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14)
녹취자: 이재호
마지막 수업시간이고 다음 주에는 기말고사를 보게 될 텐데 오늘 강의를 끝까지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론 과제가 디모데전서 4장 15절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였는데 같이 한 번 나눠 보기 전에 먼저 기말 고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말 고사는 요렇게 문제가 나왔습니다. 수업 끝나고 나서 에레메스에 다 공지가 될 예정입니다. 1번부터 18번까지 있는데 저게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 중에서 문제가 한 10문제 정도 나올 예정입니다. 무엇이 나올지는 모릅니다. 18문제를 내고 골라서 10개를 쓰시오 이렇게는 안 나오고 무엇이 나올지는 모릅니다. 아마 적으면 10문제 많으면 12문제 정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한 문제에 대해서 10줄내지 15줄 정도 쓰면 적합합니다. 그리고 책을 보고 쓰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여러분이 순수하게 공부하고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타이핑 치는 것입니다. 12줄 정도가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10줄에서 15줄을 넘기 않도록 10줄 미만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고 10줄에서 15줄 사이 그렇게 쓰시면 됩니다. 저 질문지를 놓고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공부한 것을 쭉 정리해보라는 뜻입니다. 몇번 읽고 오셔서 자유로운 말로 쓰면 되고, 여러분 가운데 꼭 A+를 맞고자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은 훨씬 답안을 잘 쓰셔야 합니다. 책에 실리고 강의 안에 실리 것을 그대로 옮기는 정도로는 A+까지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확실하게 소화하고 정확하게 자기 말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지만 받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혀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편안하게 그렇게 해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한학기 동안 수업 받으시느라고 고생하셨는데 이번에 책이 나왔습니다.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다시 게으름’ 이라고 책이 나왔는데, 성실하게 수업에 임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권씩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 시험보러 오실 때에는 과제 없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오셔서 시험만 보시면 됩니다.
수업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나눔의 시간도 굉장히 많이 가졌는데 오늘도 먼저 진보를 알게하라는 나눔의 시간을 먼저 갖고 그리고 수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맨 밑에서 부터 하겠습니다.
임승현 : 저는 그 강론이 지성의 진보와 신앙의 진보로 설명을 해 주셨는데, 계속 들으면서 저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아 가지고 엄청 많이 안타까워 하셨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저도 교수가 되거나 그렇게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적당히 공부를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을 좀 더 하다 보니까 내가 생각하는 적당히 공부하는 건 얼마나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것을 또 고민해 보니까 저는 한학기를 기분좋게 마무리하는 정도? 주어진 과제랑 시험을 잘 넘길 수 있는 정도로 공부를 하고 있었구나! 그게 딱 저한테 적당한 공부였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그 나라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과제 잘 끝내고 성적 잘 받고 그렇게 잘 종강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구나 이런 게 조금 생각이 되니까 막막하기도 했고 좀 반성하면서 강론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 오늘 마지막 시간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유승현 자매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목사님 : 야구 좋아하세요?
윤승현 : 아니요.
목사님 : 운동 중에 뭐 좋아하는 거 있어요?
윤승현 : 저는 수영 좋아해요.
목사님 : 그럼 이야기 해 봅시다. 수영 선수가 있다고 칩시다. 사람이 너무 좋아요. 모든 동료 수영 선수들에게 칭찬을 받아요. 좋은 거에요? 나쁜 거에요?
윤승현 : 좋은 거에요.
목사님 : 부모에게 너무 효성스럽고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너무 친절해요. 좋은 거에요? 나쁜 거에요?
윤승현 : 좋은 거에요.
목사님 : 얼굴도 예쁘게 생겼어요. 좋아요? 나빠요?
윤승현 : 좋아요.
목사님 : 당연히 운동 선수니까 몸도 튼튼해요. 좋아요? 나빠요?
윤승현 : 좋아요.
목사님 : 친구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어요. 서울 시내 온갖 맛집을 다 꿰고 있어요. 좋아요? 나빠요?
윤승현 : 좋아요.
목사님 : 수영은 잘 못해요. 좋아요? 나빠요?
윤승현 : 좀 곤란해요.
목사님 : 수영선수인데 다른 것을 아무리 잘 해도 수영선수인데 수영을 못하면 다른 많은 것을 잘 해도 살아날 수 없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본분이 뭐에요? 학생이잖아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에요. 언젠가는 그것이 끝나겠지만 지금의 중요한 덕목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거에요.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공부는 단순하게 학교 공부를 열심히해서 A+를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에 이 과정속에서 성실히 임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발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거죠. 김혜원 학생.
김혜원 : 저도 앞의 학우랑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데 굉장히 강론을 들으면서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비대면 수업을 하다 보니까 더 마음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겠다는 마음보다는 대충 설렁설렁하자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대면을 했을 때 보다도 비대면을 하다 보니까 또 학교도 안가고 집에서 좀 있다 보니 마음 자체도 게을러지는 그런 마음이 좀 들어서 동기부여가 많이 됐던 강론이었던 것 같아요.
목사님 : 그래서 뭐에 대해서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김혜원 : 사실 이제 4학년이다 보니까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가장 고민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신대원을 가야하나? 어딜 가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좀 더 크게 가고싶다는 동기부여가 생겼던 거 같아요.
최주헌 : 강론을 들으면서 이제까지 내가 해 왔던게 공부라는 것을 해 왔었나 생각이 들었는데 누군가 시켜서 하고 숙제로 내주면 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면 그 숙제를 해가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교수님들이 내주신 과제를 하고 내가 시험공부를 하고, 이것이 내가 공부를 하는 건지 시켜서 하는 건지 생각해 보면서 내 스스로 지식을 쌓고자 책을 읽고 조사를 해보고 이렇게 했던 적이 없었던 같아서 돌아보게 되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읽은 책들을 쌓아보면 어느정도일까 생각도 해 보면서 돌아보았습니다.
