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염려는 어디에서 오는가(2)
녹취자: 백지영
네,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벌써 또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염려에 관하여 제1장을 지난주에 이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이태원 발 확진으로 많은 사람이 긴장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큰 여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한 이틀 전에는 공기가 너무 맑아서 정말 산책할 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밝은 햇빛과 맑은 공기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가지고 있을 때는 잘 모르고 잊어버리고 난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제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자, 그럼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염려에 대해서, 인간 존재, 그리고 염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체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부를 했는데, 이 시간에는 염려가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염려와 많은 근심, 그런 것들은 결국 어디서 오는가?’라고 할 때, 결국 자기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첫 시간에 염려에 관해서 먼저 말하면서 염려를 구분하였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즉 필요한 염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해야 하는 염려들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고 또 우리의 삶을 어느 정도 유익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 사고의 위험을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하게 되고, 앞날의 궁핍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절제하는 삶을 살게 되고, 이런 것은 합당한 염려입니다. 더욱이 합당한 염려를 넘어서서 경건한 염려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족하다는 염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필요한 염려이고, 그런 염려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런 염려가 아니라 합당하지 않은 염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난 시간에 윌리엄 퍼킨스의 이야기를 참고하면서 배웠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서 비롯되는 염려입니다. 그러면 그런 염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자기 사랑에서 온다는 공식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염려가 자기사랑에서 온다면, 그러면 그 자기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또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다시 한번 더 깊이 살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자기’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별로 긍정적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물론 중립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혹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런 경우에는 무슨 선악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의 대상으로서 ‘자기’라고 할 때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긴 교리적인 설명을 끝낸 후 이 사실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듯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 그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본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우리들이 본떠질 것입니다. 여기서 ‘수스케마티조’라는 그리스어 단어인데, 쇳물 같은 것을 녹여서 틀에다가 부어서 많은 제품을 찍어내는 그러한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결국 인간을 그렇게 본받도록 찍어내는 것은 딱 두 개밖에 없다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찍어 내지고, 하나는 세상에 의해서 찍어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 틀 지워지든지, 그 경우 그리스도에 의해서 틀 지워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형상을 가져야 할지를 그리스도가 가장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틀 지워진다고 하는 것은 참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계셨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해서 틀 지워지면 결국은 세상의 부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20년 전 영화를 보면 왜 그렇게 촌스럽습니까? 바지 모양도 다르고 양복 옷깃도 다르고 심지어 헤어스타일도 너무 다르고, 화장법은 또 왜 그렇게 촌스럽습니까? 왜 그럴까요? 그 후로 많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표준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는 사람들을 똑같이 따르도록 찍어냅니다. 그중의 하나가 유행입니다. 유행, 그다음에 그 시대에 유행하는 관습, 이런 것들을 안 따르면 무엇인가 불편해지고 소외된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의해 틀 지워진다고 할 때, 결국 그게 세상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세상을 따라가는 인간 자신에 의해서 그렇게 틀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자기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할 때,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면 권장할만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런 자기 사랑이라는 말을 안 쓰는 이유는 굳이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질서 지워진 그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신이 합당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제일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심이 자기를 향해서는 하나님 사랑과 합일될 수 없고, 관심사와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이 가장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르시시즘의 유래를 아십니까? 자기 자신에 도취하는 게 나르시시즘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물에 비춰보면서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상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도취하여서 죽는 것 아닙니까? 그게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현대를 지배하는 많은 생각은 바로 그렇게 자기도취입니다. 그런 중심으로 생각을 하면서 결국 인간의 자기사랑을 널리 널리 부추기면서 그렇게 살도록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들에는 모두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의 기준만을 계속 따라가면서 억압을 느낀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참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자기를 어떻게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좀 길어졌습니다만,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염려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할 때, 어거스틴은 교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의지에 관한 것이라면 교만은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지성적인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적인 교만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고 어느 사랑이 어느 사랑을 지배해야 될지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이 질서를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질서를 어긋나서 인간이 그 질서를 뒤집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많이 사랑해야 할 것을 적게 사랑하고, 적게 사랑해야만 할 것은 더 많이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말 것을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않는 이런 방식이 될 것 아닙니까? 그 사랑의 적도(適度), 뭐라고 할까요? 사랑의 비율, 사랑의 우선순위, 사랑의 분량,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기준은 싹 쓸어버리고 내가 정한다고 하는 교만이 자기사랑을 가져오고, 그것 때문에 염려를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자신 있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할까요? 결국, 인간의 욕망이 그것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지요?
