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에 깃든 사랑(2)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28~30)
녹취자 : 박혜아
(본문은) 염려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의 선하심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페이스(faith)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를 이야기할 때 어떤 본질을 규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이 가지고 있는 기능,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통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유추하게 하듯이, 믿음의 기능을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직감적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목적이 우리의 이지적인 목적을 충족시켜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를 참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유학자 주희는 자신의 책 속에서 “우리는 마땅히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두 번째의 일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첫 번째의 일이고 책을 읽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정의나 본질보다 믿음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알고자 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이고, 믿고자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믿음의 기능에 대해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믿음으로서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나를 믿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긴다.”라고 말씀하십시다. 또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살게 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견디게 해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를 기뻐하게 해줍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믿음의 요소를 네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포기입니다. 포기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에 이르는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 하면 우리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알고 난 다음에 갖게 된 구원에 대한 정의이고, 예수 믿기 전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학문을 통해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쾌락을 즐기므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짐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각자 자기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그것이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었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참된 구원의 길에 이르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찬동입니다. 찬동은) 믿어야 할 내용에 대해 깊이 찬성하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인정입니다.) 인정은 그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을 거기에 얹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의존입니다. 의존은 히브리말로 ‘바타흐’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 모든 만물 중의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힘입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훨씬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하나님이 있게 하시니 있는 것 아닙니까. 들판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풀들도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니까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들에 핀 백합화의 요지 아닙니까. 동물들도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니까 있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우리도 주님이 살아있게 하시니까 살아있는 것입니다. 허블 망원경이 몇 년 전에 수리를 끝내고 가동을 한 것을 기준으로 보면 120억 광년 거리에 있는 운하까지도 관측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광대한 우주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어마어마한 운하도 하나님이 있게 하시니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이 있게 하시니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자연 만물보다도 훨씬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하나님을 더 높은 차원의 방식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잘 먹고 건강 관리하면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면 더 오래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야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인간에게 있어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의존의 마음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의존의 마음은 자신이 아무 희망도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자신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 내가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람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나의 마음과 정신의 모든 힘이 그분께로부터 온다는 것, 그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고백할 때, 인간은 그런 감정 안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기쁘게 복종시킬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조나단 애드워즈는 자신의 글 속에서 “하나님은 세상 어느 곳에서보다도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 안에서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존하고 나를 의존하지 않으며 살 것이냐,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나를 의존하며 살 것이냐’라는 선택을 수시로 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움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때에 인간은 아름다워지게 되는데 이것을 ‘의존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아름다우신데, 이것을 하나님의 ‘독립미’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아무것도 의존하지 아니함으로써 아름답고,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아름답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추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인간은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란 바다, 푸른 하늘, 하얀 백사장, 노송이 숲으로 우거져 있을 때 어울림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하나씩 따로따로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서로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것이 결국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올리고피스토스’입니다. ‘올리고스’는 ‘상대적으로 작은’, ‘피스토스’는 ‘믿을 만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해 깊은 감화를 받고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사랑은 하나의 짝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갑니다. 믿음이 없이 회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니고, 회개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같이 갑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깊이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회개하게 되는 것만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고 당연히 의존의 감정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회개하게 될 때 죄에 대한 미운 마음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가 ‘나의 인생이 그분의 손에 의존해 있고, 티끌 같은 나의 목숨이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사라진다고 해도 무엇이 아쉬울까’ 하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큰 믿음이 생겨남으로써 염려를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염려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큰 믿음으로는 큰 염려를 이기지만 작은 믿음으로는 큰 염려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래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엔나 소시지가 줄줄이 달려 딸려 오는 것처럼 염려는 끊임없이 딸려 올라옵니다. 