는 게 아니라 다 '끔찍하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LH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기 직위를 이용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미리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 어 나는 못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어 난 난 충분히 이해가 돼' 이러는 사람보다는 분노하는 겁니다. '이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 공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그렇게 부당하게 정보를 얻고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한다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건 있을 수 없다.' 이게 모든 사람이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거 왜 그럽니까? 정의에 대한 공통 감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올바르지 않다는 겁니다. 그거는 올바르지 않다. 그거를 우리가 공통 감각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공통 감각은 미학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도덕적인 것, 또 자연적인 많은 것들이 이렇게 함께 걸쳐져 있는 겁니다. 이게 특히 이제 이 공통 감각의 문제는 미추, 그리고 도덕의 선악과 관련해서 놀라운 공통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동양에서는 권장할 만한 일이고 서양에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동양에서는 악한 일이고 서양에서는 권장할 만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그 인간의 도덕성이 주어지지 않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도덕적인 것은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근데 이제 현대 사상은 그런 것들의 유래가 무엇인가, 추적을 할 때 그건 진리다, 신이 인간에게 준 예를 들어서 양심 신성설 같은 거 그러니까 윤리라고 하는 의식 자체가 신의 음성을 인간의 마음에 준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사회의 관습에 의해서 우리가 물들어온 것이다, 무슨 충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도덕이라든지 정조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어떤 진화론적으로 우리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사회에 있어서 우리에게 억압적으로 주어지는 가치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어떤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러면 결국은 도덕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게 이제 실존주의자들이 고민했던 바입니다. 그래서 그 「아사밤」 보면서 여러분들이 '바이런의 이야기' 읽었잖습니까. 그런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도덕적인 그런 어떤 그 상대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그 방종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도 행복하지 않잖습니까. 공통 감각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개, 감각 지각, 공통 감각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이성입니다. 그 세 가지가 합쳐져서 결국은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러면 내 자아나 다른 사람의 자아나 마찬가지 아니냐? 모든 사람이 감각 지각을 가지고 있고 공통 감각을 가지고 있고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죠? 그런 점에서는 결국은 자아라는 것이 결국은 구별성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근데 그게 이제 다른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각기 하나님이 공통적인 본성도 인간의 영혼에 주셨지만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개별적인 본성을 그 속에 주셨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 가지와 이 세 가지를 영원 안에서 가짐으로써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 우리 모두 사람이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 그런 개별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개별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성향과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도록 인간을 그렇게 지으신 겁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은 인간을, 어떤 인간에 대한 어떤,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 깊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그런 외형적인 요소에 매이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귀한 형상이라고 볼 수 있는 그 태도 자체가 신앙의 깊이인 겁니다. 사랑 없이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그 경지에 이르를 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하고 계속 나가겠습니다.
이러한 기능들은 인간의 육체와 마음, 마음 영혼에 걸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 거기 있는 감각기관으로 자기, 자기 밖에 있는 사물을 파악하며 그것을 인간의 마음에 전달해 준다. 그러한 마음으로 외부의 사물들에 대한 감각들을 전달해주는 육체의 기능을 포함하여 영혼 전체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의식하는 자기로서 기능하는 총체적 실체를 가리켜 자아라고 부르는데 이 자아를 움직이는 중심부가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그 자아에 대한 의식 자체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 도서관에 가서 아니면 인터넷으로도 자아에 대해서 좀 철학 사전 같은 거 한번 찾아보십시오.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인간은 이미 어떤 영혼의 경향성과 힘을 가지고 태어나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그와 합치된 경향과 성향을 가지게 되지만 인간은 마음을 통하여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들과 접촉하면서 마치 자신이 미완성인 것처럼 감응과 변향이 아니라 변양입니다. 변양. 써드리면 이렇게 변양입니다. 양상할 때 '양'자고 이건 변화할 때의 '변'자입니다. 양태가 변한다 이런 뜻입니다. 감응은, 감응. 뭔가 상황에 대해서 느끼고 반응하는 걸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감응과 변양을 통하여 새로운 자신을 형성해 간다.
