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제8장_죄의 지배의 발전 :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됨으로써 (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4)
녹취자 : 오희열
성도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지난주에는 제가 나오지 못해서 좀 놀라셨을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쌩쌩합니다. 오늘 공부를 같이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어떻게 지배력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될 때 그때 죄가 빨리 발전하게 된다는 말씀을 오늘 교리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에 대해서 친화적으로 민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항적으로 민감한 것과 친화적으로 민감한 것이 있습니다. 저항적으로 민감한 것은 내가 싫어하는 일, 여러분 중에 아무도 좋아하는 분이 없겠지만, 유리 긁는 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차라리 아이들 우는 소리는 견뎌도 유리 긁는 소리는 못 견딥니다. 옛날 역사에 보면 적군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방법들 가운데 소리 고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려주면 거의 정신분열 같은 것이 일어날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저항적 민감함입니다.
그런데 친화적 민감함이 있습니다. 친화적 민감함은 좋아서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곱창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곱창집 앞을 지나가면 그 집에서 곱창을 바깥에서 굽습니다. 굽는 냄새를 골목에 막 풍깁니다. 안에서 굽는 사람은 연통을 길게 빼서 환풍기를 연결하여 바깥으로 일부러 고기 굽는 냄새가 나가도록 합니다. 진짜 곱창을 좋아하는 사람은 코에 그 냄새가 닿아도 “이건 고기 중에 다른 고기가 아니라 곱창 구이구나! 아 먹고 싶다!” 하는 마음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저항적 민감함, 친화적 민감함입니다. 죄에 대해서 어떤 민감함을 가집니까? 이미 은혜의 지배에서 미끄러져서 은혜에서 멀어지고 죄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죄에 대한 친화적 민감함이 있을 것이고, 은혜에 대해서는 약간 저항적 민감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은 은혜에 충만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불편해하고 싫어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야만 편안합니다. 정상적으로 되려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은혜에 대해서는 친화적으로 민감하고 죄에 대해서는 저항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고 사람의 마음이 죄로 물들게 되면 이것이 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친화적 민감함을 느끼게 됩니다. 죄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을 자기에게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유혹을 하고 힘을 기울여야만 겨우 넘어왔는데 은혜의 지배에서 멀어지고 나면 많이 힘들이지 않고도 잡아 끌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의 목에 줄을 묶어서 개를 끌고 다니듯이 다닌다고 하면 그 소를 끌고 다닐 사람이 있겠습니까? 옛말에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못 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송아지 목에 밧줄을 묶고 그 송아지를 삼부자가 끌려고 해도 송아지가 한 번 고개를 휘 저으면 세 부자가 밧줄에 끌려옵니다. 그래서 송아지가 아주 크기 전에 코를 뚫습니다. 코를 뚫고 코뚜레를 끼고 묶으면 어린 아이가 잡아당겨도 소가 옵니다.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서 옵니다.말이 달리다가 멈춥니다. 말이 주인을 위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입에 재갈을 물렸는데 그것을 잡아당기니까 입이 아파서 급하게 멈추는 것입니다. 말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멈춥니다. 이렇듯이 죄가 처음에는 우리에게 정성을 기울여서 잡아 끌지만 일단 자기 아래 들어오게 되면 아주 손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목표입니다.
이 그림이 보여줍니다.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죄에 대한 저항적 민감함이 제거됩니다. 죄가 숨기 좋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간첩이 넘어왔는데 이 나라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간첩을 숨겨 줄 사람이 많은 지역에 간다면 발각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시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합니다. 이미 죄에 대해서 친화적 민감함이 생겼고 말씀에 끌리지 않고 죄에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에 끌리고 끌린 결과로 개인이 범죄를 하게 됩니다.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에 대해 친화적으로 민감하게 됩니다. 욕망은 상승하게 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이 처음에는 작은 것을 훔치다가 그 다음에는 매우 큰 것을 훔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그 폭력은 그 사람이 느끼는 격렬한 감정과 함께 증대됩니다. 그래야만 만족을 누리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죄가 자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안의 부패성과 만나서 이런 식으로 죄에 대해서 친화적인 민감함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부하는데 이것은 결국 은혜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항하는 마음입니다. 신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런 죄를 짓고 행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고통을 받습니다. 마음에 평안과 안정이 없습니다.