목사님 :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좋은 품질의 인생을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식이 없이 우수한 품질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입니다. 공부를 해야되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고 어디든지 자기 직종으로 나갈꺼 아니에요? 그러면 거기에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원하지 상식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질문 벌써 몇 번만 해보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훤히 들어나는 사람은 어디가서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것보다도 내가 강론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더 중요한 점은 인생공부를 해야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에요. 그래서 끈임없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생각하지 공부하지 않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불빛이 나면 불을 붙여야 되듯이 불빛이 나는 것이 사색이라면 공부를 하는 것은 불은 떼는 거에요. 그래서 공부하지 않고는 사색에 잠길 수가 없어요. 반대로 공부만 하는데 사색은 안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공부하는 기계죠. 그런 것들은 다 AI나 CPU에 의해서 대체될 지식들이에요. 그래서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생각을 하는 거죠.
특히 젊은이들은 여행 좋아하잖아요? 코로나 끝나고 나면 80%가 다 여행가고 싶다고 하는데 저도 여행가고 싶어요. 보통 1년에 인천공항을 우리 비서가 20번씩 따라다니는데 한 번도 못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너무나 답답하죠. 답답할 뿐만 아니라 해야할 일들이 전세계에 있는데 안되고 있으니까 갑갑하죠. 여행을 잘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 진짜 제대로 여행하는 사람은 없어요. 가서 맨날 예쁜 곳에 가서 사진찍고 오고 맛있는 집에 가서 먹고 오고 파리에 가서 에펠탑 앞에서 팔 벌리고 사진 찍고 세느강에서 유람선 타면서 사진찍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것은 여행의 부가적인 즐거움이에요. 진짜 여행은 ‘그 사람들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았나? 무슨 생각을 했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나? 그리고 그들의 살았던 과거가 오늘의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를 생각하면서 여행을 하면은 그 도시를 떠날 때 쯤에는 그 도시를 찾았던 당시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그 책을 읽기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어떤 여행은 떠나기 전의 그 사람과 다녀오고 난 뒤의 그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김재원A.
김재원A : 저는 강론을 들으면서 계속 왜 공부하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던 것 같아요. 그냥 제가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닌 거는 분명 알고 있었는데 그게 조금씩 바뀔 때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냥 인정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공부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이번에 많이 들었던 것 같고, 공부함이 잘못하면 그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많이 깨닫게 되었던 것 같고, 아직도 확실히 다 제 스스로의 답은 못 내렸지만 강론을 들으면서 갈피 약간의 방향성은 잡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지성이라는 말이 좀 깊게 파고 들었던 것 같아요. 인격뿐만아니라 인성뿐만아니라 지성까지도 하나님께 헌신되어서 공부함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하나의 또 다른 방법이 되어야 된다는 공부함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된 것 같아서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함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앞으로 평생토록 환경과 씨름하고 세상의 다른 풍조들과 사상들, 이면에 흐르는 고도들을 파악하는 씨름을 해 나갈 때 정말 하나님께 헌신된 지성으로써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인격과 지성이 분리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의문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지요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노래를 어거스틴이 지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공부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학문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으면서 모든 지식들을 공부할 때 거기서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에게 주신 중요한 의무가 ‘너희는 나를 기억하라, 나를 알라, 여호와를 힘써 알라, 나를 잊지 마라, 나를 기억하라’ 이것이 전부가 지성의 헌신을 요하는 것입니다. 그런 공부를 하면서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이 못 보는 하나님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며 보다 더 아름답고 선한 삶을 사는 데에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유교에 격물치지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을 살핌으로써 궁극적인 지식의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흘러가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소재가 보이겠고, 또 화학자에게는 H20가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격물치지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아! 인생도 흘러가는구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모든 인간도 이치를 따라서 살아야 되는구나!’ 하고 ‘그 이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구나!’하고 깨달아서 그 결론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늘의 영광을 돌리고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격물치지의 개념입니다. 모든 학문을 하면서 거기에 인간의 어떤 근본적인 이상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알고 나면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여울 수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까?’ 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놀러가고, 그냥 이래저래 부딪치면서 즐거우면 웃고 힘들면 울고 그러면서 사는데 인간은 그 이상의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죽어도 티끌만큼도 두렵지 않고 용기가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이태양.
이태양: 강론을 들으면서 ‘내가 너무 쉽게 나 자신을 좋게 보고 만족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에 와서 책은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그러면서 ‘내가 좀 자라고 있구나!’ 생각을 했는데 강론을 들으면서 ‘이 귀한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너무 부끄러웠고 좀 그런 마음을 되게 많이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저희 친형이 대개 공부를 잘 하는데 형이랑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하다보면 좀 말이 안 통할 때가 있었어요. 내가 나중에 사역자가 되면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가르쳐야 되는데 ‘정말 큰일났다. 내가 이 상태로 사역자가 되면 큰일 났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대개 많이 부끄러웠지만 다시 힘을 얻어서 내 미래의 성도들한테 부끄럽지 않게 진짜 잘 준비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애를 써왔고 좋아했는데, 제가 1988년도에 34살의 나이로 교수가 되었습니다. 정식 교수가 되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해에 스티브 림이라고 하는 미국의 고위 관료를 지낸 사람이 교수 퇴수회에 한 학기 끝나면 퇴수회를 하는데 거기 강사로 오셨습니다. 이 분이 하버드 출신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도 사회 교과서에 실렸는지 모르지만은 6.25의 참상을 이야기할 때 어떤 어린아이가 밥그릇 하나를 들고 숟가락을 들고 하늘을 보면서 울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사진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진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이 전쟁 고아가 되어서 결국 미국으로 입양을 갔고, 대령인 사람이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여서 교육을 시켜 주었습니다. 어렸을 때 젖을 못 먹어서 키가 작습니다. 그 사람이 백악관에 들어가서 아주 고위직을 지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학을 하버드를 나오고 석사를 하버드에서 하고 박사까지 하버드에서 했습니다. 정치학 박사를 했는데 그 사람의 지도 교수가 헬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고위직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데 자기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이야기를 해 주는 것입니다. 한국 학생 공부 너무 안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루에 600 페이지를 매일 읽어야 됩니다. 그것이 영어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 불어 원서까지 합해서 600페이지입니다. 평균 읽는 독서량입니다. 그리고 매일 9시 정각에 레포트를 교수실 앞에 통이 있는데 문이 열려 있는데 창구에다가 넣어야 되는데 교수 한 사람은 9시 10분에 가져갔더니 ‘No thank you’ 하면서 그 자리에서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대학 4년, 하버드에는 술집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1,2,3학년 학생은 들어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4학년 학생들만 이용하는 펍이라고 합니다. 법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거기에 갈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4년, 2년, 박사과정에서 5년정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졸업을 하는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이야기를 들으니까 거기는 더 합니다. 이튼스쿨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나온 한국 학생이 아버지 따라 이민을 갔다가 거기서 케임브리지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공부하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숙사 한 동에서 한학기에 평균 두명이 기말고사가 끝나면 병원에 실려간다고 합니다. 감기 몸살로 실려가는 내과가 아니라 정신과로 실려 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머리가 돌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대국을 떠 받치는 힘들이 그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준을 맞출 때 총신에서 상대를 찾지 말고 눈을 크게 떠서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그 사람들과 어깨를 견주면서 공부한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해야지 미래가 있지 준비를 잘 해도 기회가 안 오는 적은 있지만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 법은 없습니다. 준비가 안되면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기회일 수 없습니다.
