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지신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8:9)
녹취자: 박효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그 이야기 끝에 오늘 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상당히 안타까운 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섭섭했다라기 보다도 안타까운 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고린도전서에서는 교회의 부도덕한 문제와 파당이 나뉘어지는 문제 그리고 또 은사를 갖고서 서로 자랑하는 문제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고린도후서에서 오늘 이 8장에서는 마게도냐 교회 같이 그렇게 정말 환란을 많이 만나고 가난한 교회였는데도 넘치는 헌신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그래서 구제 헌금을 아마 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에 그 마게도냐 교회가 그 가난하고 환란을 많이 당한 교회였는데도 하여튼 거액의 헌금을 했습니다. 오늘 헌금 이야기를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하나님 앞에 받아 은혜가 크니까 가난한 사람을 통해서도 큰 헌신이 나왔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바라보고 또 우리들이 실제로 목회의 현장을 바라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재능을 갖고 있거나 또 시간이 많거나 혹은 재물이 많거나 혹은 충분히 건강한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유지되고 교회에 많은 헌신이 받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저히 환란을 많이 당해서 소망이 없고 그리고 극도로 가난하고…….
(예화) 하나님 앞에 처음 예수를 믿고 어렸을 때 믿었습니다만 변화를 받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뭐든지 좀 받히고 싶은데 쥐뿔이나 받힐게 있어야지. 아무리 봐도 들여다봐도 받힐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늘 드리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드려서…….
(찬송) 내 무엇 주님께 받히리까
그맘때 이 찬송을 굉장히 많이 좋아 했었는데 하나님 앞에 뭔가를 드리고 싶은데 이 드릴게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다운 헌신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나 시간이 많은 사람이나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으로 바라 볼 때 아무런 능력이 없고 힘이 없는 것 같은 사람 같은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통해 넘치는 헌신을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느냐? 그것은 환란과 극한 가난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참된 기쁨이 있으니까 이런 하나님 앞에 섬기고 싶고 헌신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섬김이 부족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누구 탓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큰 깨달음을 얻고 그리고 심령의 기쁨이 넘치면 그러면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 시간도 건강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렇게 드려야지만 마음이 편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받히는 것이 한 없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는 꾀 부자였단 말입니다. 도시가 상업도시 이 사람은 샐러리맨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그렇게 돈이 많지 않습니다. 그 생활은 안정적이지만 그렇게 돈이 많지 않습니다. 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안 벌릴 때는 돈이 안 벌리지만 벌릴 때는 아마 왕창왕창 벌리나 봅니다. 장사해본적은 없지만 그러니까 돈이 말하자면 돈이 흔한 겁니다. 이 고린도시가 항구에 위치한 산업도시였습니다. 무역이 행해지고 그러면서 한 밑천 잡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교회 꼭 교회에 가난한 사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부요한 사람들도 오고 가난한 사람도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볼 때 마게도냐 교회가 그렇게 결국 어떻든지 간에, 이유가 어땠든지 간에 예루살렘이 아니었다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모교 회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예루살람 교회에 복음에 사실은 복음에 빚을 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교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누가 복음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흉년이 들어서 지금 굶어 죽어 간다고 했을 때 복음에 빚을 진 이 고린도교회로서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교회에 돕는 일이 헌금하는 일이 당연했는데 매우 안했습니다. 인색했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이 섭섭했던 모양……. 섭섭했다라기 보다도 자기가 쓸라는 것이니니까 섭섭했다기보다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헌금이 안 들어와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 연보가 안 들어와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야! 그래도 내가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런데 너희들의 믿음이 겨우 그것 밖에 안 되느냐?" 그러면서 안타까워 하다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는 그 마지막 결론에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주는 말씀을 통해서 복음에 메시지를 한번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재밌는 게 '은혜'라는 말이 '연보'라는 단어와 말하자면 같은 어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단어 갖고 말하자면 Wordplay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하기를 뭐라고 했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가난한지가 아느냐? 그 사람들이 굶어가고 있다. 너희가 하루 먹을 것을 갖고 그 사람들은 열흘을 먹을 수 있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않느냐?"