다음입니다. 여기 빨간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성령님이 인간의 양심을 깨우치십니다. 그럴 때 인간은 죄책을 인식하게 됩니다. 죄책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입니다. 사람들이 큰 잘못을 하고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까지 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양심이 너의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극을 합니다. 이 양심도 사실은 어떤 상태에서 그 사람이 교육을 받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에 따라서 양심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가지고 나타나게 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대마초를 재배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각보다 재배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베란다 같은 곳에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해 놓고, 요즘은 식물을 키우는 전구 같은 것이 많이 나옵니다. 햇빛이 하나도 안 들어오게 커튼을 쳐 놓고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식물을 기릅니다. 적절한 온도와 적절한 시간에 물과 비료를 주면 쑥쑥 자랍니다. 그렇게 대마초를 재배합니다. 이번에 보니까 미국에서 이미 대마초를 합법화한 주가 몇 주가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서 세수가 엄청나게 감소하자 여러 주에서 자기들도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예 담배처럼 살 수 있게 만들고 그 거래에 세금을 붙이는 것입니다. 세수는 증대될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마리화나를 피울 것입니다. 주 경계선을 놓고 보면 이쪽에서 걸리면 큰 벌을 받고 도로 하나를 건너서 저쪽 주로 가면 합법화 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마초를 피우고 환각하는 것이 절대적인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향락 산업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유럽 같은 경우를 보면 성매매 특별법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정부에 등록을 하고 매춘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서 매춘을 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 미성년자라든지 폭력을 행했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또 다른 이유로 법의 제재를 받지만 그 행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많은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내가 빵집에 갈 것이냐 떡집에 갈 것이냐? 찻집에 가서 커피를 마실 것이냐, 차를 마실 것이냐, 주스를 마실 것이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이 본래에 인간이 가져야 할 양심이 어느 한 시점에 그 민감성이 뚝 떨어지면서 그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런 양심의 문제는 굉장히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좀 더 자세히 보시려면 2005년에 나온 “자기 깨어짐”을 보시면 앞부분에 양심의 문제가 어떻게 변이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죄책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자는 이것이 없는 적은 없습니다. 비록 아무리 적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기 때문에, 양심 또한 남아있기 때문에 항상 죄책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타락하고 죄에 몰입하다가도 죄책을 인식하게 되면 죄의 지배 아래에 있으면서도 죄의 즐거움을 따라서 죄의 지배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거기서 절대로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쾌락을 누려도 평화를 누릴 수 없으면 그 쾌락은 마취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를 잊어버리도록 만들 수는 있지만 끝나고 나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평강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죄를 깨닫게 하는 원리와 방식, 방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본성적 양심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인식하고 두 가지의 관계와 보응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옳다, 그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보응이 있다는 것, 옳은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는 암시를 받고,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했을 때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는 것입니다.