목사님 : 이승찬, 랩을 좀 해요?
이승찬 : 잘 못합니다. 하나도 못합니다.
목사님 : 하나도 못해요? 그런데 BTS가 뉴욕에서 어마어마한 공연을 하면서 이승찬 학생에게 오프닝 무대를 줄테니까 랩을 한 번 선보여 주면 당신이 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기회를 주면 이승찬에게는 기회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이승찬 : 안됩니다.
목사님 : 그렇지! 준비가 안 됐으니까! 그런데 누군가 준비를 했으면 기회가 되는 거죠. 기회라고 하는 것은 준비가 되도 영영 안 올 수도 있지만 그러나 준비 자체가 안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와도 그것은 기회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임승현. 외국에 살아 봤어요?
임승현 : 아니요.
목사님 : 드라마 좋아해요?
임승현 : 아니요.
목사님 : 드라마도 안 좋아해요? 어쨌든지 간에 외국에서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들은 한국 학생을 불러서 학술대회에서 한 번 발표를 시켜보고 싶습니다. 세계의 대륙에서 오는 학생들과 더불어서 임승현 학생에게 기회를 주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독일어로 발표를 해야 돼요. 그러면 본인에게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임승현 : 안되요.
목사님 : 될 수가 없겠죠. 독일어를 공부하지 않았으니까!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에요. 준비되도 안 올 수 있어요. 그런데 준비 안했는데 오는 경우는 없어요. 그래서 공부가 중요한 거에요. 마지막 시간이래서 말이 많죠? 김태웅.
김태웅 : 저는 4년 동안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목표로 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정말 쉬는 시간없이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했다라기 보다는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번 학기 동안에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성만 알았는데, 그러니까 지성의 질서와 다른 심정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교수님을 통해서 알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알았고 파스칼을 통해서 알았어요. 그리고 가장 제 안에서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이 한 학기 동안 정말 제 자신을 테스트를 했거든요. 대학원 가기 전에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고 내가 얼마나 많이 쌓았는가 이것을 테스트를 했는데 정말 제 존재에 있어서 처참하게 깨졌어요. 저희 어머니가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냐? 너 너무 무섭다. 너 너무 이상하다. 지금!’ 그렇게 할 정도로 정말 혼자서 많이 싸웠고요. 그런데 그 제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을 타협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그지 같아도’ 그런 것, 그 것을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었고, 공부를 한다는 게 저한테는 어느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한 그것이 있었어요. 예전에는 그것이 강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만약에 뛰어난 사람들이 철학자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다. 과학자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생각으로 공부를 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은 거의 없어졌고 정말 말씀을 듣고 싶은데 듣지 못하는 성도들을 생각해요. 그게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심정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 인격! 지성만 알았는데 그 심정, 그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김민아 : 저는 교수님 수업을 듣고 강론을 들으면서 거의 매일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인생은 매우 짧다. 부지런해야 된다.’ 이런 것을 굉장히 많이 생각했거든요. 강론을 들으면서 제 대학 4년의 삶을 잘 많이 생각하고 돌아봤는데 제 자신이 너무 슬퍼졌어요. 나의 그 게으르게 보냈던 시간들, 더 주님께 헌신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헛되이 보냈던 시간들에 대해서 마음이 좀 슬퍼졌는데 다시금 삶을 세워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교수님께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제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그토록 삶고 싶어했던 내일이라고 했던 그 말들, 인생은 짧다’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다시금 내가 전심전력해야 하는 것은 공부하는 것! 그리고 만일 꼭 누구 앞에 서서든지 복음에 대해서 소망에 대해서 말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자가 되어야겠다.’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허윤 : 몇 년도에 이 강론을 학생들에게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리액션이 좋더라구요. 들으면서 다들 많이 웃고 교수님의 예화를 할 때, 저도 들으면서 굉장히 많이 그 학생들이 웃는 거에 맞춰서 웃음이 나왔는데 저도 웃음이 나왔는데 그 웃음이 뭔가 재밌는데 내용이라서 웃긴 내용이라서 웃은거라기 보다는 실소였던 거 같아요. 교수님께서 예화로 들어주시는 그런 지성적 준비에 대해 수준이랑 우리가 진짜 실제로 학교를 다니면서 수행하고 있는 그 수준이 많이 격차가 나니까 그것이 마치 터무니없는 정도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말 대단하다. 저렇게 한다고? 저게 된다고?’ 이런 웃음이 저한테는 나왔던 거 같아요.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을 뜨면 어떤 때는 대개 그냥 일어날 때도 있지만은 하루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일어나자마자 생각이 돼서 그 과업들이 생각이 나서 마음이 깊이 눌리는 날도 대개 많은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굉장히 약해지거든요. ‘오늘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오늘도 이렇게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약해지는 마음이 드는데, 강론을 들으면서 가능성을 하나 봤던 거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는 할 수 있다!’ 이런 뭔가 단지 교수님이 말씀하신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맞겨주신 삶 안에서 복음의 은혜를 자꾸 누리면서 내가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고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서 대개 위로가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문주빈 : 저도 앞서 말한 것처럼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수준들이 제가 하고있는 거랑 많이 차이가 나서 ‘어느정도 제 다음단계다 다다음단계 정도다.’ 이러면 ‘조금 욕심을 내서 한 번 해봐야겠다.’ 라는 이런 의지가 생기겠는데 너무 큰 거인 앞에서 굴복해 버릴 수 없는 약간 그런 느낌으로 와 닿기는 했는데 들으면서 한 생각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전공이나 자기가 가져야되는 그런 전문 지식, 이런 것에 대해서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을 안 가지면 되겠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어느 정도 지식을 쌓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간다라기 보다는 ‘내 열심이 어느 정도 인가’ 이런 것을 많이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더 열심을 가지고 주어진 것들, 공부나 강론에서 말했던 것은 ‘지식과 인격의 진보에 있어서 더 열심을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받쳐서 힘써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봤습니다.
