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Ⅲ 8 (1994.6.22 수요예배)
인내의 십자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 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 지이다”(딤전 1:15-17)
녹취자: 이경순
오늘 세 시간 째 12절부터 17절까지의 한 단락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시간입니다. 그렇게 사도바울이 죄인중의 괴수라고 본인은 생각하게 되었는데 자기가 구원 얻은 것이 너무나 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세상에 있는 집단은 모두가 각자 자기가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 세상에 단체들이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인 사람 모두가 한 사람한 사람이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 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들이 서로 교만하고 다투고 서로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은 견해의 차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수준의 차이다 그렇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 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무슨 말을 하다가 사도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까. 너희들 가운데 누구를 권면하고 싶거나 칭찬하고 싶거나 그리고 교제하고 싶거나 이런 것들이 있으면 너희들이 서로 한마음이 되어서 각각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높게 여기며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면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들을 잘 지키는 이런 교회가 되라고 권면하는 가운데 그러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여러분 세상의 사람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혀 놓아도 똑같지 않습니다. 월드컵 보지 않습니까.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 파란잔디밭에서 22명이 뛰는데 각자 다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볼만 잡으면 어쩜 그렇게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볼만 잡으면 실수를 합니다. 사람이 다 똑같은 것 같아도 똑같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도 보입니다. 우리도 인생이니까 다 보입니다. 아 저 사람은 생각하는 거나 태도나 행동이 이상하게 규칙에서 자꾸 벗어납니다. 삐딱선을 탄 것같이 그리고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 사람은 왜 이럴까? 간혹 살다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생각이 옳을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자기가 훨씬 더 보편적인 객관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좀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진실에 가깝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은 좀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을 수 있고 좀 더 그리스도에게로부터 가까이 있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양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볼 적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를 비롯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항상 우리는 자기를 낮추고 사람들을 높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이런 일들을 이루어 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옳고 내가 맞는데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너희가 좀 더 잘났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이 못난척하면서 살아라. 이런 식으로 권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 그런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그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사도바울은 깨닫는 것이 과연 그가 무가치한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정말 죄인중의 괴수 이었습니까? 죄인중의 괴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죄인 중에 괴수로서의 연장의 삶을 살았습니까? 누가 말해도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였던 그 놀라운 헌신과 선교의 위대한 사역은 이전에 그가 어떻게 살아왔던지 그것보다 더 훨씬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지금 누구를 보는 것입니까? 사명을 받았으면서도 충성하지 않는 그 불충성한 복음 전도자들를 바라보면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끝까지 예수를 위하여 사는 일에 실패하고 세상을 따라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쫒아서 세상으로 도망 가버린 실패한 복음전도자 데마와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지금 자신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데마와 같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복음전도여행을 힘들다고 포기한 사람 마가와 같은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옳고 그름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볼 적마다 자신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상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섰을 때 그때에 우리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섰을 때는 자기는 절대적으로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그것은 단순히 십자가와 관계가 없는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자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도 바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죄인들이 못 박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 할 적마다 사도바울은 할 말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실속이 없습니다. 깊이 깨달으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집회를 가봐도 특히 젊은이들은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집회 끝나고 집에 돌아 갈 때까지 할 말이 없습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없이 회개하고 감사합니다. 뭐 별로 은혜도 별로 받은 것 같지도 않는데 그것을 막 부풀려서 과장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는 것을 습관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서 압도당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놀라운 나의 죄악 됨과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그 사이의 간격이 도저히 맛 닿을 수 없는 간격인데 무엇이 그 다리를 놓았는가. 나는 그렇게 한없이 죄인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넘쳤다 어째서 그렇게 나와 같이 비참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가 기필코 넘치고야 말았는가. 그 이어준 다리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아 이거다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다리를 타고 건너온 하나님의 긍휼 이것이 이 이상한 전제 지극한 죄인 그리고 놀랍고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말하자면 만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렵고 엄위로우신분이었습니다. 그 두렵고 엄위로우신분이 죄로 말미암아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버린 자기를 향하여 진노의 심판을 벌하시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오늘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되었냐면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 이라는 것입니다. 