그러면 넘어가보겠습니다.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 사람이 있고 사랑을 합니다. 음악과 여흥을 사랑합니다. 음악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한 10여 년, 20년 전만해도 트로트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할까 좀 교양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유흥으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트로트를 디스 하는 게 아닙니다. 혹은 강의를 들으시는 분 중에 트로트 애호가나 혹은 트로트로 직업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어마어마한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잘 알려진 트로트 가수 한 사람은 가서 한 번 노래 부르는데 2천 5백만 원에서 3천만 원을 호가한다고 합니다. 시장을 어마어마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절대 예전에는 그런 것 안 불렀을 아주 젊은이들이, 심지어 10대까지 아니면 초등학생까지 이렇게 트로트에 열광하고 있는 게 뭘까요? 그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분석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음악이 주는 즐거움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음악을 하고 그다음에 그 음악이 다시 우리를 정화시키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이런 것 별로 필요 없이, 쉽게 이야기하면 그냥 소비해 버리는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이 트로트의 유행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는 이것도 또 어떻게 보면, 짧게 보면 우리의 감각 문화, 주관적으로 감각되는 것을 모든 객관적인 것보다 더 우위에 놓는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들의 한 산물이 아닐까 그렇게까지 한번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그래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이겠지요? 그리고 그 위에는 플러스하고 점점이 찍혔는데 뭔지 모르겠습니다. 카드인가요? 그리고 밑에는 돈, 달러 표시가 되어 있는데 국제적으로 노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자기성취, 자기만족 이런 것을 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렇게 되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마음에 이런 것들이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사람이 사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재물의 대표적인 것이 돈입니다. 그러면 망명정부의 돈은 여러분들이 사랑하겠습니까? 파산한 국가의 돈을 여러분들이 사랑하겠느냐고 제가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이라고 하는 것은, 돈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돈에 보장되고 있는 소비의 가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소비가 보장된 가치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너무 많이 들고 소비할 기력이 없으면 돈의 의미가 별로 없어집니다. 여전히 의미가 있겠지요? 더 비싼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과 싸구려 요양원에 들어가는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경제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돈 없는 너도 어디 못 가고 돈 많은 너도 어디 못 가고, 그래서 결국은 요양 시설이나 좀 돈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만족을 느끼는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재물에 대한 사랑은 자기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사랑은 결국은 그릇된 자기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은 정체가 뭐냐 하면 그릇된 것을 욕망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자기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에 의해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됩니다. 그때 그래도 믿을만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결국은 재물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다음으로 놀라운 능력이 현찰의 힘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질적으로 볼 때. 예를 들어서 내가 내 인생을 나를 좋아하고 돌봐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의지했다. 그 지위가 영원합니까? 두 번째, 또 그 지위가 굉장히 오래 간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변심해서 나를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은 변함없이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것 중의 가장 유력한 것이 돈입니다.
요즘은 주식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몇억을 넣어놓았는데 어느 날 가서 뒤져보니까 0이 됐습니다. 요번에 마이너스가 된 사태까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원유선물시장에서, 그러니까 뭐냐 하면 7천만 원을 통장에다 집어넣었는데 이게 계속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거의 0까지 내려가서 매도하려고 하는데 이게 서버가 다운이 되어서 먹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마이너스라고 하는 것 자체를 얘가 인식을 못 하니까 매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천을 집어넣은 사람이 마이너스 3천이 되었으니까, 그 증권계좌를 청산하려면 0원이 돼서 돈을 다 날린 게 아니라 3천만 원을 들고 가야지만 그 계좌가 정산되는 이런 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나갈 때는 괜찮지만 안 나갈 때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이 현찰을 가지고 있으려고 하고, 현찰도 우리나라 현찰은 환율에 의해서 출렁거리니까 비교적 안전한 달러나 유로화나 심지어 엔화 같은 것을 선택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심지어는 금을 사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사랑의 질서에 대해서 매일매일 도전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각론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남긴 한 백 개의 어록을 뽑는다고 하면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요한복음 각론 한곳에서만 쓴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책에서, 삼위일체, 신국론, 그리고 고백록에서도 다 나옵니다. 굉장히 광범위하게 자주 인용되는 글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내가 많이 인용하니까 김거스틴이라고 누가 그랬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명칭 별로 안 좋아합니다. 제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은 저 자신의 삶입니다. 그리고 저를 너무 좋아하고 제 사상을 판박이처럼 박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추종하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신 예외적인 도움들입니다.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느껴질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역설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반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사랑은 생명의 근원을 가지신 분을 자기 밖에 두는 것이기에 그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참된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파괴일 뿐이다.”