이제 신학과 학생들로 넘어왔는데 결국은 말씀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를 다룬다는 사람 아니에요? 진리를 다루는 사람이 공부를 안 한다고 하는 것은 사기꾼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하면 반드시 거짓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그 진리가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학문에 다 베어있는데 학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결국 거짓말을 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라’ 했습니다. 배우지 않은 사람은 확신할 수 없고 확신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 거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과 학생들에게 특히 내가 이야기하자면 공부를 안하고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모두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한 나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부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공부를 계속 해 나가서 지식을 쌓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더 알고 싶고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도 연애를 해 보면 제일 즐거운 시간이 상대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즐겁잖습니까? 나는 인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면 연애도 아닙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알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승우 : 저도 강론 들으면서 다른 학우님들과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교수님께서 강의 말미에 두가지를 지적해 주셔서 첫번째는 ‘공부하지 않는 것 뒤에는 우리의 게으름이 숨어있다. 우리 인격 부족에는 우리 마음에 완학함이 있다.’ 라고 지적해 주신 점이 대개 인상 깊었고 단순히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격적으로 부족하지!’ 그런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넘어에 있는 죄를 지적해 주셔서 강의를 듣고 제 삶뿐만아니라 저의 마음의 내재된 죄까지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좋았고 회개할 수 기회가 되어서 참 좋았습니다.
제 7과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신학에 있어서 매우 어려웠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악을 행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인간이 악을 행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놀라운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도 작용하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악을 행할 수 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안되고 또다른 마음의 힘이 필요한 데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렸고 ‘그 은혜의 저자가 바로 성령이시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과학을 하는 방식 같은 것으로 ‘내가 선을 행할 때 얼만큼 내 의지가 역사했고 또 얼만큼 성령님이 역사했는가 라는 것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분할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100% 내가 한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100%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라는 양 측면을 성경에서 함께 골고루 강조하면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에 대해서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배울 것은 결국 우리들이 여태까지 한 학기를 공부하면서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한 인간이 생김새도 비슷비슷하고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한 인간의 차이는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라고 할 때 그 차이가 결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에는 ‘외모가 어떠하다’ 라는 이유 때문에 착하다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중요한 명제는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맨 처음에 도달하는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두번째 도달하는 것은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선한 의지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의지 자체가 마음의 작용이니까 하나는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 마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 아름다운 것이 마음으로 나타나는데 그 마음은 진리를 잘 알고 진리에 합당한 정서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의지는 그 지성과 정서에 지휘를 받으면서 올바르게 올곧게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젊었을 때 한 때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금방 늘고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육체로는 죽어도 영혼이 아름다웠던 사람은 죽어도 여전히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감화를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공부를 여태까지 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룰 내용은 참된 신자에는 참된 마음이 있는데 ‘참되다’ 라고 할 때 ‘참’은 진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진리를 말씀해 주시는 분, 우리의 지성에 설복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바꾸십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신다.’ 라고 할 때 ‘건넨다’ 라고 하는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건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말을 건네시는 거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지성으로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만한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과 마음 A번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시며 영원하시다. 성부, 성자와 동일하시며,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셨으나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두 위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 무한한 신성을 소유하시며 창조와 구속, 구속의 적용과 완성, 모든 구속사의 완성에서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용에 있어서 다른 두 위의 하나님과 독특하게 구분된다. 성령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불리어진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자신을 포함한 삼위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성도와 더불어 연합을 이루게 하시는 결속이 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 자신이시면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 안에 부어지며 그 성령님을 통하여 전 삼위일체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하나님이시다. 성령님 없이 마음도 존재하지 않으며 중생, 성화의 전 과정에서도 필수적이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연합의 본질이시며 교회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와 성도안의 연합의 본질이 되신다. 인간과 교통하실 때 성령님이 주되게 오시고 나머지 두 위는 부차적으로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바꾸고 영혼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마음은 마음의 영향을 끼치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받는다.
