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의지할 주님 (2)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악인에게 지는 것 같고 악인이 형통한 것 같은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에게는 이처럼 이 세상의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위대한 하늘의 자원이 있습니다. 그 자원의 힘으로 말미암아 감당할 수 없는 현실들을 견디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은 악인이 형통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로 삼으셨다고 찬송했습니다.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과 거기에 맺혀지는 열매들로서 이 감람나무를 상징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렇게 시인처럼 하나님의 집에 심기어진 감람나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당신의 집에 심으시기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그 분은 죽으시고 여러분은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역경의 때를 지나면서도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생명과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삶의 사태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이 없었더라면 절망하고 낙심하였을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시인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II. 주 뜻 행하시는 하나님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우리 주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이 시인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께서 일을 행하셨으므로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을까요? 어떤 일을 행하셨기에 이 시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두 가지였는데 잠시 형통해 보이지만 악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 이것은 단순한 확신이 아니라 시인이 일생을 살면서 겪어온 경험이었습니다. 악인은 잠시 번성하는 것 같지만 마치 벤 풀을 풀 위에 던져 놓으면 처음에는 그 푸르름이 살아있는 풀과 구별이 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검불이 되어 허공중에 흩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악인을 다루시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도액과 그 일행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고 시인은 그들에게 구박을 당하며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선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악인들을 징벌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믿음을 시인에게 주시기까지 하나님은 수없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 신실하신 성품을 체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앞에 벌어지는 이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들을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 오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지식의 빛 아래에서 해석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직 하나님이 자기 앞에 있는 악인을 심판하시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 시인의 마음속에 그 악인은 이미 심판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국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이 당신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많이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꽃의 향기나 그리고 풀의 아름다운 냄새들이 그 풀과 꽃들이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풀과 꽃들이 벌레의 침입이나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뿜어내는 냄새이고 향기입니다. 허브를 냄새를 잘 맡기 위해서는 한참 손으로 괴롭힌 후에 그 향기를 맡아 보아야 합니다. 백합화가 산속에 고요히 있을 때에는 그리 큰 향기가 나지 않지만 벌레가 침입하거나 혹은 바람에 나부껴 곁에 있는 가시에 찔릴 때에 진동하는 꽃의 향기가 울려 퍼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지혜로서 우리가 인생 중에서 만나는 시련과 고통, 우리가 원하지 않은 아픈 삶의 사태들을 통해 그것을 활 삼아 우리를 연주하기를 마치 능숙한 연주자가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내십니다. 긁히는 줄과 긁는 현이야 유쾌할 리가 없지만 거기에서 울려 퍼지는 곡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의 정동들을 실어 나릅니다.
시인은 그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다시 한 번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뽑힐 수 없이 견고하게 심겨진 감람나무이며 또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적들을 향해서 개인적인 복수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는 자신과 모든 악인들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을 향해서는 그 악을 바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통 속에서도 선을 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선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우리 여호와의 그 섭리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집에 심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은혜의 세계, 시련과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의 비밀들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 말고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이 시인처럼 고난의 때를 하나님 의지하면서 그의 은혜의 비밀 속에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고통 받을 때 구할 바
A. 주께 감사함
그러면서 이 시인은 자신이 악인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을 때에 구하여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 감사함과 주를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심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겠사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그는 고난을 받으면서 주께 구할 바를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묘사하였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잠시 번성하는 것과 같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믿었기 때문이고, 또 그런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말려 죽게 하시는 대신 악인들은 알 수 없는 은혜의 생명들을 이 시인의 가슴속에 가득 부어주셔서 시련을 이기고 고난을 견디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소중한 것들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공개적으로 주시지를 않고 비밀스럽게 주시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일생을 돌아보더라도 형통하고 모든 것을 누리며 내 마음대로 번영하던 때에서는 우리가 감동을 받으며 추억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으로 얼룩진 우리의 인생의 날들, 피할 곳이 없어서 폭풍을 만난 작은 배가 항구로 급히 피난하듯이 주님의 품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통과 눈물의 때에 만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두고두고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지혜의 샘이 됩니다. 이 시인이 바로 이런 경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터치는 감격으로 감사의 찬송을 올릴 수 있었으니 이는 시련과 고난을 당해도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평강이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엽게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외적인 환경 속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조금 번영하면 교만해지고 번영이 끝나면 낙심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니 하나님이 무엇을 그에게 주셔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미끄러지고 무엇을 거둬 가셔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니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의 결국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일어난 아주 좋은 것들도 결국은 좋은 것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과 같이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나쁜 일들도 그것은 나쁜 일일 수 없으니 그 나쁜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기회로 삼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모든 것이 형통하고 왕위에 올라 호위 호가하던 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넘치고 악인으로 말미암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인생을 뒤덮을 때 거기서 그는 자신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에 뿌리박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고난과 시련,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은혜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환경을 통해서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당신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당신을 찾고 어린 아이처럼 당신께 의지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영혼에 은밀히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자의 마땅한 반응인 동시에 앞으로 주실 은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자신의 삶 속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기대가 함께 공존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이 시인은 하나님 이외에 자신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 한분께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무엇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당하는 시련과 고통이 너무 아파서 주님의 품을 찾았더니 하나님은 이 시인을 큰 바위에 숨기시고 당신의 손으로 덮으셔서 이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자비와 은혜를 이 시인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인의 인생의 마당을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무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우리 주님을 향하여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주를 사모함