유명한 글입니다. 사실 저 이야기를 제가 아주 오래전에 처음 읽었을 때 쿵 하는 커다란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저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어법이지요. 그래서 한번 텍스트를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와 그다음에 두 번째 줄에 나오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할 때 그 ‘자기’가 두 개가 같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자기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줄에 나오는 “자기를 사랑하고” 할 때 이 ‘자기’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을 욕망하는 자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줄에 나오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할 때 이 ‘자기’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진정한 자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뒤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네 번째 줄에 나오는 ‘자기’는 첫째 줄의 ‘자기’이지 두 번째 줄의 ‘자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wordplay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자기 바깥에 두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인 것입니다. 저는 다른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불행해지는 모든 이유는 역설적으로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어떤 행복입니까?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꿈꾸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충 우리가 이 자기사랑이 왜 우리에게 염려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에 하는 염려는 그릇된 자기사랑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이렇게 그릇되게 자기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임없는 찢어짐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과 기쁨을 주시는 행복의 근원이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행복한데, 그분께로부터 멀어지면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면서 더 불행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이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얘기가 있는데 넘어가겠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대안입니다. 그래서 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몸과 눈의 비유가 나오는데, 결국은 이 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이것을 ‘인텐티오’, 그래서 ‘의도’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판단능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서 몸이 안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눈이 보면서 판단을 합니다. 이것은 나에게 큰 해를 끼치는 상황이 아니다, 혹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이런 것을 코로 냄새 맡고 손으로 접촉하면서도 하지만 제일 먼저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정보를 우리에게 실어다 주는 것이 눈입니다. 눈으로 보고 딱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의 올바른 판단은 우리의 영혼 전체의 갈 길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공부하면서도 여러분들이 배우고 있지만 결국 지식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 판단과 열정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 도표를 한번 잘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사단이라고 예를 들어보면 한 사람을 미혹하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을 위하여 헌신하게 만들려면 어떤 작전을 써야 되겠습니까? 결국은 여기에 개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흔들어 놓아서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들고, 결국은 이 순결한 사랑을 오염시켜서 말하자면 불결하게 만들어야 될 것 아닙니까? 불결한 욕망이, 육욕이 되게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정신을 혼란시켜서 올바른 판단을 못 내리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될 경우,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인간이 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가치의 전복(顚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먹는 전복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뒤집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올바른 판단으로 이렇게 1. 2. 3 이런 식으로 가치가 정해질 것을 이것을 확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 있어야 할 것이 위로 가고 위에 있어야 할 것이 아래에 가게끔 만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결국은 불결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판단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판단은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고 그 진리의 기준을 명료하게 가짐으로써 판단력을 갖게 되는데, 이 명료한 지성의 판단은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 아니면 결국은 자기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것인데, 이럴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올바른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욕망과 정보라는 주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어느 그룹에서 느닷없이 자동차 사업을 하겠다고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아해했습니다. 왜 다른 업종에서 그렇게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던 그룹이 왜 자동차를 만든다고 그랬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그 CEO가 자동차를 너무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태까지 그렇게 기업을 잘 이끌어온 사람이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결국 그 사업은 얼마 못 가서 접게 됩니다. 그때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접으면서, 심지어 개인 사재까지 몇 조를 출연해서 회사의 손실을 보존하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어느 놈이 자동차 사업을 하면 된다고 나에게 정보를 주었냐?” 사람이 그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저 사람이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도록 객관적인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저분이 원하는 게 뭘까 하고 그 욕망에 맞춰서 정보를 주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항상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쪽으로 그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역시 얼마나 욕망과 지식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 속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댓글들이 많이 들어오셨는데 몇 개 보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김현진님, 염려의 순환이 아닌 은혜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손이 짧고 귀가 어두워 못 들으신다고 푸념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염려의 순환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한 가지 염려가 또 다른 염려를 부르고 또 부르고, 부르고 하면서 계속 돌아가는 것이지요. 비참하지요. 한은정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염려시리즈를 들으며 작년 가을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되겠네요. 책과 구역 공부로 다시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대가 됩니다. 예, 그래도 저만큼 은혜받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평생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앞으로는 또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 덩어리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렇다면 일어나라고 그래라, 그런 말씀이 저를 많이 격려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대로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런 것이지요.
