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웃기는 심포지엄
-하나님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습니까?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요 2:16)
녹취자: 이재호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겨울에 시작했는데 이제 벌써 여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오늘 아주 더웠죠? 드디어 오늘 제 9장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종강 마지막 공과 공부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온라인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이 공과 공부 종강모임에 많은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오늘 마지막 과를 공부하면서 이 공과를 마치면서 소감 인터뷰한 영상이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 번 보시고 시작하겠습니다.
(인터뷰영상)
장년 1교구 김성삼 집사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목사님의 저서의 모든 장은 제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는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른 땅처럼 메말라 있는 저의 영혼에 주님의 만져 주심으로 다시 한 번 은혜의 단비가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저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원합니다. 이전에는 한 주의 삶을 위해서 예배를 준비하고 드렸지만, 이제부터는 예배를 위해 한 주의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 예배 중에 만나 주셨던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여 저의 모든 삶이 다시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장년 1교구 노혜란 집사
이번 공과를 통해 제 자신을 많이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왜 예배의 감격이 없었을까?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을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지 못했던 그런 순간들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그런 노력의 부재와 또 하나님과의 친밀하지 못한 관계에서 기인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못하고 살았던 그 삶들을 죄로 여기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젠 어린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으로 또 하나님 앞에 기쁘게 쓰임 받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장년 1교구 이은하 집사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공과를 배우면서 예배와 삶은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과 어제와 별다를 게 없는 삶을 사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현실의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히며 한없이 가난해지기도 하지만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또 다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며 삶에서도 더 진지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비록 온전한 성도의 삶의 모본은 아닐지라도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곁에 머물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삶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앞으로의 삶도 참된 예배자로서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소망합니다.
장년 1교구 박종진 집사
팬데믹으로 인하여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예배의 소중함과 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는 신자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있기 위해서는 기도, 말씀생활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게으른 저의 모습이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예배를 통한 영혼의 안식과 삶의 경건을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영상 NG까지 보았습니다. 댓글 이벤트 질문이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책을 펼치셔서 본인에게 가장 좋았던 한 대목, 최대 3문장까지 쪽수와 함께 올려 주시고 어떤 점이 좋으셨는지를 간략하게 적어 주시면 됩니다. 그냥 좋았던 문장만 올려 주셔도 응모한 것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질문 이벤트2 10명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예감빠’를 삼행시로 지어 주시면 20분에게 열린카페 기프트카드 빵도 드시고 커피도 마시라고 구역원들하고 같이 마시라고 이만원권 드린다고 합니다. 많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공과를 나가는 동안에 뭐가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제 9과 웃기는 심포지엄입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 본문인데 우리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구약의 안식일의 개념은 구약 안에서도 창조에서 구속으로 이행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창세기 2장 1절과 2절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그리고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시니라’ 그러니까 6일 동안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 그 다음에 마지막 하루 아무 일도 없는 안식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명기로 넘어오면 출애굽기에도 나오고 신명기에도 나오는데 신명기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하나님이 창세기 2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6일 동안 창조를 끝내시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고 했기 때문에 십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나오는데 신명기 모세의 유원적인 설교입니다. 여기서 일곱째 날에 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이렇게 나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 인도하여 내었나니 안식일을 지키라’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도 창조의 개념에서 구속의 개념으로 이렇게 이행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구약의 안식일이 십계명에 나오지만 이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는 신학적인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안식일은 창조를 중심으로 안식일이 설정되는데 신약의 주일은 구속을 중심으로 다시 그 안식일이 주일로 신학적인 전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구약에서는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안식일이 이루어지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주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중심은 율법이지만 그러나 구속을 통해 율법이 성취되는 것으로서의 주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편의가 아니다. 그래서 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주일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라고 본격적으로 호칭되시는 것, 그러니까 우주적인 통치자로서의 주님이라고 인정받으시는 것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유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주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이다. 이것이 신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주일의 개념의 기본 골격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따라서 구약에서 율법을 따라 지키는 안식일이 무조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면 이 주일은 그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안식을 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지고 영적인 은혜를 받는 시간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000(11:04)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주일날 특별히 하루를 구별해서 영혼이 은혜를 받고 살아나는 날로 삼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예배를 통한 기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기쁨이 없으면 주일이 살아날 수가 없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신자의 의무다. 이것은 율법 그 이상이어야 한다.
