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오늘, 염려하지 말라 2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녹취자: 조경훈
본문을 보면 우리의 염려가 대부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염려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매우 견디기 힘든 사람도 그 어려움이 오늘 끝난다면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까지 계속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겠습니까?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에서 염려하는 주체를 내일로 미뤄버리고 있습니다. ‘한 날에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에서 예수님께서도 너희에게 무슨 괴로운 일이 있느냐? 너희들이 나를 믿고 사는데 무슨 힘든 일이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한 날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한 편으로 인생에 대해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는 것은 첫 번째로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한들 그 키를 한 자나 크게 할 수 있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책에서도 밝혔지만 그것은 사실 키일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나오는 한 자가 큐빗입니다. 큐빗은 45cm쯤 되는데 어떤 사람이 ‘내 키가 왜 45cm나 작을까? 염려를 하면 내가 45cm 쯤은 더 클 텐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1900~1982) 이라는 아주 경건하고 박식한 주석가가 있습니다. 그분 책을 굉장히 애독했었는데 정말 굉장한 분입니다. 그분의 주석에 보면 합리적인 논증을 합니다. 누가 자기의 키를 45cm나 더 클 것이라고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어린애들도 섞여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인들인데 그런 식으로 자신의 키에 대해서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들이 ‘한 뼘밖에 안 남은 인생의 날인데.’ 이런 표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시간에 대한 개념을 공간 개념과 혼용해서 썼습니다. 키라고 하는 것이 키보다는 목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봅니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 번역이 그런 점에서 아쉽지만 번역이 완전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읽으면 성경이 더 은혜가 될 것입니다.
도표를 다시 보겠습니다. 하트 표시 안에 별, 오각형, 사각형, 삼각형, 원 많이 들어있는데 초콜렛 상자 같지 않습니까? 표현을 유아틱하고 재미있게 하려고 했는데 저것은 사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것부터 시작해서 부정적이고 나쁜 것 까지,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도형으로 만들어서 하트 주머니 속에 넣은 것입니다. 감정들은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쪽에 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다양한 선하고 악한 많은 감정들, 즐거움부터 시작해서 괴로운 것 까지 다양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게 한 사랑 안에서 자기질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살아온 날이 어쩔 수 없어서 미워하게 됐다고 칩시다. 여러분. 휴 잭맨(Hugh Michael Jackman, , 1968 ~ )이라는 배우 아십니까?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굉장히 성공한 배우입니다. 운동을 많이 하셔서 힘이 세신 건지 텔레비전 프로에 나왔는데 강호동이 씨름을 이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니까 강호동을 똑바로 선 자리에서 번쩍 들어서 땅에다 메쳤습니다.
키도 크고 호주 태생인데 자기의 지난 인생을 얘기하면서 너무 충격 받았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모님이 호주로 이민을 와서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어느 날 집에서 갔더니 엄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핸드폰도 없던 시대였는데 며칠 있다가 전보가 날라 왔는데 엄마가 ‘나 이제 더 이상 엄마 못하겠다. 가족들끼리 잘 살아라.’ 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때 휴 잭맨의 나이가 다섯 살쯤 됐는데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하고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아이들을 잘 돌봐서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엄마는 자녀들과 남편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재혼 후에 가족들과는 상관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저렇게 버림을 받았을 때 다섯 살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예를 들어 미운 마음, 충격 같은 것들이 쌓였다고 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때는 이것들이 마구잡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힘을 행사합니다. 무엇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아해도 될 것이 있고 좋아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곳에 가면 마약을 한 주사는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지정한 통에 버리라고 써 놓을 정도입니다. 마약을 좋아하게 됐다고 칩시다.
이런 것들이 기분에 따라서 마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많은 감정들이 있는데 이 안에서 통일적인 질서를 못 찾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그 질서를 통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희로애락도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이 안에서 질서가 잡힙니다. 물론 미움은 이 자리를 차지해라 하는 건 아닙니다. 사라져야 될 감정들, 남겨야 될 감정들, 미운 감정들을 사랑으로 작용시켜서 사람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선한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생명입니다.
