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을 가진 교회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1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나간 12월 12일이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 교회를 세우실 때 주셨던 말씀을 듣고 또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오늘 팔복 설교를 잠시 멈추고 오늘 본문을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을 바라보는 본문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고, 이 열두 제자들은 늘 예수님 가까이 있어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도들을 세상에 파송하여 당신이 하고 계신 일들을 뒤잇게 하시고, 당신이 죽고 하늘나라로 부활승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사역에 뒤를 잇도록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II. 전파하고 돌보심
예수님의 소위 삼중 사역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전파하시고, 또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삼중 사역으로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을 보여줄 뿐 아니라 사도로 세움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를 보여주고 나아가서는 사도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어떤 일을 계승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처럼 예수님이 사도를 파송하신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이고, 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돌보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또 이 선포를 듣고도 미처 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조용조용히 가르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교훈으로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질병과 약한 것들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구원이 단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육체와 인간 존재로서의 모든 삶을 아우르는 전인적인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이 모든 귀신을 내어 쫓고 모든 약한 것과 질병을 고칠 수 있는 큰 권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이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의 모든 말씀으로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미 깨달은 사람이든지 미처 못 깨달은 사람이든지 간에 사랑으로 그들의 연약한 모든 것을 끌어안고 돌보고 그리고 위로해주고 불쌍히 여기는 일이 교회가 계승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I.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
A. 불쌍히 여기심(esplanknisthe)
그러면 예수님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가까이 두시고 함께 시간을 보내시며 훈련시켰던 이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셔서 이 세상을 향해 파송하셨을 때에 세상을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떤 마음이 있으셨기에 예수님은 당신 곁에 오래 두고 싶으셨던 이 제자들을 사도로 만드셔서 이제 사명을 주어 파송하셨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사도들을 파송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 성경에 ‘에스프랑크니스테’(ἐσπλαγχνίσθη)라고 나오는데 이 단어는 원래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영혼의 자리가 인간의 창자라고 본 대에 있습니다. 아프리카 콩고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간다의 전설적인 독재자 이디아민이 자기의 정적을 죽이고 그 간을 파내 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혼이 간에 있기 때문에 그 간을 먹어버리면 자기를 대적하는 자의 영혼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믿음이 시킨 우매한 행동입니다. 아무튼 예수님 시대 때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배에 영혼의 자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에스프랑크니스테’라고 하는 단어는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요즘 우리말로 말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 때에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을까요? 무리를 보셨을 때입니다. ‘이돈’이라는 분사는 보는 것을 가리키는데 물리적인 눈으로 어떤 물리적인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어떤 사물의 배후를 통찰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육체의 비참한 형편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형편을 직시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고 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무리들을 바라보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것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명목상 하나님의 자녀요, 언약의 백성들이었지만 그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과 충만한 사랑,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핍절한 삶을 보셨기 때문에 가슴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정확히 사도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또 사도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물려받아야 할 마음인 것입니다. 사도들의 올바른 가르침이 교회를 세우는 육체라고 한다면 그 예수님께로 받았던 사도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잃어버린 영혼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는 이 사랑이야 말로 그러한 육체인 교회 속에 부어져야 할 영혼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마음을 가지고 사도들을 파송하셨고, 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부활하심으로 주가 되셨고 당신의 교회에 이 마음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은 높은 건물이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의 영광은 바로 교인들이 이 마음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이렇게 모였을 때에 예배 속에서, 기도 속에서, 찬송 속에서 바로 이렇게 목자 잃은 양 같은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예배이고 생명이 있는 기도이고 은혜가 있는 찬양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아가서 마치 예수님이 내가 있는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사셨을 그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일들이 우리나라 바깥에서 이루어질 때에 이것이 선교라고 말하고 우리나라 안에서 이루어질 때 이것을 우리들은 전도라고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인생 자체이고, 전도이고, 선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무디어지기 쉬운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통해 수시로 그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져서 그래서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이럴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충만하게 되도록 우리는 헌신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해 들어온 물질주의와 세상에서의 번영주의의 정신은 바로 서서히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 땅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교회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받은 구원이 무엇이고 구원받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정신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슴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19년 동안 우리에게 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이 마음이 때로는 많이, 때로는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떠난 적이 없이 이 마음이 깃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오셨고, 또 많은 영혼들이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이 마음이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랑 자기와 관계없는 영혼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신 관계를 느끼고 그를 불쌍히 여겨 가슴이 저미도록 아파할 수 있는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늘 부어주시도록 아버지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B. 목자 없는 양 같이
