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기부인
녹취자: 김재혁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면 아주 상쾌한 가을이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지만 여름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더 복된 날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희망차게 오늘 하루도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자기 깨어짐 제6과 자기부인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이 ‘부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 ‘부인’이 무엇인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자기부인은 자기에 대한 비판과 의지적 거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부인은 결국 자기에 대한 비판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것에 대한 의지적인 거부, 이것이 결국은 자기부인의 실체입니다. 자기부인은 자아에 대한 비판과 의지적 거부로 이루어집니다. 자기부인이 크게 이제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측면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내재하는 악한 경향, 여기는 당연히 욕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욕망 자체가 경향성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 그건 잘못됐다’ 라고 비판하면서 그다음에 ‘나는 그게 싫다’라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자기부인인데 그 소극적인 측면으로서는 자기의 악한 경향을 부인하는 것이라면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면 이제 이렇게 웅덩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렇게. 이것을 이제 퍼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깥으로 덜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에 소극적인 측면이라면 여기를 다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이게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떠난 것을 사랑하는 나 때문에 결국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사랑을 비워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채울 때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기뻐하시는 일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 자기부인이 없을 때 그때 인간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결국 부패한 사랑에 종속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자기부인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은 자기를 부인하고 마땅히 되기를 원하시는 나를 시인하는 그 삶의 연속이 신자의 생애가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자기부인에 대한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부인이 결국 그 무엇으로 이루어진다고 그랬습니까? 자아에 대한 비판과,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가진 그릇된 욕망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시작이 두 자아 간의 대화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시편 42편에서 찾았습니다. 42편을 찾았는데 이게 지금 시인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종의 두 당사자의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영혼이 둘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소망을 가지고 찬송합니다. 이게 그러면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게 모두 시인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마음이라 이런 뜻입니다. 근데 이렇게 상반된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믿는 그것으로 가득 차지 못한 데서 오는 일종의 결함의 결함입니다, 결함. 우리가 예를 들어서 몸을 이렇게 정상적으로 늘 이렇게 움직이면서 하는데 갑자기 여기에 그 쥐가 납니다. 그러면 손이 막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막 이렇게 쥐가 나서 이렇게 비틀리거나 아니면 당겨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펴려고 해도 이게 마음대로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게 내 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것도 내 몸인데 무엇인가 그 이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상이. 그래서 늘 내 뜻대로 움직이던 나의 손이 쥐가 나서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이 두 개라기보다는 내 몸에 이상이 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시 도표로 돌아가 보시면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소망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데, 그리고 만약에 그 건강한 경건 생활을 하면서 믿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으면 이 정도 어려운 일에 이렇게 낙심하거나 불안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이제 일종의 영혼이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사람이 특별히 죄에 빠졌다기보다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런 어떤 자아의 분열 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무엇이냐 하면 경건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느냐? 이제 낙심하고 불안하는 자를 객관화시켜서 남처럼 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찬송할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크면 결국은 이 마음도 변하여 찬송하는 마음으로 바뀔 것이고, 반대로 만약에 이게 크면 결국은 소망을 해서 찬송하던 마음도 낙심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이에 긴장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이런 위기에서 낙심하고 불안한 것을 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소망을 갖고 찬송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 그게 이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경험 여러분들 있으십니까? 한 번 구역이나 순에서 같이 한 번 나누어 보십시오. 그러면은 이렇게 두 마음이 갈등하던 때에 분명히 오고 가던 대화가 있을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시련 앞에서 낙심을 한다든지 할 때 오고 가는 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대화에서 마지막에 주도권을 갖고 이기는 그쪽으로 우리의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생각보다도 감정에 많이 지배를 받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 할지라도 누군가가 삶에 좀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하면 금방 솔깃해서 ‘아 그렇지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거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살아야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듯이 결국 무엇에 의해 내가 설복되느냐에 의해서 내 마음의 결정이 좌우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낙심되었을 때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희망으로 인도되는데,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데 낙심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면 희망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죄인에게 희망을 주고 또 고난을 받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격려함으로써 소망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자아의 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때가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신의 의지를 따르게 됩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다음 보겠습니다.