부정적인 예화라 미안하긴 하지만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나 독일 사람들이 세균전을 계획하면서 세균을 가지고 사람을 마루타처럼 시험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이야기고 이미 물적 증거들이 남아있습니다. 전쟁 속에 깃들어 있는 광기, 제국주의 속에 깃들어 있는 미친 기운들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저히 감옥을 나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유혹을 해서 이 주사 한 대만 맞으면 내보내 줄게. 하면 그 사람은 집에 너무 가고 싶으니까 주사 맞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주사를 집어넣고 그 다음에 죽이는 주사를 다시 넣고 하면서 몸 잔체를 실험도구 삼아서 어떤 약에 반응해도 죽지 않는 내성이 있는 균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어느 몸에 들어가든지 간에 도저히 약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균을 만들기 위해서 온갖 억제하는 약들을 사용하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것들을 채집하고 배양해서 그것을 균으로 만들어 퍼트리는 것입니다. 세균은 생물학적인 존재이고 바이러스는 화학적인 존재라서 바이러스가 더 무섭습니다. 만약에 균이 살아남아 있으면 겪는 모든 것들을 통해 균 자신이 변하고 더 강한 쪽으로 발전합니다. 죽으면 끝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상황들은 즐거움도 주고 괴로움도 주는데 괴로울 때는 더 이상 살 힘이 없습니다.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는 것은 생명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그 생명으로 사랑의 질서들을 다시 잡으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해서 영혼에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온갖 어렵고 나쁜 일들을 겪게 됩니다. 사랑이 없고 사랑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수없이 내 마음 안에서 나를 일그러진 사람으로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원하는 삶을 살면서도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만드는 모순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좀 더 나가 보겠습니다. 또 하나는 기쁨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누구든지 간에 벗어날 수 없도록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선적인 행복관과 점적인 행복관입니다. 점적이라는 것은 시간이 고려가 안 된 것이고 선적이라는 것은 시간이 고려된 것입니다. A, B, C 라는 상태가 있으면 이렇게 연결되어서 어딘가로 가는 것이고 이것은 직선으로 그 아래로 끊어지는데 둘 사이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선의 개념이고 이게 점의 개념입니다.
쾌락주의자들은 어떨 것 같습니까? 점적인 행복관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 선적인 행복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도 보면 추수를 해서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다고 고민합니다. 선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하지?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창고를 크게 짓고 모든 것을 쌓아 두면 내가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잔치를 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년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점적인 행복관도 선적인 행복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적인 행복관은 극단적으로 보면 행복한 상태를 미래의 관점에 두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22절이 점적인 행복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낳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목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 3:22).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고 하는 인생에 있어 거대한 담론을 일삼는 이유는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 그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인류의 고민은 시간의 고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왜 행복하지 않을까? 도대체 왜 사는 게 의미가 없을까?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인생이 이게 다가 아니라 영원 이편에서 시작해서 영원 저편으로 가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객관화시켜서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자신이 행복해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죄가 되고 이웃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이 돼서는 안 되겠지만 그 안에서는 자기가 즐거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입니다. 불만족한 왕보다는 행복한 왕궁의 청소부가 훨씬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선적인 행복관으로 가면 같은 전도서인데 2장 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앞에 나오는 점적인 행복관이 자신의 만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면 뒤에 것은 의미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꼼지락거리며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도대체 이게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아끼던 내 몸과 내 청춘도 가는 것이구나.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할리우드 스타들 중에는 특히 젊어서 예뻤을 때 화면을 가득 채웠던 여배우들이 나이가 들어서는 절대 화면을 안 비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젊었을 때의 기억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간직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많은 것을 누리던 사람이 죽었다 혹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대부분 미워하지 않게 되지 않습니까? 제 경우는 그런 것 같습니다. 김지하씨도 감옥에 있을 때 그런 글을 썼었는데 박정희 대통령하고는 정치적인 대적 관계에 있었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는데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모든 미움이 사라지더라고 합니다. 그분은 그것을 생명의 신비로 설명을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사람이 살아있으니까 미워하는 거지 죽은 다음에 무엇을 미워하겠습니까?