양심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옵니다. “거짓 없는 양심과 사랑에서 나오는 믿음이니”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양심이 좀 약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을 하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 그런 일관된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작용의 방식입니다. 지성이 파악하는 지식의 빛, 지성이 지식의 빛을 파악합니다. 어떤 지식입니까?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가? 등등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엄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가 행한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런 작용은 율법을 통해서 하십니다. 복음의 실을 율법의 바늘에 꿰어서 인간의 마음을 꿰맵니다. 율법의 뾰족한 바늘로 사람의 마음을 뚫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데 그러면서 복음의 실이 들어오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전적인 무능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의 힘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그 때 바깥으로부터 오는 구원에 대해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죄책감과 죄의 지배의 관계입니다. 은밀한 죄의 역사입니다. 당연히 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때는 은신처를 찾습니다. 그래서 죄는 들어오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미혹시킵니다. 지성을 미혹시킵니다. 비유를 하자면, 미군이 이라크 전쟁에서 잘 보여주었는데, 전쟁을 할 때 제일 먼저 신경쓰는 것이 적의 방공망입니다. 공군이 가서 폭격을 해야 하는데 공군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방공망, 마사일 기지, 이런 것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비행기가 떠도 미사일이 그 비행기를 격추시키면 폭격이 어려워집니다. 미사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쏟아 붓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각국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도 정해져 있습니다. 무제한으로 물 쓰듯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보통 미사일 한 방에 싼 것은 3~4억에서 시작해서 비싼 것은 20억, 30억, 더 비싼 것은 250억, 300억, 더 비싼 것은 몇 천 억이 되는 장거리 유도탄들도 있는데 그런 것을 무제한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공군 전략폭격기가 동원되어 폭탄을 퍼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그라올로기라고 하는 전자전 비행기가 먼저 뜹니다. 어차피 미사일 발사나 모든 것들은 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런 것들을 무력화시키는 비행기가 떠서 그것을 무력화시켜버립니다. 그것을 다 파괴하고 무력화시키고 나서 폭격기가 뜹니다. 그러면 폭격기가 들어와도 감지가 되지 않습니다. 감지했다고 하더라도 미사일을 작동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와 똑같이 죄가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 잡기 전에 우리의 정신, 지성을 교란시킵니다. 죄가 발견되지 않도록, 혹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죄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지성을 혼란시킵니다. 죄를 죄로 보지 못하게, 그 죄의 특성과 작용, 시작과 중간, 발전, 그 종말의 연관관계를 다 볼 수 없도록 우리의 지성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CCTV에 화면이 나오는데 지직거리고 선이 그어져 나온다면 그것을 보고 바깥에서 누가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지, 담을 넘는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는 그런 작용을 우리 지성에 제일 먼저 합니다. 죄가 제일 먼저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생각에서 마음으로 내려와서 검은 마음이 되게 합니다. 죄가 발각되지 않고 은밀하게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마음 가운데 충분히 만들면서 더 많은 죄를 불러들이고 그 죄가 우리 안에 아주 굳건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거의 우리 자신의 운명처럼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죄의 목표입니다.
보십시오. 간첩이 침투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오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조직을 만들고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 파악했다고 할지라도 퇴치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반정부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최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간첩 자신들이 세력을 구축해서 나라를 스스로의 힘으로 전복시킬 수 있다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죄도 똑같이 그런 설계도를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이때 이것을 막아내는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합니다. 성령이 조명하시는 것입니다. 조명은 이렇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었더라면 결코 볼 수 없을 어떤 것들을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캄캄하고 여기밖에 불이 없습니다. 3m 앞도 볼 수가 없는데 아주 밝은 라이트가 확 비춰줍니다. 그러면 비로소 거기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조명입니다. 그 조명을 사물에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작용에 빛을 비추어서 그 조명이 없었더라면 파악하지 못했을 어떤 사실을 파악하고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 조명입니다. 그렇게 조명이 비치게 되면 비로소 죄의 존재와 작용을 감지하게 됩니다. “아!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 아주 공정하게 이런 작용을 내 안에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근에 법원의 판결 가운데 황당했던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들의 소송이었습니다. 법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판단을 할 때는 심증이나 현상만 가지고는 안 되고 인과관계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무죄의 취지로 판결을 내렸는데 피해자들은 굉장히 억울한 것입니다. 저도 가습기 살균제를 굉장히 많이 사용했습니다. 다행히 집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사무실에 나왔을 때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쓰지는 않았습니다. 게을러서 그랬을 것입니다. 가습기를 사용해 보신 분을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는 쓰지 않습니다. 물때가 엄청 낍니다. 용기 자체도 세척하기가 힘든 구조입니다. 