성령은 중생과 함께 거하며 내면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치신다. 중생을 통해 사망의 법이 지지되던 영혼에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으신다. 이 원리를 통해 사랑과 생명을 공급하신다. 이 사랑과 생명은 성령님 자신의 작용이며 동시에 성령님 안에 실재하는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생명과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교제의 본질은 사랑이며 이 사랑의 교제는 수많은 생명을 낳게 되는 것이니 자신을 끊임없이 외부로 확장하고 뻗치시는 하나님의 자기 확대, 확대는 존재론적으로 뻗친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새로운 사물이 생겨나면 하나님은 그 사물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창조세계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확대다. 피조물 속에서 생명을 읽고 그 동기로서의 사랑, 생명을 지탱해 나가는 방식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동물들의 짝짓기와 작은 벌레, 식물에 이르기까지 복수성으로 구성되며 성의 연합을 통해 사랑을 구현하고 그것을 통해 생명을 산출한다.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은 사랑을 통해 시공간 안에 펼쳐지며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해야 그 생명 또한 무한할 수 있으니 생명의 확장은 무한한 사랑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도 이러한 삼위일체적 작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 안에서 사랑이시고 생명이시다. 그러나 그 생명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펼치신 것처럼 또한 거듭나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 사랑과 생명, 생명이 자신의 마음을 통해 그 영혼 바깥으로 확대되고 전개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 개별적인 인간이 삼위 하나님처럼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밖으로 끊임없이 펼치며 삶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확장하기를 원하신다. 사랑과 생명은 원천적이며 그 창조의 역사는 없는 것을 향한 전개이지만 인간은 이미 그렇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확장으로써 세계와 인간과 사물 속에서 그것을 연장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 안에서 누리는 사랑과 생명이 마음을 통해 삶 밖으로 전개되는 모습은 내재적인 삼위일체가 외출적으로 자신을 전개해 보여주는 방식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의 위대성이며 마음을 통하여 세계 속에 구현되는 것이다. 세계 속의 자기구현은 나타날 때 생명과 사랑이 전개한 세계를 향해 또다시 하나님 자신을 전달하고 유통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원창조를 통해 세계에는 생명과 사랑이 가득하게 되었다.
노동은 이미 있는 생명과 사랑의 교통을 더하여 이 세상을 생명으로 더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신성을 인간 자신과 세계, 자연세계에 흘러 넘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만물 속에 생명과 사랑의 부족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하신 만물을 자신과의 상호교통 속에서 끊임없이 부어주심으로 창조세계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세계를 통해 당신과 교통하려는 하나님의 자기회귀의 순환 속에 도덕적 통치에 복종하는 인간을 두신 증거다. 인간의 지위는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가! 이를 통해 자기를 도덕세계와 자연세계 속에 전개하시는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이러한 일이 전개되는 각 사람 안에 있는 문이 바로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 생명과 사랑이 무한하시기에 세계를 통해 자기를 확장하고 교통할 때 하나님과 교통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래서 더 충만한 영광과 사랑으로 가득하게 된다. 구속의 완성을 통해서도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영광의 증진을 시작하는 시점으로 삼게 될 것이다. 마음 안에서 위대함이 경험되는 것이니 이 계획을 위해 인간의 마음에 직접 교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불린다. 성령님은 하나님 자신이신 동시에 또한 선물이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가지는 독특성이다. 하나님이신 동시에 삼위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성도와 더불어 연합을 이루시는 결속이 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 자신이면서도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 안에 부어지며 성령님을 통해 삼위일체가 신자인 우리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원인이 되신다. 구속으로 말미암는 풍성함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현재화되며 성령의 역사없이 신자의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생과 성화의 전 과정에서 필수적이시다. 이처럼 성령님은 구원계획이 인간 속에 전개되고 또 인간을 통해 그 계획이 실현되는 원인이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의 본질이다. 성도의 연합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인데 성령의 결속이 본질이다.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면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을 통해 결속이 이루어지며 성령을 통해 신자의 마음 안에서 실제적으로 경험된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의 연합에 있어서도 그 본질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님은 삼위 하나님께서 성부의 계획을 따라 성자의 구속을 기초로 삼위의 충만한 신성, 의지와 지성에 따라 사랑과 생명을 온 세계에 가득 채우시는 유효인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처음 창조의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천지가 개별적 사물로 창조되기 직전 형상을 지니지 못한 질료로 존재할 때 성령께서 그 모든 질료를 휘감고 계셨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질료를 품으심으로 만물을 나오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 이로써 만물의 존재는 상이하지만 ‘성령 안에서’라는 고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층차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운행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운행하시니라’ 는 ‘메라헤페트’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라하프’ 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 동사의 뜻은 ‘닭이 알이나 새끼같은 것을 품다’ 라는 뜻입니다. 신명기에서도 이 단어가 나옵니다. 둥지가 있고 여기에 새끼새가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이렇게 펼치고 있는 그래서 이 둥지를 보호하고 있는 이 광경이 ‘메라헤페트’ 입니다. 이렇게 창조하신 세계가 성령님이 여기서 왔다갔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다 감싸고 계시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물들이 어떤 자연의 법칙으로 볼 때가 모든 사물들이 연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생태계 자체가 그런 커다란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들이 산소를 발하고 동물들이 꼭 필요하게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해 사용하고 이산화탄소를 뱉고 식물에게 필요하고 햇빛이 비치고 광합성 작용이 일어나고 하면서 생태계가 유지되어서 모든 만물들이 서로 관계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결국 한 성령안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신적인 질서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물질적인 사물들이 성령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물질적인 사물들이 갖는 관계와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갖는 관계는 현저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서 남을 위해 헌신한다든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동물들이 자기 새끼를 위해서 헌신하지만 본능에 속한 것이고 도덕적인 감화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이 있어도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물들이 창조된 후에도 그 성령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이로써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상호교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쓰신 용어인데, 만둘들이 서로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메덱시스’ 라고 하는데 ‘연관’ 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물들 하나하나가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어떤 창조주의 어떤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첫째로 자연적 차원의 상호교통이다. 자연적 차원에서 창조된 개별적 피조물들은 성령안에서 창조된 관계를 자연법칙 안에서 구현해 보여준다.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피조물과 관계를 갖는다. 자연적인 관계가 대표적이다. 작용과 기능에 있어 각각의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과 의존하며 공존한다. 그리하여 질서로운 우주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작은 생물의 체내세계에서부터 우주 공간의 천체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어떤 피조물도 이 자연적인 질서를 벗어나는 것은 없고 그 안에서 모든 작용은 하나의 고유한 목표인 창조목적을 향해 통합을 이루게 된다. 그것이 결국은 코스모스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이야기할 때 그리스어로 ‘코스모스’ 라고 부릅니다. 영어에서도 코스모스가 우주를 가리킵니다. ‘코스몰로지’가 우주학입니다. 그 ‘코스모스’ 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어에서 원래 ‘질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 여자들의 화장품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카즈메틱스’ 이것이 ‘코스모스’에서 옵니다. 질서가 없는 얼굴을 화장품을 바름으로써 질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켜서 더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것이 화장품입니다. 