대만 목회자들이 왔었는데 그들이 선교 나갔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도하고 붙어있는 파키스탄 국경 쪽으로 매년 선교를 나가는데 94살 먹은 할아버지를 전도해서 그리스도인이 됐는데 100세 가까이를 사셔서 어느 날 방문해서 오래 사시니까 좋은 점이 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있다고 하셔서 뭐가 좋으냐고 물으니까 ‘내 인생에 마지막 원수가 작년에 죽었어.’ 라고 말하더랍니다. 억울하면 오래 사셔서 원수들이 다 죽는 것을 보시면 행복할까요? 미리 용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니까 아무것도 아니고 놀라운 것은 이 두 개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두 개를 같이 이야기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아라. 그것이 선적인 행복관이라면 오늘을 염려하지 말라. 오늘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라. 하는 것은 점적인 행복관입니다. 진정으로 참된 점적인 행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선적이지 않을 수 없고 점적인 행복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단어 ‘카키야’ 는 ‘카코스’ 에서 옵니다. 나쁜, 악한, 괴로운 재난, 고통, 괴로움 등의 뜻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악이 있으면 선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즐거운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 일어나지 않고 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책 속에서 제가 예를 들었는데 아이를 다섯 명쯤 놓았고 다 어린데 남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졸지에 능력 있는 남편을 의지하면서 세상물정도 모르고 살림만 하면서 살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현실을 감당할 수 없으면 감당할 수 있게 현실을 변화시키든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면 그것을 감당할 힘과 용기를 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휴 잭맨의 얘기도 나왔지만 도저히 나는 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면 다섯 명을 다 고아원에 보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좋은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한테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자신이 도저히 생명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감당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우리가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입니다. 정신의 크기가 그것밖에 안 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한 후 자신의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매일 술을 마시면서 왜 남편은 그때 죽었을까? 왜 그 남자는 무책임하게 우리를 버렸을까? 를 생각합니다. 무책임하게 죽는 사람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책임에 대한 논의에서 훌쩍 날라가 버린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책임이지 시체한테 가서 무슨 책임을 묻겠습니까? 맨날 술을 먹고 아이들은 밥도 못 먹고 이리저리 해갈을 하는데 그러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면 뭐가 좋은 게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남편이 죽은 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섯 애를 키워줄 마음씨 좋은 남자를 만나든지 혼자 살든지 아이들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보낸다든지 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적 침체의 지름길입니다. 어떠한 감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시간을 되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그 사람하고 헤어지는 건데 왜 사귀어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이게 뭡니까?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투덜거리면 안 됩니다. 깨끗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당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들을 길러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더 심오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저녁 때 남편은 안 들어옵니다. 매달 통장에 돈도 안 들어옵니다. 받은 퇴직금과 남아있는 저축한 돈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애들 밥이나 해 주고 살아도 살 것 같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고 이거 가지고는 석 달도 못 버티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자기 일을 가져야 됩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과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나쁘고 악하고 괴로운 일을 만나다 보면 선한 일도 만납니다.
