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생자를 주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벌써 아마 30년쯤 된 과거의 일일 것입니다. 아직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지정되기 전에 불교계를 비롯한 많은 종교계의 사람들이 성탄절을 공휴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위헌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특정종교의 명절을 공휴일로 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때 법원의 판결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에 아무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답하면서 이렇게 판시하였습니다. ‘성탄절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독교만의 명절이 아니라 세속적인 명절이 되었으므로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이 기독교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판시했습니다. 그때 어린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씁쓸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고유한 명절이 아니라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도 그저 즐겁게 노는 세속화된 명절이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의 의미도 모르는 채 들떠하며 명절처럼 이 절기를 보냅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의 의미를 명확하게 새기고 그리고 그 의미를 묵상하면서 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본인에게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본문은 66권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도 불리는 구절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으로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성탄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젊은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로마의 관원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의 최고의 종교적인 재판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앙을 가졌던 사람으로 사료되지만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 아니면 저런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예수님을 믿고자하는 마음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따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고데모의 칭찬에 대하여 아무 관심도 없이 전혀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즉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칭찬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니고데모 같은 사람에게서 칭찬받으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비참한 상태를 바라보며 복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무지하게도 사람이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냐고 모태에 다시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으니 이는 종교에 있어서 영혼에 관한 비밀을 전혀 모르는 무지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정결과 쇄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영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기적의 한 예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불 뱀에게 물리게 되었고 이제 그 독이 올라서 모두 죽어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지팡이 끝에 뱀의 형상을 구리로 매달게 하셨고 그것을 높이 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얻게 만들어주신 유명한 놋 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세의 지팡이에 매달렸던 뱀이 높이 들렸던 것처럼 인자도 그렇게 높이 매달려야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 일어난 한 사건을 가지고 설명하시는 가운데 요한복음 3장 16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했는지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그림처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Ⅱ. 기독교는 무엇인가?
A. 사랑의 종교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처럼’ 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놀랍고 크다는 사실을 적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시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천 년 전 사람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 사랑이라는 것은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만족과 기쁨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안에 사랑이 많으면 그 사랑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주고 이미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 관계를 올바르고 돈독하게 하도록 헌신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계셨고 그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셨습니다.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지만 그러나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면서 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자가 없이도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사람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은 모자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하나님이셨지만 그 넘치는 사랑은 이 세계창조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세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 피조물들을 통해 나타나는지를 당신도 보시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신 후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고 또 받을 수 있는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땅밖에 모르지만 인간은 이 모든 이 세상의 피조물과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면서도 자기를 내신 하나님을 알고 또 자기와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로 인간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을 만드시기 위해 꾸며놓은 신방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것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그 사랑으로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맞게끔 가꾸고 돌보도록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나타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 영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가시화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에 주신 아름다움과 진리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이 모든 자연의 세계 속에서 나타내 보여주셨는데 바로 그 자연의 세계 안에 모든 법칙들을 통해서 질서와 조화와 균형들을 이루게 하셨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자연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의 많은 학문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자연 세계 속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겨놓으신 그런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학문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학문을 통해서 자연의 세계 속에서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선하게 이용함으로써 물질생활은 증진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재화들을 생산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보여주신 아름다움을 인간의 정신과 영혼 안에 새겨놓으셨는데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선한 성품을 가진 어떤 사람을 보고 그의 행실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깎아놓은 미인과 같은 얼굴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과는 다른 감동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새겨놓으시고 이 사회 안에서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해가도록 만드셨는데 주님이 인간들을 창조하셔서 사회를 만드실 때에 하나님 마음 안에 있었던 이상은 모든 인류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이런 사랑과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그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들이 필리핀에서 겪었던 그 자연재해 속에서도 그 엄마가 아이들을 사랑해서 끌어안고 죽은 시체들을 보며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그리고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정의 지극히 큼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굳이 멀리가지 않더라도 부모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사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받는 자를 향한 갈망과 헌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불행해지는 것도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찾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사랑이야 말고 인간이 풀어야할 가장 중요한 숙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이처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을 찾을 줄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멀리 떠난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처럼 인간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집을 떠나 부모를 버린 자식이 철이 들어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기까지 아버지는 그 자식을 기다리고 자식은 부모를 버린 적도 있고 미워한 적도 있으나 그 부모는 자식을 마음속에 지워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죄와 불순종으로 인간을 멀리 떠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완전하고 무엇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 없이는 당신도 행복해지실 수 없는 유한하신 하나님이신 것처럼 계시하심으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 년 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아기예수는 이렇게 당신을 멀리 떠나 비참하게 살아가는 우리 인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다가 낮은 지위에 스스로 내려가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하물며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으로 그것도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아주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뉘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오신 그 모습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 없이 사실 수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오신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등지지 말고 이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독생자의 종교
