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명랑함입니까?
녹취자: 이새봄
성도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오늘부터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청취공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삶의 명랑함에 대해서> 우리가 여섯 번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아마 열린교회 시작한 이후 꽤 긴 설교로 기록을 세운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몇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행복과 불행 혹은 기쁨과 슬픔의 계곡이 있고 그 사이에 걸쳐진 밧줄입니다. 한 사람이 그 균형을 잡기 위해서 그 막대기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습니다. 그렇죠? 오늘날 신앙이 잃어버린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지함과 또 하나는 명랑함입니다. 진지함이 없는 명랑함은 너무 가볍고 명랑함이 없는 진지함은 너무 무겁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명랑함이 없는 진지함도 아니고 진지함이 없는 명랑함도 아닙니다. 인생의 답을 예수 안에서 찾고 명랑하게 사는 것 미래에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또한 그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불신이웃을 위한 최고의 전도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렇게 진지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게 사는 그리스도인,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묻습니다. 예수를 믿는 게 사는데 도움이 됩니까? 왜 당신은 진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명랑하지도 않고 명랑하지 않고 또 진지하지도 않은 그런 삶을 삽니까?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명랑함이란 어떤 것이냐, 이런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고민거리가 생긴 겁니다. 엄청나게 많은 수확을 거둬들였는데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그게 고민을 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아 이렇게 하자. 내 이 좁은 곳간을 헐어버리고 더 크게 짓자. 그리고 거기에다가 곡식과 물건들을 쌓아두자. 그리고 영혼에게 말하자.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 그러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제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명랑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주 세속적인 명랑함입니다. 그렇죠? 이런 세속적인 명랑함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인생의 한계에 대한 도피적인 명랑함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만 추구하고 산다면 우리들은 이 어리석은 부자의 운명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취하리니 그렇다면 그 많은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명랑하게 살아가는 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 세속적인 명랑함만으로는 결코 인간이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명랑함은 결국은 세상을 전부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영원한 명랑함이라면, 그다음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 맛있는 음식, 높은 지위, 재산, 현금 이 외에도 뭐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든지 이런 다양한 즐거움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명랑하게 하지 않습니까? 근데 이것들은 일종의 일시적 명랑함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결론에 이르냐 하면은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짝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있고 지상의 나라가 있고 그리고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렇게 하늘과 대지, 여기서의 대지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대명사고, 이거는 이제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들의 대명사입니다. 천상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게 전부인 것처럼 살아도 안 되고 이게 전부인 것처럼 살아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전부인 것처럼 살면 결국은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이 되고 그 다음에 이것 밖에 없는 것처럼 살면 비현실적이 되잖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 둘 사이의 긴장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행복이다, 이 얘기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승리한 사람들일 것이고, 그리고 신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늘을 향하여 의미를 물으며, 의미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니까, 그 다음에 땅에서 나의 현실을 찾아야 된다, 그래서 이 둘을 모두 수렴하면서 뭔가 행복을 찾아가는 삶, 이것이 진정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보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뭐 크게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게 왜 어려워 보이냐 하면은 균형을 안 잡으니까. 대개 너무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서 균형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소수고 오히려 반대로 이 덧없는 세상에 몰입함으로써 하늘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균형을 잃어 버려서 결국은 불신자와 다름없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어떻게 우리들이 영원한 명랑함과 일시적인 명랑함, 그 사이에 조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냐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부자가 대책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내 곳간을 헐어버리겠다. 그리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둘 것이다.” 