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은혜의 상태 아래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와 파멸되는 죄(2)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녹취자 : 박혜아
오늘 이 시간에는 얼마든지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죄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의식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은혜 생활을 하면 사라질 수 있는 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죄들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완전히 없앨 수 없는 죄들보다 실제적으로 우리 영혼에 더 많은 손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증거 본문이 시편 19편 13절입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이렇게 시인이 고백합니다. 이 말을 반대로 뒤집어 보겠습니다.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게 내버려 두소서. 그 죄가 나를 주장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내가 올바르게 될 수 없어서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뒤집거나 긍정문을 부정문으로 뒤집으면, 다시 말해 본문의 말을 정 반대로 뒤집으면 훨씬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우리 말로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제가 의지적으로 짓는 죄를 짓게 내버려 두십시오. 결국은 그 죄가 나를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절대로 올바르게 살 수 없고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고범죄는 히브리 말로 ‘재딩’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는 ‘주드’인데, ‘반항적으로 행동하다, 무례하게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명사형으로 되면 ‘재드’가 되고 ‘반항, 고의, 의도를 가지고 행할 의도’를 뜻하며, 이것이 복수가 되면 ‘고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한창 자유주의가 팽배할 때 경건한 신학자이자 성경학자였던 프란츠 델리취는 이것을 ‘의도된 범죄’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까요? 사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죄에 너무 익숙해져서 자신은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고 하거나, 아니면 인간의 본성 속에 교묘하게 깃들여 있기 때문에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범죄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의도된 것입니다. 그 죄를 짓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지성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채비를 해야 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면의 세계가 붕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드러난 것은 그 자체가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속에서 밖으로 드러날 때까지 속이 얼마나 많이 망가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누구에서 폭력을 행하고 강도짓을 해서 돈을 빼앗았다고 합시다. 그것이 그날 처음 저지른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마음 속으로는 수천번도 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한 것입니다. 의도가 깊이 개입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세계를 계획한 것조차 계속해서 내면의 세계가 망가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짐짓 지은 죄에 대해서는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사의 제도도 주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죄들을 계속해서 내버려 둔다면 이 죄는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지배력을 형성해서 우리의 마음 전체의 주인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로는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당시의 사람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그에 합당하게 선하게 대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남에게 받은 것만큼 되갚을 줄 알아도 괜찮은 사람 아닙니까. 어느 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부조금 때문이라도 그 교회를 쉽게 못 떠난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인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교인이 20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했던 부조금만 합해도 2000만 원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받을 기회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조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교회를 쉽게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제 경우도 어떤 사람들의 경조사를 찾아가고 부조금을 보낸 것을 대충 생각해 보면 약 60퍼센트 정도만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목사님들도 거의 비슷하게 이야기합니다. 결국 30, 40퍼센트는 못 돌려받는 것인데, 형편이 어려워서 남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한다면, 그것을 공정의 원칙에 의해서만 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더 충격적인 것은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미움이 살인이 될까요? 살인이 어떤 존재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미움은 어떤 존재가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극단적인 상황이 살인입니다. 마음에 이 고범죄, 자범죄, 실행죄는 의지를 가지고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짓는 죄와 행동으로 짓는 죄로 나뉘어 집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미움이고, 행위로 짓는 죄는 그에 대한 폭행일 수도 있고, 심하면 살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면서 미움이 되는 것인데, 그 의지가 죄의 욕구에 복종하고 정서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나름대로 쾌감이 있습니다. 미워하면서 그를 미워하라고 죄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에 나를 복종시키는 것이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인간이 좌절합니까. 자기가 너무너무 미워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엄청나게 잘 될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밉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짜증나고 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때 여러분 마음속에 ‘정말 잘 죽었다. 진짜 죽어도 싸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사람을 미워하기는 하지만 죽일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운전 때문에 실랑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추월합니다. 그런데 그 차가 경찰에 걸려서 딱지를 떼입니다. 마침 여러분은 ‘고소하다’하면서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차가 고속으로 달리다 다른 차와 충돌하여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운전자도 죽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새치기 하다가 까불더니 잘 됐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저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인간의 마음이 미움이라는 마음의 병에서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데 우리에게 비율이 안 맞을 때는 ‘아유, 새치기 하다 까불더니 잘 됐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우리 형평에 안 맞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봅시다. 사람이 미울 때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 살인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살인 이전에 폭행과 같은 온갖 것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미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은혜에 의해서 지배됩니다. 그럼 당연히 이런 행동을 꿈꾸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함정은 ‘미움은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아직 표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움과 살인은 마음속에서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 미움을 내버려 둔 채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미움, 살인 모두 죄이며 살인은 미움에 기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찼을 때 살인으로 갈 것을 내다보면서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행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움 자체도 실행죄이지만 말입니다.