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들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복음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제세하고 그 복음의 정신을 갖고서 그들의 물질생활을 한번 교훈하려고 하는 이런 사도의 의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사도는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만 그 예수를 우리 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헌신되고 그렇게 헌신되고 또 예루살렘교회나 고린도교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받힐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앞에 헌신된 이 사도에게만 그리스도가 예수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렇지 못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도 예수는 그리도였고 그 그리스도는 우리 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통해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라.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든 덕행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덕행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잘 알아야지만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체험해야지만 비로소 그리스도다운 덕행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뿐만이 아니라 골로세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할 것 없이 계속 그 교회에 편지를 써내려갈 때는 교회에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설교만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어느 교회는 이단으로 흐르고 어느 교회는 이런 문제를 갖고 헤매고 어느 교회는 자꾸 거짓된 교훈을 쫒고 또 어느 교회는 이런 문제가 있고. 그런 구체적인 교회의 문제를 다루다가 사도 바울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생축으로 드리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라. 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니라."이러면서 계속해서 그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하는 당연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교회에게 되풀이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주요, 예수요 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모든 교회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이었습니다.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그것을 다시 회상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였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 예수는 먼저 너희의 주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고린도 교회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고린도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은사도 많았고 성령의 역사도 많았습니다. 방언과 예언이 그치지 않았고 지혜로운 말을 전하는 자들과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상기시키는 것은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밖에 죽으신 것을 깨닫는 순간에 복음을 듣고 그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고린도교회에 교인들은 한때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케하셨으나 우리는 당신의 종이나이다." 이런 신앙과 헌신의 고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나이다." 이것은 뭐냐면 "이제는 내가 주님의 뒤를 따라서 주님은 나를 자유하라 하셨으나 그러나 나는 주님의 종처럼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인 내 인생에 최고의 기쁨이옵나이다. 그것이 바로 이전에는 나의 육체대로 자유하였으나 이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묶이기를 바라나이다."
(찬양)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인생들이 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사랑에 묶여서 살아가길 싫어합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적당히 자기의 육체가 살아 있고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그리고 내가 원하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압니다.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즐거우니까. 문제는 이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우리의 믿음과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굳게 묶이고 붇찹히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 그리스도께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란 마음에서 애를 쓰면서 몸부림치면서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매여서 묶이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화) 두란노에 나온 그림책 가운데 지난번에 그 대전에 갔을 때 두란노에서 나온 그림책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막! 그 미안합니다만 거름 같은 똥 같은 것이 잔뜩 있고 그리고 여기에는 수영하는 높은 다이빙 틀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거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빠져가지고 거기에 막 허우적거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뭘 하냐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세요. 흑흑흑" 흐느껴 울면서 "못살겠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두 번째에 나오는 사람은 뭐냐면 노래를 부르며 거기서 나온 다음에 다이빙 틀로 다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랄랄라~" 거리며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맨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다시 손을 좌우로 흔들면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제목이 <미련퉁이>입니다.
