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
녹취자: 백지영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어디 가지도 못하고 집에 콕 박혀 있는데 그러다보니까 ‘확! 찐 자’가 되었습니다. 몸무게를 달아보니까 코로나 사태가 나기 전보다 약 1.5kg 이상 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합하면 얼마쯤 될까요? 자, 우리 즐거운 마음으로 구역공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들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제7장을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자, 채팅창에 벌써 난리가 났습니다. 한나리 자매, “샬롬 오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선리, “코로나가 생각보다 오래 가네요. 구역식구들이 보고 싶은데 구역 공부하는 시간도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 나오셨네요. 저와 함께 똑같이, “저도 2kg 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자, 그럼 오늘의 성경 구절은 계속해서 마태복음 22장 37절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 우리 첫 번 문제를 한번 보겠습니다.
문제 4. 신앙의 세계에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이어갔던 이들은 하나님께 매인 자유인이었습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들이 누리는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자, 그럼 우리 한번 설명을 보겠습니다. 자유인이라는 말은 그리스 시대 때에 혹은 로마 시대 때에 노예와 반대되는 말이었습니다. 노예와 자유인의 가장 큰 차이는 - 물론 부자인 노예가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교육의 수준, 재산의 유무 등등도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자유가 중요한 이유는 자유로움으로서만 참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우리가 이 사랑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자유를 잃어버리고 얽매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떠나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얽매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것을 ‘죄의 종’, 혹은 ‘죄의 종노릇하는 자’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당한 우리 마음속에 솟아나는 욕망들은 결국 죄의 바다에서 떠오르는 물결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유롭게 사는 비결은,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자유롭게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질서가 그게 결국은 진리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를 배우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여기에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탁월한 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토마스 아 켐피스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당장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마치 발꿈치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에 대한 평가가 나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 사랑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사는 것이라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밑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사슬에 얽매인 채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여야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을 텐데 사슬에 얽매어버렸으니 속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를 상실한 채 속박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은 사람답게 살고 싶어도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죄의 사슬을 끊어서 자유롭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바깥으로 설명하면 우리가 죄 가운데 형벌 받을 존재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내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선하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도록 속박된 사람을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 밖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더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이미 주신 자유를 따라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들이 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구원해 주셨는데 왜 사람들은 자유를 잃어버린 채 속박받으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속박받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사랑 때문에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흡연에 대해서 꽤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저는 결코 중독에 걸려본 적이 없습니다만, 알코올중독이 있습니다. 그것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특별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원에서 제가 만난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목사인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뭔가 도움을 좀 받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알코올중독자였노라고, 그래서 생활이 안 되니까 가족들이 어떤 의미에서 귀찮으니까 자기를 정신병자처럼 몰아가지고 강제수용을 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을 거기에 갇혀서 일체 술을 먹지 않고 살았는데 석방이 됐습니다. 말하자면 그 병동에서 풀려나오는 그날 제일 먼저 간 곳이 술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떻게 알코올 중독자가 됐는지 이야기했는데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처럼 보지만 그냥 너무 괴롭고 힘들 때마다 술을 입에 댄 것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알코올을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보통 사람들은 인생에 어려움이 있고 현실을 직시해야 될 때에 힘을 들여서 그렇게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술을 의존하게 됩니다. 이렇게 술을 의존하게 되면 결국은 우리는 자꾸 그 술에 인이 박히면서 술의 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노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했으나 나중에는 그 자유 때문에 속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우리의 속박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아주 훌륭한 비유입니다. 그다음 설명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문제 5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5. 우리가 연약해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버릴 수 없을 때 어떻게 기도하면 세상 사랑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요즘 우리나라 심리학계에서 핵심감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핵심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또렷이 뭐라고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다른 감정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그런 감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한과 같은 감정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알던 한 자매는 사람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되었느냐, 우리 같은 사람은 너무 잘 믿어서 걱정인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그랬더니, 가족과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속아서 고통을 받은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사람을 믿고 신뢰하면 항상 나쁜 것이 온다는 감정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 렌즈를 쓰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말하자면 그분들이 말하는 핵심감정입니다. 사실은 기독교적인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부분은 인정이 되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틀 자체를 우리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어떤 때 보면 우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우세한 감정이 있습니다. 확실히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때로는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관성 있게 어떤 한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핵심감정의 핵심개념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집착입니다. 왜냐하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구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보는 때도 있지만 누구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쉽게 아예 안 믿으려고 하는 그 자체는 무엇이냐 하면 자신 마음속에 형성된 어떤 불신이라는 성향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자기 이익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놓고 본다면 결국은 우리가 그런 식의 올바르지 않은 감정에 전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히 속박 받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게 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설명을 더 드려보겠습니다.