의미 있는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리 백스테이지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단이 주는 염려도 있을까요? 10년 전에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또 다른 사람이 십 년 전에 누군가 괴롭혔던 똑같은 것으로 자기를 힘들게 한다는 이런 뜻 같습니다, 제가 힘들었던 상황이 다시 재현되었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사탄이 주는 염려가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하셨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말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악의 궁극적인 원인자가 사단이니까. 그렇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결국은 사단의 이러한 영향력은 염려하기 위해서 잘 준비된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이런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자기 기독교 강요에서 악을 행하고 사단이 그렇게 나에게 시켰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이렇게 타이릅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단이 자신 혼자의 힘으로 염려에 잠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의심하는 마음이나 불신하는 마음을 스스로 갖기 때문에 결국은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은혜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충만히 있을 때는 이런 것을 이겨낼 수 있는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백스테이지님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왜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어느 작가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젊었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의 처세의 차이에 대해서, 젊었을 때는 주먹으로 치고받으면서 자기 길을 여는데 나이가 들면 발꿈치로 밀치기도 하면서 혹은 그 사람을 피해가기도 하면서 자기 길을 걷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구하면서 이기십시오. 문제를 너무 그것만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하게 커 보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힘이 없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김현진님, 자기 사랑은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감정이겠지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사회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알아주는 가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요. 또 수님, 하나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자기사랑은 본능인데, 하나님 안에서 하는 자기사랑은 본능으로 하는 자기사랑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 알겠는데 사실 잘 구분하기가 어렵네요. 굉장히 쉽습니다. 수님 제가 답변 드리겠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할 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약화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떨어집니다. 그게 금방 느껴집니다. 한번 하나님을 시험할 수는 없지만 기도하면서 자기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도를 열렬히 해보십시오. 그게 열렬해지는지. 놀랍습니다. 자기가 엄청난 욕구가 있어도 사실 막상 혼자 있을 때는 엄청난 욕구가 마음속에 발현되는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려면 이상하게 열정이 안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자기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기도 제목을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쓰면 자기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흡인력이 생겨나면서 그 기도를 자기 안에 있는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것같이 그런 열정으로 쏟아내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쏟아놓는 시간을 가지면 이 분별은 매우 쉽습니다.
김현진님, 하나 더 제 의견에 대한 댓글인 것 같은데, 트로트 열풍은 뉴트로 열풍에 맞춘 역동적인 쇼와 더불어 공동체의 기억과 히스토리를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뉴트로라는 말은 알겠는데, 새로우면서도 그다음에 옛날로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역동적인 쇼? 쇼를 동반할 수도 있고 또 혼자 노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더불어 공동체의 기억과 히스토리를 건드린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트로트가 공동체의 기억을 건드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트로트는 공동체적인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경험이나 이런 것? 그런데 그런 것을 한 시대에 같이 공감했다는 면에서는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겠는데, 저는 기본적인 본질이 오늘날에 불고 있는 트로트 열풍은 단순히 뉴트로의 열풍만이 아니라 소비적인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판소리는 유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트로트 열풍이 일어나는 것은, 상당히 소비적인 그런 것에 쉽게 하고 아예 소모해 버리는 그렇게 그런 문화가 이런 열정을 불어오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토마스아퀴나스를 왜 이렇게 마귀같이 그려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개혁신학이냐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계셨던 분이고, 그가 마주했던 시대는 종교개혁 시대하고는 다른 세대였으니까 자기 시대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신학의 오류? 당연히 오류가 있습니다. 마리아 사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우리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인 자양분들 속에서 종교개혁도 나오고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도 나오고 등등 이렇게 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초상화는 누가 반대자들이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어쨌든지 간에 굉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엄청 뚱뚱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먹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뚱뚱하셨겠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아버지가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부잣집의 아주 유복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머리가 남다르게 총명해서 아버지는 얘를 잘 길러서 성공하는 인물로 만들고 싶었는데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오직 성경과 경건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 녀석을 좀 약간 세속화시켜야지 인생의 방향을 바꾸겠다고, 그리고 미인계를 쓰십니다. 그래서 그림같이 예쁜 자매를 어디서 골라와서 예쁘게 입혀서 아퀴나스가 공부하는 방에 들여보냅니다. 그래서 저 소녀를 보고, 한창 피 끓는 젊음이니까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고 나면 뭔가 신앙에 미친 듯이 한쪽으로 치우친 저 아들의 삶의 자세를 바로잡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윽고 문을 열고 그 소녀가 들어옵니다. 저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묘사에 의하면 그림같이 예쁜 자매가, 자매인지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쁜 젊은 청년이 들어옵니다. 그때 무슨 대화가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퀴나스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겨울이었던 같습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로로 가서 불에 타고 있는 장작 하나를 딱 집어 들었습니다. 드니까 불이 어느 정도 꺼지고 숯이 됐겠지요. 그것으로 벽에다가 십자가를 딱 그리더니 아직도 불이 남아 있는 그 장작을 휘두르면서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도다. 물러갈지어다.” 하면서 그 자매를 쫓아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쨌든 굉장한 분이었습니다.