두 번째는 독생자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독생자라는 단어는 희랍어 성경에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ὴς)라고 나옵니다. ‘모노’는 ‘하나의’ 라는 뜻이고 ‘게네스’는 ‘종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저 단순한 하나님의 외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도 우리를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모노게네스를 독생자가 아니라 독종자라고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유일한 외아들인 동시에 유일하게 독특한 종자로서 오신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독생하신 예수는 육적인 출생에서 인간의 본질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신적인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셨고 모든 인간은 생육의 방식에 의해서 태어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심으로 나신바 되신 방식에 있어서도 독종하신 하나님의 외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으로 오셔야했고 사람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큰 인류의 죄를 모두 속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때 의로움의 공로가 무한한 것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분은 사람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야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했고 우리를 위해서 지불하시는 이 구속의 공로가 무한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흠 없는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는 독생자의 종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만을 말한다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부처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부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슬람교에 있어서 마호멧은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호멧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슬람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기독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독특성은 바로 모든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인간은 누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마지막으로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인류의 모든 운명이 궁금하거든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떻게 나셨고, 어떻게 사시다가, 어떻게 죽고, 부활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오실지를 배우면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 감추어져있고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모든 경륜의 비밀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자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오신 참뜻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온전한 기독교 신앙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독특하게 이 세상에 오셨고 아기 예수를 이 천 년 전에 보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께 죄를 짓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사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 비참한 인류를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절을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약에서는 말로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천 년 전 말구유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일체의 자기 사랑이 없이 온전히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독생자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죽음 때문에 모든 멸망 받는 인류를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독생자의 종교 곧 기독교의 대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의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하며 살기를 원할 것이고 이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그 일들을 토대로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을 얻어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인바 되어 한 지체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기독교신앙에서 예수가 중심이 되지 않고 여전히 내가 중심이 된 종교, 예수가 중심이 아니라 이 세상이 중심이 된 종교, 예수가 아니라 내 번영과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중심이 된 종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우 기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모든 비참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종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말구유에서 보면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때문에 이 성탄절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일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린 일생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믿음의 종교
세 번째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를 닦고 수련함으로써 신을 찾아가는 종교와 그리고 그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당신께 돌아올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종교로 나뉩니다. 전자를 수도종교라면 후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주도적으로 찾아오는 종교라고 말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기초가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완전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이 세계가 인간과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져 존재하도록 창조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인간과 밀접한 결합 속에서 창조하셨고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 이 세계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이 세계도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상실하도록 그렇게 연결하여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처럼 창조하시지 않으시고 당신을 닮은 아름다운 완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한히 선하고 완전한 존재는 아니었고 한정적으로 완전하고 선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었고 자기를 사랑하고 죄를 좋아하기를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함으로써 그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탈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있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무능해졌고 이 무능과 함께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기 위해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불순종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사람도 잃어버렸고, 이 세계도 잃어버렸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 완전히 소외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비참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불멸하도록 지어진 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이제 끽해야 한정된 기간을 살다가 죽는 유한한 육체의 생존기간 밖에 부여받지 못했고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즉각적으로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 일어났던 수많은 문명의 충돌과 전쟁에 대한 역사와 기록들 그리고 나라와 나라들이 반목하고 서로 군비를 경쟁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고 있는 것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들이 남의 자원이라도 빼앗아서라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자하는 정복의 야욕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없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모든 비참함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쾌락에 몰입하며 이 본질적인 인생의 질문을 외면하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모든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의 허무함을 깨닫고 욕망을 줄이고 자기 자신을 가꾸어 그래서 갈등이 덜한 상태로 자기 자신을 수양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비참한 존재가 된 인간이 그 비참함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극복되어 완전한 하나님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 환희, 감격, 즐거움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잊힌 단어들이 되었습니다. 마치 아무 희망이 없고 그리고 어떤 형이 확정되어 죽음의 날을 기다리는 죄수들처럼 인간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죽음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순간순간의 즐거움과 보람에 자기의 인생을 맡기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얻었던 즐거움은 즉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번민으로 바뀌고 실제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이미 얻었던 행복의 기쁨 때문에 더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인간의 이 모든 불행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실 복음의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가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신약성경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은 믿음의 덕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비참해진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님 이외에 어디에도 구원의 길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의존의 마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덕입니다.