교회 역사에 요한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동방교부였는데 어머니가 한 열아홉 살 나이에 - 안투사라고 알고 있는데 - 아주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키우게 됐는데 전승에 의하면 탁월한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을 했지만, 일체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념했던 아주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소스틈은 그 어머니의 전폭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별명이 황금의 입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로 말하면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 사람의 설교의 명성을 들은 귀족들이 크리소스톰 같이 훌륭한 분을 어떻게 저 촌사람들이 설교를 듣도록 할 수 있느냐 우리 교회로 모셔야지 하고, 전승에 의하면 안 오니까 그분을 보자기로 싸서 그리고 자루에 넣어서 납치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정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설교사역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 교회가 어디냐 하면 여러분들이 터키에 갔을 때 보셨던 성 소피아 성당, 지금 커다란 모스크로 쓰고 있는데 똑같은 건물은 아니었겠지만 바로 그 터에서 그분이 목회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설교를 잘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온 귀족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제 없는 삶과 세상 사랑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들의 사치한 차림새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그들이 자랑하듯이 교회에 걸어놓은 금붙이와 은붙이들을 모두 떼어내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런 실천을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결국은 죽이기로 합니다. 그런데 대중으로부터 받는 인기가 너무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만약에 이 거룩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대중들의 귀에 들어가면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안 하고 납치 해다가 귀향 보냅니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 볕 아래 물 한 모금 못 마신 채로 묶인 채 걷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거기서 죽습니다. 그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유명한 대사입니다.
결국은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그 일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크게 우리의 운명이 거기에 달린 것처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의 버림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물론 세상이 우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우리가 먼저 세상을 버리겠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세상의 버림을 받아도 좋다 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 그래서 이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때 거기에서 지혜와 용기와 그런 모든 인생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랑과 모든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자 할 때, 그때 집착을 버리게 되고, 이때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잡한 나의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또 계속 들어오시는데 짱구라는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양산에서 듣고 있습니다.” 꽤 머네요. 그리고 김현진 자매님, “저도 ‘확! 찐 자’가 됐어요.” 다행입니다. 교회 나오셔도 되겠네요. ‘확진자’가 아니니까. 그다음에, “알코올중독자가 스스로 중독자임을 인지 못 한다고 하는데, 가족 중에 그런 속박의 어려움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예, 의학적인 도움도 받아야 되고, 무엇보다 영적인 도움도 받아야 되고, 또 인격적인 도움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정신병자 취급을 해서 강압적으로 사람을 아무리 가두어도 아까 그분 이야기처럼 환자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자가 없으면 치료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의학적인 도움 또 영적인 도움 그다음에 인격적인 도움 모두 필요하겠지요. 계속 보겠습니다. 문제 6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 “용서받은 죄인”들이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과 구별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세상에는 다 죄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신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아직 용서를 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죄인이 있고,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죄인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주관적인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죄인이고, 신자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불신자는 아직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자랑스럽지만 그게 우리 자신이 자랑스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말씀을 드리자면 너무나 자주 유혹을 받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설교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를 다 듣고 난 후에 설교자가 존경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 저 사람은 저런 삶을 사니 얼마나 훌륭한가! 나는 정말 비천하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설교를 통해서 사람을 사람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는 사람을 사람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훌륭한 설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복된 것이고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뻐기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대해서 깊이 자부심을 느끼고 또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자랑거리로 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나 본질적으로는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자,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랑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사랑이 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처음 젊은 나이에 교수로 가서 교수들을 힘들게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구원파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굉장히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또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심지어 수업시간에 교수님 강의가 신통치 않을 때는 아예 책 덮고 성경을 펴고 읽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학 한 3학년밖에 안 됐는데 자기가 성경을 벌써 예수 믿고 나서 백독을 했다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항상 똑같은 메시지에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내가 회개할 때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감동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전도를 하고 그러는 것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어떤 생명력으로 그렇게 해야 되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면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 전도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을 계속 읽어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자기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성화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도표를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십자가의 감격으로 사랑을 경험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깊어져 가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남녀가 서로 만났는데 한순간에 마음이 확 쏠렸습니다. 한마디로 반했습니다. 그 감정을 가지고 연애는 시작할 수 있지만, 내일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인줄 알고 일생을 맡기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이 깊어져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결국은 성화인데, 이 사랑이 성장해 가면서 결국은 이 과정에서 이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으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계속 순환을 하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현재의 성화적인 사랑이 과거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소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오늘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 그러면 우리 서로 만난 시간을 생각하면 뭔가 추억이 떠오르고 과거의 일들을 사진으로 보면 새록새록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싫다, 진짜 보기도 싫다, 진짜 헤어지고 싶고 내 인생의 최대의 비극이 이 남자하고 사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왜? 모든 것이 다 실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시면 남편이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성화의 감격과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은 두 개가 같이 순환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구원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나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느 날 교인이 와서 등록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교회를 오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저기 충청도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열린교회 설교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파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여서, 아실 것입니다. 그분들 절대 정통교회로 안 돌아가는 것, 그래서 교회를 안 나가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말씀을 듣는데 열린교회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거의 모든 목사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고 회개해야 된다고 보니까, 그런데 어쨌든 설교를 매주 들으면서 그들이 열린교회 설교가 진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저 목사님은 회개한 사람 같다, 구원받은 사람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구원이 무엇일까요? 구원은 자기가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함으로써 구원이 입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남편과 처음 만난 날이 언제인지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 있는 사랑을 취소하지는 못합니다. 또 그 기억이 없어진 사랑을 소환해 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날까지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렇게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도록 부름 받은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 사랑으로 용서받은 사람인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감격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경건한 회고의 삶,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려 놓고 그 감격으로 현재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집착을 끊임없이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쓸 때 사실 그 의도가 짧은 시간 안에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그 기독교강요를 쓴 것입니다. 그 읽는 대상은 우리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정도 졸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전에 몰랐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그리스도인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불어로 이것은 ‘삶’이고, 이것은 ‘선하다’는 뜻이고, 이것은 ‘질서 지워진’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선하게 질서 지워진 삶’,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그 질서는 우리를 속박하게 하는 질서가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 모든 질서를 기쁨으로 즐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비비엔 오흐돈니, ‘질서 지워진 선한 삶’, ‘선하게 질서 지워진 삶’ 이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서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이 아닐까요?
