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1)
“…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녹취자 : 박혜아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일들에 대해 염려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위한 염려이고, 그 염려는 (자기)사랑에서 비롯되며 그 사랑과 염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은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고, 결국 허무한 삶을 살게 되며 행복하지도 않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제가 회심하기 전에 가장 심취해 있었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저는) 그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쇼펜하우어의 책은 기독교 신앙과는 많이 거리가 멀었지만 사실 의외로 성경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기독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대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그는 대표적인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고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고뇌에 대해 ‘자기가 의지하는 것과 목표 사이의 불일치’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되고 싶은 상태, 도달하고 싶은 상태가 있는데 현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이 고뇌라고 보았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의지가 목표를 향해 가고 달성됨으로써 인간은 행복해지는데,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저지될 때 인간은 고뇌에 찬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는 의지를 가지고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아래의 경우, 즉 저지당하고 고뇌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 영속적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간의 삶이 끊임없는 고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것은) 한번 일어나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목표가 생기고 우리는 그 목표에 도달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목표가 생기지 않을까요?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목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고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저지당하는 경험도 피할 수 없고 고뇌는 현실적인 것이 됩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보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신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결국 인간이 육신을 사랑하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이 배우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이 육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기쁘게 됩니다. 또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입니다. 인간이 육신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육신은 영혼이 아닌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육체를 만족하게 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집착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이 매우 빈곤해집니다. 영혼이 빈곤해져서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해 생각을 하고 보면서 그 일의 가치, 중요성,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돈은 돈이지만 돈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는 내가 그 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사뭇 다르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억만장자가 되었는데, 그 돈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의 육신을 즐겁게 하고 쾌락을 누리고 호사를 누리고자 마음먹으면 그 돈은 매우 흉악한 방향으로 사용이 되면서 이 세상의 고통와 죄를 더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 돈이 그렇게 쓰여서는 안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등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그쪽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이 세상은 아주 놀라운 일들을 해냅니다. 결국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은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꽉 차 있어서 그 정신에 의해서 육체가 지배될 때 삶은 참다운 의미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정신의 한없는 빈곤함이 찾아오게 되어 혼란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영혼의 생명의 자원이 없는 상태입니다. 잠시 육신을 사랑하고 세상에 집착해서 만족을 얻는 동안에 혹은 만족을 얻지 못해 그것을 찾는 동안에는 자신의 정신이 빈곤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정신이 빈곤함은 끊임없이 혼란과 고통으로 우리에게 경험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혼의 생명의 자원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은 역사적인 책입니다. 이 책은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이 책을 기준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봅니다. 우리는 흔히 계몽주의가 나오면서 과학적 세계관이 생겼다고 생각하나, (이 책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사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는 신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령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세계가 신이나 정령들에 움직인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관점이었고, 심지어 철학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에 철학자들은 논쟁 후에 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가기도 하였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당시의 일반적인 관점에 반하여 이 세계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엄밀한 법칙이 있어서 그 인과 관계에 의해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이론을 설파합니다. 정말 논리가 정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이성이 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1418년 수도원에서 발견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주고 서고 속에서 부스러져가던 책을 다시 출간하면서 엄청난 의식을 변동을 가지고 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런 과학적 세계관이 아닙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아, 인간의 비참한 정신이여, 눈멀어 버린 가슴(지성)이여! 얼마나 큰 인생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큰 위험들이 너의 모든 가엾은 (인생의) 시간들을 지나가는가”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첫째로, 이러한 과학적인 세계관을 믿지 못해서 신이나 정령들에게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로 해석될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과학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학들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이튜브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F22 전투기만한 빠르기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빠른 것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운전하기 피곤하고 나이 들어 운전하기 힘든 사람들은 빨리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좋겠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지팡이 짚고 덜덜 떠는 사람들도 버튼만 누르면 시골에 있는 집으로 바래다 줄 것이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고민만을 줄여줄 뿐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120세로 늘어난다고 했을 때, 또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었을 때 사람들이 고뇌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지 못해 고뇌하고 괴로워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어둠 속에 있다면, 그리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살 수 없어서 굶어 죽거나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물질주의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괴로워 하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극도로 극빈한 나라에서는 자살자가 많지 않습니다. 소득이 높아져 먹고 살게 된 사람들 속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도의 물질 소비를 누리고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북유럽에서는 행복하냐고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행복을 잘 못 느낀다는 뜻입니다. 좋다. 기분이 어떻다 등의 말을 하지 행복하다는 말은 소득이 낮은 나라에서 쓰는 용어라고 어떤 학자가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은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여기서 ‘프로스티테미’는 ‘덧붙이다’, ‘더 받다’는 뜻입니다. 존 오웬은 전집 제 9권 『유고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합니다.
