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희 자신을 알라 -(2)
녹취자 : 오희열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저녁때 워킹맘들과 직장 다니시는 장년 남성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해보도록 이번 주는 화요일 저녁 시간으로 옮겼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물류센터발 확진이 터지고 뜻밖에 많은 사람이 감염되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잘 대처하면서 살아야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필요성은 그만큼 강조됩니다.
잠깐 기도하고 공과를 진행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처럼 저녁 시간에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이게 해 주시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오늘 이 저녁에 공부할 때 집중된 마음을 주시고 큰 은혜를 우리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부 제2장의 뒷부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일부가 화면에 나오는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앞 시간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염려를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어록,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주제를 파악하라”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영혼을 가진 위대한 자임을 알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드렸고 키케로도 그 부분을 해석하면서 “너 자신을 안다”라는 말은 곧 “너 자신의 영혼을 안다”라는 말이라고까지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거기서 시작해서 오늘 우리는 뒷부분을 가게 되었습니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예를 드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설명해드렸습니다만, 여기의 “새를 보라”고 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새니까 공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땅에 있다고 해서 항상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듯이 새도 얼마든지 땅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신 이유는 그 충만한 생명력을 염두에 두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새의 충만한 생명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새는 자신을 위해서 심지도 거두지도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그 새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그렇게 공중을 날아다니니, 만일 새를 그렇게 돌본다면 너희는 얼마나 귀하겠느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당시 로마 시대에 노동자들 한 사람이 하루에 버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이고,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으니 한 데나리온으로 서른두 마리의 참새를 살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참새가 지금 우리가 보는 참새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만한 자료가 솔직히 없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참새보다는 좀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중국에서 참새를 잡아놓은 것을 보니 별로 먹을 게 없어 보였습니다. 어쨌든 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싼 값으로 섭취할 수 있는 단백질원 중의 하나가 바로 참새였다고 합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그렇게 값어치가 적은 사물을 가리켜 참새를 예로 드신 것입니다. 그것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돌보신다면 “너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좀 더 특정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존 칼빈이 공관복음 주석을 할 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차례대로 하지 않고 각 복음서의 같은 구절끼리 묶어서 한꺼번에 주석을 했습니다. 그 공관복음 주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분위기 있게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새들을 먹이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에 단단히 새긴다면, 주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 여김을 받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짐승들의 모든 필요까지도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만으로 우리는 충분하다는 뜻이다.” 칼빈이 자신의 전 작품에서 아주 강조한 신앙의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겪든지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주권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명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을 겪든지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든지 간에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특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에게 하나님의 의지에 거슬러 발생하는 일은 없다고 믿고 그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인생을 그분의 손에 맡기게 될 텐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살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고 그분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칼빈이 살았던 당시보다 지금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넓어졌고 사회도 훨씬 더 복잡해졌기 때문에 칼빈의 생각을 우리가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대강의 뜻에 있어서는 칼빈의 생각에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고 “나”라는 아주 작은 존재는 그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좋으신 뜻을 따라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숙연해집니다.