자, 이제 계속 들어옵니다. 많이 들어오는데 다 읽어드릴 수는 없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서 읽었던 내용이네요” 그랬는데,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베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남보성 바닷가에서 듣고 있습니다. 전에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매일 술을 마시고 다니면서도 위로가 느껴졌는데요, 이제 내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 댓글을 쓰신 분은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하게 제가 모르겠는데 그렇게 술로 위로를 하고 하는 것들이 이제 지겹게 느껴지신 것 같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이렇게 여쭤보셨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생활을 단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술 드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끝이 없습니다. 생활을 우선 단순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니실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접속하셨으니까. 그래서 제일 먼저 해야될 것은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 종교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책도 읽으시고 하셔서. 그래서 이분은 만약에 여기에다가 주소를 남겨 주시면 제가 특별 추첨으로 해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한 권 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는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기도를 드리셔야 됩니다. 짧게 드려도 좋습니다. 진실하고 간절하게 그러면 마음이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 질문 두 개가 추가로 들어왔습니다. 1번입니다. “핵심감정이 왜곡되었을 때 고통을 겪게 됩니다. 왜곡된 핵심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런 감정을 갖게 된 나 자신을 부인하면 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당장 그 핵심감정의 지배를 안 받으려면 부인을 해야 되겠지요. 예를 들어서, “인간이란 못 믿을 존재다. 그러므로 나에게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저 사람의 호의도 내가 신뢰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런 마음을 “아니야, 그래도 이 사람은 다를 거야.” 이런 다툼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해결은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볼 때 이것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지성과 의지, 정서, 이런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과거로부터 받은 상처나 한이나 이런 것들이 장기간 동안 핵심감정 역할을 하던 것들이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게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질문받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있는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 채우지 못하지요. 특히 신자들의 마음은 못 채웁니다. “이런 마음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질문하시는 님께서 어떤 연령대에 계신 분인지를 모르겠지만 혹시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모든 사람이 보기에 너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결혼적령기의 남녀 중 수많은 사람에게 프로포즈를 받아도 절대 응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본인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 생겨나는 방식 아닙니까? 바람이 불지만, 부는 것은 알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모릅니다. 당연히 사랑하게 됐지만, 그 사랑이 어디서부터 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출발점을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전개된 어떤 상황은 있었겠지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결국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잘 들어주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만큼 우리가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그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문제는 진실하고 간절하게 믿음으로 기도하셔야 됩니다.
자, 또 많은 것들이 있는데 더이상 시간이 없지요? 거의 끝날 시간이 됐지요? 15분 남았습니까? 그러면 질문을 좀 더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오디오러브,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셔서 사랑으로 대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어떤 일에 휘말려 질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혼자 살고 싶기도 하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한 것도 집착일까요?”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을 하실 때는 그냥 이웃을 잘 대해줘라, 착하게 살아라, 욕먹지 마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책 전체에서 우리가 배우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안에 참된 나도 있고 이웃도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답글을 보내주신 분이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선하게 산 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뭐가 문제가 된 것이냐 하면, 그것이 진짜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아마 사람들로부터 그에 합당하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좋아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기대하면서 대가를 받자고 그 일을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에 견디고 참고 한다면 그런 상황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답변이 되셨습니까?
이제 몇 개 더 많이 올라왔습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데 지금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또 다음 시간에 만나서 오늘 못한 질문은 편하게 해주시면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에 전부 다 일곱 문제를 나가려고 하니까 너무 시간에 쫓깁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도 1번에서 한 3번까지 나가고, 두 주에 걸쳐서 한과씩 공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즐거운 성경공부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로 모두 뒤숭숭하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평안을 누가 흔들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때 오히려 하나님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며 은혜로운 시간들을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은 요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주는 평안의 힘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염려와 모든 걱정과 근심을 주님의 은혜로 쓸어버려주시고 저희의 마음에 하나님이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떠오르게 해 주시옵소서. 많은 고통은 우리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떠난 데서 비롯되었사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민들이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모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며 자신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옵나이다. 주님께서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나이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동안 이 부르심을 감당할 은혜로운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