이제 자기부인의 성격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제 죄의 확신에 기초를 해서 죄의 확신에 기초를 해서 그 미래의 가치를 현재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성격이에요. 무슨 뜻이냐면 지금 이제 이렇게 이렇게 뭔가 세상 행복에 취하고, 그다음에 분노하고 게으르고 그다음에 교만합니다. 이게 지금 다 이제 이런 마음 때문에 과거에 뭔가 잘못을 한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서 지금 지금 기도하고 있다면 어쨌든 이것들은 모두 다 과거에 일어난 일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죄에 대해서 확신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회고적인 사실을 현재로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 진짜 요즘 내가 너무 게을러 게으르게 살았어. 세상을 너무 사랑했어. 그다음에 교만했어. 내가 너무 작은 일에 분노했는데 사랑이 없기 때문이야” 근데 이렇게 과거에 일어난 회고적인 사실을 현재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 사랑의 경험과 회개의 경험이 아주 놀라운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가지고 있냐면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데 이미 오래전에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생각이 나면서 지금 내가 방금 지은 죄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한 이십여 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어떤 한 형제가 예수를 우리 교회에 와서 믿게 되었고, 어머니를 전도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이제 신방을 갔습니다. 신방을 갔는데 이분은 회개 중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많이 받고 그렇게 회개를 했는데, 그때 연세가 제가 보기에는 60대쯤 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 대화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어쩜 그렇게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자기 결혼도 하기 전에 처녀 때의 일인데 그때 그 잘못했던 일까지 다 생각이 아주 새록새록 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게 하시더라 그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신앙을 받아들이시던 분이었는데, 그것은 뭘 보여 주냐 하면 이렇게 회고적인 사실을 현재로 끌어오게 만드는 그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잘 보십시오. 이러고 이러고 살 거 아닙니까? 분노하고, 세상 사랑하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이게 이렇게 여기는 현재까지 왔는데 이게 이게 미래로 전망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실제로 이 사람이 그 마음으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생각이 안 떠오릅니다. 이렇게 살면 결국은 나중에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고, 죄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앞으로 일어날 전망적인 사실을 이렇게 끌고 와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게 불가능하다 이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작용이 이미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결코 이런 상태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기부인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현재에 있는 이 죄가 주는 기쁨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것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현재로 끌어오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현재로 끌어오면서 결국 자기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 내 욕망을 따라서 살아서는 내가 안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죄의 확신에 기초해서 미래의 가치를 현재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의 성격은 이제 크게 세 가지예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환경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짓고 불순종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자기부인의 가장 중요한 성격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이것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중독 같은 데 빠지면, 뭐 도박 중독에 빠졌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이제 비유를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도박에 빠졌습니다. 도박에 빠졌는데 내가 통제가 안 됩니다. 통제가 안 되는데 옆이 옆에 줄이 하나 달려 있습니다. 이 줄을 잡아당기면 그러면 내가 이렇게 도박을 하던 컴퓨터가 아래로 덜컹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면이 사라지고 컴퓨터가 땅으로 떨어져 버리면 계속하던 도박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도박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의지가 있는 동안에는 이 줄을 안 잡아당긴다는 것입니다. 안 잡아당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 한편으로는 이 도박의 끝이 매우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을 알겠는데, 그런데 싫어하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기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죄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지금 아프카니스탄 미군이 철수하고 이제 완전히 그 나라가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어제 엊그제 신문에 나왔는데 비참하답니다. 그 뭐냐 하면 동아일보인가에 크게 나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절망적이고 그 비참하니까 마약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그 마약의 생산지랍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85%가 거기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굉장히 싼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페트병에 구멍을 뚫어가지고 개하고 둘이 그것을 뒤집어 쓰고, 그 다음에 사람이 마약을 개한테 불어 넣으면 이 개도 마약에 취하는 것입니다.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고. 사실은 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제가 지금 마약을 끊을 수 없습니다’라고 그렇게 신고를 하면 병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같은 나라는 마약 정책에 있어서 성공한 나라인데 그곳에는 마약 상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 병원에 찾아가서 자기가 마약 중독이 있다고 신고를 하면 마약을 줍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하냐면 엄격한 의사의 처방을 따라서 관리를 받으면서 마약을 서서히 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기 발로 걸어가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나를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것을 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즐거움도 주니까. 그러한 애매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부인할 때가 되면 환경을 거부하게 됩니다, 환경. 이것이 진정한 자기부인의 모습입니다. 환경을 거부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이제 속박을 거부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죄의 즐거움보다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 죄가 주는 즐거움으로 속박을 받기보다는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라는 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그 두 가지를 같이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질서를 따르는 습관, 그러니까 몸에 밴 예절 이런 것과 함께 자기가 속박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행복을 함께 가르쳐야 됩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가 어떻게 책임을 동반하는지를 가르칠 때 그 아이가 건전한 시민으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 자유를 많이 주십시오. 그 대신 그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반드시 책임을 가져온다, 반드시 책임이 동반된다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엄중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지는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다음에 이제 독립의 거부입니다. 이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싫다 이게 이제 자기부인의 성격이에요.