그다음 성경 구절에서, “공중에 나는 새가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귀하지 않겠느냐” 하셨는데 우리가 여기서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존엄하다”라는 것입니다. “존엄하다”라는 것은 “엄숙할 정도로 존귀하다, 엄숙하리만치 존귀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그렇게 엄숙할 정도로 존귀한 존재일까? 이 그림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크기와 넓이, 부피, 모양, 색깔, 따뜻함과 차가움, 이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 코, 입, 귀, 살갗, 이 다섯 가지 감각으로 사람의 육체는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각이 있기 때문에 “예쁘다”라거나 “예쁘지 않다”, “멋있다”, “멋이 없다.” 등등의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은 확실히 크기는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소가 한정되어있을 테니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보다 몸무게가 20kg 더 나가서 92kg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체중이 줄어들어서 72kg이 된다고 해도 내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더 마르고 말라서 한 45kg으로 줄어들었다고 해도 나는 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내 몸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내 영혼이 밖으로 넘쳐난다거나 나의 영혼이 다른 사람에게 출장 가 있다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집에 두고 온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영혼은 그것이 어디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 사람 안에 있다는 점에서 한정된 공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영혼은 감각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가끔 영혼을 본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허풍입니다. 영혼은 처음부터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혹시 그런 예가 있다면 그것은 영혼이 사용한 어떤 매개물을 본 것이지 영혼 자체를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신은, 영혼과 정신이 두 개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혼의 기능입니다. 마음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육체는 하나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디자인하셔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무엇을 본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많이 닮은 것이,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맨 처음에 인간들, 특히 그리스 철학사와 역사를 보면 고대의 사람들은 영혼이 물질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등 뒤의 정 가운데에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팔, 다리, 모든 기관을 실처럼 엮어서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똑바로 서거나 걷거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이 영혼이 제거되고 나면 사람이 죽었을 때 손발이 다 풀어져 버리고 엎드러져 버리듯이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보면서 영혼이 물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점점 바뀌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이라는 책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책상은 책상의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형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고 동물은 동물의 영혼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육체는 흙, 히브리어로 “아파르”라고 하는데 “티끌”, 혹은 “먼지”입니다. 그런 것으로 하나님이 육체를 만드시고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시는데 이 영혼이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은 영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완전한 영이신데 이 하나님을 가장 닮은 사물이 온 우주에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을 가장 닮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영혼을 주셔서 인간이 충분히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가꾸고 다스리고 돌보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그것이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천지의 만물 중에 당신을 가장 닮은 영혼을 사람의 육체와 결합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시간 안에 당신처럼 있는 존재를 만드시고 공간에 매이지 않는 분이 공간 안에 계셔서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이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옆으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아래로는 자연만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오셔서 이 세상을 가꾸셨을 것처럼 똑같이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의 지위라는 것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천사들도 부러워할 만한 하나님의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아주 엄숙하도록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설명하자면 굉장히 길지만, 이것이 골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결국 하나님과 언약을 파기하고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행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렸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존귀한가?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대답은, 타락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존귀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이 그렇게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댓글들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히 많이 들어왔습니다. 정현경님, “워킹맘이라 라이브 공부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참석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네, 우리도 감사합니다. 이한나님, “부부가 함께 접속했네요”. 네, 잘하셨습니다. “미혼도 있습니다.” 네, 존중합니다. “근무하느라 라이브를 못 들었는데 편한 시간에 라이브를 들어서 좋습니다.” 네, 좋습니다. “직장인을 배려하여 화요일 저녁에 강의해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유지원님. 이렇게 강력하게 환영하시면 또 한 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청년부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다른 교회 성도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의미있는 질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답변하겠습니다. “다른 사물이나 동물에게는 없는데 인간만 영혼을 가진 증거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우선 어떤 물건이 어떤 구성 요소로 되어있는지를 보려면 사람마다 관측할 때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에 가서 몇 개의 부속품으로 조립해서 그 물건을 만드는지 보면 됩니다. 그 첫 번째의 조립하는 장면이 창세기 2장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흙으로, 티끌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것을 육체로 삼으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그 과정이 하나님 자신을 나누어주신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결국, 인간 영혼의 기원이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인간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 교육을 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이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많은 짐승과 식물과 곤충과 물고기, 모든 것들이 나오는데 이런 두 가지 창조의 과정을 거치고 그 결합을 통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그냥 “있어라.”, “땅은 내놓으라.” 이렇게 명령하심으로 수많은 식물과 짐승들이 태어납니다. “동물도 뭔가 느끼고 감각하려면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무생물과 식물, 동물, 인간은 각각 다릅니다. 무생물은 그냥 있습니다. 있기만 할 뿐입니다. 