인간의 마음과 현실을 해석하는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 해석들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인간의 기대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불만족,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기대하는 대로 인생을 끌어올리면 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항상 그렇게 끌어올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외국에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하는 바이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둘째로 능력이 있어서 다행히 그렇게 한다고 해도 기대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인간이 살아 있는 한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염려를 극복하는 길에 대한 중요한 중간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 두 번째는 현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꿀 것, 세 번째는 꼭 그래야하지 않는 기대를 낮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 가지 방향으로 골고루 접근하면서 염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현실을 자기의 기대만큼 끌어올리는 데서 염려를 극복하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신앙도 그런 일을 위해서 이용합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끊임없이 기대를 확장한다면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백합화가 아궁이에 던져질 풀에 불과하다. 그것들도 하나님이 입히신다.’(라는 말씀과) 공중에 나는 새들에 대해서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 속에는 무가치의 의미도 있지만 (그런 미물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중을 나는 참새가 항상 날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들도 죽습니다. 바다 속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의 사체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 곳에서 썩고 부패하고 순환을 이룹니다. (바다 속으로) 물 위에 떠다니는 수많은 생물들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다 생물부터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죽어서 물 위를 떠다니거나 부패해서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바다 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습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도 물속의 생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날아다니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 앞에 육체적, 물질적으로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미물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돌보신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아 그렇게 사랑하시는 인간은 얼마나 더 잘 돌보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염려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육신에 대한 염려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찌해야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선한 의지의 크기는 왜 이렇게 작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선한 의지의 크기가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등의 고민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참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염려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육신을 위한 이기적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염려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책 중의 하나가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상은 ‘늘 있지 아니함’이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사물이 변함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도서 13:19~20에 “...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에 대해 염려하나 그 육체는 무상한 것이고,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저희 할머니는 생전 심부름을 시킬 때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당신이 손수 하시면서 “죽으면 썩어질 살인데 무얼 그렇게 아끼냐” 는 말씀을 종종 하셨는데, (할머니는) 인생 특히 육체의 무상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는 유한한데, 후일 새로운 육체를 덧입는다고 할지라도 (그 육체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물질의 속박을 받는 그런 육체가 아닌데, 그런 무상함에 대한 묵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합니다. 시간 안에 있는 것들은 영원의 빛으로 비추어볼 때 그 의미가 드러나고, 있는 것들은 없는 것들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은 어마어마합니다. 어떤 사업가가 상가를 경락받았다고 합니다. 상가에 (세 들어) 있는 사람과 명도 소송을 벌였는데, 104명을 상대로 하나씩 소송을 해서 결국 이기고 다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부동산업자는 뇌암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우리의 육체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마음을 전혀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었을 때 저는) 어느 보험FP가 와서 보험을 들으라고 했을 때 ‘주님 의지하며 살면 되지 보험이 왜 필요하냐’고 생각하고 보험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보험을 들고 싶어도 못 듭니다. 실손 보험도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항상 살면서 무소유를 외치던 스님이 마지막에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입원비 8000만원을 어느 그룹의 부인이 대납해 주었다고 하면서 “목사님, 무소유도 좋지만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은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상당한 깨달음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적절하게 우리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에 갔을 때 어느 목사님이 개혁주의 사상으로 수백 년째 살아가고 있는 마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성수주일하고 주일은 마을 자체가 모든 가게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험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절대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갸우뚱해졌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랜 전통 속에서 보험에 드는 것은 아주 세속적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이 많은 물질들을 모아서 불행에 대비하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협동조합도 비성경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요? 진짜로 저는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보험FP가 조언해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과 함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자신의 과실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없이 민폐를 끼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할 수 있는데 부주의하거나 낭비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삶은 그렇게 권장할 만한 삶이 아닙니다. 이러한 예들은 삶의 무상함에 대한 묵상이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시간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영원한 것들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서 칼뱅이 ‘이 세상은 허무하고 헛되다. (세상의 것을) 하찮게 여겨라. 