늘 그 하나님의 사랑에 묶이면서 사는 것이 옳고 그것이 참되다는 것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자아는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순종하던 그 죄 된 인간의 버릇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봉할 때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할 때 스릴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에 어긋나서 살짝 벗어날 때 서스펜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살아가길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 봐라! 내가 불순종하는데도 끄떡없다." 스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성이 아주 못된것입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너희의 구주시오. 그리고 너희는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너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묶여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구원을 아름답고 감사하게 여기며 그 구원 안에 사는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는 구원 받고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고난 이후에 그 다음에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해서 신령해지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신령해져야 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금식하고 철야하며 자기 몸을 괴롭게 하고 그렇게 뛰어난 기도의 영을 소유할려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앞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누구인가를 하는 것을 늘 확인해야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하자면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바둑을 좋아하며 두면 거기에 깊이 미치는겁니다. 그런데 하여튼 어떤 사람이 바둑에 유명한 고수였는데 하여튼 깊이 두다가 졌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이 ‘아! 나는 인생이 끝이다.’ 그러면서 이제 그 바둑계에서 영원히 은퇴해갖고 ‘이제 초야에 묻혀 살다가 죽어야겠다.’ 그러면서 봇다리를 싸가지고 깊은 산에 들어가 넘어가고 있었는데 날이 컴컴해서 어느 집에 들어가서 “주인장님 하루만 묵어갑시다.” 그랬더니 들어오라고 그럽니다. 딱 들어가서 보니까 바둑판이 있더랍니다. 다짜고짜 "주인장. 바둑 둘 줄 아시오?" 그러니까 “그럼요.” “내가 한수 가르쳐줄테니 나랑 둡시다.” 무슨 이야기냐면 인간이 봇다리를 지고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게 패배한 사람인가를 알고도 봇다리를 집어 들고 가고도 그 바둑판을 보고서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내가 이제 한 수 가르쳐줘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늘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엇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고린도교회 사람들. 또 그렇게 구원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일에 실패하고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 교인들을 향하여 지금도 주님의 은혜는 넘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에 전혀 합당하게 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 예수는 지금도 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참된 것이 무엇이고 그릇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는 은혜를 계속 보내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 그리스도의 은혜를 패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그리스도의 그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한번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후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건전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들려 고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뜨거운 열심히는 오늘도 사도를 통해 잘못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만약에 이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기는 뭘 합니까?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환란에 많은 시련과 극도로 가난한 가운데 피죽도 끓여먹지 못하는 후배의 그리스도인들 마게도냐 사람들의 삶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감격 속에 살면서 예루살렘 교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할 때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며 그 형제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린도교회 삶을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삶입니까? 그러나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말씀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그리스도가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고 좀 더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이미 베풀어주셨던 그 과거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였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오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의 은혜를 믿을 수 없고 오늘 주신 은혜를 은혜로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전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과 구속의 은혜를 인하여 오늘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내일에 우리에게 주실 그 은혜를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어떻게 고린도교회에게 임하게 되었는지 어떤 모양으로 그 은혜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떤 분이셨는지를 말합니다. “부요하신 자였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 그것이 너희에게 은혜였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만 그리스도 예수가 부요한 분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의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부요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을 때 무엇을 원하는 게 있으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말하셨습니다. “섬김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왕들이 이 땅에 오는 것은 섬김 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선한 군주들은 백성 위에 굴림 하였고 악한 군주들은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었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핍박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한 번도 “내가 이 낮고 천한 세상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그러냐하면 주님의 관심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 하고 그리고 자기의 몸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 물로 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 기증의 바람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뒤를 따라간다.” 