그 긍휼의 여기심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긍휼의 여기심이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오래 참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가면서 혹시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먹은 빠르고 하나님의 도움은 멀다 이렇게 지금 다급한 상황인데도 하나님의 도움 심은 왠지 먼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말고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와 같이 낮고 천한 인생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지푸라기 같이 태어났다가 지푸라기와 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 가을날의 들풀과 같은 존재들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잠간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서있는 이 사람이 강건하면 40년 더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30년 그렇지 않으면 20년 그렇지 않으면 10년일 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여러분 그런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영원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죄 사함을 주시고 우리가 오늘 먹고 살고 숨 쉬고 오늘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인생의 한 순간의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므로 말미암아 이 예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적어도 영원을 향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흥청거리는 이 방배동 거리를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훌륭한 차를 타고 다니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산다고 하더라도 모두 걸어가는 들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영생을 모르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구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오래도록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두 가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다 원치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믿는 나머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 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너무나 두렵고 먼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양쪽이 다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이 한없이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리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한번 뒤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을 기회를 하나님이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뭐 잘 났다고 안 믿고 돌아다닙니다. 그때 한 번 전도를 받고 예수를 안 믿고 세상길로 걸어가니까 에이 이 녀석아 하나님께서 발로 무릎을 차서 다리가 덜컥 부러져서 땅바닥에 주저앉게 만드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서 애를 팰 때 ‘저 놈의 자식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놔야지 부모가 돼서 왜 그렇게 흉악한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 발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안다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애들이 다리몽둥이가 분질러져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 참 좋기도 하겠네요. 왜 좀 건설적인 책망을 하지 그렇게 파괴적인 책망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리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지막에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찬양)
손들고 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다 모아지고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는 뭐라고 고백합니까?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뒤를 돌아다보니까 내가 예수를 믿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셔서 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참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정말 인간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행위로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았느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면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들거나 그럴 때 여러분 뻐팅기면 여러분 손해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데 하나님은 하도 죄인들을 많이 다루시니까 전능하신분이시니까 참는 것도 하나님은 도가 트셨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예수의 그 사랑은 그 사랑의 빚 잊어버리면 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어요.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인간은 과연 참고 견딜 수 있습니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기도하러 왔는데 기도가 안 됩니다. 말씀을 읽으려고 해도 말씀이 안 됩니다. 설교를 하려고 올라섰는데 입이 딱 달라붙고 말이 안 나옵니다. 사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참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우리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의 소원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무엇을 기도할 수 있게겠습니까? 주님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 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오시고 내 스스로 제할 수 없는 것들을 주님이 오셔서 내려놓게 해 주시옵소서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닫혔던 마음이 열리면서 어느 순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심령이 물같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들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나서 사도바울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향하여 오래 참으셨도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래도록 나를 참으셨도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 다메섹에서 처음 예수님이 자기를 불렀다고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시는 일들이 계속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그런 어두움 속에서 불러내시고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빛 가운데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런 값지고 보배로운 인생 이 세상을 살되 영원을 향해 사는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끊임없는 불순종과 고집과 그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불신앙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인내하심이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울의 마음을 녹이셔서 구원해 주시고 그래서 예수 믿는 종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안 나오고 등산 다니고 놀러 다니고 결혼식이나 다니느라고 주일날 예배도 하나도 못 지키고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캠핑가고 놀러가고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뭐 갑자기 그 집안을 거꾸로 메다꼰져 가지고 박살이 나게 하시냐? 도봉산으로 주일 예배 안 드리고 올라갔더니 종치는 순간에 미끄러져서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서 기브스를 하고 교회를 나온다면 예수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모여서 뭐 하러 나오는 겁니까? 종치는 순간에 교회 안 나오고 밖에 나가면 다리 부러진다 그리고 모여 앉아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종의 영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돌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런데 어때요?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안에 주가 내안에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지 그 사실을 깨닫고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된다. 