그 ‘소출’이라고 하는 거 있잖습니까? ‘소출’ 뭐 이렇게 지금 옛날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뭐 생겨난바 그런 뜻이라 이것입니다. ‘소출’인데 근데 결국은 뭡니까? 식물들이 죽은 겁니다. 그 알곡을 맺은 곡식들이 죽은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게 해서 자기 창고에 거둬들이게 된 겁니다. 그런데 식물들은 그렇게 죽어서 자기 창고의 소출로 수확이 되었는데 부자는 자기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겁니까? 그러니까 일시적인 행복에 일시적인 명랑함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사람이 영원한 행복엔 무관심하고 일시적인 행복에 매몰되는 겁니다. 근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네 것이 그것들이 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 물으시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될 경우에는 여태까지 몰두하고 있던 그 현재적인 명랑함과 또 부유함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게 돼버리는 겁니다. 이런 삶을 과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문득 그 생각이 납니다. 어렸을 때 동화책 한 권을 읽었는데 이게 <서울쥐와 시골쥐>라는 동화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읽으신 기억날 겁니다. 시골쥐가 이제 친구를 찾아서 서울로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친구를 따라 그 집에 서울쥐 집에 가보니까 시골에서 상상할 수 없는 맛있는 게 많은 겁니다. 그래서 너무 부럽고 즐거웠는데 수시로 도망을 다녀야 되는 겁니다. 우리 연세 드신 분들이 기억납니까? 저 천장으로 막 쥐들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막대기를 가지고 천장을 퉁퉁 칩니다. 조용하라고. 그러면 또 한동안 쥐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다가 막 돌아다니고 그래서 또 오줌을 쌉니다. 짐승들은 항상 오줌을 같은 데 싸잖습니까? 천정이 이게 구멍이 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새끼들하고 애미들하고 한꺼번에 이불 위로 떨어지는 겁니다. 후루룩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새빨간 쥐, 갓 태어난 게 꼬물꼬물꼬물 움직이면서 일곱 여덟 마리가 이불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눈도 못 뜨고. 그러니까 시골쥐가 그거를 보고 그 다음에는 보따리에 싸가지고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야 맛있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야 이거 서울은 살 곳이 못 되는구나.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냐. 나는 이렇게 맛난 것 없어도 그냥 이렇게 우리 위협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평온한 시골에서 사는 내가 더 참 행복하구나.” 그렇게 반성하면서 시골로 내려간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근데 그런 겁니다. 무엇에 쫓겨서 미친 듯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결국은 자기도 무엇에 쫓겨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허무하게 일생을 보내는 겁니다. 그건 무엇 때문입니까? 일시적인 행복에 인생 모두를 걸고 영원한 명랑함에 대하여는 별로 생각을 안 하면서 살기 때문에 삶은 그렇게 요동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네. 그래서 이제 옆에 보면 창고를 이렇게 넓힌다 이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는 극단적 물질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세속주의에 빠져있고. 근데 현실에서 도피하고 세속적인 기쁨을 누리는 데서 오는 명랑함만을 한쪽에 치우쳐서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배는 지금 그 암초에 부딪혀서 서서히 물이 들어와서 침몰을 하는데 배 위에서 음악에 맞춰서 신나게 댄스를 추는 겁니다. 근데 결국은 그 곡은 끝나고 배는 모두 가라앉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과연 진정한 명랑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건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하나님 있는 명랑함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그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삶의 모든 의미를 그 기반을 하나님께 두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사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살아가는 겁니다. 누가복음 12장 27절에서 28절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렇죠?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게 이런 겁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는 못하였느니라’ 이게 무엇 때문입니까? 솔로몬이 그 얼마나 좋은 옷을 입었겠습니까? 그렇죠? 중국에 한 번 갔을 때 그 황제들이 입는 의복을 이렇게 보여주는데 말입니다. 수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자켓입니다. 그거를 아주 장인이 하나를 짜는데 5년 2개월이 걸린다고 그러더랍니다. 근데 황제는 옷을 빨아 입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옷을 걸쳐 입고 음식물이 튄다든지 뭐가 묻으면 그냥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딱 한 번 입기 위해서 5년 2개월 동안 장인이 거기에 매달려서 옷을 만드는 겁니다. 참 어떻게 보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백합화는 그저 오늘 피었다가 사라지는 들꽃에 불과하지만 생명이 있고 그 다음에 솔로몬이 입었던 옷은 아무리 비싸고 화려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값으로는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옷이 백합화 수만 송이와 비교할 수 없는 가격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는 백합화만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들풀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면 그러면 들풀의 생명보다도 훨씬 소중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들의 생명은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로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까 인류 전체를 창조하신 목적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하지만 그러나 왜 나라는 인간이 여기 태어나야 했는가는 그것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자존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신 분이니까.
