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마1:23)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마태복음 1장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따라서 구체적으로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태어나게 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예고된 출생
처녀가 잉태를 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고된바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중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라는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잉태하신 이 사건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그렇게 동정녀 탄생하실것을 예고 하였던 그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동정녀 탄생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만약에 사람이 사람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인간과 같이 예수님이 그런 생식의 방법으로 오셨다면 그분은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부모에게로부터 물려 받아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모든 인간들이 대를 이어 가면서 죄와 함께 오염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셨을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의 생식의 방법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만약에 사람의 몸에서 생식의 방법으로 태어나셨더라면 예수님은 반드시 사람의 인격을 가지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함있는 인간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인 신성과 사람의 성품인 인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격은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만을 가지고 계신 단일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와의 생식을 통해서 인성을 취하고 그 인성은 인격과 함께 취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격 없이 사람의 몸을 취하여 신의 인격을 가지시고 사람이 되신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반드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취했으나 인격은 사람의 몸에서 취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방식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정녀 탄생은 죄 없으신 사람이 되시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월경을 통하여 잉태 하셨느냐 안 하셨느냐를 가지고 이단 시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논쟁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남자의 씨와 여자의 씨가 만나서 잉태된 것이라면 마리아는 반드시 월경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복중에 온 것은 초 자연적인 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마리의 몸이 그런식으로 준비될 필요가 없다고 봐야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무익한 논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에 대해서 흠집을 내는 논쟁들입니다. 그런 도움 필요 없이 성령으로 직접적으로 인간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셨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이 출생은 예고된 출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이미 예고 하였고 그리고 천사도 마리아에게 이미 예고 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는 아주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여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자로서 당연히 느끼게 되는 커다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복종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생산해 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A. 임마누엘
이렇게 태어날 메시아의 이름까지 예고 되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이었습니다. 이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구인데 ‘임’ 이라는 것은 함께 라는 뜻이고 ‘마누’ 라는 것은 1인친 복수가 붙어서 ‘임’ 함께하다, ‘임카’ 남자인 너와 함께 하다, ‘임크’ 여자인 너와 함께하다, ‘임마누’ 우리와 함께 하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누’ 라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한다 혹은 함께 있다는 뜻이고 ‘엘’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수명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의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로 예고 되었던 것입니다.
B.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통해 큰나라와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이제 중다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중다한 수의 민족이 되었고 그랬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중재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미 세우신 언약을 이스라엘 자손과 새롭게 맺으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셨던 지상최대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토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머지 모든 약속은 그 약속에 매달린 것이고 심지어 요한복음 3장16절도 바로 그 말씀에 매달린 말씀들이고 그 하나의 말씀이 전개되어간 역사가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언약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그 백성과 하나님의 그림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왕과 함께 하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국가는 애굽과 같이 그렇게 커다란 국가는 별로 유례가 없는 국가였고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에 초상때부터 경험한 나라들은 작은 도시국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몇십나라 왕과 몇십나라 왕이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아브라함도 그들과 함께 전투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왕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로마제국이나 애굽제국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처럼 있는 하나의 성 안에서 불과 일이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무리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도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확대된 씨족사회 같이 왕이 어른으로 군림하지만 지금처럼 그런 어마어마한 대형 국가의 존재가 아니라 한 씨족과 같은 곳에서 왕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으로서 분명한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왕은 백성들을 떠난 왕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그 성에서 살아 가면서 운명을 함께 하는 왕입니다. 거기에서 바로 하나님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라고 하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성에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고 주님이 우리의 식구중 한분이 되셔서 그래서 가족과 같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작은 왕국의 꿈을, 그림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속에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는 이 그림은 가족관계로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한문의 집 ‘가’ 글자가 돼지 우리에서 돼지들이 세끼들 젖 먹이는 것을 그린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처럼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울타리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이 세상에 보낼것을 약속하시면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선지자에게 미리 말씀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하시고 싶으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1. 언제나 함께하심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다 라고 생각할때에도 하나님은 그들 가까이 계셨고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할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이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정탐꾼으로 가서 그들의 장대한 기골을 보면서 두려워 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셔서 결국은 그 가나안을 정복하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역사는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해 온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임마누엘과 함께 계시되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가 아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위에 계신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온땅과 만물 위에 아주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고 권위로 우리를 다시리는 시기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 성령이 오신 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도 안 계시지만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그리스도가 하신 것과 똑같은 일을 하시고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성령의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존재로서 우리 안에 쑥 들어 와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렇게 와 계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매우 탁월하고 특별하게 관계를 가지고 교통하심으로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이것을 가르켜 우리는 성령의 내주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특별히 함께하심: 성육신
한 시대는 하나님이 우리의 위에 계신 시대이고 한 시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시대라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계셨던 성육신의 시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시대였습니다. on , in, with 라는 영어 전치사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god on us, god in us, god with u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두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눈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거친 손으로 내미시는 보릿떡과 물고기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자신들을 먹이고 입히시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었고 그것도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직접 예수님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손을 직접 만지고 그리고 예수님에게로부터 병고침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 신체적인 접촉이 가지는 커다란 영적인 복이 결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주님을 만져보고 경험하게 만드는 우리의 영적인 경험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찬송)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 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이것은 우리가 예전에 제자들과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져 보는 것처럼 그렇게 물렁물렁한 주님의 손을 만져 보거나 혹은 그분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그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실 때 우리는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을 만났을 때 보다 더 확실하게 그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3년을 살았던 도마도 예수님이 오셨을때에 예수님을 의심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을 직접 손 만진적이 없어도 주님을 우리가 영으로 만났기 때문에 육신으로 본 사람보다 더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이렇게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에게 접촉되었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놀라운 교제를 가지신다는 이 복음적인 성취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III. 결론: 믿음으로 반응
그러면 이제 이런 하나님의 아들인 임마누엘, 우리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안에 계신 그 하나님의 임마누엘 되심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의 교통을 누리면서 이 약속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임마누엘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때에는 데가볼리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고 유다로 내려 가셨을때에는 갈릴리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임마누엘이 아닌 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가진 임마누엘로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임마누엘 하시며 그들안에 살아 계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을 모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의 눈에 슬픔의 눈물을 씻기시고 낙심한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충성하게 만들고 시련과 고난속에서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반응하며 사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올바른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 예수로 오신 이 성탄절에 이렇게 임마누엘의 깊은 의미를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에 넘어져 고통 받고 우리의 마음이 황폐해졌던때에는 주님 없이 넘어진때이고 그리고 시련과 고난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풍족함속에서도 물러가 침윤에 빠지지 않던 때에는 임마누엘의 주님과 함께 하던 때 였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고 명예를 주시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임마누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어느 곳에서나 당신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오신 성탄절에 이처럼 주님을 충만히 누려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임마누엘 때문에 완전한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