인생의 날들에 있어서 괴로움을 안 겪을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생각을 빼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나에게는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충만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도 괴롭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그런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슬프고 아픈 일이 왜 일어났을까를 생각하면 머리를 벽에다 쥐어박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 그럴 수도 있다. 하는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진리가 없는 어두움입니다. 어두움과 악, 혼돈 속에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참된 주체성이 생기게 됩니다. 주체성은 자기 스스로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함으로써 인생에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체성입니다. 주체적이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예전에 아이들이 화투치는 것을 못 치게 했는데 화투만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오락이나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과도하게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리콘벨리에 있는 CEO의 자녀들은 아이패드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생존경쟁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창의적인 생각이 난다고 하는데 스마트폰만 안 한다고 창의적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어마어마하게 창의적이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약물이나 오락, 취미 같은 것들에 과도하게 빠지게 될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두순이 출소한다고 나라가 난리인데 무슨 법이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위험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인권이 있으니까 석방되는 것은 법으로 어쩔 수가 없는데 이런 상황이 되다 보니까 참 어려운 것입니다. 한 사람이 쾌락에 탐닉할 때 인간이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어거스틴에 의하면 학문도 똑같이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지식과 사랑은 같이 가야 된다거나 그런 비슷한 이야기도 안 합니다. 어거스틴은 sns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지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정보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라 함은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을 잘 살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식이 지식입니다.
주체성은 순수한 자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깊이 심취해 있는 것은 다들 알고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책이 될 텐데 삼위일체에 대한 주석 책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안 읽습니다. 오늘도 미국에 있는 교수하고 통화를 했는데 교수인데도 아직 한 번도 못 읽었다고 해서 한 참 동안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려운 책인데 저는 너무너무 행복하게 그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이 15개의 책으로 되어 있는데 어거스틴이 젊어서 시작해서 늙어서야 글을 마치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30년 정도를 쓴 것으로 계산이 나옵니다. 그 책을 몇 달 만에 읽어서 어거스틴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는 저술을 했고 나는 이해를 했습니다. 권 당 450페이지씩 총 네 권 정도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주석 책을 쓰고 있는데 일 권의 절반 정도를 마쳤는데 기회가 되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안 읽힌 책이 삼위일체 책입니다. 목회자들도 거의 안 읽는 책입니다. 어렵다고 소문난 책을 친절하게 해설집을 만들어서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 제 저작의 목표입니다. 일 권의 절반 정도를 썼는데 11월까지는 마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삼위일체를 읽으면서도 많이 눈물을 흘렸던 것 중에 하나가 어거스틴의 생각은 사람들의 사변을 위해서 삼위일체를 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썼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책에서 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겠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참 된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제 산책을 하면서 한 생각이 길가에 보면 이름 모를 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문학적으로 묘사할 때 ‘가을이 가까워 오는 들판에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하구나!’ 라고 하는데 이름 모를 꽃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짜증나는 표현입니다. ‘이름 모를’ 이라는 하나 속에 고유성을 상실한 채 다 매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서 묻습니다. 너. 이름 뭐니? 그러다가 이름을 찾아보면서 아. 너. 제비꽃이구나! 할 때 그 꽃은 제비꽃이 되는 것입니다. 좀 철학적입니까? 우리가 그 꽃에 다가가서 이름을 불러줄 때 그 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이름 모를 꽃이 아니라 그 꽃이 되어서 자기 고유의 독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의 최고의 스승인 어거스틴을 통해서 몰랐던 것을 깨달았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깊은 생각을 기울이지는 않고 내 밑바닥에 있었던 것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듯이 그가 깨닫게 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수면 위로 부상해서 나의 감정과 인식의 막들을 건드렸을 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까지는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인류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무개야! 하고 불러주셨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에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가 인류 중에 한 사람이 아니고 이름 모를 인간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주체성을 가진 바로 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받음으로써 주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그러한 주체성을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사랑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엄마가 끔찍이 자기 자식 하나를 사랑합니다. 그때 그 아이는 자존감도 높습니다. 문제는 그 자기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공평한 정체성을 못 갖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이 편집증적이고 질서가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인생을 참 힘들게 삽니다.