그 평범한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결국은 우리가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삶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해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므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 내어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겁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십자자가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참뜻을 깊이 알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어 맡길 수 있는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이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 로라 사나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살든지 떠나 있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 힘쓰노라 이런 고백으로 나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주위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세상과 하나님사이에서 적당히 어떻게 하면 더 신앙적인 모습을 갖추며 세상에서 살고 그리고 어떻게 더 그렇게 하나님과의 그런 완전한 내어맡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부르신 그 구원의 참뜻을 이해하는 대신에 세상과 결별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지 못하고 적당히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주장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오늘 고백하기를 그렇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셔서 그래서 이렇게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한없이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나를 구원하셨다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도바울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부끄러운 일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많이 참으시게 만들어드렸다 좋은 이야기입니까? 나쁜 이야기 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참는 것을 훈련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바울은 이것도 자랑합니다. 푼수가 좀 없지 않습니까?. 적당히 감추어야 되는데 죄인 중에 내가 괴수나 나보다 더 죄인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했습니다. 또 나는 이 세상에서 나만큼 하나님을 오래참게 만들어 드린 분이 없다. 나는 끝까지 버텼다 그러면서 자랑하는 겁니다. 뭘 말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자기에게 그런 말하는 것은 수치일지 모르지만 오늘 먼저 일체의 오래 참으심을 보이시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에게 본이 되게 하심이라, 무슨 본? 나같이 하나님을 오래 참게 만든 사람도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으니 그러니까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나를 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라. 이겁니다. 어떤 하나님을? 주님은 오래 참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사람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 시대 때나 부흥의 시대 때 보면 사람들이 아주 너그러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기를 들어내기보다 사람들을 높여주기를 정말 원했습니다. 요즘은 총회장 하는데 돈을 몇 억 쓴다든지 하면서 신문지상에 나오는데 옛날의 부흥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등을 떠미는 겁니다. 목사님이 이 일을 안 맡아주시면 누가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사정사정해서 그래서 섬겼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왜 그래요?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높이고 나를 자랑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면 나 같은 사람 망신당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 그럽니까? 야 봐라 내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다 말한 사람이 여기 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남편을 다섯씩이나 은혜가 안 될까 봐 말할 수 없지만 그러고도 남았을 겁니다. 야, 나는 다섯 남자하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다 알아, 뭘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예수가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해 주셔서 구원해 주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다 알기만 한다면 나 같은 사람 망신당해도 문제가 무슨 상관이냐 이겁니다 나 같은 인생이 망신당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이겁니다. 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은 존귀한 그 예수가 영광을 받고 그 예수님이 제대로 알려지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거드름 피우지 않았습니다. 내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 인요 율법에 의로운 흠이 없는 자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전부다 배설물과 같았다 알고 보니 똥오줌이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못 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못 보게 가리고 또 내가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보지 못한 내가 또 사람들에게 예수를 못 보도록 가리고 한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은 전부다 있어서는 안 되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고 정말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정말 죄인 중에 괴수입니까? 그것보다 더 나쁜 사람들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시고 오래 참으심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사람들이 알기만 하면 자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주님이 왜 나 같은 죄인을 구하셔서 이렇게 사도로 삼으셨는지 아느냐? 그것은 스스로 죄가 많다고 생각해서 절망할 사람들에게 나를 보고 용기를 얻으라고 그렇게 하신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모든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참지식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면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아침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못 박혀 죽으셨네. 여러분 전에 학생들하고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밤중에 차를 붕 하고 달리는데 비가 막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별이 총총한데 웬 빈가 그랬더니 공기가 맑으니까 벌레가 많이 삽니다. 그런데 차가 워낙 빨리 달리니까 이 벌레가 차에 충돌을 해서 유리창에 달라붙어서 충돌 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니까 그 손 내밀다가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잠깐 내밀다가 손을 끄집어내보니까 손이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손에 충돌해서 수많은 벌레들이 맞아서 죽은 것입니다. 큰 나방 작은 벌레들로 시작해서 찬송가가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십자가에 돌아 가셨네. 깨닫게 됩니다. 그 벌레 한 마리 돌아다니는 하루살이 이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고 그 수억 마리가 태어나고 죽어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누가 그것을 기억하겠습니까? 그런 인생들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바울이 깨닫게 되니까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구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툭 끊기면서 만왕의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 지이다. 이것은 갑자기 삽입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삽입이 되었냐면 뭐라고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찬송이 확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 무궁토톡 있을지어다. 쉽게 이야기 하면 그 십자가를 깊이 깨닫고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은혜를 생각하고 나니까 그다음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구원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고 깨달은 사람들이 살아야 될 삶은 마지막에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책에다 그러면 우리가 그 십자가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예수님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러면 무엇을 거기다가 더 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모두 나와서 그 샘물을 먹고 마시며 즐거워합시다. 