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홀로 사랑 받으실 주(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7)
녹취자 : 허혜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누구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이 호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입니까? (216-217, 217-218)
. 하나님 : 주
.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야 함.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하면서 ‘주’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스어에 나오는 ‘퀴리어스’라는 단어인데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폭 넓게 사용되었는데 아내가 남편을 호칭하기도 하고 종이 주인을 호칭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들끼리 선생님이나 자기가 높여 부르고 싶은 사람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으로부터 배경을 가기고 있었는데 구약에서 얘기하는 ‘아도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세 성함이 대표적으로 쓰입니다. ‘하나님,’ ‘야훼 ’그 다음에 ‘주’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각각 하나님의 성함을 말하면서 특히 ‘아도나이’ ‘주’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의 지배자가 되시고 우리 인간의 지배자가 되시고 또 나의 지배자가 되신다. 그래서 내가 그 분의 소유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상전과 노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완전히 선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그 분의 사랑과 질서 아래 살아갈 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구약에 있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서 완전히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그 분의 사랑의 질서 아래 살아갈 때에만 자신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 심오한 이야기가 이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희망의 갈등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을 안 믿겠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겠다거나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인데 문제는 온전히 그 분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주인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주인은 완전한 주인이 아닙니다. 뭔가 선한 주인도 있겠지만 뭔가 자기의 이익을 움켜쥐고 주인이 아닌 자들과 다투고 감시하고 억압하는 주인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들을 당신의 통치 아래 두셔서 이 안에서 사람들이 뭔가 합당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뛰쳐나가려고 할 때 가능하지도 않지만 여기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이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 분의 소유인 것을 행복해 하고 그 분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랑보다 선행되어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218, 218-219)
. 겸비함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실 사랑을 능가하는 덕목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기 전에 먼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고 자신은 정말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데 코로나라는 뜻은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바이러스인데 바이러스는 병균이 아닙니다. 병균은 오히려 잡기가 쉽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정말 육안으로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서 사람들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세계 무역의 양이 32%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2주 전에 세계 증시에서 날아간 돈이 3만 2천조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타격을 우리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인 것을 먼저 알고 난 후에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관계를 맺어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라인 질문) 돌아온 탕자의 큰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주인으로 여긴 것인가요? 그래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된 것인지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면 작은 아들이 유산을 받아서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허랑방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먹을 것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을 하느냐 하면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그냥 나를 품꾼 중 하나로 여겨달라고 하자’ 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놀랍습니다. 진짜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가는 과정이 자기가 아들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게 됩니다. 놀랍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그 아버지는 큰 아들을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들은 자기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교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집에서 오랫동안 애를 썼는데 나에게 뭐 해 준 것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은 자신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아버지가 즐겁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서 섬기며 사는 그것이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계속해서 의식이 아버지의 집에서 타인처럼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아버지의 아들 된 것을 깨닫는 것과 이제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드리고 나는 그 분 아래 살아야 되겠다라는 그 종 된 마음이 일치한 것입니다.