특히 색조화장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보면 이 창조된 모든 세계 자체가 어마어마한 질서를 이루고 있고 우주의 질서는 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하나 안에도 그 질서가 있다. 당연히 인간도 그런 질서 속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삶도 어떤 질서를 가져야 된다. 그래서 결국은 두가지 이상, 하나는 그들이 말하는 신 앞에서 신이 지정한 질서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두번째는 한 인간인데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공동체에 속해 있으니까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참된 질서가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내가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나 자신이 개인으로서 어떤 질서를 가지고 나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것인가, 거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덕스러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나쁜 짓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것이 왜 이런 일이 나는지 볼 때에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 자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자기 속으로 들어가보면 영혼과 마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탈레스의 경우는 그런 영혼이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까지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명품은 좋은 영혼을 가진 물건이고 싸구려는 그 영혼이 신통치 못한 물건인 것입니다. 잘 망가지고 고장나고 그렇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탈레스의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플라톤 같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결국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탈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것도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탁월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무슨 역활을 우리에게 하는가? 예를 들자면, 야구 선수가 뛰어난 것은 야구를 잘 하면 되는 것이고, 군인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전쟁을 잘 하면 되는 것인데, 사람이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이 뛰어난 것인가? 그 모든 질문들 속에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과
연 이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마음에 깃드는 것인데 바꿀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사람은 그냥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못 바꾼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아리스토탈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은 안 바뀐다 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사람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본성이 반드시 타고 나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착한 사람은 착하다고 해서 칭찬을 받을 필요가 없고 나쁜 사람을 나쁘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자기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착한 사람은 칭찬하고 나쁜 사람은 비난을 하지 않습니까? 모순 아닙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타고나는 본성도 있지만 환경과 교육이라고 하는 삼각형의 한 가운데는 인간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아주 나쁜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오히려 반대로 ‘나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환경에 빠져서 악으로 빠져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세가지 변수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간이 하나의 꼭두각시나 혹은 손으로 빚는 빵이나 과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주체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호작용하면서 자기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철학자들이 관심사를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마음은 작용을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올바르게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이미 플라톤이 자기의 국가론에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같은 개념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인 진실이 있어도 교육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치면 안되는 지식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신기한 것은 인간이 불행지는 것도 마음 때문에 불행해지고 행복해지는 것도 마음 때문에 행복해지는데 인간이 공부 안 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도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공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람이 결국은 조금만 공부를 하고 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배운 양이 미미한데 조금만 공부하고나도 결국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돈도 필요하고 어느정도 명예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하고 여러가지 필요하지만 근원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있구나 라는 사실은 모두 동의를 하잖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그것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공부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을 공부하는 것인데 자기 자신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만 매우 퍼지티브 합니다.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생각하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가 결국은 포기하게 됩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 인간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다기 보다는 인간의 마음은 마음을 봄으로써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어야지만 인간의 마음에 공부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그것을 도라고 생각을 했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떠나서 모든 일반적인 인간이라고 볼 때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준점이 있어야지만 거기에 자기를 비쳐보면서 내가 어디까지 갔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 인식을 합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을 보면 고도계를 가져가는데 고도계를 보면 지표면에서 2000미터를 올라왔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보고는 밑의 땅만 보고는 그 높이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산이 시작할 때에 바다 바로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산의 봉우리에서 시작하니까 그 시작되는 봉우리가 산의 지점이 몇 미터 인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바다에다가 내놓으면 사면이 다 바다고 날도 흐린데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가 있겟습니까? 밤일 경우에는 산 속으로 들어가면 더더욱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호주같은 경우에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들어갈 때는 분명 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결국에는 못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침반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런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 크기, 모양, 부피, 색깔 이런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려면 진리라는 기준이 있어서 자신의 마음은 마음으로 안 보이고 자신의 삶이나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보는데 자신에게 친절하고 따뜻하면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 마음 자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보려면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을 그 때는 그저 생각없이 행동을 했는데 나중에 반성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 행동에 깃들여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울 때에 자기도 비소로 자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자기만 자기 마음을 모를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장 타인입니다. 오히려 타인이 내 마음을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가 중요하냐 하면 인간이 마음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대변혁입니다. 생각으로만 ‘그래 진리가 있지, 하나님이 진리지’ 이렇게 하는 것 말고 그 진리에서 무엇을 발견하던지 자기의 삶 전체와 연관시키면서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삶의 방식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필로소피아’ 지혜에 대한 사랑. 지혜는 진리의 효과입니다. 그 지혜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래서 그 진리로 말미암는 지혜에 도달해서 산다면 내가 비록 돈 많은 사람이 아니어도 그 ‘필로소피아’ 없이 부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관 전체에 대변혁이 이루어져야지만 겨우겨우 인간의 마음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보면 시중에 보면 마음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의해서 질서 지어지는 삶을 택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공부할 수 있는데 그것을 싫은 것입니다. 