식물은 있을 뿐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동물은 있을 뿐 아니라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동물들은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그 중의 어떤 기능들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있고 살아있고 감각하고 그 위에 인식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인식의 능력은 동물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동물에게 약간의 정신적인 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작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영혼은 인간만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시간 안에서 사물들을 생각할 수도 있고 시간을 벗어나서도 생각할 수도 있고 장소 안에서 생각할 수도 있고 장소 바깥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소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특히 자신에 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한 자기반성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다분히 자기 자신 생명의 연장이나 혹은 자신 생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작용, 그것에 국한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사람의 영혼에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증거에 의해서, 인식하는 증거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영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모든 능력을 동물들의 능력을 약간 향상시킨 것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실제가 있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타락했으나 여전히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칼빈주의를 자칫 오해하면 자신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세상도 모두 더럽고 자기 자신도 일체의 의미가 없는 무익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데 성경에서 그런 표현을 할 때는 구원에 관련해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여전히 존귀한 존재이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존엄성이 인간에 의해서 함부로 짓밟힐 수 없는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질문에 대답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다음 질문으로, “인간의 지위는 대단한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색깔을 드러내며 살 수 있을까요?” 아주 긴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인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물은 동물 이하의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개를 향해, “이 개만도 못한 개xx!”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향해서는 “개만도 못한 OOO!”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게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에 사실은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선택을 인간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존중해 주셔서 인간이 원하면 그렇게 타락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용해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는 결코 행복이 없고 끊임없는 고통과 좌절과 슬픔이 뒤따르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그것을 깊이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감을 그 어깨에 짊어진 것이고 그 책임을 짊어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자유를 찾을 때 그것이 참다운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돌아가기 전에 질문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재방송을 듣다가 퇴근하고 라이브로 들으니 너무 좋습니다.” 맛이 다를 것입니다. 질문들이 있는데 긴 답변을 요구해서 일단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그림을 보시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을 닮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한 존재입니다. 완전하고 순전한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기 때문에 이분은 완전하시고 이 사람은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안에서 교제가 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인 교제라고 설명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생명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사물을 너그럽게 돌보고 가꾸며 이 세계를 우리가 없었더라면 도달했을 그 상태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이바지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모든 인류가 있을 수 있고, 그다음에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가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람을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써 인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성은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데 사람의 성질을 가지고 계시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성질에 모든 인류를 동참하게 하셔서 넓은 의미에서 당신께서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영혼을 가지기 때문인데 그 영혼은 인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 인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인간이 존귀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평생을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인간이 신,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이 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섞여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있고 인간의 인성이 있는데 인성 사이에 공통적인 결합을 갖게 되어서 결국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존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인성 안에서 연합되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육신적 연합”, “본성적인 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경우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뚜렷한 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연합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중생과 칭의를 통해서 생겨나는 연합입니다. “감추어진 신비의 결합”, 쉬운 말로 “신비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앞에 설명한 것은 “본성적 결합”, 혹은 “성육신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영적인 생명과 실제적인 사랑은 아직 내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릴 수 있도록 연결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입니다. 구원받는 그 순간에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결합을 갖게 되고 이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최초로 우리의 영혼에 부어집니다. 그런데 이 부어지는 생명, 충만한 생명과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얼마나 더 풍성하게 누리느냐, 이 풍성함의 정도는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화되는 것만큼 그 충만한 생명과 충만한 사랑을 누리도록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즉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해서 오신 것인데, 이 풍성한 삶은 결국 내가 어떻게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충만하게 받으며 살아가느냐, 그것에 의해서 즉, 성화에 의해서 이 처음 주어진 생명과 사랑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복잡한 말로 설명했지만 이해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인간성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존엄해지는 근거는 되지만 그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거나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신비적인 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이 주어진다. 