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을 따라온 경배자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12)
녹취자: 김명진
I. 본문해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시조, 혹은 중심적인 인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석가모니나 이슬람교에 있어서 마호메트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인물들이 자신의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종교가 그 인물들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오신 분을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시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태어난 시점과 날짜가 있고 그를 낳은 육신의 어머니가 있지만, 그러나 그 분은 이미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가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는 성자요,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성품으로는 여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요셉의 집안에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와 세계를 계획하신 작정과 창조의 실행, 구속의 집행, 그 구속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성자가 관여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계는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그를 통하여 구속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탱되고 있고, 다시 그에게로 만물은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시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절대적인 의존을 그분을 향하여 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오신 이 성탄을 우리들이 축하하는 이유는 단지 한 종교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성자를 사람의 몸으로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그 분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신 그 분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채로 오셔서 시간과 공간 안에 매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는 성자를 의존해 있고 특히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들임으로 본래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II. 별빛을 따라온 사람들
오늘 성경은 첫 번째 성탄절을, 아기 예수가 처음 이 세상에 온 그 성탄절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그리스도지만 그를 찾아 별빛을 따라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멀리 이방에 있던 동방의 박사들이 문득 나타나는 기이한 빛을 따라서 그 별빛의 인도를 받으며 아기 예수가 있는 곳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이하게 나타나는 찬란한 별빛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실제로 그런 별빛이 없었지만 동방박사들에게 환상이 보여서 그 환상의 빛을 따라서 온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두 번째 학설은 천문학적인 설명이기도 한데 혜성의 주기를 계산한 끝에 바로 이 시기에 혜성이 지나갔고 그 혜성이 이 동방의 박사들의 눈길을 끌어서 이들을 베들레헴까지 인도했다는 설입니다. 세 번째 설은 이런 환상이나 천문학적인 별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신비한 빛을 비춰 주셔서 그것이 별처럼 빛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들을 인도하여 예수님이 계신 베들레헴까지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야사에는 이 세 사람들의 이름까지 등장하는데 메르키오르, 발타사르, 카스파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전합니다. 오늘 박사라고 번역된 ‘마고스’라는 희랍어 단어는 원래는 ‘마술사’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귀신을 이용해서 점을 치거나 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었는데 철학자, 혹은 현자, 자연의 이치로 세계의 운명과 인간사에 대해서 탐구하는 사상가들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영어 성경에서 ‘마고스’를 ‘The wiseman’, ‘현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A. 동방 박사들에게 먼저 알리심
이 사람들에게 찬란한 별빛이 비췄고 아마 이 사람들은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세계의 운명과 인간의 미래를 생각하던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별빛은 명백하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기 위한 별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이 기이한 별빛이 먼저 동방박사에게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백성들인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 탄생의 기쁜 징조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방인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습니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죄와 사망이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즉시 죽임을 받고 죽어야할 백성들에게는 자연적인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자손을 낳아 그 후손이 인류를 이어가도록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후로부터 메시아의 예고에 대한 끊임없는 약속들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체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약속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올 것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유대주의라는 잘못된 사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계명을 다윗 왕국의 회복이라는 정치적인 부흥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죄에 물든 인류를 구속하고자 하는 위대한 계시의 물줄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한 소경이 되었습니다. 무지와 불신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기 예수께서 오신 이 기쁜 징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복음의 축복을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참된 구약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분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분께 죄를 고백하고 그분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거절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버린 그 복음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꽃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받고 구원의 약속까지도 얻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상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완전히 소경이 되어서 아기예수 오신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생활 그 자체가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곧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쁨은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닮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오신 소식은 유대인들에게는 감추어 졌고 오히려 제일 먼저 동방의 이방인들에게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오래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교회생활에는 빠삭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B. 길을 잃은 경배자들
그런데 이 동방 박사들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정말 인류의 왕으로 오신 세계의 행복에 무엇인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실 예수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별빛은 밤에 빛났을 테니 낮에는 휴식을 취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어둠속에 잠기던 때에 깊은 잠자리 고요한 한 밤중에 그들은 여행길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찬란한 별빛의 인도를 따라 산 넘고 물을 건너 들판을 가로 지르고 도시를 지났을 것입니다.