시인이 그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구하게 된 또 한 가지는 주님을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이름이 선하심으로 성도들 앞에서 내가 주님의 이름을 사모할 것입니다.” 여기 사모할 것입니다 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말로 ‘바꾸베’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사랑한다기보다는 소망을 둔다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에게 소망을 두시거나 우리를 의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랑 속에 의지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설교하러 올라오기 전에도 조용히 앉아서 책을 쓰다가 올라왔습니다. 마침 쓰던 그 내용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냈을 때 우리가 어떠한 감정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일종의 마음의 버릇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의지하는 감정이 그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한 사람의 고통은 그를 떠나보낼 때에 의지할 대상은 사라졌는데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버릇이 남아있으니 이는 형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자의 죽음은 남아있는 자의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떠나보낸 삶은 남아있는 자의 죽음이 되어서 슬픔과 비탄 속에서 상실의 고통을 겪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결국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였으니 그를 잃어버릴 때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인간에게 흔히 있는 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바깥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상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어 놓는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니 덜 사랑하면 덜 사랑할수록 인생이 안정감을 갖는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사랑의 비밀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되 홀로 있는 단독자로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함으로 사람을 사랑하되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그를 잃어버려도 그를 사랑하게 만든 사랑의 원천이었던 그리스도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니 또한 잃어버린 사람 때문에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사람을 향한 사랑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언제 말입니까?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나의 이웃들과 나의 가족들을 한없이 사랑하지만 그들에게서 무엇을 구하지는 않는다는 것, 끊임없이 나를 흘려보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지언정 그들로부터 흘려 들어오는 어떤 것에 대한 기대 때문에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니라는 신앙 말입니다.
시인은 바로 악인이 번영하고 자신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는 그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제가 주의 이름에 소망을 둡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함께 두려워합니다. 이 시인이 그런 하나님께 깊이 의지하는 법을 인생의 고난의 때에 배웠습니다.
시인이 앞으로 자신에게 전개될 인생의 날들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현실 속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아닌 현실 속에서 어떻게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할만한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시인에게 이 확신을 심어주었을까요?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선하시기 때문이옵나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할만하다는 사실을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알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만약에 사랑이 깊지 않다면 그 결점 때문에 그를 추하게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마음 안에 그를 향한 사랑이 아직 충분한 성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를 향한 사랑이 진실하고 크다면 결점을 발견하였어도 그 결점조차도 그것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사랑하는 자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박애적인 사랑이고 이 박애적인 사랑은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렇게 악인의 번영과 자신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깊이 터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 자신이 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시인 자신이 하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결국은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보호받으리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때에 이렇게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 선하심에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고통스러운 한 순간이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연주하여 아름다운 찬송의 가락이 울려 퍼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발견이었고 아름다운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의지하겠습니다.” 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렇게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많은 성도들을 깨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인이 자신의 경험 속에 우러나오는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의 언어로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니 악인의 결국을 하나님이 정하셨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신에 불탔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주는 두려움과 고통에 대한 전망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이 노래의 불길을 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V. 적용과 결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온 인생은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 다음으로 우리의 신앙의 유익을 주는 증거는 그 성경 말씀을 믿으며 살아온 우리의 신앙의 경험입니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운 시련의 때에 그리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뜨고 싶지 않은 고통의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께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은밀한 장막으로 피하여 악인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녹아내리는 마음의 눈물과 쏟아지는 탄식 속에서 언제나 주님은 평탄한 길을 걸었더라면 결코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을 당신의 성품의 비밀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는 든든한 버팀목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환경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사랑의 증거를 없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외칠 수 있었습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완전한 이 세상에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어떻게 우리의 삶에 굴곡이 없겠습니까? 맑은 날이 있는가 하면 비바람 치는 날이 있을 것이고 따뜻한 봄날이 있는가 하면 눈보라 치는 겨울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퍼져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맛보도록 가르쳐 주는 기회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의 악을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악을 악으로 갚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고 악으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가 자신에게서 끝나도록 하나님 앞에 사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악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대신 그 악에 대해 여러분이 최종적인 피해자가 되고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여러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살아있는 많은 성도들 앞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시인처럼 노래하며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악인들이 보기에 여러분은 외로운 것 같고 부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러분이 잃어버린 자 같아도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