바가지 형태가 아니라 얼개가 많아서 하나씩 닦아내기가 힘듭니다. 이틀만 내버려두고 손을 넣어보면 미끌미끌합니다. 그것이 다 미생물입니다. 그런데 가습기 메이트가 나왔습니다. 너무 좋은 것입니다. 거기에 넣어두면 물때가 끼지를 않습니다. 더 깔끔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한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병균이나 해로운 것들을 없애려고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몸에 그것을 달고 산 환자들과 어린 아이들, 주부들이 그것을 흡입하고 폐에 문제가 생겨서 산소 호흡기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 피해자들이 있고 피해자들이 한두 명이 아닌데 그것이 왜 입증이 안 되는 것인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와서 울부짖으며 “내가 증거이고 증거품이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판결할 수가 있느냐?”고 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법원도 나름대로 고뇌가 있을 것이고 법원을 너무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항소해서 진실이 가려지기를 원합니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을 숨기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지하면 파악을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어느 순간에 보면서 인과관계를 생각하면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존재와 작용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죄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신에게 절대로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죄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문제 3번입니다. 죄는 신자가 죄에 대하여 친화적으로 민감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확대해 갑니다. 이러한 발전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다 공부한 내용입니다. 첫째, 저항적 민감함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저항적 민감함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결국 친화적인 민감함을 갖게 됩니다. 이 결과는 은혜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죄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인간의 몸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게 되고 인간의 마음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죄인은 특별히 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죄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내용들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문제 4번, 죄에 대해 친화적 민감함을 갖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 실제적인 이유, 그리고 그 기능이 무엇인가? 근원적인 이유는 신자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부패성이 없다면 죄에 대해서 친화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친화적인 민감함이 지금은 많지 않지만 그것을 많이 갖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가 보이스 피싱 같은 것에 낚일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아닌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오래전 일인데, 2000년 초반에 캐나다로 집회를 갔습니다. 거기의 목사님이 저에게 너무 애쓰셨다고 록키를 보여주신다고 하면서 본인은 바빠서 못 가시고 전도사 한 분에게 자동차를 빌려서 1박2일 투어를 시켜주었습니다. 가서 아내까지 셋이 탔으니까 할 이야기가 많고 경치도 좋았습니다. 교제를 많이 나누었고 사람도 반듯하고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솔직히 이름도 잊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10년쯤 지나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혹시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에드먼튼에 있는 아무개 전도사였습니다. 목사님 부부를 모시고 록키산 투어를 갔었습니다.” 제가 얼굴은 잘 기억 못해도 목소리는 오래 기억합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거의 30년 만에 전화 온 친구의 이름을 딱 알아 맞췄더니 굉장히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정수기를 팔러 와서 하나 구입했습니다. 그 전도사가 전화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내는 아직 못 들어오고 장례 비용이 없어서 1000불만 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100만 원정도 됩니다. 너무 틀림이 없어서 돈을 부쳤습니다. 그런데 통지가 왔습니다. 그 계좌가 보이스 피싱 계좌라서 송금한 우체국 계좌에서 빼지도 못하게 묶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나중에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경찰과 그 사람과 나와 삼자대면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신실하던 형제가 아내도 좋은 자매였는데 이혼을 하고 많이많이 미끄러져서 그런 범죄에까지 손을 댄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근원적인 이유는 신자 안의 부패성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이유는 개인이 범죄했기 때문이고 마음을 지키기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를 짓고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친화적인 민감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능입니다. 죄에 대한 혐오감을 제거하고 죄의 계획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흐려지게 합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 범죄의 실행이 가져다 줄 낙을, 즐거움을 크게 확대해서 거기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 전에는 엄청난 착시현상이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것을 다시 깨닫게 되는 때가 오는데 그것은 회개할 때입니다.
5번, 죄책감이 무뎌지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죄책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심과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먼저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감정은 지성을 따라옵니다. 무엇인가 계속 알고 있게 되면 거기에 합당한 감정이 따라옵니다. 당연히 막 바로 감정을 공격하면 감정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성을 먼저 공격합니다.
“죄의 욕구와 욕망에 미치는 영향력의 힘은 은혜의 강도로 정의하면 되는지요?” 정의라기 보다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의 힘이 강할 때는 죄의 욕구가 아니라 선을 행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사랑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