그 자체는 엄청난 속박입니다. 예전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을 그 진리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속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결국 마음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까지 인정을 했는데 그 지혜를 사랑하기는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자기 편만 들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자기 깨어짐이 없는 나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위대한 세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예전에 자신을 보았던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살았습니다. 항상 어렸을 때 엄마가 자식 역성을 든다고 합니다. 자기 아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가 아니라 무조건 아이편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의 역성을 들면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파스칼이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그런 자기 자신의 역성만 들어서 살아서는 인간의 불행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항상 좋은 것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마음 공부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끝까지 사랑해야지만 마음 공부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안 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인생의 대대적인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방향의 전환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굉장히 아주 웃기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모순이 나오냐 하면 절대 행복하지 않은데 계속 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 역성을 들고 싶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니?’ 하고 물어보면 하나님을 안 믿는 이유가 대개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반대로 파스칼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너는 너를 왜 사랑하는데?’ 하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논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면 똑같은 논리로 자기를 왜 사랑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설명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안하고 자신은 논리적인 이유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파스칼은 어떻게 설명하냐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말할 때는 이성의 논리를 동원한 것이고, 심정의 논리는 전혀 동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할 때에는 이성의 논리는 포기하고 마음의 심정의 논리만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정의 논리가 무엇인지는 자기도 모릅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이성의 논리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심정의 논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정의 논리를 이성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명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의 논리를 마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인간은 심정과 이성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고 어떤 의미에서 심정이 이성보다 앞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에 빠질 때 한순간에 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지 ‘이 사람을 어떤 이유로 사랑해야 될까?’ 그것을 분석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심정의 논리가 먼저 가고 그 다음에 심정의 논리가 지지 않는 이성의 논리들이 비치면서 ‘역시 내가 사람을 잘 선택했어!’ 라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깊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떠나면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공부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삶 전체를 지혜를 사랑하는 삶으로 방향을 정하고 살아가려고 할 때 그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영적인 수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데도 자기 자신이 자신 속에 있는 성품의 결함, 죄성 같은 것을 발견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진리라고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나는 마음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마음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계속 가겠습니다. 둘째로 미학적 상호교통이다. 전자가 물리학적 연결이라면 이것은 아름다움의 연결이다. 성령님은 아름다움이시다. 완전한 아름다움이신 그 분 안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으며 아름다움들과 조화를 이루며 보편적인 질서의 아름다움을 전개한다. 위치와 비율, 크기와 색깔, 빛 등에 의해 피조물들은 가장 정확한 자기의 위치와 기능을 가지며 이러한 피조물들과 그것들이 어울려 미학적 질서를 만들어낸다. 작게는 길 위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의 미세한 구조로부터 시작해서 밖으로는 전 우주의 질서에 이르기까지 그 아름다움이 전개되는데 이것은 바로 성령의 아름다움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들이 함께 공존하며 드러내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아름다움이다. 영적 상호교통이다. 피조물은 상호교통을 가지고 있다. 영적교통을 이루고 있다. 영혼을 가지지 못한 자연적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교통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영적교통하고는 다르다. 둘로 나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도덕적 피조물의 상호교통과 자연만물의 영적교통이다.
첫 번째로, 자연만물의 영적교통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연만물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고 영혼을 가지고 교통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다. 인간과 달리 영혼을 가지지 못하지만 성령을 통해 전개하시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영적 교통임을 기억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교통이 없다면 인간이 타락하여 저주받았을 때 왜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았을까? 인간만 저주하시고 땅들은 저주받지 않은 상태에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성령 안에서 창조되어 모든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억해보라. 구속이 완성되는 그날, 저주도 풀릴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묶인 영적인 단절이 완전히 풀어지는 그 날에 이루어질 것이며, 만물들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상호교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지막날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땅을 저주하신 것이 인간에게 고통으로 벌 주시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만물이 회복될 때 자연적 사물에 맺힌 속박을 풀어주시는 것도 구속이 완성된 상태에서 행복을 주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의 통일성을 무시한 견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인간을 한 성령 안에서 창조하셨으며 이런 만물과 함께 통합된 상호교통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의 종말까지 나아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도덕적 피조물들의 상호교통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덕적 특성은 영적 상호교통에서 비롯된다. 타락하기 전 이런 교통을 누리며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움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락 후 파괴되었다. 수적으로는 증가하고 있었으나, 일치된 목적을 향하던 질서는 상실하였다. 결과 인간은 갈등하고 투쟁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를 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의 교통은 망가진 채로 방치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점에서 논증된다.
첫째로 교통이 단절되는 것은 창조 계획의 실현의 단절을 의미하므로, 결국 회복되도록 작정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바로 이 인간을 통해 자연의 세계에까지 펼쳐 창조시 전 우주적인 상호 교통의 회복으로 나아가도록 작정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지상세계만의 평면적 교통이 아닌 천상과 지상의 통합적 교통을 가리키며 그 속에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어느 것도 소외되는 것 없이 창조 교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종자씨로 부름을 받은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으니 교회이다. 이렇게 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된 인간과 자연의 상호교통은 삼중의 동심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동심원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이며, 심판을 통해 종결하신 후 인간을 포함하는 동심원이며, 마지막으로 자연 세계에까지 상호교통이 확장된다. 그러므로 도덕적 피조물의 상호교통은 자연적 피조물의 상호교통의 핵심을 형성하며 그것을 통해 존재론적 질서를 회복하게 하신다. 그런 점에서 자연적 상호교통은 도덕적 피조물의 외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통 속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정점을 차지하게 되는 원뿔형 구조 속에서 꼭대기에 위치하게 된다.