그럴 때 우리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가 자꾸 실망을 합니까? “예수 안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하신 것이 예수 안에 없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실망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로부터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예수처럼 살고 그러다가 예수처럼 죽으라는 것입니다. 좀 냉정한 이야기인 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를 믿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받은 다음에 예수처럼 살다가 예수처럼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울하고 그리고 늘 부란하고 쫒기는 것 같고 고통으로 얼룩지고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인생을 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아 계셨을 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내게 있다. 나는 곧 생명이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그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만족을 누리면서 알아갈 수 있는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그분이 부요해지셨으나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오히려 가난해지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오히려 가난해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우리가 부요해지려고 하면 꼭 물질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부요하졌었는데 오히려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더 부요하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그 부요했던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는 그 부요했던 것들을 청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부요하신 분이었던 것은 아마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신 그 영광을 다 버리고 그리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셨습니다.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영광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버리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부요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비로소 살만해졌는데?” 그런 물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요한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참으로 알게 되자 이 세상에서 부요해지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우리의 그 진심으로 가난하고 목마른 것들을 체를 수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삶을 그 한목음의 물을 구하기 위해서 우물가에서 그 물을 캐는 사마리아 여인 같이 그런 삶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니까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었고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오 보좌 우편에서 내려오신 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받으시기에는 합당한 그분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부요하시고 그 부요하신 것을 버리지 않으셨을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 버리고 낮아지고 비참해지고 가난해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너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가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그리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고 영적으로 무슨 좋은 은혜와 은사를 누리며 하는 이 모든 축복들. 심지어는 오늘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듣고 있게 된 이런 놀라운 신앙적인 특권들도 모두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낮아지시고 그가 자신의 부요함을 스스로 버리시고 가난해지고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러한 해택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전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 낮아지신 분으로 말미암아 가난했던 우리들이 부요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구원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부요하던 자리에서 낮아지는 자리로, 가난한자리로. 높아진 자리에서 낮아지는 자리로, 부요하던 위치에서 가난한 위치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는 가난한 삶으로 섬기려고 하는 삶에서 섬김을 받으려는 삶에서 섬기려고 하는 자리로 내려오게 될 때 가난했던 하나님의 교회는 부요해하게 되고 그리고 가난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회가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부요하게 나타나게 되는 이런 법칙을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짧은 기간 내에 놀라운 부흥을 이뤘던 하나님의 교회들과 늘 성령이 함께하시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전도 사역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 자신은 한 없이 이 세상에서 부요해지는 것을 미웠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안일하고 그리고 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로 인정을 받으면서 그렇게 사는 것들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은 낮아지는 자리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의 모든 것들을 섬기고 먹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께서 얼마나 부유해지는 그 뱃길을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버림으로 부요했던 것들을 버리고 가난해지는 과정들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런 식으로 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배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기도한데로 살고 또 산 사람이 와서 기도하고 그 속에서 역동적인 순환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은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굽니까? 아레이토레이 목사님이 이야기하잖습니까? 진실로 기도가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뜨거운 말씀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위해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습니다. 그때 비로서 말씀에 불이 붇고 설교에 불이 붙고 복음을 증거하고 돌아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절박한 기도가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헛된 기도로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하루라도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이 험악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 수가 없는 인생임을 고백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은 크고 담대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낮추고 낮아지게 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은혜를 처음 받고 교회를 생활하기 시작할 때 우리 교회는 아직 교회가 조금하지만 뭐, 그 교회도 큰 교회는 아니었습니다만. 하여튼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몇 교회 안다녔지만 그 교회 같이 더러운 교회가 없었습니다. 더럽다는 것은 뭐냐면 물리적으로 더럽습니다. 왜?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를 지나가다 뭐 지저분한 게 있으면 줍는 게 그게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이상하게 그 교회는 어른이나 애들이나 마구 다 버립니다. 