이제 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주님이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지적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시체를 이렇게 눕히고 그 다음에 이 문을 하얗게 칠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덤처럼 안 보이게끔 미관상 색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문을 보고 깨끗하다 생각했는데 사실 이 속에는 시체가 누워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입니다. 썩으면서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 겉모습은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에 순종하는 듯한 가식이고 그들의 진실은 이 안에 있는 시체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예수님의 비난의 표적은 회칠한 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회칠한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회칠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를 아주 지저분하게 색칠을 해서 문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시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는 그런 뜻입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이 무덤의 비유를 통해서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속은 탐욕으로 가득하고 겉은 경건한 척하는 그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속이 탐욕으로 차 있는데 겉은 경건할 수 있습니까? 경건한 듯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식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밥 먹는 외식이 아니라 가식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결국은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의도 자체가 하나님과는 상관없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데 경건한 척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경건한 척하는 것을 다 때려 부수고 막 살아라 그 뜻이 아니라 이걸 고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라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썩은 시체와 같은 내면의 죄악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무지에서 깨어나라는 것이고 위상과 거짓된 삶을 버리라는 것이고 그래서 겉과 속마음이 일치하는 거룩한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모습에 어울리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경건이 참된 경건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왜 이 말씀을 강조 하냐면 이런 모순이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목양하면서 있었던 일인데 ‘왜 교회 안 나왔냐?’ 그니까 죽어도 나오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나와 봤자 내 마음은 딴 데 가 있을 거고 그러면 결국 하나님은 내 예배를 받지 않으실 텐데 그러면 결국은 내가 교회에 오나 안 오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면서 인천으로 놀러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워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 어떤 일이 있어서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고 갈들이 있어도 집에 들어오고 ‘아무개야!’ 라고 부르면 ‘네, 어머니’ ‘네, 아버지’ 이렇게 하고 살아야지 ‘당신들이 뭔데? 나 이 집구석에서 안 살 거야! 난 당신들하고 이제 상관없어!’ 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면 그건 부모와의 연을 끊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속적인 말로 막본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선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의 말하자면 신앙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이거는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정말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것이냐.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일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몸과 마음으로 주일을 보낼 수 있도록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잘 준비하고 방해받지 않고 주일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영적으로 은혜를 받고 섬기고 그러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딱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우리는 항상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주일만이라도 주일은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더 많이 기도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꽉 채운다면 거기에서 받은 은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나머지 6일 동안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 보면 이렇게 설교자가 마음에 불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가대가 찬양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인 특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예배당이 가득 찰 때 주일을 기다리는 신앙이 될 때 이 때 이 교회는 진짜 살아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의 신앙은 주일을 어떻게 지내는지 그 주일에 예배의 감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감격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것이고, 이 은혜는 결국은 사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가 사랑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달음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충만해질 때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주일 동안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살아온 일주일이 예배의 정신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아주 구김이 없는 기쁜 마음으로 가득차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배는 삶이 있는데 예배는 삶을 가능하게 만들고 삶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다 온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하면서 여기에서 하나님 은혜와 사랑이 중심이 되어서 이렇게 살아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아픈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주일을 아무렇게나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유익을 거의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무기력해져서 월요일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일주일의 끝 날이 아니라 일주일의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안식일은 그 것이 끝 날이었지만 주일은 이게 첫 날입니다. 첫 날 주의 날을 지킴으로써 나머지 6일 동안을 진짜 주님의 날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 아닙니까?