그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는데 그것은 조건적이다. 그가 죄를 죽이고 순종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 살수록 그 생명과 사랑은 점점 풍성하게 나타나서 그가 더욱더 강인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신다. 이것이 바로 이 도표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 심지어 이교도들과 끔찍한 범법자들까지도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존귀하게 여겨야 할, 그리고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중요한 근거를 이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또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성화의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가 실제로 그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연을 보겠습니다. 엄청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실시간 방송 너무 좋습니다.”, “목사님과 교역자, 관련 담당자님들이 야근하시는 건가요?” 보시면 모르십니까? 당연히 야근하는 것입니다. 양미루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의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중생과 칭의를 통하지 않은 영혼들도 본성적인 연합의 부분으로 존귀하게 여길 수 있나요?” 네, 지금 설명해 드린 바와 같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를 심하게 대적하는 이교도들까지도 여전히 그리스도와의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염려는 제 자신이 그렇게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믿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많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요새 이렇게 염려하지 않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염려하시며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염려하느냐 기도로 믿음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차이가 아닐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염려는 성경에서 합당한 염려와 합당치 않은 염려,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합당한 염려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염려입니다. 예를 들어, “정말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이런 경건한 염려는 하면 할수록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염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 아닙니까? 찻길을 걸을 때도 염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있습니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서 기다릴 때는 항상 전봇대 옆에 1m쯤 떨어져서 기다립니다. 이쪽에서 버스가 오다가 길을 벗어나서 인도 위로 튀어 올라온다고 할지라도 나를 막아줄 것이 있는 곳에 서는 것이 습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더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염려는 우리 자신의 생존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매우 이바지하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염려입니다. 그런 염려는 결국 점점 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낙심 속에서 긴장하게 함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술 취하고 방탕하는 것과 함께 마지막 날에 인간이 떨어지게 될 심각한 불행의 상황을 염려라고 하셨습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고 염려하는 것, 특별히 생활의 염려,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까 하는 인간의 육욕적인 삶을 위한 염려가 하나님 앞에서 잠들어 있는 신앙이 되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잘 구별하면서 이해해야 합니다. 경건하고 합당한 염려는 염려할수록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 염려는 염려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을 찢어지게 만듭니다. “에립나오”라는 그리스어가 “염려하다”인데 “마음이 갈라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갈라지면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distraction 되는 것입니다.
“새 창조된 그리스도인이 마음의 가책 없이 장기간 죄를 즐기며 지낼 수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다면 그것은 불신자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조건적이라고 하셨는데 구원을 받았어도 성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하하하, 불가능합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릴 테니 대답해보십시오. 여광남님, 성함을 보니 남성분 같은데, 님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생애에 더 놀라운 여자는 만날 수 없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서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이것이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자기 전체를 지배하면서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꿈이 이루어져서 그녀와 사랑하는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님의 마음에 “내가 이 여자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이 여자가 없이는 내가 사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내가 이 여자 뜻대로 하고 싶거나 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감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소원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너무 사랑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그것이, 나 자신이 만족해서 기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정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해 보셨을 것 같은데 혹시 못하셨다면 지금 해보시기 바랍니다. 결혼하셨으면 아내와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파랑새님, “목사님과 직접 대화할 기회가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생생하게 대화할 기회가 생겨서 감사합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지만 선한 기회로 바꿔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그럼요, 그렇습니다.
“목사님, 인터콥은 괜찮은 선교단체인가요? 혹자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열린 교회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면 인터콥에 대한 예전 자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저는 별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자로서 성화와 선은 다를진데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선한 행동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영상을 자주 틀어주고 그런 부분들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런 부분이 저에게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쪽 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영상을 틀어줬을 때 이것을 보여준 사람이 생각하기에, “여러분이 그 영상의 사람처럼 인간인 선한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좋은 신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렇게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 마지막 끝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지만 그래도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이렇게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그러니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선하게 산다면 그 행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의도로 보여준다면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조심스러운 생각이긴 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았지만 평생 성화되지 않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대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 치릅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동반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죽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성화를 완성하셔서 당신의 나라로 부르십니다.