그다음에 이제 거부하는 의지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걸 보여주는데. 우선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죄의 속박을 받고 있지만 자기가 속박받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왜? 죄가 지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속박받는 걸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순간에 죄의 즐거움이 다하고 나면 자기가 죄의 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속박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속박의 불편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게 철장 안에 사람이 갇혀 있을 때, 그러니까 철장 안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면 속박을 안 느낍니다. 우리가 지구에 살고 있어서 답답합니까? 속박을 느끼십니까? 우주의 별이 한두 개가 아닌데 갑갑하게 콧구멍만 한 저기 지구에 갇혀서 내가 이러고 사나, 저는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왜냐하면 콧구멍만 한 지구인데 아직 못 가본 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이제 우주를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참 답답한 것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화성에도 가고 싶고 뭐 달에도 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속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나면 그다음에 ‘내가 이렇게 갇혀서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다’라는 것을 겪게 됩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면서 이제 자유를 갈망하게 되면 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참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속박된 것이 하나님이 가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죄 때문에 스스로 갇힌 것입니다. ‘이것이 나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참회를 하게 되고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되면서 이제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면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현재적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기본적으로 자기부인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없이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더 쉽게 얘기하면, 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현재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 사랑은 아주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자기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끊임없이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배신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혼인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그렇게 해봐야 결국 하나님과의 불화를 가져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것이 컴파스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컴퍼스의 중심을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확장해 나갑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그다음에 나의 가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불행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외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고 싶고, 노동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노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결국은 이 두 원이 이렇게 해서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 사랑을 따라 사는 것만큼 하나님 사랑으로 따라 사는 것을 하나님 사랑을 따라 하는 거를 파괴해야 되는 것입니다. 파괴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파괴할 때 제일 직접적인 피해자는 누구라 그랬습니까? 본인 자신입니다. 보면 본인 자신이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그렇게 살면 결국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은 삶의 허무와 영혼의 고통입니다. 보면은 허망한 사람들이 이제 그런 사람들인데, 이제 젊은 나이에 이제 자기 성격을 못 이겨서 가족들에게 함부로 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이제 외도도 합니다. 사실은 짧으면 10년 한 20년 지나간 다음에 보면 사실 바보 같은 짓을 한 거라는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아이들은 다 커서 아이들과 화목하게 가정을 이루면서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제 한순간에 자기 사랑을 못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은 버리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을 붙들면서 자기 사랑으로 산 것입니다. 마지막에 찾아오는 건 삶의 허무와 영혼의 고통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너무나 쉽게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깊이 인정하고,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10년 20년 후의 미래에서 보면 어떤 선택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제 자기부인의 두 측면이 있는데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부패한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추론하고는 다릅니다. 부패한 이성의 추론의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그래서 뭐라 그랬습니까? 곳간을 더 넓게 짓고, 그리고 내 영혼아 함께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부패한 이성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이냐 하면 정당한 이성의 추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는 추론하고 그다음에 이성의 능력으로 입증할 수 없는 공리적인 명제, ‘액시옴(axiom)’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바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 담고 있습니까? 성경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그다음에 이성이 조화를 잘 이룰 때에 이것이 훌륭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부패한 육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비춰주시면 죄를 확신하게 되고 그다음에 부패한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서 이렇게 다시 죄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싫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것이 이제 자기부인이라 이것입니다. 그다음에 자기 사랑을 비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자, 1번. 자기부인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을 설명해 봅시다. 소극적 측면, 자기 안에 내재하는 악한 경향성을 부인하는 것 없다. ‘없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따라 살지 않겠다’라고 부인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2번. 자기부인은 전망적 사실을 현재화하는 경험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죄의 확신에 기초해서 그래서 죄의 확신은 과거에 지은 죄를 현재로 끌고 오는 것이고 또 미래에 죄가 몰고 올 불행한 결과를 현재로 끌고 와서 그래서 올바른 실천을 하는 것, 그것이 결국 자기부인의 경험입니다.
3번. 자기부인에서 의지가 구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짓게 하는 환경, 그다음에 죄로 말미암는 속박,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이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부인에서 거부하는 의지의 작용은 어디에서 비롯됐습니까? 죄로 말미암는 내적인 속박에 대한 거부,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여기에서 난 이대로 살 수 없다’, ‘이렇게 내가 생각하던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당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자신에 대해 어떤 결과를 초래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고 혼인 언약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에서 사명을 저버리게 합니다. 사실은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제 삶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다음에 이제 자신에 대해서는 삶이 허무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오늘 공과공부 어떠셨습니까? 조금 어렵게 느껴지셨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꼼꼼하게 강의를 들으셨으니까 이젠 책으로 돌아가셔서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으시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을 하시고 또 지체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