어떤 사람이 얘기하기를 자기는 결혼을 하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대학 다닐 때까지 ‘에이.’ 하고 주저앉아서 두 발을 구르면 엄마가 다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런 주체성을 갖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주체성을 가짐으로써 어떠한 자기 사랑의 지배도 받지 않은 채 자신답게 느끼고 행동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통해서인데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참된 주체성을 가지고 나답게 생각하고 나답게 느끼고 나답게 결정하면서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까 줄리스킨 교수하고 대화했던 화면을 띄워 줄 수 있습니까? 내가 오늘 내용에 관한 어거스틴의 명문을 읽어드리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삼위일체 8권 9장 13절에 나오는 엄청나게 은혜 받은 구절이었습니다. 기존에 나와 있는 번역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가 다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만큼 그 형상을 확실하고 평온하게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로 여기서 ‘확실하다.’ 라는 단어가 중요한데 남의 개똥철학을 물려받고 누구의 말에 휘둘려서 그 사람을 추종할 때는 확실하지 않고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상’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그 형상을 닮은 인간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인간 자신의 형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평온하게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라고 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보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악인이라도 양심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볼 때 결코 평온하지 않습니다. 평온한 게 아니라 갈등하면서 그 형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악한 일을 했는데 어떻게 네가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느냐?
제가 설교시간에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공범들 중 한 명이 암에 걸려서 죽기 3일 전에 경찰을 오라고 해서 다 불었습니다. 뭐가 시켰을까요? 그 형상을 희미하게 보기는 봤는데 평온하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리라.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평온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의에 불변하는 형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 결코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은 영원한 형상을 보게 되면서 그 때 비로소 자기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마땅히 이 형상을 따라야 한다. 라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다시 한번 읽어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만큼 그 형상을 확실하고 평온하게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의의 불변하는 형상을 보게 되고 이윽고 사람은 마땅히 이 형상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괴로움은 하루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르케톤’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만족스럽다. 충분하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 고통을 받으면 그것이 내일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 때문에 더 많이 고통을 받지도 말고 내일이면 닥칠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늘 괴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살면 우리의 인생 중에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게 결국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찬양) 나는 갈 길 모르나 주여 인도하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나님 앞에 해 보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복음을 통해서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힘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미래의 궁핍 때문에 고통 받지 않으려면 미래를 위해서 저축을 해야 하고 건강하게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하고 노력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한마디로 얘기해서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일어난다면 일어나라고 해라. 괴로운 인생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무슨 더 어려운 일을 당하겠느냐? 내가 견디며 살아야지. 하는 담대한 마음을 가집니다.
코로나 사태인데 1단계에서는 사람들이 불안해 하게 됩니다. 인간은 에너지가 모자라서 오래도록 불안해 할 수 없습니다. 그 불안이 해소가 안 되면 우울감으로 바뀝니다. 우울감이 꽉 차서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분노로 바뀝니다. 마스크 쓰라고 했더니 사람들을 패고 폭력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왜 일어납니까? 그것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통화하다 들으니까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하는 사건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단순한 의학적 방역이 아니라 심리 방역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을 많이 동원해서 미리 상담하고 교육해서 마음을 극단적으로 안 가게끔 조절해 줘야 합니다. 지금 통계를 보면 코로나 상황이 있고 1년 정도 있은 후부터 계속해서 자살 같은 사건들이 꼬리를 문다고 합니다. 우리도 9개월 정도 지났는데 벌써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기도를 해줘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낮고 미약한 인간인지를 이런 재앙을 통해 보고 하나님 밖에는 내가 사모할 자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거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한 권을 책을 마치니까 기본이 좋으시죠?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고 조급하게 먹지 마시고 1년 동안은 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할 일을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제가 삼위일체 책을 쓰고 있는데 깊이 감명을 받은 음악이 있습니다. 볼쇼이 합창단이 연주한 린스키 코르사코프의 ‘더 파더’라는 음악입니다. 엄청 감동이었고 들려준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히 다시 염려 책을 펼치고 첫 장부터 천천히 한 번 더 읽으신다면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