예수님이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셨던 이유는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기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 혹은 어린 양으로 묘사했고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이 바로 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필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많은 짐승 가운데 왜 이스라엘을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더 멀리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양에다가 비유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양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존의 양식에 있습니다. 모든 들짐승들은 각기 자기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이어가지만 양은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도움을 받으며 인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인간과 영적으로 매우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네 가지 종류의 사물들이 있습니다. 다만 있기만 하고 아무 감각이 없는 무생물들이 있고, 그보다 더 위에는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살아있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존재하고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영혼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태들을 해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물음으로 살아온 지난날 보다는 살아가야 할 날들을 지혜롭게 하여 자신의 행복과 이웃의 행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보다 훨씬 더 커다란 동물과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고 지배하며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혼자 힘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내면의 깊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는 이 땅의 흙으로부터 지음 받았지만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빚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본향인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그리워합니다. 죄와 타락으로 자신의 원래의 고향이 어디인지 희미한 의식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고, 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류 역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문학과 사상들은 언뜻 언뜻 인간의 마음에 비췄던 이 영혼에 대한 그리움들을 문학으로 사상으로 표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고, 신앙은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독립하여 살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자기가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고, 가치의 최고 기준인 것처럼 살아갔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고생하며 기진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고생하다’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에크로뤼메노이’(ἐκλελυμένοι)인데 이것은 ‘스킬로’라는 동사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라는 동사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즉, 스스로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괴로운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고생을 하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피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진하다’라는 이 단어는 ‘에림메노이’(ἐῤῥιμμένοι)라고 하는 단어인데 ‘립토’, ‘내던지다, 팽개치다.’ 라는 동사의 역시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이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이들의 불쌍한 형편 이면에는 마귀의 세력들이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복음의 광채를 가로막고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지 못하도록 철저히 가로막혀 있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이런 인생의 한계를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신자가 되지 않습니다. 혼자서 사는 인생의 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기가 스스로 주인 노릇하며 살아가는 그 마지막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절대적으로 느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이 불쌍한 많은 영혼들만 눈에 보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질병의 상태, 그리고 굶주리고 헐벗은 상태가 모두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능력으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셨고, 또 그들이 주렸을 때에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그들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도 다시 또 다른 질병에 걸릴 수가 있었을 것이고 뱃세다 광야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도 그 다음날에는 다시 배고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참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고 믿으셨고, 그것을 위해서는 이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천국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키셔서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칠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도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승계 받은 사명이고,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이 사명을 승계 받은 제자들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물려주신 교회의 사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이렇게 교회를 맨 처음에 세우셨던 예수님의 이 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들어온 물질주의와 세속적인 번영주의, 그리고 인간을 모든 가치의 중심과 기준으로 삼는 현대의 사상에 동조하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은 모두 이렇게 주님이 교회에 주셨던 본래의 이 마음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방황하던 죄인들이었고, 누군가가 전해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여러분의 영혼이 거듭나고 회심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메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고 이 세상에서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눈물 흘리며 회개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메웠던 것은 어느 한 회심의 순간에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도 모른 체 내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그러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에는 우리가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나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다음에는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게 우리 주위에는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내동댕이쳐진 영혼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우리에게 상처를 준 가족일 뿐이었고,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이웃일 뿐이었는데 이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자 가족들이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었던 우리의 이웃들의 고생하며 기진한 영혼의 형편이 우리의 마음을 메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부족하나마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우리의 마음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예수님의 이 마음을 닮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세상의 지위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인간의 모든 비참한 형편 너머에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핍절한 영혼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 많은 시간을 들여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우리와 꼭 같이 이 마음이 주님의 교회에 가득차기를 눈물로 빌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커다란 영광을 누리지 못해도 온 땅 가득히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으로 교회가 가득 찬다면 우리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존귀하게 영광을 받으실까 하는 마음에 녹았습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에 탄식소리 들려온다
이 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기를 원했고, 우리나라가 부자가 되기보다는 정의가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사랑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저는 신학교에서 교수 생활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신학교 교수가 될 사명을 주셨고, 그리고 저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정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학문을 연마하였습니다. 절대적인 양에서는 일평생 공부한 대학자의 비할 수 없는 미미한 학문이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했고 인간적인 안목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던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신학교에 선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가 만 서른두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넷이 되던 해에 그렇게 교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학교에서 한 4년 동안 열심히 근무했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신학교 선생으로서의 소명의 이상과 학교의 현실 사이의 격차는 너무나 엄청났고, 그래서 그 사년동안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 4년 동안에 흘린 눈물의 양은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19년이 넘는 세월동안 흘린 눈물의 양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의 눈물이었습니다.