이게 자아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지만 끊임없이 그 정체성 안에서 인간이 변해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향이 변할 수 있잖습니까. 그렇죠? 어려서 생선 입에도 못 됐는데 나이가 들면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되고 또 물고기를 좋아하게 된다라든지. 아니면 어려서는 책 읽는 걸 좋아했는데 나중에 점점점점 취미를 붙이면서 운동하는 것도 좋아하게 된다든지, 다른 사람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사람이 점점점점 이렇게 성향이 개발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성향으로 바뀐다든지 하는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아의 정체성을 바꿔놓는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마음의 작용을 주신 것은 이러한 외부의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이미 주신 하나님의 질서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또 그것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구현함으로써 세계의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인간이 자기의 지성적 영혼 안에 있는 세계 안에 있는 객관적 도덕 가치의 질서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한 도덕의 가치들은 다음 세 가지 근거에 의하여 인간 지성 속에서 이해되며 이로써 인간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를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의 지성이다. 창조되었을 때 두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믿음과 이성이다. 믿음에 의해 초자연적 하나님과 자연적 사실을 직관함으로 깨닫고 이성의 추론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우주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질서들을 파악하고 거기서 도덕 가치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객관적 진리다. 이 진리는 질서를 통해 인간에게 파악되는데 진리를 전달해주는 피조세계의 질서는 두 가지이다.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인데 자연적 질서는 과학적 진리들을 전달해주고 도덕적 질서는 윤리적 질서들을 전달해 준다. 영혼과 육체 안에서 인간은 총체적으로 진리를 향해 살 수 있는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존재다. 인간은 영혼으로서 하나님을 보고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객관적인 도덕 가치질서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작용을 하도록 부여된 것이다. 자아를 움직일 뿐 아니라 정체성을 형성하고 반영하는 곳이 마음이다. 인간의 사람됨이 마음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아란 그 근간은 영혼의 기억이며, 기억해 두십시오. 그러므로 자아란 그 근간이 영혼의 기억이며 기억의 무수한 넘나듦과 광활한 움직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의 다대함을 보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처럼 독특한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과 정신 안에 일어나는 작용은 실로 무한하며 그것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은 자아에 대한 이해를 수립한다. 우주만큼 광대무변한 정신 작용, 기억의 광활함, 그 속에서 인간은 자아를 발견하기보다 붙들고 있던 자신에 대한 지식조차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 탐구고자 하고자 하는 자아 발견의 한계다.
자아는 무엇인가 어떻게 발견되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끝없는 기억의 광활한 우주를 더듬어 가본 적이 없는 영원 안에 있는 무한한 세계로 확장한 것만을 통해서는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우주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해서 확장해 간다고 할지라도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매우 미천하고 작다는 것을 느낄 뿐이지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느낄 수는 없다, 이겁니다. 그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겁니다.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따지면 나만 먼지가 아니라 너도 먼지고 너도 먼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연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 수는 없다, 이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끝없는 밤 하늘을 한없이 여행한다고 할지라도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인간 영혼의 근원인 영원 편에서 확장하는 정신 작용과 기억의 넓어짐을 주시하는 가운데 파악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영혼과 정신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자아는 파악된다. 영혼 자체이신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끝없이 확장되는 정신과 마음의 기억조차 객관적으로는 무한소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으며 영혼과 정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스스로는 누구인지를 알고 존재의 목적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마음 밖에서도 진실이며 내면의 세계 안에서도 진실이다. 하나님 없이 정신 세계를 들여다보면 길을 잃을 정도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정신 작용을 보면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의존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아의 육체와 정신 세계를 넘나드는 성격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넓은 대역을 넘나드는 자아를 파악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니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표지다. 이 마음을 중심으로 자아는 정체성이 유지되며 변양하며 발전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바로 자아를 구성하는 육체와 관련된 모든 정신의 작용과 또 영혼과 관련된 모든 정신 작용을 수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 퀘스천?