하여튼 예배 한번 드리고 나면 말입니다. 완전히 쓰레기 더미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침이 되어도 청소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100명이나 되어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그런 소원을 주시는데 새벽 기도를 나간 다음에는 그 다음에 새벽 기도 끝난 다음에 다들 돌아간 다음에 그 그럴만한게 목사님이 제일 안타까운 게 목사님이 빗자루를 들고 거기를 다니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그래서 안 오시고 전도사님은 멀리 사시고 사찰 집사님은 없고. 그러니까 토요일 어지럽혀진 교회가 주일날 그대로. 아침에 나와서 한 시간 반 걸립니다. 다 청소하면서 그러면서 걸레로 깨끗이 닦으면서 뭐 그 먼지라는 것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일을 한 6,7개월 했던 모양입니다. 하면서 개인적으로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마치 이 더럽혀진 내 마음을 청소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진심으로 낮아지고 가난해진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몸과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가난하게 여겨질 수 있는 곳에 우리를 내동댕이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렇게 서서 설교를 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데 누가 내게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면 기분이 좋고 용기가 나고 누가 내게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것들이 들려오면 실망해 하고 실망이 되고 낙심이 됩니다. 그래선 안 되고 부질없는 것들인데 뭐 지나가다 어떻게 들으니까 “아! 김 교수 강의는 참 좋더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고 “야! 세상에 강의를 그렇게 하나? 설교를 그렇게 해?” 그런 소기가 들려오면 한 없이 낙심이 되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마음입니다. 높여주고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고 칭찬해주고 그리고 높이 드리움을 받게 해주면 사람들은 모두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미워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에게 미음을 받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부유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 죄된 욕구를 수 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낮아지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우리를 감희 하나님 앞에 기도하오니 우리를 정말 가난한자 처럼 그렇게 우리를 써 주시옵소서. 멸시가 넘칠지라도 그리스도가 부요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가난해 지겠나이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가난해지게 될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 우리 자신을 노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부요해지면서 오히려 낮아진 생애를 사심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하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 낮고 천한 자리에 처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이런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 안에서 대접을 받고 높이 여김을 받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각성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교회에서 직분이 점점 높아지면서 오히려 그 직분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한 없이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발견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낮고 천한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낮고 천한 일에 자신을 들이고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 부요함을 버리고 “나는 가난해지고 그리스도 예수가 낮아진 것처럼 내 인생이 낮아져서 이제는 그리스도가 부요해져서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가난했던 내가 부요하게 되어졌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부요한 자리로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이, 부요해지길 원합니다.” 라는 그런 야생초와 같은 신앙생활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예화) 여기에 있던 그 나무 보셨습니까? 그 옛날에 김영래 집사님이 기증하셨던 나무가 ‘박히라’ ‘파키라’라는 아주 나무가 멋있게 생긴 게 있잖습니까. 얼마나 여기서 이파리가 잘 자랐습니까? 잘 안자라서 우리 집에 가지어갔는데 이파리가 가득 자랐습니다. 그래서 욕심에 “햇빛을 보게 해줘야지! 태양을 봐야해.” 그리고 그걸 갖고 갔더니 그 다음날 보니까 노랗게 다 말라서 다 죽어갔습니다. 물도 줬고 태양빛도 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나는 새벽에 추워서 그런 줄 알았더니 꽃가게에 가보니까 상식 이하라는 겁니다. 실내에만 몇 달 동안에만 있던 것을 뜨거운 햇볕 갖다 두니 타죽지 그게 말라 죽은 게 아니라 주워서 얼어 죽은 게 아니라 타죽은 거랍니다. “당연 하잖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내놓으려면 여기서부터 빛이드는데로 10cm, 10cm, 이렇게 이동을 하다가 며칠 있다가 햇볕 있는 곳으로 옮기랍니다. 내가 그걸 보고서 오늘도가서 이파리를 따주면서 옛날에 나서 있던 옛 이파리는 다 잘라 줬습니다. 그런데 잎이 다 떨어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뭘 발견했냐면 “야! 온상에서 자란 신앙도 이렇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화) 제가 아는 동료 목사 한분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여튼 대학을 다니면서 4년 동안 죽어 라설교를.. 아 물론 선교 단체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하여튼 열심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무슨 말을 하냐면 그 훈련 받은 데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직장에 취직해서 6개월이 안 걸리더랍니다. 6개월도 안 걸린답니다. 이론은 다 있고 그러고 방법은 몸에 배었는데 그러나 학교생활은 어떻습니까? 학교, 채플실, 교회,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니까 그 직사광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딱 직장가보니까 이건 뭐 죄 많은 직장 사람들만 사니까 뻔하다? 이쪽에서는 이중생활 장부를 쓰라고 하고 이쪽에서는 뭐 돈을 때어 먹으려고 하고, 사기 치는 사람, 뭐 배래한 사람들이 다 모인 곳이 직장인데 진짜 직상광선인거라! 4년 동안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는데 훈련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는데 6개월이 안된답니다. 6개월이 안 걸린답니다. 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은 무엇입니까? 잎을 다 땄는데 다시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에 있던 이파리는 손바닥만 한 것이었는데 타죽는데 지금 나오는 것은 이 손가락 마디만큼도 못하는데 쌩쌩 살아서 퍼들퍼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태양 볕을 맞으면서 강하게 크는 것입니다. 역시. 그걸 보면서 “야! 역시 우리 그 온상에서 자란 것 같은 신앙도 한번 직사광선을 맞아갖고 다 잎이 저렇게 떨어지는 역사가 한번 일어나고 새순이 돋아나는 역사가 나야겠다.” 아니 왜 이렇게 아멘을 안 ?십니까? 새순이 자라는 역사가 일어나야겠습니다. 이제 그게 쫙! 잘아나면 끄떡없습니다. 비바람이 불어쳐도 상관없고 직사광선이 내려쬐면 내려 쬘수록 더 튼튼하게 자라는 겁니다. 그 보십시오. 그 본질이 새롭게 되니까 이파리를 말려죽이던 그 직사광선 때문에 오히려 강하게 하는데 본질적인 변화가 안 일어나니까 강하게 하는 직사광선을 받으니까 말라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여기서 붙어 있었던 몇 가지 큰 이파리들이 있었는데 요만한 게 크게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적은을 해서…….