어제 교회학교 교역자들을 만났는데 요새 고등부 학생들이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가지고 공과를 하는데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회심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또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은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예배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신들이 이전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예배자 다운 예배자로 살지 못했는지를 반성하면서 새롭게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누구냐?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사랑하냐? 예배드리는 태도로 보면 압니다. 예배드리는 태도를 보면 예배 시간에 산만하고 말씀에 집중하지도 않고 찬양도 모깃소리만 하게 딴 생각 하면서 겨우겨우 따라 부르고 기도 시간에 눈 감고 입 꽉 다물고 있고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일주일을 못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가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겠습니까? 무엇으로서 일주일 동안을 이기면서 살아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예배자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결국은 그렇게 살면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지 않으면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이유도 결국은 마지막으로 이 땅의 모든 인류를 예배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 마지막은 온 인류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감격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들이 이기면서 일주일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책에 이미 나오지만 에드워즈의 <a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s> 라는 부흥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다섯 살이 채 안되었습니다. 거기는 만으로 치니까 4년 몇 개월 된 아이였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5살이 채 안된 아이인데 그 아이가 부모와 함께 에드워즈 목사님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만 갔다 오면 매일 물어보는 것입니다. ‘엄마, 몇 밤만 자면 주일이야?’ ‘왜 그렇게 교회 가고 싶으냐?’ 그랬더니 ‘그날은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그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쓰는 용어는 다 모르지만은 그것이 분위기로 와 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회심한 아이들에게 이 진리에 대한 민감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아기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회심하고 난 다음에 저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시편 126편 아마 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그 때의 감격을 노래한 것 같습니다.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습니다.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그래서 이렇게 큰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결국은 이런 감격, 이런 깊은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하는 그 놀라운 감격이 사람들이게 충만하게 있을 때 그 때에 그 우리가 불꽃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마음에 불꽃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불 붙여져서 사람들이 이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마음에 불이 붙으면서 큰 은혜를 받으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거룩한 주일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불꽃처럼 드려지는 예배로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지고 한 주 빠졌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나머지 6일을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 제가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인생에서 딱 30분만 시간이 남았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가족들에게 유언도 다 끝냈습니다. 다 얼굴 봤습니다. 마지막 30분, 숨 거두기 전에 의식이 있는 30분이 남았습니다.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텔레비전을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카드 한 판 합니까? 아니면 온라인 게임 한판 하고 죽습니까? 아니면 빈대떡이나 한 장 부쳐 먹고 죽습니까? 나 같으면 예배 드려 달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려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운 식구들이 함께 만나서도 예배를 드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헤어질 때도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감격이 있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닐 때 있었던 일인데 다른 부처에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간증을 하러 왔습니다. 이 사람은 경비행기를 타고 일을 보다가 아마 공군 계통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기억을 하는데 자기의 옛날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비행기가 추락을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이 사람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깁스를 한 채 거의 6개월을 병원에서 있었고 몇 달 동안은 아예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6개월 만에 깁스를 다 풀지 못한 채 목발을 집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예배당에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는데 그렇게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는 이해가 갑니다. 그 죽을 고비를 넘겨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놀라운데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이렇게 원격으로 예배를 드린다든지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축을 받으면서 그렇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그 때에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저도 군대에 갔다가 다시 귀향 통지를 받고 13일 만인가 교회로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너무 그립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그 은혜가 있는 예배, 그 예배당의 분위기, 그렇게 그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공부한 책은 제가 1997년도인가 그 때 쓴 것을 완전히 개정해서 다시 쓴 책이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썼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책을 교과서처럼 가까이 두고 예배를 좋은 예배자로 일평생 빚어져 가고 십년보다 더 나은 예배자가 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통해서 참된 예배자로 돌아가라고 여러분들이 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종강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음 주부터 공과책은 ‘자기 깨어짐’인데 ‘자기 깨어짐’ 하기 전에 우리가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설교가 어떤 사람은 그렇게 듣지 못했겠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와 닿은 설교였고 저 역시 그 설교를 하고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체력적으로 한 달 이상 체력이 복구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아마 개척하고 나서 설교 준비한 것 가운데 가장 많은 심열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보통 20시간 걸렸습니다. 그리고 진짜 많이 많이 준비한 설교는 한 30시간 제가 소모했으니까 일주일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설교 준비만 할 정도였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구에서 그냥 하기에는 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설교 속에서 못한 이야기도 하고 여러분과 소통하기 위해서 설교 청취 스터디를 6번에 걸쳐서 제가 직접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듣기 좋게 하려고 한 45분 정도로 축약해서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물론 좋겠지만 긴 설교를 좀 빨리 속도를 해서 다 들으시고 축약된 설교를 한 번 더 들으시면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 마음을 크게 깨웠던 시리즈였기 때문에 여러분과 한 번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말씀으로 한껏 시름을 하고 거기서 여러분들의 삶의 소망을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3주 후에 만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