자,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그림을 보면 한 사람이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회화 적으로 그린 것인데 깃발을 들었는데 왠지 힘이 없습니다. 원래는 저런 자세로 들고 있었던 그림이 아니라 이런 그림입니다. ‘이 땅의 주인은 나다’ 라고 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계기가 있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찬송)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자신이 정말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회심하기 전 어렸을 때 이야기인데 밤하늘을 보면서 그 어린 마음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때는 공해가 없어서 지금보다 별이 더 잘 보였고 서울에도 전기불이 많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어두워지면 별이 많이 떠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무 별도 인간은 가 본적이 없고 저 빛이 어디로부터 온 지도 모르는데 언제부터 있었을까? 우리 엄마가 태어나기 전,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텐데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신지 신이신지 이런 것은 확정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떻든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외로움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 매여서 독단적으로 살아가니까 사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한 번 이 복잡한 세상사에서 떨어져 나와서 공정하게 이 우주 속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면의 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라는 존재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이 사람이 온갖 사람들에 에워싸여서 온갖 크고 작은 세상사에 얽혀서 살아가는데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 바깥으로 튀어나가서 무한히 이어지는 이 어두운 밤하늘을 보면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일에서 빠져나와서 객관적인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서 ‘나’라는 존재를 봅니다. 그러면 존재로 본다면 솔직히 모기 한 마리나 메뚜기 한 마리나 나라는 인간이 여기에 하나 있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원과 영원을 이어져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100년과 1000년의 차이는 무엇이겠으며 순간과 영원의 차이는 정말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비로소 이 세상이 전부 다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인생은 시간 안에 있지 않은 그 무엇엔가 연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생각만 한다면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어차피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나라고 하는 존재는 출렁거리는 파도 속에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수많은 물거품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잠깐 사이에 그 물방울은 바다로 합류하여 끝을 알 수 없는 대항을 이루고 그러면 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물방울은 바다인가? 바다는 물방울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냥 도나 닦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12시에 끝나고 나면 밥을 먹으러 가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하게 되고 어떻게 아이들하고 오후 시간을 보내고 살림살이를 할까? 그리고 직장은 어떻게 할까? 사업은 어떻게 할까? 이런 고민을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직조물이 짜여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시간 안에서의 삶과 영원 안에서의 삶을 끊임없이 엮으면서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해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 아닐까요? 좀 더 곁가지로 나갔습니다.
다시 도표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만세를 불렀는데 이럴 때에는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자만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힘없이 깃발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나니까 ‘내 것이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임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이 알고 보면 내가 주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가서 안 되는 길로 나를 데려갔고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들었고 내가 행복하리라 믿었지만 마지막에 나를 불행의 낭떠러지로 나를 데려 간 것이 결국은 나를 주인 삼은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나를 주인 삼으면서 살던 삶이 결코 자기를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주인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고백을 하면서 주님 앞에 부복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지극한 겸비함을 느낍니다. 나를 나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겸비함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사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의 통치 아래 행복하게 복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겸비함에 뒤따라서 이렇게 무가치한 존재,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이런 존재를 하나님이 사랑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책을 읽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2차 대전 때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거기에서 그 작가가 의문을 던진 것이 맞은 사람들은 맞고 수많은 사람들이 핵에 노출되고 병이 걸리고 아직까지도 비참한 삶이 계속 되고 있는데 그것 말고 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 중심에 몇 백 미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질문을 했습니다. 옆구리가 터지고 창자가 터져서 죽어버렸을 것 같죠? 흔적도 없이 기화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뼈? 뼈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체가 되어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게 기화되어서 없어질 존재인데 과연 있다고 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자기가 여기 살아있어서 누군가를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거기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주인이시고 우리가 아주 하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고 할 때 왜 꼭 그 주님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는지 아주 깊은 생각을 가지고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라인질문) 작은 실패를 통해서도 티끌 같음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승승장구 하다가도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자살을 하게 되면 살기 싫어서 죽나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너무나 차이가 나서 죽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싶은 현실과 자기가 지금 살아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클 때에 결국 인간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자살은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제가 몰입하다시피 좋아하던 작가가 쇼팬아우어였습니다. 이 사람의 중요한 주제는 ‘고뇌’였습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고뇌의 개념은 희망과 현실의 격차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바라는 현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희망입니다. 여긴 현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격차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이 격차만큼 고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인생에서 고뇌가 그치지를 않느냐?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이 희망이 성취가 됩니다. 이 희망이 성취가 되면 순간적으로 고뇌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희망이 성취가 되자마자 더 높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이에 다시 격차가 생기는데 이것이 무한반복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고뇌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꼭 돈을 많이 갖고 싶다, 명예를 갖고 싶다 그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하나의 인생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나면 아, 이제는 해결됐으니까 됐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 있을 때 고민하지 않던 것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고뇌하는 것과 천재들이 고뇌하는 것은 수준이 다릅니다. 우리는 신경 쓴 적도 없는 일 때문에 천재는 너무 고민을 해서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천재가 과연 행복하냐고 말할 때 소팬아우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매우 특별한 고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계속 고민하는 천재가 낫지 평범 이하의 사람은 좋지 않잖아요?