그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사랑과 지성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이 설명한 것을 지난번에 제가 원전과 함께 읽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몇 주 전에 했지요. 그런데 이분은 그것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1번, “신자 안에 계신 성령은 진리와 지식을 주신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해준 진리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과 같은 분입니다. 2번, “성령은 사랑이시기에 진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성령은 진리와 지식을 주시는데, 성령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은 진리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성령이 되는데, “사랑이신 성령이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신다. “맞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결국은 사랑을 갖게 됩니다. 신자도. 그래서 “그 사랑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올바른 성향을 형성한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향은 무엇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사랑하는 게 없을 때 그 사람의 삶은 매우 무기력해지거나 무질서해집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예를 들자면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연극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연극을 보고 난 티켓들을 모은다든지 아니면 팜플렛, 연극의 안내지 그것을 차곡차곡 모으는 사람들이 있고, 그게 경우에 따라서는 꽤 비싼 값에 경매에 나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결국 사랑은 어쨌든 그것이 무엇에 대한 사랑이던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성향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저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니까 올바른 성향을 형성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난 시간에 설명한 것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고 싶도록 만들어줍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 안 한 것 같은데, 다음 시간에 한번 제가 어거스틴의 글을 하나 인용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 “형성되면 거기서 지성은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된다.” 이게 다섯 가지 논리로 사랑과 지성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딱 맞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은 행복한 삶인데, 선하지 않은 행복한 삶은 우리에게 결코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으니까 결국은 선하고도 행복한 삶이어야 됩니다. 가장 큰 방해물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게 올바르지 않은 성향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올바르지 않은 성향 안에서 지성은 항상 그릇된 판단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성향을 갖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이렇게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을 보겠습니다. 자, 이제 최상의 가치를 어디다 부여하느냐 이것입니다.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어디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의 시작이 결국은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면서, 그 재물을 쌓아두는 이유가 결국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이고 그 염려를 대비하기 위한 자기사랑이 재물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바람직한 삶은 그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두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삼아야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저 도표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재물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재물을 사랑하고 그 재물을 통해서 자신의 염려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게 육체의 문제만 그렇게 해결해 주지 정신의 문제는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살하는 이유가 결국은 인생의 문제는 그것으로만 해결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재물이 우리의 정서를 조금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아름다운 여행지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새로운 정동을 느낄 수도 있고, 좋은 오디오를 들여다 놓고 감동적인, 그래 봐야 한 6개월밖에 안가겠지만, 어쨌든 감동적인 음향을 들을 수도 있고 아니면 거의 몰입하는 영상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영혼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자기를 사랑하여 재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차이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럼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의 것을 누리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힘이 재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만큼 육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돈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의 이유는 두 개입니다.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것도 역시 그래서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가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욕망이 증대하니까 두려움도 커지고, 두려움이 커지니까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재물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조금 빨리 나가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품고 있는 욕망에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남들과의 비교라고 나오는 이 도표는 아마 팔을 벌리고 뭔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두 개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여섯 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여섯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저 사람 참 좋겠다.” 두 번째는 “나도 저만큼 가져야지.” 그러면서 욕망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긁어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분량 이상의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많이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네 줄이나 쌓였습니다. 두 줄에서 네 줄로 바뀌었습니다. 넥타이도 새로 하나 사서 찾고, 잘 먹어서 덩치도 켜졌습니다. 그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욕망이 커지게 되면 결국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사회 경제학자가 이런 것을 했습니다. 엑스 분의 와이(y/x), 이렇게 했습니다. 이게 소유입니다. 그럼 이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소유는 많아지는 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밑의 이게 욕망입니다. 