죄의 경향성은 힘입니다. 물은 평평한 곳에 두면 당연히 고여있습니다. 그런데 경사를 비스듬하게 해 주면 커다란 힘을 가지고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면 강물은 H빔을 엿가락처럼 휘게 만들면서 흐릅니다. 물이 그것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나무나 바위를 떠내려 보내고 밀어붙이면서 철근까지 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향성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죄가 경향성이 되어서 사방으로 뻗어나갑니다. 목표는 하나입니다. 바로 마음속에 있는 죄가 바깥으로 뚫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뚫고 나와서 실질적으로 실행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반복하게 하면서 범죄로 만듭니다. 이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더 강화시켜서 죄의 경향성을 강하게 만들고 더 큰 죄를 짓게 만들고 반복되면서 인간 자체를 악의 화신처럼 만듭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경험자들에 의하면 첫 번째 살인이 무섭고 떨리지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은 우리가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별 느낌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면 이런 과정에서 (죄는) 완고함에 힘을 실어주고 죄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맹렬함과 광기와 무모함을 더해주고 죄책감을 덜어줍니다. 죄가 들어가면 죄책감을 많이 느끼지 못하도록 지성에 영향을 주고, 감정에 영향을 주고, 의지에 영향을 주어서 지성이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죄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합니다. 죄를 사랑하게 되고 죄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를 내버려 둔다면 우리 안에서 남아 있던 은혜는 점점 고갈되고 죄의 힘은 점점 증대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불법적으로 우리 마음을 지배해서 죄 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런 삶을 체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롬 7:21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구절을 보면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첫째로 ‘깨달았다’입니다. 이것은 예전에는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입니다. 즉, 자신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의 면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또 하나의 면은 악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둘 다 자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나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는 참된 나이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는 거짓 나입니다. 이 두 개는 사실 자신을 구성하는 하나가 됩니다. 결국 성화는 잘못된 나를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 받으면서 참된 나를 되찾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죄는 영원 안에서 실효적인 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힘입니다. 예를 들어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후’하고 붑니다. 촛불은 흔들리는데 꺼지지는 않습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을 꺼뜨릴 정도의 실효적인 힘은 없습니다.
도표에서 죄는 영원 안에서 계속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생각에 씨가 떨어집니다. 씨가 마음에 받아들여지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서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돋아납니다. 싹이 작아 보여도 광합성을 해서 양분을 만들어 뿌리로 보내줍니다. 뿌리는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줄기로 올려보냅니다. 그러면 줄기가 커지면서 풍부한 광합성을 하면서 다시 아래로 내려보냅니다. 이것이 상호협력하면서 작은 싹이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나무가 원래 이렇게 크게 태어난 경우는 없습니다. 나무는 작은 싹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잣나무를 보십시오. 하나의 작은 잎이 올라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안을 수 없을 정도의 큰 잣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죄가 있었는데 촛불을 끌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 죄가 계속 성장합니다. 실효적인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법처럼 작용하게 됩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방앗간이 홍보했습니까. 낟알을 좋아하는 성품이 방앗간 앞에서 덫에 걸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새는 방앗간에 내려갑니다. 이것이 결국은 낟알을 좋아하는 참새 속에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죄를 짓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이것이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집에 아들이 있습니다. 공부도 안 하고 예배 생활도 신통치 않습니다. 핸드폰이 툭 떨어졌는데 뒤져보니 포르노그라피가 나옵니다.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솔직히 아이가 야한 사진을 봤다고 해서 죄가 되면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물론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쁘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서 접할 때 이것보다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되면서 죄는 아이의 마음 속에서 실효적인 힘을 키워 가다가 결국 바깥으로 뛰쳐 나올 때 성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사전에 마음이 그 죄에 충분히 지배되는 시간이 있은 후에 그런 실재적인 범죄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우리가 금하는 것입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어른은 청소년들보다 사고가 입체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사회적으로 확률적으로 생각해 주는 것이지 통제가 되지 않는 성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아야 할 우리의 영혼의 비밀입니다.