보혈의 생명수 임마누엘의 생명수 샘가에서 우리는 주님의 구속하신 이름을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 그것밖에는 참된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찬양)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눈물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길 다 가네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까? 완전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감격어린 찬양이 터져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슨 요소가 여러분 마음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안에 내가 너무나 많고 가시덤불과 같은 것이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주님만을 찬송하고 주님만을 찬송하고 주님만을 노래하며 십자가만 높이고 예수만을 자랑하며 그리스도만을 영광을 돌리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쓴 뿌리들이 가슴속에서 솟아납니다. 가시 엉겅퀴 같은 것들이 우리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 없게끔 우리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이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의 참다운 완전한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은 모든 성도들은 완전한 찬송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릴 그 새날을 그리워하며 이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 십 년 전입니다. r그 찬송만 부르면 막 눈물이 납니다. 우리 청년 하나가 전도사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 신상에 무슨 일이 있어야만 눈물이 납니까? 그 찬송을 부르면 특별히 눈물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길 다가네 주께서 오라 부르실 때에 영광중에 나아가리. 하나님 앞에 완전한 찬송을 불러드릴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의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얽매인 것들이 어떻게 풀어집니까? 세상을 보며 사람을 볼 때 우리에게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여러분 그 사람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찬송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속에 수많은 나를 만들고 그리고 쓴 뿌리들을 돋아나게 하고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 같은 것들로 주님을 찬송하며 살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예수만을 자랑하고 싶고 나를 구원하신 구속의 십자가만을 위해서 살고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를 누릅니다. 우리들을 고통 줍니다. 우리를 아프게 만듭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짐 내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여 의문의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자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십자가가 우리를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미쳤는지를 여러분들은 자랑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들을 불러서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통하여 소망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예수가 자랑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가치 없는 죄인을 오래도록 참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끝으로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 지이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아니 자기가 뭐 하나님한테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 지이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영광을 받고 존귀를 받으십니까? 사도바울이 명령을 한다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까? 난 그런 하나님 안 믿겠네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 세상에서 말을 하든지 하나님은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이고 존귀하신분이십니다. 이 사도바울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것은 헬라어에서 희구법입니다. 희구법이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이런 경우 결국은 하나님에 관해서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도 구원받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주님이 나를 구속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이제 나는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면서 살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리라 결국은 하나님이 참아 주실 필요가 없는 죄인들을 향하여 참아주신 하나님 의 은혜 구원하실 필요가 없는 인생을 향하여 구원을 베풀어주신 그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인해 그것을 한 없이 받은 인생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누구든지 그러니까 성경을 마지막 다 읽고 나면 마지막에는 십자가 하나 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분한테 십자가 책을 주면서 읽어보십시오. 했더니 뚜껑은 안 읽어보고 한참동안 표지를 들여다
보면서 이것밖에 없는데, 진짜 이것밖에 없는데, 그 말을 네 번인가 다섯 번을 되풀이 하는 겁니다. 없는데 없는데 하는 이야기는 요즘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사도바울의 최선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죄인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그리고 그 흉악한 죄인 중에 괴수에게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그 놀라운 긍휼히 여기심을 다 받은 다음에 이 사도는 마지막으로 얼마나 많은 감격을 했을까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깊이 깨다는 겁니다. 회개하는 사람마다 다 공통된 고백입니다. 내가 세상으로 나갔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간절히 부르셨지만 저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게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억지로 끌어다 교회에 앉혀다 놓은 것 그것도 부르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뭐 테이프 하나 들어보면 그거 준 사람한테 무슨 커다란 소득이 들어옵니까? 이 테이프를 들어 보십시오 하며 자기 돈으로 사다주고 전화 걸어서 들어봤냐고 물어보고 책을 사주면서 어느 교회는 책을 거저 나눠주면서 읽으라고 읽고 오면 또 준다고 또 읽으라고 그거 읽으면 자기들이 읽으면 교회에서 무슨 졸업장을 받아요. 학사학위를 받습니까? 왜 그러는 것입니까 그것이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던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깨닫기를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던 그 사실들을 후회하며 하나님 앞에 깊이 가슴 아프게 회개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나를 구하고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 이 사도바울은 깊이 감격하고 그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데 그담에 뭐 할 일이 있겠습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아무리 울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고백은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것이 인생의 결론입니다. 십자가 앞에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난 다음에는 마지막에 사도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다고 고백을 했습니까? 내가 핍박자요 포행자여 행악자였으나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도다. 할렐루야 ! 사도바울이 그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다음에 결국은 자기의 신앙의 고백을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서있는 이 십자가는 우리를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깊이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로부터 찬란한 빛과 능력이 쏟아져 나와서 여러분들을 미움과 원망과 죄악의 쓴 뿌리들로부터 끌어내 마음의 가시덤불들, 가을되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여름 되면 그 가시하고 엉겅퀴가 밭을 전부다 뒤덮는데 잎이 다 떨어진 가을에 성냥불을 그어대면 쫙 타서 말끔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분들을 새롭게 해주셔서 여러분들도 감격하며 하나님 앞에 만세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렇게 찬양을 돌릴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