이 믿음은 결코 삶과 분리되고 인격과 나눠진 일시적인 심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영혼의 변화이고 불신하려는 경향이 믿으려는 경향으로 바뀌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려는 성향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려는 성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없이 살기 원하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는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지식과 생활이 일치할 수밖에 없고 마음과 정신이 모두 아울러서 함께 이 믿음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성으로써 추론하여 알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초월적인 사실들을 자기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특별히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진리에 대한 탁월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의존하던 신앙을 버려 하나님을 의존하고 자신이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살던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이야말로 이 모든 피조물의 중심에 계시며 자신은 이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수많은 피조물중 하나인데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친 아들처럼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도구삼아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언제나 하신 일이었지만 그 사랑을 깨닫고 행복해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 년 전에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그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고 기뻐하는 우리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내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내가 보낸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가 오신 이 성탄절에 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금이나 은이나 이 세상에서 없어질 보배도 귀한 선물이 되겠지만 그보다도 더 소중한 선물은 여러분의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믿음을 아기 예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셨다는 것과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버림받고 비참하게 나의 영혼과 이 모든 인류의 운명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천 년 전 아기 예수를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D. 영생의 종교
마지막으로 이 천 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기독교가 영생의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고 말입니다. 이 영생은 영원한 생명 혹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영원하기까지 계속되는 이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원하도록 계속되는 생명이 아닙니다. 불멸의 몸으로 다시 입게 된 후에는 우리의 육체도 그런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머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도록 있는 생명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음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
한 십년쯤 되었을 때입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와 합장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금을 기준으로 한 52년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지금을 기준으로 약 26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간의 차이는 26년쯤 됩니다. 그런데 선산이 개발이 되면서 모든 산소를 이장하라고 나라에서 통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 묏자리를 우리는 참 좋아했고 성묘가기도 편리한 서울근교였기 때문에 좋아했고 바로 그 아래는 아버님도 묻히셨는데 결국은 이장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그러니까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한 20년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의 유골을 모두 보았습니다. 다 캐내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다 수습해서 보았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고 뼈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26년보다 훨씬 먼저 돌아가셨는데도 두 유골의 상태가 똑같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남자와 여자의 유골은 뚜렷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나도 할아버지의 유골이 분명했습니다. 그 유골을 앞에 놓고 앉아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할머니와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수십 권의 책으로 써도 다 쓸 수 없는 사랑과 교제의 기억들 그리고 스치고 지나갈 수 없이 마지막에 내가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도 잊힐 수 없는 수많은 기억의 잔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새삼 이십 여 년 전의 일이지만 할머니의 사랑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습니다만 그 흐르는 눈물 속에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것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 존재입니까? 도대체 인간이 죽어서 이십 여 년 만에 그렇게 뼈만 앙상하게 유골이 되는 것과 허공을 날아다니던 곤충이 죽어서 땅에 묻혀서 사라지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인간을 단지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셔서 그 영혼을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 뼈를 현장에서 모두 불태워 절구에 넣고 찧었습니다. 그리고 가루로 만들어 유골함에 담으면서 하나님의 부활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서 한줌의 재밖에 남지 않는 이런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약속이 있다는 것, 그때에는 그 모든 영혼과 육체가 다시 결합되어 하나님의 불멸의 생명을 육체와 영혼 안에서 모두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인간의 비참함 인생의 덧없음과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부활의 위대함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에게 주신 소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이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이 먹어 늙은 네가 다시 엄마의 뱃속에 들어가 태어날 수는 없지만 영혼은 다시 태어나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 종교적인 사람 니고데모에게 영혼이 거듭나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이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다시 공급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늙은 사람이 젊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이 오늘 예수를 믿으면 내일 금시발복을 할 것이라고 그렇게 교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그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공급해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 때에 일평생동안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을 이렇게 거듭나고 회심하는 순간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거듭난 사람 안에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부요하고 풍족하면서도 일체의 감사와 기쁨이 없이 원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 오히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이 세상의 부와 물질적인 자원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전에 없었던 하늘의 자원이 그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 혹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이 비참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이 천 년 전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보면서 우리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그 아기는 당장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직행할 수 있는 아들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따라서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생명을 또한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어디선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진리와 이 생명을 충만하게 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원수도 자기의 모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조차도 진심으로 용서하며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팔복의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그 소금의 고유한 맛을 회복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한 때는 빛이었던 사람들이 빛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어둠속에 찬란하도록 빛나게 만드는 그 빛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 신적인 생명을 교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영원한 생명이 충만할 때 이기고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믿음으로 이기고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과연 하나님은 살아있고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하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사랑의 충만함은 그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얼마나 충만한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날에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희생에 보답하는 것은 아들을 통해 주고 싶으셨던 그 영원한 생명을 충만히 누리고 원수도 사랑하며 어두운 이 세상에서 빛으로 맛을 잃어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서 맛을 내며 살아가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는 아직 말할 수 없는 어린아이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당신의 나심을 경배하기 위해 오는 여러분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들의 속에 하나님이, 생명이 있나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가 오신 이 성탄절에 우리가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보람을 느끼실 수 있으리만치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힘입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기도하고 회개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신자의 마음속에 넘치는 생명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세상에 옹달샘입니다. 그와 만나 교제하고 그에게 전도 받고 그에게 섬김을 받는 모든 사람은 복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지 그 영원한 생명은 그의 영혼을 살리는데 이바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명의 결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미친 듯이 경쟁하고 치열하게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까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수집하려고 하지만 내안에 본질적으로 없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멀리 떠난 고통이 물질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핍의 고통은 넘쳐납니다. 그리고 오늘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인류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기쁨의 원인인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슬픔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고 자원의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목적을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의 천진한 탄생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했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를 보고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치르셨던 육체의 고난을 함께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 오신 이 성탄절에 주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이 충만히 누리고 살아가서 당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보람을 그분이 느끼시게끔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이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말고 이 성탄절에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다면 아마 이 인류 역사상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께로부터 받으신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아들을 선물로 받았으니 여러분이 이 믿음을 주님께 선물로 드려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예수를 보내신 보람을 느끼게 해드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