이는 또다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질서가 종말의 완성을 통해 자연적, 도덕적 질서가 하나로 통합되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준다. 여전히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를 지닌 존재로 운명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자연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 위로는 영혼을 통하여 하나님과 아름다움을 교통하고 아래로는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써 발산하는 자연적 아름다움을 통해 다른 피조물과 함께 어울려 종말론적 미학을 완성할 것이다. 과연 자연적 피조물이 하나님과 독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대두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가지 극단을 피하여야 한다. 첫째로, 도덕적 피조물에 대한 자연적 피조물의 절대적인 종속을 주장하는 견해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연적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독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1975년 WCC 나이로비 대회를 통해 생태신학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급진적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적 피조물들의 일부라는 사실을 급격히 강조함으로써 자신과 동류인 피조물의 상태를 강조하고 그것들의 운명에 대해 자신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 있는 자연적 피조물들이 인간을 떠나 하나님과 독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말씀하셨을까? 여기서 정복이라는 말은 다스리고 통치한다는 뜻이나 주어진 상태에서 그대로 권한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 목적을 향해 존재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사랑으로써 모든 피조물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영광의 본질은 지성과 의지가 사랑과 생명을 통해 충만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생명과 사랑의 확장이며, 이 최초의 확장인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이런 통합구도를 가지고 도덕적 피조물과 자연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자연 세계는 소비되고 사라져야 할 존재만이 아니다. 자연적 피조물은 도덕적 피조물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도덕적 목적을 구현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이 타락했는데 이것은 도덕적 사건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연적 피조물이 형벌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적 구도로 답하자면 너무 분명하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땅을 가꾸어도 소산을 내지 않고, 엉겅퀴와 가시만 나온다. 구속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던 피조물이 회복될 때 그것은 구속 완결된 인간을 행복하기 위한 상급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요점은 이것이다. 자연 세계는 분명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관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 있는 상호교통을 통해 자연적 상호교통의 목적을 구현하게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피조물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자기 현시에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며 피조물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보며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필요성. 이처럼 신자는 마음을 고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요구된다. 부패성과 무능 때문이다. 이러한 부패성은 마음에 잘 투영되며 무능함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는 결심을 바꿀 수 없으며, 또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무능을 통해 하나님없이 소망이 없는 비참함을 언명한다. 인간은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 사이에 형성해 놓으신 새로운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
성령과 은혜. 일반적 은혜의 작용.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작용하시는 성령의 작용이다. 이는 초월적 사랑에 기초하지 않으며 성령의 법이 심겨지지 않은 불신자에게도 해당되는 은혜의 작용이다. 이 일반 은혜는 본성과 마음에 자연적으로 역사한다. 사랑의 빛으로 돌이키지 않으면서도 이웃의 행복과 선을 위해 기여한다. 본성의 빛에 역사하여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대표적이다. 신자들도 이러한 일반 은혜의 작용으로 죄를 억제 받고 외관상 선을 행하기도 하는데 죄의 경향성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한 작용이다. 일반 은혜의 작용을 통해 신,불신자를 막론하고공통된 도덕의식을 가지며 법과 정부와 양심, 혹은 역사의 교훈을 받으며 율법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이로써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지 않는 것이다.
특별 은혜의 작용. 성령님은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이루어지시는 분이며 이 교통은 마음 안에 경험된다.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무질서한 마음이 될 때 성령은 슬퍼하신다. 이런 슬픔은 고유한 작용인 성령의 위로가 사라지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또한 성령의 은혜의 경험을 소멸한다. 인간의 마음이 망가졌을 때 고치시는 성령의 작용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새생명의 원리를 강화함으로써. 중생과 함께 심겨진 법인 생명의 법을 강화하심으로써 바꾸신다. 신자의 마음은 영혼의 상태의 반영이다. 영혼의 상태는 중생과 함께 심으신 생명의 원리가 얼마나 풍성하게 작용하느냐에 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역사하는 성령의 작용을 위해 마음을 다해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신자가 성령으로써 자신의 몸의 행실을 죽여 죄를 이김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경험을 마음 안에서 회복하는 것인데 이것을 존 오웬은 싸워 이김, 설복이라고 불렀다. 신자는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순종 안에서 죄를 죽임으로 이미 중생과 함께 심겨진 새생명의 원리가 더 충만하게 역사하며 여기에서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감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로써 삼위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도의 일생은 바로 이러한 성령의 은혜의 작용이 새생명의 원리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지도록 죄를 죽이시고 은혜를 살리시는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초월적 사랑을 부으심으로. 성령은 초월적 사랑을 부으심으로 치료하신다. 전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초월적 사랑의 경험은 생명의 원리의 강화를 통해 주어지는 사랑의 경험을 능가하는 것이며 그 경험을 동반하게 된다. 특별한 성령의 은혜의 작용은 하나님의 사랑의 부음으로 묘사된 사랑의 경험이며 이것을 통해 망가진 마음과 육체의 질서를 회복하게 되며 지성과 욕망, 의지의 작용도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어거스틴이나 에드워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령님 자신이 초월적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의 신미로 데려가는 경험이며 존 오웬도 지지한 바 있다. 이것은 신자 안에서 경험되는 개인적인 부흥이며 성령의 초월적 역사다. 신자는 이처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질서를 회복하게 되며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성령의 경험을 통해 신자는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생명의 원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작용에서도 동일하게 경험된다. 이러한 기쁨은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응하여 도열, 진리로 말미암은 느낌입니다. 도열의 삶을 살게 하는 원천이 된다. 그 삶의 본질은 사라질 것들에서 기쁨을 좇는 육욕적 사랑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에 대한 까리따스의 삶을 살게 한다. 그 기쁨의 삶을 통해 시련이 많은 이 세상에서 불변하는 것들을 즐거워하며 오래 참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로써 인간이 행복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마음이 이 세상이라는 바닥에 그리고 지나간 궤적이다. 마음은 삶의 결과이며 삶의 원인인 동시에 미래의 삶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마음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원히 불변하는 빛이신 진리의 영향아래 있어야 하고 또한 끊임없는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쇄신되어야 한다. 영혼과 마음, 육체 작용 사이에 흐트러진 질서는 끊임없이 고쳐져 제자리를 찾고 그 아름다운 질서 안에서 하나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삶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며 인간은 행복하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성도의 삶은 이러한 마음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 이로써 저는 한학기 강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여러분들, 열심히 수업에 임해 주셔서 감사하고 선물로 책 한권씩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주에 오셔서 시험을 볼 때 파스칼의 팡세를 들은 소감문을 정확하게 내시고 시험 잘 보셔서 좋은 성적을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또 만납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