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으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녹취자: 문미경
이 글은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 메시아에 오심에 관한 예언 중 일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인용하셨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관해서 예고된 메시아의 예언이 바로 당신을 향한 건데 당신이 그 성취로써 직접 말씀하시고 계시니까 아주 의미 심장 하는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인데 그 메시아는 나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는 자다. 내가 그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줄 텐데 그가 하는 일은 이방을 심판하시는 일이다.” 이게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냄을 받으셨을 때 그냥 단지 병든 자 고치고 주린 자 먹이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사령관으로 오신 겁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반란이 바로 인간의 범죄입니다. 그 죄와 함께 사단이 들어와서 정권을 찬탈하고 불법하게 하나님이 통치할 나라를 다스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졸개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아담과 하와는 그저 우연히 의도를 가지고 지은죄였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사단이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반란이 일어난 이 세상에 토벌군을 보내시는데 그 사령관으로 오신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심판입니다. 결국 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다음 우주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우편에 앉은 예수그리스도의 통치는 두 가지로 이어지는데 하나가 우주적 통치입니다(외연). 공중에 나는 새 하나도 모든 것도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예수그리스도가 그것을 부활하신 메시아로서 주관하는 것입니다. 또 한 국면은 영적인 국면입니다(내포).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를 굳게 붙드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깨우치시고 감화를 주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빛, 소금이 되게 하신 겁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통치는 온 우주를 심판하십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교회를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고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잘라내십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구원받은 성도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그 어린양들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모든 반란을 토벌하고 원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그 이루어진 방식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치레할 것이고 심판할 것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그때 일을 지금 흉내 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은 다투지도 않고 떠들지도 않고 아무도 길거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성품을 가지신 분으로써 연기가 나는 상태,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조차 끄지 않으시는 그런 방식으로 심판의 날까지 예수님이 사역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뭐냐면 ‘긍휼’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그런 말을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심판하고 백마를 타고 오신 그 분이 오셔서 심판을 하실 때 악에 속했던 모든 무리들이 포도즙 틀에서 포도주를 쥐어짤 때에 붉은 포도즙이 나오는 것처럼 그들이 심판의 틀에서 쥐어짜져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살육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며 사는 것이 그 심판을 기다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 심판이 엄위롭고 무시무시하고 일체의 긍휼이 없는 주 능한 심판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은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고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느라고 고단할 때 그 악을 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할까 얼마나 힘들까 오히려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게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태도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예화) 오늘 아침에 새벽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어떤 한 사람이 여러 가래침을 잔뜩 모은 다음에 교회 벽돌 마당에다가 퉤하고 뱉는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고 여러 번 하자, 그렇게 하지 말라고 큰소리로 얘기했더니 그 할머니분이 뭐라고 대꾸하며 변명했는데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 생각해보니 ‘내 인간성이 그것밖에 안되는구나.’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가래침을 뱉을 때 뭐라고 소리 지를게 아니라 직접 가서 휴지로 바닥에 있는 가래침을 닦아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그 사람이 말할 수 없이 미안할 것이었는데 그렇게 행동했어야 하는 게 바로 심판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하고 너무 죄송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너 이것밖에 못해? 책망을 할 때,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그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기가 정말 잘못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실 때,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녹으면서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의 매질로 고쳐지지 않는 죄인들이 사랑의 복음을 변화되는 것, 교회는 바로 그런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날 긍휼사역하면 노숙자 밥이나 해주고 옷을 사다 주는 걸로 생각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오는 인간 마음의 품질입니다. 그것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화) 인도네시아인가 어디에서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빠졌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홍수가 나면서 늪지대속으로 빠져 들어갔는데 구조대원들이 와서 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조대원들도 구조하는 게 쉽지가 않았고 함께 사투를 벌이면서 구조하기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함께 빠져 들어가며 자기를 구조하려는 한 구조대원에게 그 아이는 “아저씨 너무 힘든데 좀 쉬면서 하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 구조대원이 쉰다면 자기는 바로 늪지대로 들어가 버리는데 말입니다.
그게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일시적으로 선하게 판단을 멈추게 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해 있는 고통스러운 상태, 그것에 마음이 녹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사랑의 감정의 최고봉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박애적 사랑의 훌륭한 증거입니다.
(예화) 한 영감이 매일 술만 먹으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겁니다. 그리곤 술기운에 깨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내를 대하는 겁니다. 그 아내는 이제 애들도 컸겠다, 남편이 너무 꼴 보기 싫자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며 이혼서류에 도장 찍어 던져놓고 집을 나와 여관에 가서 며칠 묵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남편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보고 싶고 어디가 예쁘고 자기한테 잘해줘서 생각난 게 아니라, ‘저 인간 나 아니면 밥도 못 차려 먹는데.’ 생각하니 눈물이 확 쏟아지며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집으로 옮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박애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자비, 긍휼, 오래 참음이 있는데 그 중에 사랑의 속성 중에서 박애적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타고난 사랑이 긍휼입니다. 만족적 사랑 안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얼굴이 예쁘네 사랑해볼까, 돈도 많네 한 번 시집가볼까, 평판도 좋네 옆에 붙으면 나도 한번 원님 덕에 나팔 불어볼까?’ 하며 좋아하는 만족적 사랑엔 긍휼이 없습니다. 그 가치가 떨어지면 토사구팽입니다. 휙 던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아부’입니다.
박애적 사랑의 특징이 긍휼입니다. 갈대가 가치 있고 심지가 가치 있어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갈대가 value, 가치가 있고, 심지가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자신 안에 있는 그 긍휼의 성품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는 꺾어야지만 나머지 갈대가 상하지 않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빨리 꺼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연기가 나와서 눈을 맵게 하고 그을음이 납니다. 하지만 그것을 끄지 않고 돌보는 것은 갈대나 심지 안에 있는 좋은 점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박애적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 그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전부다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가엾은 인간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그게 사랑입니다.
(예화) 나는 인터넷을 거의 안하는 사람인데 어느 날, 삼일교회 사건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던 때였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인터넷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독하게 그 전목사와 교회를 욕하기에 이 사람이 왜 그러나 생각해서 읽어 봤더니 그 사람은 자기는 시골목사인데 전목사에게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편지를 썼답니다. 그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이 인간이 답장을 안 하더랍니다. 그래서 독기를 품고 욕을 하던 차에 이 사건이 터진 겁니다. 그 사람은 전목사의 딸을 향해서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목사란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오래 예수를 믿고 오랜 신앙생활을 했어도 박애적 사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내 마음이 녹아서 나의 무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으로 그것이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유익, 그런 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그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그 아픔, 그것이 바로 주님이 당신의 구원의 은택을 입은 우리의 마음속에 두기를 원하시는 마음의 품질입니다. 이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얘기도 안 되는 인성자체가 비틀린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래서 필요한 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교인이 목사님한테 앤드류 머레이의 『겸손』이란 책을 선물을 했는데 완전히 두 사람의 관계가 박살이 났답니다. 목사님이 선물한 집사를 불러 그 앞에 책을 던져놓으며 내가 그렇게 교만해보이냐며 집사님께 화를 냈답니다. 이런 망가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겁니다.
우리는 거의 만나는 모든 인간을 정신병자 수준의 병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고통과 기쁨이 나의 것인 것처럼 동참하는 겁니다. 그게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긍휼의 삶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인간으로서는 아무 길이 안 보이는데 하나님은 신기하게 그 길을 열고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 앞에 살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