그런데 이게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물이 2에서 4였는데, 그러면 이게 2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재물이 9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이 6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1.5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여기서는 다섯이 늘어났는데 왜 나는 만족함이 없을까, 그럴 때 욕망이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제학자 이야기는, 만족하기 위해서 물질을 계속해서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대신 욕망의 크기를 줄여주지 않으면 결국 만족한 삶이 어렵다는 결론을 거기서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지침을 말씀드리는데 염려가 아주 비상한 힘을 가지고 확 파도처럼 밀려오듯이 자기를 지배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삶이 너무 우울해지고 불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렇게 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당장 그것이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정신적으로 힘이 없고 염려가 오히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기를 덮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권장하고 싶은 삶의 지침이 끊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이라면 한 사람이 방금 하고 있는 이 일의 의미를 이렇게 하면서 이게 이렇게 해서 10년 후쯤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를 함께 생각하면서 오늘날의 결정을 하는 것이 너무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을 해서 지금 당장은 좋아도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까지 생각을 하면서 이것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없어서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끊으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일주일만 생각하고, 아니면 하루만 생각하고, 하루도 안 되면 한 시간만 생각하고, 한 시간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고 하면 지금 1분만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매순간 매 순간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끊어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힘을 길러나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현실을 대면하라, 직면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현실은 도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회피할 수 없으니까 현실에 직면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도피하는 이유도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신앙으로 담대하게 이것을 이기면서 나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이 이게 생각 속에서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듯이 그러니까 언어를 길어 올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면 기도의 언어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말이 많아집니다. 느끼는 게 많으면 말 안 하고 못 배깁니다. 느끼는 게 없는데 혹은 딴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라고 그럴 때 말이 버벅거리고 말을 하기가 싫고 그냥 입 다물고 싶은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향해 소원해진 상태에서는 기도가 그렇게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제 이것을 던지면서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듯이 던집니다. 옛날 우물은 굉장히 깊습니다. 그리고 깊은 우물이 좋은 우물입니다. 왜냐하면, 깊어야지만 그만큼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물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던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물을 길어 올릴 때 세모꼴로 된 것을 쓰러트립니다. 쓰러트려서 물이 들어오면 그것을 다시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무게에 의해서 물속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득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서서히. 그러면 가운데 도르래가 있고 올라옵니다. 올라와서 물이 길어 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가 막혔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 속에서 언어를 길러 올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이 막 섞이면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그것 기도 아닙니다. 사실상.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염려로 나뉜 마음은 기도에 있어서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우리 누구 보라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문장과 문장을 이어야 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주어, 동사, 목적어, 보어, 관계 대명사까지 넣어서 그래서 한 단어 한 단어를 선택할 때 자신의 마음을 진중하게 묻어 올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클리셰’라고 하는데, 의미 없이 막 되풀이하는 말들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과 존귀를 받으옵시고, 이런 것들은 사실 대부분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오랫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떤 주어가 나오면 그냥 그 문장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셔야 된다고 하는 이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모르시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는,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마음을 기도하는 중에 바꾸어놓으시고 쇄신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 염려는 염려로 남지 하나님의 도움을 갈구하는 은혜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이런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공부 시간이 거의 다 끝났습니다. 오늘 내용은 다 했는데 또 댓글로 좀 들어가 보겠습니다. 많이 올리셨는데, 이소영님, 자기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뭔가 더 이루며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 모습이 부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러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게 사실 다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또 그것을 갖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겪게 되는 남이 모르는 상실과 염려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인 설교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는데, 나라는 사람을 다른 사람하고 자꾸 비교하면 그러면 별로 좋은 결과를 안 가져옵니다. 기껏해야 열등감 그렇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자만심을 가져옵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그림을 비교했다, 아니면 고흐와 모네의 그림을 비교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을 때는 그 사람 중 누가 더 유명한 사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비교 대상이 되겠습니까? 김홍도의 그림과 뭉크의 그림을 비교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닙니까? 각자 그 사람은 자기 시대의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 작품을 감상하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하고 비교해야 될까요?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작년의 자신과 올해의 자신을 비교하고, 그다음에 지난달의 자신과 이번 달의 자신을 비교하고,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 삼 년 사 년 후의 자신을 비교하려고 할 때, 그때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우리가 절대적으로 부러워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 행복의 근원이 결국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런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자, 12시 15분이 되었습니다. 오늘 공부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같이 잠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염려에 대해서 공부하며 두주에 걸쳐 한 과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깊이 묵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이 염려를 극복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