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은 불길이어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녹취자: 이대중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는 말은 ‘죽음은 꺾이는 것이 없다, 항거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스올은 우리말로 하면 지옥이며 이는 구약적인 개념인데 스올은 삼킬 자를 모두 삼켜버리니까 잔인하다는 의미입니다.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사람의 불은 물로 끌 수 있지만 여호와의 불은 심판하는 불과 같기 때문에 끌 수 없습니다. 즉, 사랑이 얼마가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 민수기 16장과 욥기 1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불의 특징은 무엇이며, 본문에서 여호와의 불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불이 임해서 사람이 죽는 광경을 묘사한 것인데 이것은 심판이며 모두 격렬하게 불사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질투를 뜻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250인을 소멸하였다’ 고 하였고, ‘두 번째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사람이 고하되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랐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불에 대한 개념을 아가서에서는 같이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어떻게, 얼마나 지속이 됩니까?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철이 든다는 것은 결국 사랑에 대해서 눈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는 하나님 사랑의 성품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 확신에 불타는 사랑들이 아름다웠습니다. 지금도 그 근본적인 면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확신을 지나치게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나이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그 과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질투는 스올처럼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결국 이것은 이성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는데 난관이 생기면 우린 뚫고 나갑니다. 질투를 느낄 때 이 질투는 잔일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사람이 변심하고 원한이 생겼을 때 무서운 폭력으로 돌변하곤 합니다. 인간 속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멈출 수 없는 사랑인가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추가 설명을 드리자면 로마서 8장에서 사망이나 생명 등을 쭉 얘기하는데 이런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항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심지어 불신앙과 불순종에 의해서도 꺼지지 않습니다. 다만 불신앙과 불순종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가 없습니다. 이렇게 퍽퍽한 마음을 가지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은 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죄인들도 뉘우치고 회개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을 닮게 됩니다. 그렇기에 냉랭한 마음의 신앙생활을 기질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오는 열정이 없는 것을 자기 자신의 원래 인간성이 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은 결코 냉랭한 마음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많이 사랑하는데 그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표현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를 심오하게 꿰뚫어보고 우리 속에 있는 선과 의를 알아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표현을 배우라고 우리는 한편으로 충고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랑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을 알고 이해해주는게 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표현이 모자라는 분들은 특히 그런 남성분들은 표현을 좀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말로 사랑해 하기 너무 어려우면 스케치북에 한 장씩 넘기면서 ‘사랑해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아’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표현을 안하면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표현을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표현을 하고 안하고는 성향의 문제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뜨거운 법이다’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랭한 것이 내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야지만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과 죽음의 공통점은 진지한 것입니다. 사랑을 장난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난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죽는 것과 살아있는 것 사이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죽으면 죽은 것이고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진지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랑 속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불태워버리려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면서 많은 것을 계산해서 자기의 이익을 따지려는 사람들은 사랑 속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인생은 사랑의 감격으로 가득차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신앙생활에 있어서 “거룩한 허무감”은 무엇이며,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허무감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거룩한 허무감 혹은 신령한 허무감과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허무감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세속적인 허무함, 육신적인 허무함은 자기 자신의 육신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느끼는 허무감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본성적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좀 들면 어느 정도는 허무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인생에 대해서 허무한 감정을 느끼면서 다 쓸데없는 것이다. 저까짓 것이 뭐가 중요한가 등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철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허무감이 깊이 밀려올 때 인간이 무기력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허무감은 본성적 허무감이 아니라 신령한 허무감입니다. 즉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도화지를 가지고 서로 싸우다가 엄마가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 문을 열고 얘들아 하고 들어오면 서로 다투던 아이들이 도화지 크레파스를 모두 다 팽개치고 엄마에게로 달려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투던 물건들보다 더 좋은 엄마가 왔고 또한 엄마 손에 들린 맛있는 과자가 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냐면 거룩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깊이 경험하고 감동을 받으면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니까 그런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전에 설교시간에도 잠깐 얘기한바와 같이 젊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즐거운 일이 참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나이 먹은 사람이 자기들 가까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든 사람은 상황을 보고 빠져주는게 가장 큰 봉사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회식을 할 때 제일 존경받는 상사는 1차를 하고 나이든 사람은 일체 싹 빠지고 카드만 주고 즐겁게 놀다 와라 라고 하는 상사입니다. 