대개 사람들 중에, 여러분 오늘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들 중에도 자존감이 심각할 정도로 없으신 분들 있습니다. 근데 그게 사회적인 조건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일류 대학교 나오고 또 미모이시고 또 집안도 잘 살고 재능도 있는데 자존감이 한없이 낮습니다. 그리고 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셉니다. 자존감하고 자존심은 다른 겁니다. 그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다, 그리고 존중받을 만한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존감입니다. 자존심은 뭔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자기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느끼는 거고 자존심은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더 높이 평가하려고 하고 또 낮게 평가된 것을 못 견뎌 하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그렇게 뭐 작은 일에 발끈하거나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열등감 때문에 약간 그 폭력적으로 반응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죠? 그래서 이상하게 늘 시비를 걸고 그러는 사람들을 보면은 자존감이 참 낮은 사람이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누군가와 다투고 비교하고 그들 우위에 있다는 거를 통하지 않고는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라는 거 그걸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의 닻을 내리고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때로는 비극과 고통을 만나도 그 속에서 ‘궁극적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사는 사람이고 주님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다’라는 낙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이런 문제를 얘기하면서 블레즈 파스칼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마음을 빼앗기는 동안 우리의 현실의 시간은 흘러간다.” 의미심장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시간에 마음을 빼앗기는 동안,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세속적인 명랑함 혹은 세속적인 그 근심과 염려,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동안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죽음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산만큼 우리는 의미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정함이 없는 마음의 행복이 깃들려면 욕망이 아니라 소망을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은 결국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는 바에 의하면 ‘탐욕을 버려야 된다’ 입니다. 탐욕. 결국 인간이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욕구입니다. 욕구가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탐욕은 그런 그 기본적인 삶의 욕구 내가 존재해야 되겠다는 욕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거는 말하자면 욕망의 노예가 된 그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음으로써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되어도 그 사랑 안에서 낙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게 신앙이 주는 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어야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명랑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소명입니다. 근데 그 삶을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저 사람들 속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구나, 그들을 이런 속에서 명랑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그런 질문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설교를 청취하면서 질문이 세 개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이것을 한번 질문을 듣고 또 대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문제씩 한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질문하신 분의 내용은 이런 거였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명랑함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가슴으로는 세상의 명랑함을 부러워하는데 이 모순된 마음을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은 세상에 있는 어떤 즐거움이나 또 세상에서 명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주 없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나는 지금 뭐 한 이십 년 된 털털거리는 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런데 뭐 나와 별로 크게 차이 날 것도 없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사업이 잘 되어서 좋은 차를 타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럴 때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뭐 거의 같은 나이인데 나는 폭삭 늙고 몸도 여기저기 아파서 약을 달고 살고 그리고 겨우겨우 힘들게 생활을 하는데 또 한 친구는 그 나이에 아주 젊어 보이고 활기차 보이고 운동도 많이 하고 해서 아주 건강하게 젊은이처럼 살아간다고 할 때 그런 비교의식을 느끼면서 부러운 마음이 안 생기겠습니까? 이런 부러운 마음이 생기는 거는 전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꼭 신앙이 나쁜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비교 의식에서 오는 우울감이, 부러움을 넘어서는 어떤 우울감 때문에 자기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건강한 삶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그런 걸 먼저 생각해야 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현실적으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잘 살게 된 사람 그리고 건강하게 된 사람, 또 외모의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오래 간직하게 된 모든 사람들은 다 노력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그 노력한 것을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도 ‘아 좀 더 노력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내가 비록 단숨에 그 사람만큼 부자가 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더 알뜰하게 그리고 더 열심히 일을 해서 그래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 미래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실하게 노력을 한다면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에게 인생의 자극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건강을 잃고 중년에 혹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갈 때 건강이 확 꺾어져가지고 삶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 중에 거의 80% 이상은 건강에 무심했던 사람들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그 대가를 중년이 넘어서고 노년에 들어서면서 다 돌려받는 겁니다. 근데 그 건강한 사람들은 타고 나서 뭐 운동을 안 했는데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그 다음에 먹는 것 그리고 숨 쉬는 것 모든 거 다 관리하고 그리고 철저하게 운동하고 이러면서 살았기 때문에 노화가 늦어지고 건강하게 사는 겁니다.