사실 제가 존 오웬 목사님의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여태까지 나는 사람을 겉모습만 보면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배를 가르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성형외과 의사가 아닌 한 우리의 외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가 썩은 사람을 치료하는 치과의사는 이에 관심이 있는 것이 턱이 예쁘게 생겼다든지, 얼굴이 예쁘다든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암에 걸려 왔는데 뚱뚱한 아줌마나 날씬한 아가씨나 몸짱인 총각이나 배불뚝이 아저씨가 의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배를 갈라서 암세포를 제거해서 치료받게 해 주는 것이 의사의 관심사이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이 책은 인간에 대해) 해부학적으로 보여줍니다. 목사님에게 받은 가장 감명 깊은 점은 바로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해 기가막히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죄가 일어났는지를 모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암으로 판명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암이 4기입니다. 또는 초기에서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등의 판명을 받게 되면 여러분은 비로서 어떤 관심을 갖게 됩니까. ‘왜 내가 갑상선 암에 걸렸지? 난 담배도 피지 않았는데 폐암이지? 어? 내가 혈액암이래. 내가 왜 그러지?’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과거에 어떤 일을 하면서 안 좋은 화학약품들을 많이 마신 기억이 납니다. ‘아, 그것이 원인이었겠구나’ 생각합니다. 의사에게 설명을 하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의사가 이야기합니다. ‘아, 내가 왜 그런 환경에 노출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후회합니다.) SK 창업주인 최종현 회장은 담배를 너무 좋아하여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오랜 동안의 흡연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담배를 필 때 속에 무언가 들어가서 어떻게 작용을 일으키면서 오늘날 나에게 폐암을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문제는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합니다. 살다가 덜컥 혈액암에 걸리면 ‘내가 옛날에 유해 가스를 많이 마셨나’ 아니면 폐암입니다.(하면) ‘담배를 30년 피웠더니 그렇게 되었네?’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암입니다.’ 하면 ‘내가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덜컥 ‘암 4기입니다’라고 했을 때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궁금해서라도 내가 왜 폐암에 걸렸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았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중병이 걸려서 의심할 여지없이 증상이 밖으로 나타날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우리가 암 검진을 받을 때 아무 자각 증상이 없는데도 2기라고 진단받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검사 시스템이 없었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4기쯤 되어서 폐가 답답하고 기침이 나오게 되면 4기라고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내가 암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해 가스를 보고 이것이 들어가서 혈액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관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런 가스 냄새를 맡는 것을 불편한 정도가 아니고 무섭다고 생각하게 되고 피하게 됩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시로 피검사를 해서 한꺼번에 암표지자가 나오지 않으면 ‘아직은 아직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 자각 증상이 없는 데도 암검사를 해달라고 합니다. 암 검사 받은 지 2년이 지났는데 징후라도 있는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불편하면 사진을 찍어보거나 전문의하고 상담합니다. 그렇게 항상 밖에 있는 요인이 나의 내부에 들어와서 그런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연관 관계를 알면서 지혜롭게 처신하며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도 걸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만큼도 주의하지 않았으면 더 빨리 걸렸을 것입니다. 그 이상은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 생각 없이 내버려두다가 덜컥 죄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신도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어?’ 도대체 내가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습격을 받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봅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모르던 선비들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성찰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묵념으로 시작합니다. 아침의 정기를 받으면서 자신을 생각하고 저녁때 잠들기 전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성합니다. 그것 없이는 절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은혜를 쓰지 않기 때문에 내재하는 죄가 증가되고 그 은혜를 사용함으로써 더 이상 내재하는 죄가 자라지 못한다. 순종의 의무에 있어서 더 많은 은혜를 사용할수록 은혜는 더욱 강화되고 증가한다. (하나의 유혹을 이겼을 때 밀려오는 기쁨, 하나의 죄를 이겼을 때 더 성결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반대가 됩니다. )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정욕의 열매를 많이 생산해 낼수록 그들 안에서 더 많은 정욕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이야기합니다. 정욕을 한번 확 쏟아버리면 마음이 맑아지는 것과 같은 마음이 잠깐 들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즉시 그것보다 더 많은 정욕을 우리 마음은 요구합니다.) 정욕은 스스로를 먹고 살며, 자신의 독을 삼키며 증식한다.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그들의 성향은 죄를 향하게 된다. 그것은 이 죄의 법의 속삭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
명언입니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본질과 힘, 속임과 편만함’에 대한 책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설득하여 이런저런 특별한 죄로 그들의 정욕을 채움으로써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을 만큼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킬 것이다. 모든 죄는 그 원리를 증가시키고 죄짓는 습성을 강화시킨다. 악을 범함으로써 증가되는 것이 바로 악을 쌓은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이 곳간이 있는가? 거기는 바로 마음속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또 하늘에 있는 어떤 천사도 사람에게서 이 곳간을 제거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오직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 없이 인생을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의 지배에서 정욕에 맞는 마음의 틀을 찾게 되고 기도할 수 없게 만들고, 은혜의 지배 아래 있으면 은혜에 맞는 마음의 틀을 갖게 되고 열렬한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문제 3)
시편 19편 13절에서 “고범죄”는 신자가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죄가 신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고 영혼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갖음
문제 4) 실행된 죄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죄의 경향성에 맹렬함, 광기, 무모함을 더해주고 죄책감을 덜어줌
문제 5) 신자가 계속되는 범죄로 죄의 법에 매인 상태가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죄를 짓게 하는 실효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살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