아침에 제가 삼위일체를 읽었는데 거기에서 보니까 고뇌를 아주 놀랍게 승화시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기독교는 고뇌를 승화시키는가? 아주 은혜로울 것입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마태복음 도표를 보시면 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라고 하였습니다. 그 겸비함을 기초로 이렇게 무가치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절대로 나를 주장하지 않고 그 하나님의 품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나를 모두 포기하고 완전하신 사랑의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서 나 자신을 위탁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거기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모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 할 때도 있지만 수시로 나를 내려놓고 꺾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살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답변이 되셨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어떻게 기독교는 그 쓰라린 고뇌를 환희로 승화시키는가 하는 것을 그림처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사연 들어가 보겠습니다.
(온라인질문) 자기사랑을 내려놓는 것과 내 권리 그 선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내 권리 그것은 없는 것으로 하나요?
네. 이 분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입니다. 한 번 읽으시고 읽으신 소감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라님께 가상칠언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온라인질문) 목사님 말씀처럼 내가 누구인지 내 존재를 직시할 때 주님이 생각하신 거룩한 감정을 갖게 되고 마치 뚜렛 증후군처럼 무의식에 지배되어 습관적으로 진리에 집중하지 못하는 삶이 반복되는 것이 고민이 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아주 수준 높은 질문입니다. 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자기가 직면한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볼 때에 그 너머에 있는 의미와 연관 지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사실 그것이 도덕적인 생활의 핵심입니다. 내가 너무 배가 고픕니다. 여기 길거리를 가는데 좌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빵이 있습니다. 먹고 싶기 때문에 그것을 덥석 집어서 그냥 먹어버리면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먹고 싶은 욕망을 갖지만 이것이 옳은 행동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과 직면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상하고 인생의 고뇌와 그 고뇌를 승화시키는 이러한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저도 지금 배가 몹시 고픕니다. 따끈따끈한 찌개와 밥을 먹고 싶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금방 육신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들을 보면서 그것이 나라는 인간, 그리고 변함없는 인생의 의미, 그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샘솟듯이 이런 생각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지극히 일상적인 사건을 만났는데 그 의미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약 10년쯤 지난 어느 날 길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길을 걷고 있는 모르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살아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 왔을까? 저 사람들도 나처럼 죽고 싶은 순간이 있었겠지 라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장편소설, 대하소설 같은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몰랐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육적인 것들을 영적인 것들로 사고할 수 있는 것들이 계속해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 죽음의 휘장이 내려와도 조금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 그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맞이하는 그 정신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차도 마시고 벚꽃도 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질문해 주신 분께 두 번째 마스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온라인질문) 요즘 신천지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떳떳이 말하지 못합니다. 구역 내에도 신천지가 있을까봐 걱정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겨내야 할까요?
지난 가을에 한 설교를 들으십시오.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고 지금 주시는 은혜 때문에 살아가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기독교와 신천지는 완전히 다르니까 오히려 신천지 때문에 기독교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신천지가 욕을 먹기 때문에 기독교인 우리도 따라서 욕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종류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분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주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재 상황에 매몰되어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마 지금 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의지적으로라도 고백하고 주 되심을 입술로 인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네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을 하나님이 다 아시면서도 고백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고백이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는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산란하고 분산될 때는 ‘하나님이 제 인생의 주인이옵나이다, 내 인생은 저 깊은 고독 속에 끝나도 내 주는 나의 생명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사시면 하나님이 놀랍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뜻밖의 책입니다. 2019년도의 주일 설교를 두 페이지로 요약 정리한 책을 오늘 질문해 주신 분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마쳐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쇼펜 하우어가 고민했던 인간의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고뇌를 어떻게 기독교는 승화 시키는가 그것과 더불어 나머지 세 문제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공과 공부 너무 은혜로웠다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연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극장을 그려보니 그들이 겪어 낸 삶이 참 소중합니다. 그렇습니다. 눈물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라인질문) 전도사인데 설교를 못 해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방법 하나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아주 훌륭한 설교 청취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좋은 설교자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