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천성적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아주 드물게 있지만, 그러나 훨씬 더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뭐 세수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화장품 바르는 거 그 다음에 뭐 운동부터 시작을 해서 모든 것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도하게 많은 소비를 하면서 그렇게 허영심에 가득 차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할 수 있으면 뭐 그런 사람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건강 =관리하고 운동하고 미용에도 신경을 쓰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면 자신도 너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기억이 나는데 한참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세수하기 위해서 거울을 쳐다보게 되잖습니까? 근데 우울감이 확 옵니다. 얼굴은 병색이 역력하고 기운은 하나도 없어 보이고 몸은 너무 피곤하기 짝이 없고 그리고 막 어떤 때 울고 싶은 겁니다. 이렇게 내 몸이 내가 하고 싶은 만큼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한탄하고 있어야 소용없습니다. 열심히 걷고 운동하십시오. 저도 요새 적으면 한 6km, 많이 걸으면 한 11km까지 걷습니다. 꾸준히 했습니다. 근데 보는 사람마다 혈색이 좋아졌다 그럽니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자기의 닿는 범위 안에서 성실하게 노력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히려 그냥 마음으로 부러워만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존감을 높이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세상의 명랑함의 경계를 세우는 게 어렵습니다. 한 발 내디디면 세상의 명랑함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경계를 선명하게 구분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상의 명랑함도 감사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영적인 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누구도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영적인 생활 없이 놔두면 한 때 주님을 위해 목을 내놓았던 사람도 부패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나라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감옥을 오고 가고 사형 선고도 받고 이랬던 사람들이 나중에 부패한 정치인이 되는 경우를 보잖습니까? 그럼 어느 게 진심이겠습니까? 둘 다 진심입니다. 한때는 나라를 위해 목숨도 내놓고 기꺼이 피를 뿌리고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진실입니다. 지금 돈 좋아하고 그 부정부패를 좋아하는 것도 진심입니다. 왜 그렇게 됐겠습니까? 처음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시고 은혜를 많이 받으셔야 됩니다. 그러면 이 균형을 잡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오래간만에 우리 친구들을 만나서 맛있는 식사를 하러 갑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친구들도 전도할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가서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내가 제일 그래도 성공한 거 같으니까 내가 밥을 살게, 걱정하지 말고 맛있게 드시오, 그렇게 하고.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간증도 하고 또 그 사람들의 어려운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리고 돌아오는 그 길이 허무합니까? 난 하나도 허무하지 않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세워주신 하나님 참 감사하다, 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내가 오히려 도움을 받는 대신 도움을 줄 수 있게 해주시고 또 저 친구들이 나를 만나는 것을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시니 참 감사하다, 평소 먹는 것보다 좀 좋은 걸 먹었지만 저 친구들이 저렇게 나를 만나고 기뻐하니 참 감사하다, 그게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도움이 되지, 왜 손해가 됩니까? 뒤에서 호박씨 깔려고 그러니까 그게 영적으로 손해가 나는 겁니다.
3번 문제. “거룩한 명랑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는 지식 위에 삶이 있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데도 성향적으로 우울함을 가지고 사는 지체에게는 명랑함이라는 단어는 어색하고 멀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권면할 수 있을까요?” 그거를 본인이 보여주십시오. 어떻게 깊은 영성과 삶의 명랑함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이 우울하잖습니까? 그 우울함의 정도가 지나치면 그거는 정신과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담도 받으시고 교회 안에도 상담 시스템이 잘 돼 있잖습니까? 상담도 받으시고. 그리고 그건 뭐. 그러잖습니까?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그러잖습니까? 그래서 그런 병원을 찾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과적 진단도 받으시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약 하나만 먹으면 훨씬 좋아집니다. 그렇게 자기 적극적으로 자신을 고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기질적으로 성향적으로 우울함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매사를 깊이 생각하는 그런 면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것은 잘 살리고 그리고 잘못 굽어진 것들은 고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깊은 영성과 삶의 쾌활함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못 만나기 때문에 사실은 그 조화점을 잘 못 하는 겁니다. 그런 거를 함께 조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간다면 훨씬 더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문제를 보겠습니다. ‘명랑하다’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명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명랑하다는 것은 생각과 생활이 비관적이지 않고 밝고 환하다 이런 뜻입니다. 명랑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를 믿고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더 깊이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2번 하나님 없는 명랑함의 두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전부로 여깁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일부러 회피하는 겁니다.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의 빛으로 삶을 보아야 합니다.
3번 하나님이 있는 명랑함의 특징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인간으로 또 나로 태어나게 하신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4번) 신앙 안에서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떤 성품을 믿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5번) 살면서 근심 염려 기쁨 고통을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믿는 명랑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날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에 젖어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를 쉬시면 안 됩니다. 늘 가능하면 매일 매일 눈물이 있는 기도 생활, 그리고 가능하면 매일매일 내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생활, 말씀에 감화가 있는 생활, 그 생활을 매일매일 유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근심과 염려, 고통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하나님 있는 명랑함으로 바꾸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인생에 대한 해석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네, 오늘 1과 마쳤습니다. 사실 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설교를 쏟아 부은 것은 제 2편부터입니다. 특히 다음 주가 기대가 됩니다. 다음 주 오실 때 꼭 설교를 들으시고 시간이 없으신 분은 요약본 한 45분짜리를 들으시고 시간이 있으신 분은 젊은이들을 위한 설교 2시간 16분짜리를 모두 듣고 그리고 오신다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