한 학교의 사역을 갈등 속에서 마무리하고 두 번째 학교로 옮겨 열심히 보람 있게 신학교 선생으로서의 사역을 계속하고 있던 어느 때였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마는 눈이 초롱초롱하고 마음이 아주 맑고 상쾌하여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하는 수 없이 침대 밑으로 내려와서 잠자는 아내를 침대에 놓아둔 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고, 열렬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개척할 테니 저를 도와주옵소서.’ 기도를 하고도 내가 지금 미쳤나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한 번도 교회를 개척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고 학교에서의 사역이 너무 비관적일 때에는 그저 1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나를 목자로 불러도 내가 이 교수직을 다 버리고 가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마는 뭐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목사 안수도 아직 안 받았고 불러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밤을 새워서 정말 간절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나서 아침에 가만히 생각하니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지난밤에 무슨 일을 겪었나! 아마 내 마음이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잠깐 밤새 오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다시 이틀 째날 잠자리에 들었고 간밤에 거의 잠을 못 잤으니 이제 그 밤에는 일찍부터 잠들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고 다시 정신이 아주 총명해지고 마음이 쇄락해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어제처럼 기도하기 시작했고 꼭 같은 기도가 똑같이 열렬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밤을 새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새벽까지 기도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3일째가 되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잠이 안 오고 다시 기도를 했더니 똑같은 기도가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그때에 제 마음을 3일 동안 가득 채웠던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9장 35절부터 3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목자 없이 들판에 내동댕이쳐서 맹수들에게 쫓겨 다니며 고생하는 수많은 어린 양떼들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이 양떼를 모으고 이 양떼를 돌보아 주님의 목장에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큰 눈물이 되어서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랑을 나에게 베푸셔서 일생 동안을 살아오게 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다시 회고하게 되었고,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나도 무엇인가 목회자로서 이 소명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아픈 마음이 그야말로 가슴을 찢는 것처럼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서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기도하던 3일째 밤에는 마치 예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삼일이 지난 후 아내에게 나의 기도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교회를 개척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다고 말하자 아내는 교회 이름을 이미 지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 그랬더니 열린 교회랍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 그랬더니 9월쯤 기도를 하는데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면 열린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찾아보니까 계시록에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의 빛과 사랑이 쏟아져 내려오는 축복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워지지도 않은 교회에 일단 이름을 붙였고 이날이 저의 기억으로는 1993년 11월 15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정확하게 27일후인 12월 12일 교회를 얻고 개척 예배를 드렸으니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볶는 것 같은 속도로 일이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며칠 동안을 교회를 할 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좋은 곳은 이미 교회가 있는 곳이었고, 교회가 없고도 좋은 곳은 안 빌려 주는 곳이었고, 빌려주면서도 괜찮은 곳은 매우 비싸서 우리 능력으로는 건물 임대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통장을 열어보니까 1500만원 적금 붓던 것이 있어서 그것을 깨뜨려서 드디어 방배동의 뒷골목에 있는 정말 눈에도 띄지 않는 깊은 지하실 방 하나를 얻었고, 거기는 두 개의 교회가 개척을 하려고 십자가를 세웠지만 문을 닫고 간 자리였습니다. 내려가 보니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는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는 개울보다도 더 낮은 지대가 되어서 전기 모터만 망가지면 물이 발목까지 차는 교회였고,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이나 교회당에서 물을 퍼낸 적이 있는 그런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고, 이때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과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 집사람과 저를 제외하고 7명의 성도들,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합해서 8명인가 9명이서 교회를 개척하기로 뜻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개척된 것이 1993년 12월 12일이었으니 개척을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20주년이고 1년 뒤에 정식으로 창립 예배를 드렸으니 창립을 기준으로 하면 19주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볼 때에는 정말 하잘 것 없는 사람이었고, 또 의자 한 20개 놓으면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는 아주 열악한 습기 차는 지하 예배당이었지만 바로 거기에서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거기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세상을 향해 찢어지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주셨고, 그래서 맨 처음 예배당을 찾을 때에는 자신이 불쌍해서 자신이 너무나 가엾어서 예배당을 찾았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영혼들이 불쌍해서 가슴 아파하며 울고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의 교회에 부어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이외에는 교회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고 그리고 학문도 깊지 않은 오히려 그저 평범하기 그 이하인 사람들이 예배당을 찾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 지하실 예배당이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지하실에서 사람이 한없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교회 맞은편 분식집 주인이 와서 항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댁에는 참 좋겠수.” “왜요?” “매주일 마다 손님이 이렇게 많으니.” 