“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 만약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이고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일치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란 무엇입니까. 마음이나 혹은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서로 갈등이나 모순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것보다 훨씬 진전된 것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평화라고 보는 것이 세상의 관점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는 단순히 하나님과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평화는 원래 그리스어 애이레네라는 단어로 샬롬과 동치어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고 그것 때문에 사람과의 평화가 있는 상태, 심지어는 자연 세계와의 평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목적과의 하나됨입니다. 이 세상에 혼자 살 때는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둘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 경우 그 사랑이 진심으로 우러나온 사랑이라면 서로 인생의 목표의 합치가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은 목표를 합치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어지거나 떨어지거나 갈등상태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목표가 녹여지면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외아들을 길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엄마는 이 아들을 정성으로 키우고 최대한 교육을 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합니다. 엄마는 이 아들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결국 엄마의 인생은 아들이 행복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되는 것으로 목표가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행복할 때 엄마는 아들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목표에 있어 하나님과 하나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을 때 모든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원하셨던 질서 속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뜻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께 잘하는 사람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시면서 이 세상의 선과 악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새 생명의 원리가 심겨집니다. 예전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원리입니다. 그 큰 힘이 나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굳이 다르게 애를 써야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가 우리 안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생명의 원리가 심겨졌지만 여전히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새 생명의 원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가면 강화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면 새 생명의 원리는 약화됩니다.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약화되면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나 부모가 놀음이나 외도 등 다른 것에 빠져 있다면 자식을 거의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 새 생명의 원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고 죄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려니”(행 13:22). 우리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다윗을 만나셨을 때 매우 기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나와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뒤따라오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애프터(beafter)’가 나오는데, ‘비애프터’는 ‘닮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넘어서거나 이탈하지 않고 정확하게 맞아서 그 마음에 분신처럼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신 이유는 다윗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과 어떠한 불일치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는 우리가 성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담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이 평화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없지만 가변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평화는 불변적인 동시에 실제적으로 그 평화를 누리면서 산다는 점에서 가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떻게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평화는 풍부해지기도 하고 감격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랄 때 엄마 (아빠)와 많은 관련을 맺습니다. 엄마 아빠는 변함없이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했을 때 속이거나 책망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는 관계가 소원해집니다. 아이들 자신이 부모를 슬슬 피합니다. 엄마 아빠는 아무 변화가 없는데 자신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멀어집니다. 결국 이것은 평화가 깨진 것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온전한 평화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는데, 그 평화를 누리면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은혜를 갈망하는 이유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평화와 그 평화를 이미 누리고 살아가야 할 실제적인 삶에 대해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행13:22)
앞에 부분을 보면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하나님과 원수진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평화를 계속해서 누리면서 살아갈 것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요구되는데,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순종의 삶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원리적인 평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동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갈망하는 바는 불완전한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실제적인 소원인데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그릇된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염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하는 신령한 염려들은 하나님을 더 믿게 만들고 더 순종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일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믿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육신적으로 염려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일을 하면서도 신령한 방식으로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팬데믹에 대해 설교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재난을 겪는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온전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믿음을 보여주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통해서 자신이 믿음이 없음을 자기가 직접 자신의 삶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난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과의 관계를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재난으로 인해 황폐해진 상황은 죄로 인해 피폐해진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게 해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의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그 하나님과 실제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삶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 새 생명 등에 대해 더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