무시해라. 영원을 향해 가라’고 굉장히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이원론적인 신앙이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심한 사람들은 (칼뱅이) 스토아 사상에 물들어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훼손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심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 자체가 스토아주의에 오염된 사람이고 이를 칼뱅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스토아 사상이 말하는 허무주의와 성경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소극적으로 우리의 소유를 경멸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를 위한 어떤 좋은 것들을 멸시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원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 세계를 무에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가장 충만한 유로부터 만물이 창조된 것과 같이 결국 인간의 마음도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상함을 묵상함으로부터 받는 유익인 것입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만약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라면 이 땅은 다만 나그네길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거기에 사는 것은 죽음으로 이끌어져 들어가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천국에서의 삶과 비교한다면 분명 그것은 경멸할 만하며, 발로 짓밟아 버려도 될만큼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존 칼뱅의 제자 데오도로 베자는 칼뱅의 사상을 세밀하게 정리해서 개혁 신앙으로 남겨 놓는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입니다. 그는 칼뱅을 매우 존경해서 (그에 관한) 전기를 씁니다.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이 세상에 칼뱅만큼 경건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칼뱅의 경건한 삶의 모본은 모든 교부들과 역사상 있었던 모든 뛰어난 인물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칼뱅이 대적자들에게 모함을 받기도 하지만 저는 볼 때마다 그가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으면 그의 제자가 ‘그는 모든 교부들보다 뛰어나고 역사상 있었던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여주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단지 이 세상이 싫증나서 도피하여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넋두리를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끊임없이 천국의 삶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박해- 31가지의 질병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렸습니다-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큰일을 하며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골방에 앉아 책을 쓰면서 살아가야 할 분인데 역사의 격동하는 바다위에 던져진 배에 한 시대의 선장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는 끊임없이 자기를 이기고 이 세상의 시련과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면서 살아가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이 세상에서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비결이 됩니다. 내일 죽음이 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과거의 염려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했는데 다 염려한대로 나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했지만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심리학자들도 우리가 하는 염려들 중 60퍼센트는 의미 없는 염려이고 40퍼센트가 그래도 의미 있는 염려(라고 말합니다.) 그중 염려한대로 실제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는 10퍼센트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누가 비율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결국 (인간은) 염려함으로써 새까맣게 속을 태우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슬기로운 삶일 수는 없습니다.
시편 69:20에서 (시인은)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 하였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염려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염려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하나님을 짧게, 그리고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하나님을 짧은 시간이라도 간절히 찾고 나면 마음에 평정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든지 내 인생은 그분의 손 안에 있고 나는 그분의 손 안에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려니와’라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사람이 염려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해 성경은 큰 죄라고 봅니다. 왜 (염려가) 죄일까요? (염려는) 단순한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불신앙의 고집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회의를 느낀다는 것은 믿으려고 하는데 안 믿어지는 것이고, 불신앙은 안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불신앙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하찮게 생각하는 죄가 불신앙입니다.
누가복음 21:34의 말씀은 거의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조심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쥐가 맛있는 냄새를 맡고 걸려 있는 북어나 고기를 씹을 때 쾌감이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겠죠? 그러나 그 순간 문이 털컹하고 닫히는 것입니다. 아니면 털컹하고 스프링이 튀어 올라서 발이나 몸을 톱니바퀴로 채워 버립니다. 그러면 쥐는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 방탕함이고, 둘째 술취함인데, 이때 술취함은 살짝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이 박히도록 많이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생활의 염려인데 이 세 가지를) 동급으로 놓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까지 생활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을 방탕함, 술취함과 동급으로 놓고 경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청교도 작가인 매튜 풀은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치함과 세속적으로 생각이 쏠리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먼저 방탕함과 술취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는 두 종류의 두드러진 죄였다. 이어서 이생의 염려들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이는 꼭 필요하고 앞날에 대비하는 걱정들이 아니라, 불필요하고 마음을 나뉘게 하는 염려들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혜 주셨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받을 때 일종의 망각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가장 뛰어난 기술 중 하나가 고통을 받거나 극도의 염려에 사로잡혔을 때, 은혜의 때에 하나님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나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고통과 염려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웠을 때에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조나단 애드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다음 사실을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신앙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듣고 보았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것으로써 그의 정서가 감동받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이나 일상적인 행동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덧붙여서 애드워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의 정서가 감동을 받았다 할지라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의 정서에 감동이 온 것이다. 정서에 감동이 온다고 할지라도 모든 감동이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 삶의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