(잘림.)
교회 안에서 가난해지고 그리고 가난한자처럼 대접을 받고 종처럼 취급을 받아도 끄떡없이 우리를 위해 부요하나 가난해지신 그리스도 예수 한분만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생활에 익숙해져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에 있어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살아 보십시오. 제가 장담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뭐 많이 살아보지도 못했지만 평생을 살아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때문에 여러분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럴 때가 없습니다. 직장 다니면서 신학교 다닐 때는 아! 이 직장만 그만두면 하늘이라도 날아다닐 것 같았습니다. 그만두고 나니까 교회에 코가 탁! 껴가지고 말입니다. 가서 청소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코가 껴가지고 꼼짝을 못하겠습니다. 어딜 나갑니까? 나는 외출도 못합니다. 그렇게 코가 딱 끼어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게 “아! 이것만 해방되면 뭐가 되겠지?” 되긴 뭐가 됩니까? 그러면서 살다가,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결국은 참다운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우리를 위해 부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버림으로서 가난해진 그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가난한 자로서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낮고 천한 그 길을 걸으면서 걸어가면서 살아가면서 나는 쇄하여지고 그리스도 이름은 부유해지고 나는 낮아지고 천하여지고 주님의 이름은 존귀해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가난한 낮아지는 삶을 통하는 우리는 이 인생에 신앙생활에 참된 행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이따금씩 20년, 30년 씩 헤어졌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팍삭 늙어버린 모습을 보게 되면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대전에 내려갔는데 어느 자매가 한 7,8년 만에 만났는데 애 둘을 낳는데 아!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말은 안했는데 아주 그냥 너무 너무 불쌍해요.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말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전도사님, 저 너문 많이 늙었죠?” “네가 늙은 게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냐?” 제가 그랬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무엇을 위해서 늙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겉 사람이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속사람이 함께 후패해 가는 그 사람들이 이 늘어나는 피부를 어떻게 펴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돈 주고 별일들을 다하지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은 겉 사람이 후패해져가는 것을 갖고 조금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당신의 후패한 육신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을 하시기를 “너는 비록 세월이 흐르고 윤기가 흐르던 그 얼굴에 얼굴이 메마르고 주름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러나 너의 그 후패하도록 살아온 그 모든 인생을 통하여 나는 부요해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굳이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요. 바로!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부요하셨지만 비천한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누리실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영광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몸을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고 낮아지셨습니다. 여러분! 그 낮아진 그리스도 예수. 가난케 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겉 사람이 나날이 후패해 갈 지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말씀에 대하여 아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한없이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렸고 가장 젊었던 시절을 고난과 박해 속에서 사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지만 박해를 받으시고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을 때 “아멘. 주님이시여. 그 십자가를 제가 지겠나이다.” 주님은 순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의 극치는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힘없이 못 박힌 온 몸에 쳇직에 맞은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누가 그를 만왕의 왕으로 불렀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그 의로운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영광을 다 버리고 낮아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낮아지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었으면 그랬을 이유가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낮아졌고 그리스도 때문에 내게 부요하던 그것을 나는 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낮아졌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낮아지심 한 없이 부요한 은혜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가 사랑과 그리고 구원의 발자취였음을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걸어가는 길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 기이한 신앙의 비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이해를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는 부요하나 낮아지신 이 신비로운 비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작고 초라한 사람을 비롯해서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더 우리를 위해 부요하나 그 부요를 버리고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실 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과연 너는 나를 위해 부요할 수 있는 인생이었으나 가난해진 인생이었다.”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이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한 없이 우리 자신을 버리고 부요한 것들을 미워하며 가난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섬김의 길을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 끝날 까지 걸어가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