정말 여러분보다 더 착하고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상처 많고 성격도 유별나고 괴팍한 사람들, 여러분보다 더 가난하고 끼니가 간데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지체들은 신앙에 목숨을 걸었고 한번 예배에서 은혜를 받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하실 예배를 드리다가 어떤 자매는 졸도를 하기도 했는데 산소가 부족해서였습니다. 그런 캄캄한 지하 예배당에서 두 시간 넘게 계속되는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갔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미끄러지기도 하였지만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의 용사가 되어서 이 세상 어디엔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IV. 교회의 사명을 이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픈 마음을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참다운 진리의 복음으로 설교하고 이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끄러지고 혹은 대적하는 사람들까지라도 모두 끌어안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베풀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무지한 자를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게 하시려고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땅에 이미 많은 교회가 있었지만 이 교회를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것은 이 교회가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요일이면 매일 모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시도록, 주님을 만나고 은혜 받은 영혼들에게 구령의 열정을 주셔서 이 복음을 전하고 이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게 해 달라고 눈물로 빌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정말 약했지만 주님은 크게 응답해 주셨고, 그래서 일곱 명의 성도들이 오늘에 이르러 오천 명 가까이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나온 발자취를 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사랑할 때에도 주님은 사랑하셨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에도 주님은 떠나는 그들도 사랑하셨고 그들이 버리고 간 교회도 또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끄러지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 사랑하면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고난과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헌신적으로 섬기며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희생을 힘입어 알지도 못하는 성도들이 지은 이 예배당에서 여러분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이 다시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선교와 그리고 전도와 이 조국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을 붙들어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는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위한 이 일에 여러분의 헌신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푸라기처럼 바람에 날리다가 사라질 인간, 뜨거운 태양이 돋으면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처럼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 버릴 이 하찮은 인생을 보람 있게 사는 일이 이 예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섬기는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고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믿어지지 않는 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져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 없이 주께로부터 받은 우리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우리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물론 나는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면서 한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예전처럼 그렇게 목숨을 걸고 예배당을 찾는 사람이 아닌 관객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고 예전처럼 한 번의 예배에 목숨을 거는 것 같은 비장한 성도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에 언제나 이 마음이 떠나게 하시는 적은 없었습니다. 성도들이 약할 때에는 교역자의 마음에, 장로들이 약할 때에는 성도들의 마음에, 성도들이 약할 때에는 또 다른 성도들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항상 눈물이 있게 했고 예배 속에 이렇게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애통하는 각성이 있게끔 만드셨기에 이제껏 미력이나마 보편 교회를 위해, 조국 교회를 위해 이바지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이 교회를 찾았던 그 가난하고 애통하던 마음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번의 예배에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한 번의 기도에 생명을 걸어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그 빛이 가득 차 온 땅에 이 진리의 말씀의 빛을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고, 그리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들고 신음하는 많은 지체들을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뱃세다 광야에서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사랑하는 백성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돌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할 것입니다. 맨 처음 이 교회를 세울 때에 그 마음, 이 교회 문 두드리고 와서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을 위해서 남은 생애를 살겠고 주님의 그 가슴 찢어지는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살겠다고 했던 그 헌신의 마음을 유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의 날 동안에 주님이 주신 그 은혜 안에서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섬겼노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를 결국 승리하게 하셔서 면류관을 주셨노라고 우리 주님 앞에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