아예 1차부터 안나오면 판이 안되니 맛있게 식사를 함께 하고 2차에서는 좀 더 나이든 사람이 빠지고 3차까지 갈때는 진짜 젊은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구역장님들도 기억하세요. 제일 눈치없는 사람이 나는 젊은이들과 능히 어울리고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젊은이들은 소화가 안된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젊은이들은 노인네들이 자기들을 부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나이 든 분들은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이미 겪었고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에고 헛짓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같이 신학적인 사람들은 저렇게 살다가 30년 후에는 지불만기 어음으로 돌아온 청춘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그런 인생의 부채에 시달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음이라는 것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있는 지불만기 어음입니다. 젊었을 때 그것을 잘 쓰면 노년에 파산을 안하는데 까불고 정신없이 수표를 긁어대면 30년 후에 파산하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눈물이 납니다. 저렇게 살다가 저 흥이 깨지고 나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하나님 없는 삶이 뭐가 그렇게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것을 우리의 마음에 계속 불붙이는 것이 매스미디어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미디어에 파묻혀 지내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미디어 축출론자는 아닙니다. 어느 외국에 보니 자기의 집에 TV도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저는 그 정도로 반문화적이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의 문화를 호흡하지만 거기에 미친 듯이 빨려드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는 것,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보면 투르게네프 라는 19세기 러시아 작가가 나옵니다. 산문시에 참새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 의미심장한 얘기를 합니다. ‘사랑이란 죽음보다 강하고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하다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인생은 지탱되고 움직여 간다.’ 투르게네프와 동시대에 살았던 톨스토이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죽음의 공포보다 크다. 헤엄치지 못하는 아버지가 물에 빠진 아들을 보고 뛰어드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시키는 것이다.’ 이성으로는 ‘헤엄을 못 치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가면 나는 헤어 나올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행동을 규율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이것들을 추론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뛰어듭니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장모님이 마을 아낙네들과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마음이 미친 듯이 불안해지셨다고 합니다. 그 분은 그 당시 신앙도 없으셨으니 이게 무언가 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때 어린 아이가 달려와서 “아주머니 아주머니 빠졌어요! 빠졌어요!” 라고 소리쳤고 뭐가 빠졌는데 라고 물어봤답니다. 제 아내의 이름이 옥희인데 “옥희가 우물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달려가 보니 아이가 이미 벌써 우물에 풍덩 빠져서 머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있었답니다. 아내가 우물을 들여다보겠다고 구부릴 때 옆에 있는 친구가 더 잘 보라고 다리를 번쩍 드는 바람에 우물 안의 물로 직진해서 풍덩 빠졌답니다. 다행히 우물 옆에 있는 돌멩이에 부딪치지 않고 물에 직진으로 들어갔고 우물물이 깊어서 다이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 정도만 오르락내리락 하면 사람의 숨이 멎는다고 합니다. 미리 생각한 것은 아닌데 아무 생각 없이 엄마는 점프해서 바로 우물로 들어갔답니다. 우물 깊이가 2~3미터 되는데 어떻게 아이와 함께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랑의 감정으로 그냥 뛰어든 것입니다. 그때 구해내지 못했으면 아내를 못 만나고 내 인생은 사뭇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를 건져내셨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가 얘기한 것처럼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사랑 진정한 사랑은 논리를 넘어서게 됩니다. 참사랑을 아는 것은 결국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니까요. 참사랑은 우리가 감격해야 할 이유이고 참사랑은 신앙의 장애물을 뛰어넘게 만들어 줍니다.
5.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다양성을 살펴봅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인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 모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희롱과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끔찍한 일들이 나오는데 이는 모두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렇게 고통과 학대를 받았는데 이런 사랑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결국 신자는 사랑지킴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참되면 반드시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그 믿음에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결국은 사랑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체험하는 것과 그 사랑을 간직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체험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과 나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지우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핵심은 이 사랑을 계속해서 간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병들게 되면 결국은 삶으로 그 병든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도 깨지고 사람과의 평화도 깨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고 반응하는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인데 그 사랑이 내 마음에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을 인도하시면서도 늘 명심하셔야 될 것이 있는데 자기보다 신앙생활을 좀 못한다고 해서 사람을 자기 앞에 세우는 그런 목양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했고 그런 시련이 있을 때 말씀 붙들고 살았고 그런 형제들이 나를 아프게 할 때에도 나는 용서하면서 살았다. 이렇게 너무나 쉽게 얘기를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구역장이나 설교자를 보면서 기가 죽는다. 저사람 어떻게 저렇게 잘 살았을까 나는 못살았는데.’ 그렇게 해주는 게 목양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양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설교는 그 설교자가 누군지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설교가 가장 훌륭한 설교입니다. 굉장히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흔들어 놓으셨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워낙 깊이 만서 그 사람이 누군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 앞에 세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겸손하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이 지루한 구역공부를 들어주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