계속해서 공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그림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기까지 했으나 하나님의 짝사랑만으로는 인간이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는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끊임없는 불안과 소외를 경험합니다. 외롭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사춘기 때 제일 힘들었던 감정이 “외로움”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는데 살아있는 것은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저를 잘 대해주지 않았느냐?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인 외로움이라는 것은 누가 잘해주냐 잘해주지 않느냐에 달린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해소될 수 없는 인간존재의 근원과 관련된 불안, 소외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적이 없습니까? 저는 열네 살 때 그런 것을 느꼈는데 이렇게 나에게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이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와 늘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심지어 내 가족들, 엄마, 아빠, 형제, 친구, 모든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소외와 외로움을 그 사람들이 티끌만큼이라도 알까?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끊임없는 자신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불안,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튕겨 나온 외로움과 소외, 그런 것들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 존재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는 사랑의 원인입니다. 사랑과 하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이 선하게 돌보시는 모든 피조물을 향해서도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감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의 환경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제는 저 심해에서 사는 모든 생물 속에서 어마어마한 플라스틱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인류 최악의 발명품 중 하나가 플라스틱입니다. 이것이 지구 전체를 돌면서 오염시키는데 바닷물이 위, 아래, 전후좌우로 세계를 한 바퀴 도는 데 1천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플라스틱이 청정해역이라는 개념들을 다 없애버리고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 특히 바다에 있는 생물들이 이 플라스틱에 오염된 채 그것이 인간에게 다시 돌아오고 순환하면서 모든 세계가 고통을 받는데 이런 것들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문제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랑하게 되면 그때 인간은 진짜 자존감을 되찾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다. 하나님도 나를 존귀하게 여기셔서 당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시며 나를 구원하셨다. 내가 비록 가끔은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이렇게 존귀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정말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굉장히 불우한 선지자였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고 예고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두 눈을 뜨고 봐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번 주일에 예루살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만, 어마어마한 금과 은과 동, 레바논의 백향목을 비롯해서 값진 재료들을 가지고 솔로몬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것을 모두 뜯겨 빼앗깁니다. 성도 멸망하고 성전도 훼파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위 디아스포라가 됩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게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광경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것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 민족을 사랑하는 예레미야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여기서 하박국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표면의 역사와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구속의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아주 즐겨 부르는 찬송이 거기서 나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왕국은 심판을 받고 깨어지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적인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우시는 구속의 진전을 목격합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믿은 하나님이 무엇이냐? 우리가 믿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회의하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이 다 부서졌는데 숨겨놓았던 금붙이들을 가지고 양식을 바꿔먹기에 여념이 없던 그때 통곡하고 울면서 마지막에 거기서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신약을 향해 달려오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 때는 끊임없이 염려하게 됩니다. 세상 그 자체가 뜬구름처럼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거기에 행복의 기준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입니다. 2과 공과 전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론을 내기 전에 들어온 사연들을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기 사랑으로만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만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목적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옛날에 부모님을 보면 굉장히 헌신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자식 잘되는 것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왜?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그 자식의 인생은 그 자식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은 그렇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 하나님의 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누군가를 너무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의 뜻대로, 그 사람이 원하는 내가 되고 싶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응이 없으신 것을 보니 그런 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박종민님,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지만, 교회에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값싼 구원”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습관적인 기복신앙으로부터 성화의 과정, 십자가에 대한 무게감은 어떤 것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는 인간은 자신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을 수 없고 올바른 기준도 세울 수 없고 진정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가 생각납니다. 귀뚜라미를 가지고 많이 장난쳤는데 귀뚜라미 머리에 달린 더듬이가 자기 몸보다 더 깁니다. 아이들이 모여서 가위로 그 더듬이 두 개를 잘라버립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잔인한 장난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잘라 놓으며 귀뚜라미가 더듬이로 갈 방향을 정해야 하는데 아무리 더듬이를 움직여도 감촉이 안 오니까 술 먹은 것처럼 비틀거립니다. 그걸 보면서 아이들이 재밌어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선 자신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은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질서 볼게 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너무 갔기 때문에 많은 글이 올라왔지만 접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공과를 요약하면 첫 번째로, 영원하고 불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있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도 세계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어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데 그렇게 돋보기로 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그런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세상의 의미 있는 존재로 여기에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 여기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인격적인 사랑 안에 살면 살수록 우리는 염려하기보다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이번 과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