"교수님, 아까 말씀하신 그 자아에 관련하여서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책이 사실은 자아만, 자아가 무엇인가만을 가지고 연구해서 자아가 이것이다라고 밝혀낸 책은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많은 그 책 속에서 발견되는데, 근데 심리학에서 접근하는 것과 철학에서 접근하는 것과 신학에서 접근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근데 신학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런 문제를 다룬 책들이 매우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자아의 문제를 가지고 바로 들어가기보다는 일단 영혼에 관한 문제를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에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가운데 이제 자아에 관해서 기록된 자료들을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선 제가 추천하는 것은 그 저기, 「영혼론」 있습니다. 철학 교수 이정우 교수가 쓴 「영혼론」이라는 얇은 책이 있는데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 페리프시케시(Peri Psyches)라는 책이 있고 그것도 「영혼에 관하여」라는 제목인데 「영혼론」이라고도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플라톤의 「파이돈(Φαίδων)」이런 책들을 먼저 읽고 영혼에 대한 개념을 잡은 다음에, 그다음에 인간 본성에 대해서 다룬 심리학 책과 철학 책들을 보십시오. 심리학은 철학보다는 훨씬 이렇게 바라보는 게 자세하기는 하지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책을 같이 겸하여 보면서 독자적인 자신의 이해를 넓혀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들에게 보내준 그 「마음지킴」 그런 책들을 보면서 이렇게 해나가면 좋고. 또 만약에 여러분들이 더 탐구하고 싶다면 열린교회 홈피에 들어오면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하여>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한 여덟 개 정도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 영혼론과 인간의 마음론을 좀 쉽게 다룹니다. 철학적인 내용들도 물론 들어가 있지만은 그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다뤘거든요. 그렇게 공부해 나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네, 근데 연구하는 것도 좋은데 그거를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끊임없이 연관시켜서 연구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이제 진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인간 이해를 가질 수가 있는 겁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한 분만 더 질문 받겠습니다.
"교수님 저 질문 드릴게 있는데요. 인간은 아무리 자기에 대해 탐구하고 아무리 자기에 대해 공부, 생각을 해도 나의, 인간이라는, 자신, 나는 누구인가라는 대답에 질문을 하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면 저희가 나에 대해 규명하고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안에서 이런 존재이구나 이게 최선인 건가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이제 심리학이, 이제 심리학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처음에는 인간의 심리학의 관심 대상이 인간의 의식이었습니다. 의식 세계.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실 의식 세계는 무의식 세계하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있는 거를 알 수 있는 겁니다.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잖습니까. 융도 마찬가지고.
근데 결국은 이런, 이제 결국은 그걸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캄캄한 벌판입니다. 아주 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높은 탑이 서 있습니다. 거기서 탐조등을 비추는 겁니다. 탐조등을 비추면은 멀리까지 날아가면서도 밝게 비칠 수 있어야 되니까, 그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이렇게 넓은 범위를 비춰서는 그 빛이 분산되니까 정확하게 사물을 볼 수가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멀리 나가는 것일수록 이 비치는 반경이 좁습니다, 초점이. 그래서 똑바로 나가서 딱 떨어져서 한 부분이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을 엄청나게 넓은, 드넓은 캄캄한 벌판이라고 볼 때에 그 사람들이 말하기에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거기에 비치는 한 줄기 탐조등의 불빛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그 하나 비친 거 그거 하나를 가지고 인간 전부를 알았다라고 말하는 거는 그거는 너무 독단이다라고 보는 겁니다.
근데 결국 무의식의 세계라고 하는 것을, 결국 그 무의식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의식의 세계에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우리들이 의식을 통해서 무의식의 세계에 뭐가 있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 무의식의 세계는 그야말로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를 자기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 파악한다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거기에는 끝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하면 그러면 그럼 우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근데 정확한 건 이것입니다. 뭐냐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거의 배우지를 않았는데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영혼에 대해서 많이 배웠는데도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나라고 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나라고 하는 존재를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가 뭐냐 이것입니다. 그 자체가. 호기심으로 나를 파악할 수도 있겠습니다. 파악하고 싶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죠? 아무 이유 없이? 대부분의 경우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이런 질문의 문제는 언제 발생하느냐 하면은 내가 무엇을 판단하고, 그리고 어떤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서 혼란을 느낄 때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놀이나 오락에 미쳐서 막 살아갈 때에는 절대 그런 질문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뭔가 의미를 생각하고 나의 운명을 생각하고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할 때에, 그때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이제 내가 누구인가라는 이 문제를 어디에다 초점을 맞춰야 될 것인가를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제 성경적으로 보면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겁니다. 그 목적의 끈과 탐구의 현실을 끊임없이 연관 지어야 되는 겁니다. 이건 무엇과 똑같으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지, 호기심으로 알고자 할 때는 절대로 하나님이 당신이 알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다, 라고 못 박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나에 대한 앎도 바로 그 목적과의 연관성을 놓치지 않는 그 속에서 나에 대한 앎을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를 발견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