그 별빛의 인도를 따라 먼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이 세 사람이 하늘의 들을 관측하다 기이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행복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예고하는 별빛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를 경배해야 했습니다. 황급히 행장을 꾸리고 낙타를 타고 집을 떠납니다. 아내가 묻습니다. “여보, 어디 가세요? 이 밤중에”, “별빛이 나타났어. 세계의 운명과 인류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한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징조야.”, “어디서요?”, “몰라.”, “언제까지 가야 돼요?”, “몰라.”, “어느 방향으로 떠나시죠?”, “몰라.”, “언제 돌아오세요?”, “알 수 없어.” 그러나 그를 경배하고자 하는 일념이 그들로 하여금 이 무모한 여행길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를 걸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별빛이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밤마다 이 동방의 박사들을 안내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마음속에 이 세계의 운명과 인류의 행복을 좌우할 한 위대한 왕의 탄생을 알현하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 별빛이 사라졌습니다. 그 시간이 낮이었다면 이 사람들이 이상해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낮에는 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밤이었습니다. 별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그 별빛의 인도만을 따라왔는데 그 날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곳의 지도자들을 찾아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당신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묻습니다. 우리가 동방으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별빛이 찬란하게 빛나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그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별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이 종교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만약에 그리스도가 태어나면 어디에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을 들려주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 이러라. 박사들이 알아차렸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로구나.’ 그들은 다시 떠났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을 벗어났던 것 같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별이 다시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만 비밀로 부치시기 위해서 감추신 것처럼 별빛이 사라지게 하셨고 그들이 예루살렘과 헤어지자 그 찬란한 별빛이 다시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우리 인생의 위기가 항상 죄 때문에만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인생의 위기는 확실히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옵니다. 또 우리같이 탁월하게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야 하지만 그렇지만 예외 없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위기와 시련이 죄 때문에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죄 때문에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무슨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만나서 나라 하나 쯤 떼어 받을 욕망을 가지고 그 먼 길을 떠났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께 드릴 황금을 준비한 것은 그분께 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큰 보물을 받고 싶어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진귀한 유향을 바치기 위해서 비싼 값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분께로부터 어떤 기적적인 은사를 받아서 예전에 없던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자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께 바칠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이 동방박사들이 오직 주님만을 경외하고, 주님만을 섬기고, 주님만을 예배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는 그 긴 순례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만 동기가 순수하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절실한 소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잠시 별빛조차 사라진 어두운 밤하늘 아래 자신이 가야할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야 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런 때가 우리에게는 왜 없겠습니까? 시련과 폭풍이 몰아치고 환난과 위험이 닥쳐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상황들이 뒤흔들립니다. 이 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그 힘찬 시련과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닥칩니다. 저녁에 눈을 감으면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시련의 날들이 엄습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탁월한 기쁨,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은총의 시간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믿음이 흔들리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분별력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권세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동방의 박사들은 그 찬란한 별빛이 지시하는 바를 알았습니다. 그분은 세계의 운명과 인류의 행복에 무엇인가 엄청난 의미를 던져줄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잠시 길을 잃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별빛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이 각기 자신이 살던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왜 그랬느냐고 비난을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별빛의 인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이미 아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에서 물러나기 위해, 순수한 신앙이 변질되기 위해, 불타는 사명을 저버리기 위해 학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 길은 이미 우리들이 아는 길입니다. 그냥 우리의 욕심이 끌리는 대로 교만과 거짓을 친구 삼아 육욕을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별빛조차 사라진 예루살렘의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 한 열망이 솟구쳤습니다. 간절히 솟아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그 분을 경배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마음을 보시고 절망의 어두움 속에 다시 찬란한 별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하나님은 경배하고자 하는 자를 인도하십니다.
III. 경배하는 자를 인도하심
신자의 최고의 자산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신앙의 지조나 절개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도 고생이 있는데 이 변천 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고난이 없겠습니까? 진리는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단 하나의 별처럼 오류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별빛을 헷갈리게 하는 때로는 그보다 더 찬란하고 현란하게 보이는 수많은 오류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사람의 똥을 모조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없지만 다이아나 금을 모조품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전자는 가치가 없는 것이고 후자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지성 안에서 오류와 싸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 안에서 추한 것을 미워하며 다투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의지 속에서 미움과 다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욕을 따라 살면 가장 편안해 하는 인간에게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구원을 받고, 이 세계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는지를 알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예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깨달은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소명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들이 이 작은 교회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또렷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한 어찌 고난이 없겠으며 뜻을 세우고 가는 한 인간의 외로운 길에 어찌 시련이 없겠습니까? 안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살려는 신앙적인 나와 여전히 나를 주인 삼으려는 또 다른 나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고, 세계에는 창조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빛과 그 하나님을 모든 사상에 없다고 외치는 인간의 불신앙이 싸웁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방식을 교회 속에서 고집하며 함께 활동하던 터전만 옮겼지 세상에서 추구하던 바를 그대로 교회에서 추구하려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저 공중에서는 이 땅에서 마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 세상의 역사와 인간을 부여잡고 하늘의 위대한 힘을 이 땅에 행사하려고 하는 악한 영의 세력과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며 살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속에 있는 걱정, 밖에 있는 근심, 편할 날이 없이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동기가 순수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고 싶었는데 때로는 주님의 인도가 끊어져 별빛조차 사라진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홀로 외롭게 동지도 없이 흐느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모든 시련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있는 참 신앙을 입증합니다.
(찬양)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맘을 충만하게 채우사 오 주님
우리는 그 때마다 주님을 경배하며 사는 일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회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깊이 가슴에 새기고 다시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오랫동안 열린 교회를 섬기셨던 이동수 장로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분과의 개인적인 추억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 이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두어 주 전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습니다. 병실에 온 저를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간절히 위로하고 기도해드리고 돌아왔습니다. 본인도 일 년 쯤 치료 받으면 완쾌될 것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부음에 접하며 문득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약 16년 전의 시간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교회에서 저와 첫 번째 대면하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한 때 성공한 분이었고, 별장만 30억이 넘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토요일마다 그곳에서 쉬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잘 나가던 자신의 삶이 사실은 하나님 없는 삶이었다고 고백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줍은 여학생처럼 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최근에 자신이 어떻게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었는지, 지난 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성공을 위해 달음질 쳤던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고백하며 수줍은 여학생처럼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막되 먹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고백할 때는 그 분의 볼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분의 왼손 등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있는 것을 어떻게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사라진 것을 어떻게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위대한 인물의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에서 사실은 없는 것이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 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라고 말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사라지는 것들에 에워싸여서 흘러가는 인생이고 성도는 그 허무한 세상에서 불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그 불멸의 가치를 따라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제가 유언처럼 여러분에게 남깁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허무할 뿐만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섬기고 부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잠시 별빛조차 사라진 어두운 인생의 밤 아래 홀로 흐느끼는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 사람,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수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그렇게 허무한 세상에서 불멸한 신앙을 따라 하늘 가치를 향해 살도록 아기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오늘 이 성탄절에 여러분이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은혜 받는 오늘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